<기획연재> 허균, 서른셋의 반란 (35)불행

피난길에 오르다

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어머니와 어린 딸 그리고 만삭의 아내를 대동한 허균이 피난길에 나섰다.

비록 소달구지에 일행을 싣고 옷가지를 준비하였으나 가뜩이나 흉년이 들어 모두가 힘든 데다 또 늦은 봄이라 식량이 귀했다.

게다가 서둘러 길을 떠나오는 바람에 먹을 것도 변변히 챙기지 못했다.

물론 마음속에서는 전쟁이 빨리 끝나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내와의 추억


큰 형님의 이야기가 있었지만 조정 대신들로부터 설사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막강한 조선의 군대가 왜구를 한방에 격멸할 것이라 호언장담하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터였다.

그를 믿고 피난에 대해서는 생각도 않고 있다 왜구들이 한양 가까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급하게 서둘러 길을 떠났으니 그야말로 맨 몸에 가까웠다.

피난길에 나선 만삭의 아내에게 점점 산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부인에게 제대로 먹일 음식이 없었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처지였다.

결국 아내는 그 난리 통에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불행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아기를 절대로 놓을 수 없다는 생각인지 부인까지 아기 뒤를 따라갔다.

피난길에 소를 처분하고 옷가지를 팔아 저승길이나마 곱게 보내고자 했으나 시시각각 몰려오는 왜군으로 인해 급히 야산에 묻고는 거의 실신 지경에 이른 어머니와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외가가 있는 강릉으로 갔다. 

“부인, 그만하고 나하고 좀 시간을 보냅시다.”

허균이 길쌈을 하고 있는 아내의 손을 잡아당겼다.

부인이 흠칫하고 놀랐다.

“서방님, 누가 보면 어쩌시려고.”

“누가 보면 어떻다는 말이요. 내가 나의 여인을 만지고자 하거늘.”

누나가 시집가고 빈자리를 아내가 메워 주고 있었다.

누나가 허균의 정신세계에 미친 영향을 현실에서 보완해 주고 있었다.

명문가의 여자답게 모든 일이 정형화 되어 있었다.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극진하게 섬기었고 또한 너그러운 성품과 엄격함으로 집안의 대소사를 훌륭히 이끌어 가는 믿음직스럽고 아늑한 느낌을 주던 아내였다.

아내가 잠시 밖의 기척을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길쌈을 하던 손을 멈추고 못이기는 척하며 허균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서방님, 혹여 저로 인해서 글공부 게을리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그것이 무슨 소리란 말이오. 부인을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공부에 정진해야 함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거늘.” 

전쟁 통에 사랑했던 아내를 떠나보내다
떠나야만 가치를 아는 인간의 어리석음


한창 물이 오르고 있는 아내를 안고 있노라면 야산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향기에 홀린 듯했다.

그 향기에 마음이 혼미해지고 또 몸은 저절로 요동치고는 했었다.

“어머니께서 서방님이 여기에 계신 사실을 아시면 저에게 역정을 내실 일이옵니다.”

허균이 그렇게 말하는 아내를 더욱 세게 끌어안더니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마치 멀지 않은 곳에 있을 어머니에게 자신이 지금 아내와 함께 있음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아내가 급히 그런 허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러다가 진짜 어머니께서 들으시면 어쩌시려고…….”

“어머니께서 부인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훤히 알고 있거늘.”

그 소리가 흡족했던지 허균의 가슴으로 가만히 머리를 기대왔다.

“내가 부인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친어머니에게도 그리 잘하기가 힘들 터인데. 하물며 시어머니께.”

허균이 말하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자신의 품에 들어온 아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누나도 부인과 어머니 관계처럼만 지낼 수 있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사랑하는 누나가 남편뿐 아니라 시어머니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외로이 생활하고 있는데 대한 아쉬움이었다.

“세월이 지나면 차츰 나아질 일이옵니다.”

“그럴까.”

“그렇고말고요. 시누이께서 아이도 낳고 살림에 재미를 붙이다 보면 서로 화목한 사이를 유지할 수 있을 거예요.”

사랑스러운 아내가 그리 말하는 것이 진정이라 생각 들지 않았다.

누나가 사는 모습을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하던 아내였다.

허균은 누나의 일로 늘 걱정하는 자신의 심기를 편하게 해주고자 하는 아름다운 의도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아내를 있는 힘을 다해 안아보았다.

행복에 겨운 미세한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부인. 이제 우리도 서서히 후사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소.”

부인의 시선이 허균의 얼굴로 향했다.

마치 미워죽겠다는 듯이 사랑스러운 표정이었다.

순간 허균의 손이 앙증맞은 부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미 불같이 성을 내고 있는 자신의 중심에 부인의 손을 올려놓았다. 

“나리, 진실로 부인을 사랑하셨었군요.”

허균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내를 비명에 먼저 간 누나려니 생각하고 살려고 했는데. 내 누나가 생전에 누리지 못했던 행복을 대신 아내에게 사랑으로 대해주면서 누나에 대한 생각을 순간순간 잊고자 했는데…….”

“그런 부인을 게다가 새로 태어난 아들까지 난중에 잃어버리셨으니…….”

허균의 시선이 천장으로 향했다.

공허한 눈길이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그 눈에 서서히 이슬이 솟아나고 있었다.

“매창이, 인간이란 동물이 우습지 않소.”

시선을 허공에 고정시킨 허균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살아서 곁에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전혀 알지 못하다가 죽어서 곁을 떠나야만 그 가치를 알아채는 인간의 어리석음 말이오.”

가혹한 운명

매창이 허탈하게 말하는 허균의 모습을 안쓰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에서 묘한 기운이 솟구치고 있었다.

마치 허균의 일이 자신의 일인 듯이 생각되었다.

매창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마도 허균은 지금 부인과 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을 터였다.

그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순간 천장을 바라보던 허균이 매창을 바라보았다.

매창이 자신의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정색했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송구하옵니다만 나리의 운명도 예사롭지만은 않은 듯하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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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