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또 새판’짜는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9.08.27 08:23:37
  • 호수 1233호
  • 댓글 0개

메아리 없는 ‘손의 선언’ ‘만덕산 저주’ 탄식만∼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가 빅텐트로 새로운 정치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일명 ‘손학규 선언’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현재 사정은 녹록지 않다. 실제로 그는 당내 비당권파로부터 사퇴 압박을 받고 있고 향후 거취마저 불투명한 상황이다. 손 대표가 이 국면을 돌파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가 지난 20일, 바른미래당 중심의 ‘빅텐트’를 강조하며 당내서 분출되고 있는 대표직 사퇴 요구에 정면돌파할 뜻을 밝혔다. 손 대표는 이날 서울 여의도 국회서 기자회견을 갖고 “다른 당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지 말자”며 “바른미래당이 중심에 서는 빅텐트를 준비해 새로운 정치, 제3의 길을 수행하기 위한 새 판짜기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퇴진 거부 
마이웨이∼

그러면서 손 대표는 자유한국당이나 민주평화당서 탈당한 의원들이 결성한 대안정치연대와의 통합은 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당을 통째로 이끌고 자유한국당과 통합하겠다는 생각은 아예 버리자”며 “한국당과의 통합은 양당정치로의 회귀, 구태정치로의 복귀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민주평화당 또는 대안정치연대와 통합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며 “지역정당으로 퇴락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만 “대안정치연대와 당 대 당 통합을 고민하고 있지는 않다”면서도 “대안정치연대 쪽에서도 개혁에 동조하고 대한민국 미래에 함께 동조하고 협조하면 그것(바른미래당과의 통합)을 거부할 생각은 없다”고도 언급했다.


바른미래당을 중심으로 한 제3지대론이 손 대표의 구상이다. 그는 “바른미래당이 중심에 서는 빅텐트를 준비할 것”이라며 “문재인정부와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심판과 자유한국당에 대한 절망이 중간지대를 크게 열어놓을 것이고, 그 중심을 잡는 바른미래당에게 민심이 쏠릴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어 “바른미래당으로 튼튼하게 자리 잡고, 좌와 우, 보수와 진보, 영남과 호남의 모든 개혁세력이 제3지대서 함께 모여 대통합개혁정당을 만들자”고 말했다. 

그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그 첫걸음이고, 국정의 원활한 수행을 위한 개헌을 추진할 것”이라며 “바른미래당으로 자강해서 자신을 지키고 힘을 키워나가며 제3지대서 중도개혁과 통합에 동조하는 모든 보수 진보의 정치세력이 모여 총선서 예상되는 문재인정권에 대한 심판, 한국당에 대한 절망으로 넓어지는 중간지대를 건설하자고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손 대표는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해선 “더 이상 자리에 대한 욕심은 없다”면서도 “다만 한 가지 남은 꿈이 있다면 대한민국 정치의 구조를 바꾸는 것”이라고 말해 당내의 대표직 사퇴 요구를 일축했다.

그는 “정당 간 연합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고 정책적 연속성을 보장받는 독일식 연합정치 제도를 만드는 것이 제 꿈이고 마지막 남은 정치적 욕심”이라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 그만 싸우고 화합하자”며 “안철수 대표, 유승민 대표, 저와 함께 가자. 제가 직접 나서 안철수·유승민을 끌어들이겠다”고도 했다.

당내 사퇴 요구에도 퇴진론 일축
반격 나서는 손…전운 감도는 당

하지만 손 대표의 제안으로 바른미래당 내분이 수습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손 대표는 바른미래당 비당권파와 선거제 개편안 등 패스트트랙 지정 과정서 이견 차이로 갈등이 시작됐다. 특히 패스트트랙 지정 과정서 강제로 사보임된 오신환 의원이 원내대표로 당선되면서 내분은 심화됐다. 오 원내대표는 취임 시작부터 ‘지도부의 체제 전환’을 강조하는 등 사실상 손 대표 사퇴를 압박했다. 

오 원내대표는 지난 21일 CBS라디오 <뉴스쇼>에 출연해 “손 대표 체제는 더 이상 국민들에게 감동이 없다”며 “(사퇴라는)결단을 내려주십사 하는 간곡한 이야기를 전달한다”고 말했다. 이어 “(‘추석까지 지지율 10%를 확보하지 못하면 그만두겠다’는 손 대표의 약속은)어디로 갔는지 날아가 버렸다”며 “대국민선언처럼 약속한 것이니 지키는 것이 정치적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 기자회견 갖고 있는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잠재적 연대 대상으로 거론되는 ‘변화와 희망의 대안정치연대(대안정치)’도 손 대표의 선언 내용에 불쾌감을 토로하고 있는 만큼 험로가 불가피해보인다.

민주평화당서 탈당해 제3지대 신당을 준비하고 있는 대안정치연대는 손학규 선언에 대해 “왜곡된 현실 인식과 무례한 태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반발했다. 장정숙 수석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통해 “대안정치연대와 관련해 지역정당을 연상케 한 손 대표의 무례한 언급은 심히 불쾌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내분에 휩싸여 있는 바른미래당과 손 대표는 정치개혁을 말할 위치에 있지 않다”며 “빅텐트 치고 중심에 서겠다는 포부는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

이번 손학규 선언도 정치권에 큰 반향을 끌어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여야의 격한 공방 속에서 손학규 선언이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민주평화당 비당권파의 집단탈당, 한일 갈등 한복판서 맞는 광복절 등을 고려해 선언 시점을 한 차례 미뤘지만, 달아오르는 인사청문 정국으로 인해 외면당한(?) 모양새다.

당권파 내부에선 손 대표가 중대한 정치적 결심을 밝힐 때마다 다른 대형 이슈에 가려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일명 ‘만덕산의 저주’에 또 한 번 갇힌 것 아니냐는 탄식도 나온다. 앞서 2006년 10월 유력 대권주자였던 손 대표는 경기지사 퇴임 직후 시작한 ‘100일 민심 대장정’을 마치고 상경 기자회견을 열었지만, 같은 날 북한이 제1차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주목받지 못했다.

청사진에도
뜨뜻미지근 

2007년 3월 대선후보 경선에 반발해 한나라당을 탈당했을 때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며 빛이 바랬다. 민주당 대표 시절인 2011년 11월에는 ‘민간인 사찰’ 국정조사·특검을 요구하며 철야농성에 돌입했다가 다음 날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중단해야 했다.

2016년 10월 2년여간의 칩거를 마치고 전남 만덕산 토굴집서 내려왔지만, 언론은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에 몰두했다. 이때부터 ‘만덕산의 저주’라는 말이 붙었다. 당권파 내부서 이번 선언을 통해 안철수·유승민 전 공동대표의 무책임론을 부각한 것만큼은 성공적이라는 평가가 있지만, 정작 반응은 냉소적이거나 예상외로 미지근하다.

실제로 안철수·유승민 전 공동대표는 손 대표 선언에 응대조차 하지 않았다.

손 대표는 1948년 경기도 시흥군(현 서울특별시 금천구)서 5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교사로 생활하다가 그가 태어날 무렵에 교장으로 승진했지만, 손 대표가 4살 되던 해인 1950년 1월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손 대표와 형제들은 홀어머니를 모시며 어려운 환경서 자랐다. 

1959년에 서울매동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경기중학교를 졸업 후 1962년 경기고에 입학한 그는 3학년 무렵에 대학생들과 함께 시청 앞 국회의사당서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참가했다. 1965년에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후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투쟁이 끝난 뒤 시인 김지하, 김정남, 김도현, 이현배, 허현 등의 선배들과 활동하며 문리대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대학 2학년 무렵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무기정학을 받았다.

무기정학 중 데모에 참가했다가 또 다시 무기정학을 받았던 손 대표는 강원도 함백탄광서 노동을 하기도 했다. 복학 후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과 더불어 ‘서울대 삼총사’로 불리며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1969년 육군에 입대해 1972년에 병장으로 만기 제대한 손 대표는 소설가 황석영과 구로공단에 자취방을 얻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동운동을 하던 손 대표는 한국서 에큐메니컬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진보 기독교 단체 NCCK의 박형규 목사를 만나 기독교 빈민선교운동에 투신한다. 

운동권 출신 
산전수전 겪어 

해방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전태일로부터 충격을 받은 한국의 에큐메니컬운동은 도시산업선교를 통해 노동자와 빈민의 인권문제를 위해 활동했다. 청계천서 빈민들과 같이 생활하던 손 대표는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민주세력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 유신독재체제는 박형규, 김관석, 권호경 목사 등을 구속했다. 당시 손 대표를 검거하기 위해 현상금 200만원에 2계급 특진을 걸었다. 손 대표는 2년 동안 숨어 살며 원주의 과수원, 서울의 철공소서 일했다.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민주화운동을 전국으로 확산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 최성묵 목사 등을 만나 사후 대책을 논의하다가 수사당국에 검거된다. 김해 보안대로 연행돼 48시간 동안 무작정 두들겨 맞고 문초를 당하던 그는 유신독재체제가 붕괴하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1980년, 그는 돌연 영국 옥스퍼드대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1987년에 석·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와 5공 말기에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직을 맡아 부천서 성고문 사건 자료집인 <우리의 딸 권양>이라는 보고서를 내고 각종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활동을 재개했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1990년서 1993년까지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서 교수로 강단에 섰다. 교수 시절 동안 진보적인 소장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재야의 대표적인 인사였던 그는 1993년에 민주자유당에 입당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보궐선거서 경기 광명서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제15대 총선서도 신한국당 소속으로 승리해 재선에 성공했다. 

1996년 11월, 당시 최연소 장관 기록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제33대 보건복지부장관이 됐다. 1997년 8월까지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내다 2000년 제16대 총선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3선에 성공했으며 2002년에는 민선 3기 경기도지사에 당선됐다. 

2007년 3월에 한나라당을 탈당한 후 같은 해 8월, 민주평화계의 대통합을 이뤄내고자 대통합민주신당에 참여했다. 이후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민주평화당 정동영 의원에게 패해 낙선했다.

“안철수·유승민과 제3의 길 모색”
하는 일마다…매번 타이밍이 문제

손 대표는 2008년 1월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표로 선출돼 민주당과 통합을 성사시켜 단일 야당 통합민주당을 출범시켰다. 이후 2008년 4월, 18대 총선서 당을 이끌었으나 299석 중 81석을 얻는 데 그쳐 같은 해 7월6일 통합민주당 대표직 사임 후 “반성의 시간을 갖겠다”며 강원도 춘천으로 칩거에 들어갔다.

2010년 8월15일, 춘천을 떠나며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정계로 복귀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시혜적 복지, 잔여적 복지가 아닌 보편적 복지’를 강조했으며 “진보적 자유주의의 새로운 길이 추구하는 사회는 정의로운 복지사회로서 공동체주의와 보편적 복지를 기본 이념으로 할 것”이라고 밝혔다. 

같은 해 10월3일, 인천 문학경기장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서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반성과 무상복지를 내용으로 하는 보편적 복지의 새로운 노선을 제시해 당 대표로 선출됐다. 당 대표가 된 손 대표는 전국을 돌며 민주대장정을 전개했으며, 이듬해 1월3일부터 다시 전국을 돌며 시민들의 건의와 주장을 경청하고 민주당의 보편적 복지 노선을 설명하고 토론하는 희망대장정을 전개했다.
 

10월4일, 민주당이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운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장관이 야권 후보 단일화 경선서 패배하자 손 대표는 책임을 지고 사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박 장관 등 다수 민주당 의원들의 강력한 반대에 하루 만에 대표직 사퇴를 철회하며 논란을 빚기도 했다. 

후로 2012년 6월14일,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으나 민주통합당 국민 참여 경선서 당시 문재인 후보에게 패해 후보로 선출되지 못했다. 

2014년 6월4일 지방선거 때 민주당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같은 해 7월31일, 7·30 수원 병 재보궐선거에 출마했으나 새누리당 김용남 후보에 패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전남 강진군 만덕산 자락에 있는 토굴로 들어갔다.

정계 복귀
그 이후…

2016년 10월20일엔 오랜 산중 생활을 마치고 ‘제7공화국으로의 개헌’을 명분으로 정계 복귀를 선언하며, 최측근인 이찬열 의원과 함께 더불어민주당을 전격 탈당 후 자신의 정치기반인 국민주권개혁회의와 국민의당의 통합을 선언했다. 이듬해 3월19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국민의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에게 밀려 또 고배를 마셨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 합당 후 바른미래당 지방선거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2018년 8월8일 정치제도, 선거제도 개혁을 내세우며 바른미래당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건진법사·노상원 연결고리 추적

건진법사·노상원 연결고리 추적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윤석열정부는 여러 비선 실세가 있었다. ‘V0’ 김건희씨의 최측근인 건진법사 전성배씨, 군 인사를 좌지우지한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 이들에게는 ‘무속’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김씨와 윤석열 전 대통령이 위기일 때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건진법사 전성배씨와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 등이 서로 일면식이 있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 명씨와 전씨는 김건희씨 및 윤석열 전 대통령과 직접 만나거나 통화했다. 노 전 사령관만이 김씨와 윤 전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알았는지가 드러나지 않았다. 김건희 일가를 잘 아는 이들은 위의 인물들이 각자의 존재를 인지해 왔다고 한다. 윤석열정부 초기부터 이른바 ‘비선 경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출범하자 기웃기웃 윤 전 대통령은 국민의힘 예비후보 시절부터 논란을 달았다. 지난 2021년 TV 토론회 당시 그의 손바닥에서 ‘王’ 자가 세 차례 포착됐다. 이는 김씨의 무속 의혹과 겹치면서 지지율 폭락을 가져왔다. 전씨는 2022년 대선 당시 윤석열 후보 선거대책본부 산하 네트워크본부에서 ‘상임고문’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1월 윤 전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에 있는 사무실을 방문했는데 전씨가 윤 전 대통령의 등에 손을 올리고 사무실을 소개하는 모습도 영상에 담겼다. 전씨가 ‘고문’으로 네트워크본부의 실질적인 지휘를 담당했다는 의혹과 함께 ‘무속인’이 캠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선거대책본부는 “(전씨는) 고문으로 임명된 바 없다”고 해명한 뒤 네트워크본부를 해산했다. 이 같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서 전씨의 영향력은 위축되지 않았다. 최근 검찰 수사에선 전씨가 2022년 지방선거 당시 최소 3명의 공천 청탁을 했고, 비슷한 시기 통일교 전 고위간부 윤영호씨가 전씨에게 김씨에게 줄 선물용 목걸이를 전달한 정황 등이 확인됐다. 전씨는 당시 ‘윤핵관’으로 꼽혔던 국민의힘 윤한홍 의원과 선거 운동에 관해 논의하기도 했다. 이른바 ‘건진법사 게이트’를 수사한 서울남부지검 가상자산범죄합동수사부(부장검사 박건욱)가 확보한 문자 메시지를 보면 2021년 12월 윤 의원은 전씨에게 ‘권성동 의원과 제가 빠지는 게 (윤석열) 후보에게 도움이 될까’라고 묻는다. 전씨는 ‘후보는 끝까지 같이 하길 원하는데 빠진다고 하면 안 된다’고 조언한다. 검찰 조사에서 전씨는 “사람들이 제가 힘 있는 줄 안다”며 이런 의혹들을 부인했다. ‘무속인 논란’ 이후 기자 등을 피해 숨어 지냈다고도 했다. 전·노 윤석열 캠프 외곽 그룹서 활동 “정권 초기부터 셌다” 일면식 있었나 검찰 조사에서 한 진술과 달리 전씨의 영향력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윤 전 대통령 당선 후 더 커졌다. 검찰은 2022년 6월 치러진 지방선거를 전후해 전씨가 받은 경북 영주시장·경북도의원 등의 공천에 영향력을 발휘해 달라는 취지의 문자들을 확보했다. 또 전씨가 경북 봉화군수·경남 합천군수·경기 성남시장 후보 등과 관련해 윤 의원에게 청탁을 시도한 정황도 파악했다. 청탁을 한 사람 중 일부는 실제로 당선됐다. 전씨는 검찰에 “공천 부탁이 아니라 추천”이라고 답했다. 김건희 특검팀은 최근 전씨 휴대폰을 포렌식하며 ‘건희2’로 저장된 인물과의 대화 내역 일체를 확보해 분석 중이다. 전씨는 윤석열 전 대통령 취임 직전인 2022년 4월19일 ‘건희2’로 저장된 번호로 8명의 이름과 근무 희망 부서를 적은 명단을 보냈다. 8명은 대부분 윤 전 대통령 대선캠프 내 ‘네트워크 본부’에서 일했다. 전씨는 “사모님께 말씀드렸다. 꼭 해주시라고 당부했다”는 취지의 문자를 이어 보냈다. 그러자 ‘건희2’로 저장된 인물은 다음 날 전씨에게 “이력서를 보내달라”고 답했다. 김씨 측은 전씨가 ‘건희2’로 저장한 번호의 실제 사용자는 김씨의 ‘문고리 3인방’으로 꼽히는 정지원 전 대통령실 행정관이다. 특검팀은 지난달 25일과 31일 두 차례 정 전 행정관을 불러 조사했다. 특검팀은 정 전 행정관을 상대로 전씨와 연락을 주고받은 이유가 무엇인지, 전씨가 보낸 메시지를 김씨에게 전달했는지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특검팀은 전씨가 윤 전 대통령 및 김씨와의 친분을 내세워 다수의 공직 희망자로부터 인사 청탁과 공천 청탁을 받고 거액의 금품을 수수했다고 보고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윤석열 캠프 출신이다. 그는 윤석열 캠프서 국방·안보 정책 자문을 담당하는 특보였던 것으로 파악됐다. 노 전 사령관은 주로 출근하던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제의로 캠프에 몸담기 시작했다. 노 전 사령관의 역할이 국방·안보 정책 자문을 뛰어넘었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겨레>가 지난 5월 단독으로 보도했던 노 전 사령관 기사를 보면 그는 2020년~2021년 사이 ‘식목일행사계획’ ‘YP(윤 전 대통령 추정)작전계획’ ‘YR(와이알)계획’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작성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비상계엄 특별수사단(특수단)이 압수한 노씨의 유에스비(USB)에 있던 문건으로, ‘윤석열 대통령 만들기’가 주된 내용이다. 공천 청탁 금품 수수? 식목일행사계획 파일에는 ‘분노와 정의’라는 제목 아래 ▲(검찰총장) 퇴임 시 행동 ▲퇴임 후 동력 유지 방안(예) ▲퇴임 이후 정치 참여 방안(2~3개월 야인 생활 후) ▲대선 카드 준비 등의 내용이 담겼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퇴임 시기에 대해 “자의로 퇴임 시 지금의 몸값을 최대한 유지하여 내년 4월 서울시장 선거 직전이 유리, 기자회견은 ‘더 이상 직무 수행이 불가능하여 퇴임합니다’라고 간명하게 함”이라고 적었다. 2021년 4월 치러졌던 서울시장 보궐선거 전에 윤 전 대통령이 검찰총장에서 사퇴해야 한다는 뜻인데, 윤 전 대통령은 실제로 서울시장 선거 한 달여 전인 3월4일 검찰총장직에서 물러났다. 퇴임 이후 행보와 관련해서 노 전 사령관은 문건에서 “국민과 소통하면서 자연스럽게 현 시국 상황에 대한 우려와 인식을 공유하여 지도자급으로서의 이미지를 노출”시키고 “재래시장, 청계천, 남대문, 지하철 등에서 몰래카메라의 형식으로 소박하고 인간적인 냄새를 국민이 느낄 수 있도록 깜짝 행보”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았다. 또 “현 정치체제와 일정 기간 거리 두기를 하다가 내년 9월을 목표로 국민의힘에서 모셔가는 형식으로 영입” “AN(안철수 추정) 등 여타의 후보군을 모두 참여시켜서 경선을 하고 여타의 후보군이 꼼짝없이 경선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게 사전에 정리 작업” 등의 내용도 포함됐다. 실제로 윤 전 대통령은 검찰총장 사퇴 4개월 뒤인 2021년 7월 영입 제안을 받고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YP작전계획’ 문건에는 ‘정의로운 법조인’이라는 ‘Y의 현재의 모습’을 바탕으로 “연예인, 중도좌파도 끌어들이는 과감한 인물 영입”을 통해 “후원 지지 그룹 구성”을 하는 방안이 담겼다. 이어 “친박, 비박을 포용하는 탕평책”을 사용하고 “좌파 중량급을 영입”해서 “당권 장악”을 한 뒤 “대선 성공”을 하는 단계를 순서도 형식으로 그렸다. 막강한 영향력 아울러 “좌파 정권이 추진한 경제정책을 좌파 적폐 척결 차원에서 폐지”하고 “한미일 안보 축을 기본으로 하고 한일관계를 적폐 청산과 국민적 인기 영합 차원에서만 다룰 것이 아니고 미래지향적인 전략적 관점”에서 다룬다는 정책적 내용이 적시됐다. ‘YR계획’에는 “국립묘지 참배, 노무현, 김대중, 김영삼, 박정희 등 전직 대통령 두루 참배” 등 내용이 적혔다. 실제 윤 전 대통령은 2021년 10월26일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박정희·김대중·이승만·김영삼 전 대통령 순서로 묘소에 참배했다. 이어 같은 해 11월11일에는 김해 봉하마을을 방문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찾았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11일 경찰 조사에서 “(2022년)윤 전 대통령이 대선캠프를 구성했을 때, 김 전 장관이 제게 일을 도와달라 부탁했는데 성 관련 범죄 경력 때문에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며 “(그 대신에) 대선 토론 때 안보 관련 분야 질문 및 답변 내용에 대해 초안을 잡아주면, (상대 후보의) 역공 대비 등을 세밀히 검토해서 수정하는 작업을 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윤 전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김 전 장관이) ‘대통령 지지도를 어떻게 하면 올릴 수 있냐’고 묻길래 ‘검사 출신이라 말이 친화적이지 않다. 국민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줘라’고 했다”며 “(시장에 가서) 생선 같은 것도 만지면서 친근하게 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광주 5·18(행사)에 참석해라. 그들도 같은 국민”이라며 “일단 내려가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라 건의해라. 이왕 대통령이 됐으면 전라도도 품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실제 윤 전 대통령은 지난 2023년 7월엔 부산엑스포 유치 홍보를 위해 부산을 찾은 뒤 자갈치시장서 붕장어를 맨손으로 만졌다. 또 2022년 5월 취임 이후 지난해까지 3년 연속 광주를 찾아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노 전 사령관은 “나중에 티브이(TV)를 보니까 제 말대로 다 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정책·현안 모두 비선 실세 말대로 실현 김·노 라인 물적 증거 없어 수사 필요 전씨와 노 전 사령관의 공통점은 하나 더 있다. 의외로 ‘일본’과 무속이다. 김건희 특검팀 관계자 4~5명이 서울 강남구 역삼동 건진법사 전씨의 법당으로 들이닥쳤을 당시 ‘일본 신상’의 존재가 처음 드러났다. 전씨의 법당은 지하 1층~지상 2층 건물 면적만 279㎡(약 84.4평)에 이르는 단독 주택 2층에 있다. 2층(90.18㎡)엔 거실과 큰방, 작은방, 화장실이 있고, 1층(134.02㎡)은 일반 가정집 형태 생활공간으로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 2층 법당으로 올라가는 내부 계단이 설치돼 있다. 2층 거실과 큰방에 각각 부처상과 일본 신화에 나오는 아마테라스상을 모신 불당과 신당이 한 개씩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전씨가 일본 천황가의 조상신이자 신도(神道)의 주신으로 일컫는 아마테라스를 모신 건 한국 전통 무속이 일제 시대 신사 참배 등 일본 신도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작은방은 테이블과 방석이 깔려 있는 응접실 형태의 손님 대기실인데, 전씨는 이 방에서 공천 헌금 의혹이 제기된 2018년 자유한국당 영천시장 예비후보와 사업가 이모씨, 축구선수 이천수 등을 만났다. 복수의 정보사 간부들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일본어를 매우 잘한다. 육사 졸업 후 일본에서 수년간 거주한 까닭이다. 노 전 사령관이 일본 동북대 석사 위탁교육을 받는 동안 그의 딸들은 현지 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전해진다. 노 전 사령관과 같이 근무했던 한 군 관계자는 “노 전 사령관이 일본에 오래 거주하지는 않았다. 일본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던 터라 신사에도 자주 갔었다”고 전했다. 주변 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2019년부터 경기도 안산 본오동 ‘아기보살’ 점집에 얹혀살았다. 등기부 등본에는 이 점집의 소유주가 아기보살 윤모씨로 돼 있다. 왜 하필 일본? 윤씨와 노 전 사령관을 잘 안다는 한 지인은 언론 인터뷰에서 “아기보살 점집에 가보면 노씨가 트레이닝복이나 잠옷 차림으로 있기도 했다. 점 보러 오는 손님이 많은 집이라 노씨가 손님들 줄도 세우고 그랬다. 1년쯤 지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노씨가 실은 자기가 장성 출신이라고 그러기에 ‘웃기지 마라, 나도 군대 ‘장’ 출신’이라고 대꾸해 줬다, 병장. 그런데 몸집도 탄탄하고 해서 장군 출신이 무슨 사연이 있어 이런 데 사는구나 짐작했다. 노씨는 후배 군인들을 데려와 점을 보게 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