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고 이희호 여사의 97년을 돌아보다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9.06.17 10:04:59
  • 호수 12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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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동지 ‘인동초’ 곁으로 떠나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9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 여사의 인생은 ‘정치인 김대중의 부인’이나 ‘퍼스트레이디’라는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일제강점기·한국전쟁·민주화운동 등을 거쳐 평화적 정권교체까지. 이 여사는 격변의 한국 현대사를 오롯이 온몸으로 이겨낸 여성운동가였다. 
 

▲ 고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평화센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자 여성운동가·민주화운동가로 평생을 보낸 이희호 여사가 지난 10일 오후 11시37분 서울 서대문구 신촌 연세대세브란스병원서 별세했다. 향년 97세.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다. 지난 14일 이 여사의 장례예배는 평생토록 다닌 신촌 창천교회서 치러졌다. 이 여사는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의 김 전 대통령 묘소에 합장됐다. 

여야·각계 망라
추모·애도 물결

이 여사는 올해 들어 건강이 급속히 나빠졌다. 감기 등으로 수차례 입원했다 퇴원하기를 반복했다. 지난 4월엔 ‘위중설’이 보도되기도 했다. 같은 달 20일에 장남인 김홍일 전 의원이 별세했을 때도 주변에선 이 여사에게 아들의 임종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이 여사의 장례집행위원장을 맡은 김성재 김대중평화센터 상임이사는 “이희호 여사님은 모든 가족과 함께 찬송가를 부르다가 지난 10일 밤 11시37분께 편안하게 소천하셨다”고 밝혔다. 김 상임이사는 “이 여사님이 입 모양으로 찬송가를 따라 부르셔서 가족들이 깜짝 놀라고 좋아했다”며 이 여사의 마지막 순간을 전했다.

가족들은 평소 이 여사가 좋아하던 찬송가 ‘나의 갈 길 다가도록’을 부른 것으로 전해졌다.


김 상임이사는 고인이 남긴 유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이 여사는 유언을 통해 “국민들이 남편 김대중 대통령과 자신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며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또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적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도 덧붙였다.

이 여사는 생전 거주하던 동교동 사저를 ‘대통령 사저 기념관’(가칭)으로 써달라고 유언했다. 김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상금도 고인의 유지에 따라 대통령 기념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쓰일 예정이다.

이 여사는 유언 집행에 대한 책임을 김 상임이사에게 맡기며 “김대중 대통령 기념사업과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위한 김대중평화센터 사업을 잘 이어가달라”고 당부했다. 이 여사와 가족들은 지난해부터 유언장 작성을 준비해왔다.

이 여사의 타계 소식에 사회 각계층의 추모행렬이 이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SNS에 “우리는 오늘 여성을 위해 평생을 살아오신 한 명의 위인을 보내드리고 있다”며 “여사님은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다’ 하실 정도로 늘 시민 편이셨고, 정치인 김대중을 ‘행동하는 양심’으로 만들고 지켜주신 우리 시대의 대표적 신앙인, 민주주의자였다”라는 글을 남겼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여야5당은 이 여사의 타계 소식에 애도의 뜻을 전했다.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수석대변인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인권운동의 거목이었던 여성지도자 이희호 여사의 삶을 깊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추모한다’고 논평했다.

홍 대변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반자이자 가장 가까운 비판자로서, 독재세력과 싸우는 민주화 투쟁의 동지로서, 매섭고 엄혹한 격정의 세월을 함께 헤쳐오셨다”며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삶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 현대사였다”고 했다. 이어 “독재정권의 서슬 퍼런 탄압도, 죽음을 넘나드는 고난도, 이 땅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향한 두 분의 굳은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고 했다.


격변의 현대사 온몸으로 이겨낸 여성운동가
퍼스트레이디이자 민주주의·인권운동의 거목

자유한국당 민경욱 대변인도 서면 논평을 통해 “이희호 여사는 대한민국 1세대 여성운동가로서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여성문제연구회 회장 등을 맡았으며 가족법 개정 운동, 혼인신고 의무화 등 사회운동에 헌신했다”며 “고인께서 민주주의, 여성, 그리고 장애인 인권운동을 위해 평생 헌신했던 열정과 숭고한 뜻을 기리며,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했다.

바른미래당 이종철 대변인은 서면 논평서 “꼭 쾌차하시어 따뜻한 햇살이 간지럽도록 다시 함박웃음 주시리라 간절히 믿었건만, 여사님께서는 그리운 김대중 대통령님을 만나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실 기대가 더 크셨던가 보다”라며 “6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민주의 열망을 온 하늘에 퍼뜨리던 그날을 어이 맞추신 듯, 6월 민주항쟁의 32주기 뜻깊은 날에 소천하셨다. 깊은 애도와 함께 고인의 편안한 영면을 기원한다”고 전했다.

정의당 이정미 대표는 보도자료를 통해 “정의당은 고인의 위대한 삶을 계승하는 데 노력하겠다”며 “특히 고인의 필생의 신념이었던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6.15공동선언을 계승 실천하고, 한반도 평화 번영을 위한 평화 협치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고 했다. 
 

▲ ⓒ김대중평화센터

민주평화당 박주현 수석대변인도 전날 논평서 “우리 모두는 여사님이 걸었던 여성, 민주주의, 인권, 사랑의 길을 따라 전진하겠다. 이희호라는 이름은 항상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추궈홍 주한 중국대사, 동교동계 인사들과 전두환씨 부인 이순자씨 등이 빈소를 찾았다. 지난 12일 이 부회장은 10시50분경 이 여사의 빈소를 찾아 5분이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머무르다 나갔다. 

앞서 한 시간 전에는 김 전 대통령과 ‘악연’이었던 전씨의 부인 이순자씨도 빈소를 찾았다. 이씨는 이 여사의 아들 김홍업씨에게 짧은 인사말을 건네고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김영삼민주센터 상임이사(고려대 특임교수)도 빈소에 나타났다. 김 이사는 “이 여사님한테 매 신년 1월1일이 되면 인사를 드리러갔다”며 “반갑게 대해줬고 몇 년 동안 동교동을 찾아뵙고 인사드렸다”고 고인을 회상했다. 

추궈홍 주한 중국대사는 고인을 추모하며 “이 여사님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대모셨다”며 “한중관계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해주신 점에 대해서 깊이 평가하고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밖에 김명수 대법원장, 고건 전 총리, 정동영·장병완·유성엽 의원 등 민주평화당 인사, 방송인 김제동씨 등이 고인을 기렸다.

전두환 부인
이순자 조문

이 여사는 남편 김 전 대통령과 더불어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험난한 여정을 걸었다. 일제 치하에 태어나 해방과 분단,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결혼 전에는 독신을 고집하며 유학을 다녀온 뒤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활약한 엘리트 여성이었다.

정치인 아내의 길에 들어선 후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며 험로를 걸었지만, 대통령의 영부인이라는 영광을 맛보기도 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내조자를 넘어 김 전 대통령이 옥고를 치를 때는 옥바라지로, 망명 때는 후견인으로, 가택연금때는 동지로, 야당 총재 시절에는 조언자로 곁을 지켜 정치적 동지라는 평을 받았다. 


남편이 떠난 후에도 동교동 178-1번지 자택에 걸려 있던 ‘김대중 이희호’ 문패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이 여사도 파란만장한 삶을 접고 ‘인동초’ 김대중의 곁으로 돌아갔다. 

이 여사는 3·1운동으로부터 3년이 지난 1922년 서울 수송동서 6남2녀의 넷째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부친 이용기씨가 ‘국내 의사면허 4호’였을 정도로 가정환경은 유복했다. 이 여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이순이씨의 영향으로 모태신앙을 가졌다.

이 여사는 이화여고·이화여전을 다녔지만 1944년 일제의 교육긴급조치에 따라 이화여전을 졸업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다. 1946년 서울대 사범대학에 입학해 1950년 교육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활달한 성격의 이 여사는 대학 재학 중 서울대 총학생회서 사범대 대표를 맡는 등 당시 강요되던 ‘얌전한 여학생’ 딱지를 거부했다. 발랄하고 활동적인 리더 타입으로 남학우·여학우를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이 시절 이 여사의 별명은 중성을 뜻하는 독일어 ‘다스’(das)였다.

남녀공학서 뿌리 깊은 가부장제를 처음 마주한 그는 곧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에 몰두한다. 그리고 여학생의 동등한 권리와 처우를 주장하는 데 앞장섰다.

대학 졸업 직후 발발한 한국전쟁서도 이 여사는 여성운동가들과 어울리며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피란지 부산서 이태영, 김정례 등 1세대 여성운동가들과 대한여자청년단을 조직했다. 2년 뒤에는 여성의 인권과 법적 권리를 도모한 ‘여성문제연구원’ 발족의 실무를 도맡아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여사가 처음 선거운동을 경험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1954년 5월 3대 민의원 선거서 박순천 캠프를 도운 그는 지프차를 타고 거리를 누리며 외쳤다. “여성은 여성 대표를 찍읍시다!”
 

김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도 이 무렵이었다. 이 여사가 활동하던 대한여자청년단은 1·4후퇴 당시 피난민들을 배로 후송하기 위해 인천에 있는 해운회사 사장이었던 김 전 대통령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부산으로 사업 거점을 옮긴 김 전 대통령과 대한여자청년단 간부들이 만나는 자리서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도 이뤄졌다. 

이 여사는 서울 지역 대학생 모임이었던 면학동지회를 주도적으로 이끌며, 간헐적으로 김 전 대통령과 교우했지만 곧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램버스대서 사회학 학사 학위, 스카릿대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58년 귀국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서른일곱의 엘리트 신여성이었던 이 여사는 여성운동가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당시 여성계를 선도하던 엘리트 집단인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의 총무를 맡아 축첩 반대, 혼인신고 하기 등 각종 여권신장운동을 벌였고,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운명적인 만남
끝까지 바라지

여성운동에 매진하던 이 여사는 1962년 만 40세의 나이로 김 전 대통령과 운명적 결혼을 하면서 ‘정치인 아내’의 길로 들어섰다. 김 전 대통령은 1945년 차용애씨와 결혼해 홍일, 홍업씨를 얻었지만 차씨는 1959년 세상을 떠났다. 

주변에서는 ‘정치 낭인’에 불과한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두 아들과 노모, 아픈 여동생을 거느린 정치 재수생이었다. 운도 매번 그를 비켜가 1954년 민의원 선거서 낙마했고 58, 59, 60년 선거서도 잇따라 고배를 마셨다. 1961년 강원도 인제의 보궐선거에 당선돼 4전5기에 성공했지만 사흘 만에 5·16쿠데타가 일어나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 여사의 주변에서는 그런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을 말리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여사는 연인의 비범함을 알아봤다. 그를 도와 남녀가 평등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었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됐다”고 이 여사는 자서전서 밝혔다.

1962년 결혼 열흘 만에 김 전 대통령이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는 등 이 여사는 ‘민주화 운동가의 아내’로서 시련을 겪기 시작했다. 김 전 대통령을 눈엣가시로 여긴 박정희, 전두환 군부정권은 끊임없이 그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결국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 

1973년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도쿄 시내 호텔에 머무르고 있던 김 전 대통령을 납치해 대한해협에 수장시키려고 했다. 기적적인 생환 이후에도 김 전 대통령은 재야활동을 계속했고, 가택연금과 투옥(1973∼1979년)이 반복됐다. 

“하늘나라 가서 
평화통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2·12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혐의는 ‘광주사태’를 배후 조종한 내란음모죄. 거짓 모함이었지만 이 일로 아들들까지 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겪어야 했다. 이 여사는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내는 등 온 힘을 다해 남편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이 여사는 가계를 홀로 꾸려나가면서도 남편의 심신 건강을 지키기 위한 옥바라지에도 지극정성이었다. 이 여사는 옥중의 김 전 대통령에게 600권이 넘는 책을 보내 공부를 돕는가 하면, 청와대 안가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독대해 남편의 석방을 당당히 요구하기도 했다. 

남편의 수감 시절 면회시간이 한 달에 20분밖에 되지 않자 이 여사는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이 시절 가족이 보낸 900여통의 편지와 김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은 각각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미국 망명시절과 이후 54차례 이어진 가택연금 때도 이 여사는 남편의 가장 든든한 동지이자 참모로 묵묵히 곁을 지켰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 이후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섰지만 1987, 1992년 대선에서 줄줄이 낙선했다. 당시 이 여사는 남편의 정치활동에 일체 개입하지 않았지만 여성 문제에 한해서는 발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영향을 받은 김 전 대통령은 시대를 앞서가는 여성정책을 국회에 제시했다.

상속과 이혼문제에서 남녀차별 요소를 삭제한 가족법 개정안이 89년 통과된 데에도 이 여사의 공로가 숨어 있었다. 

1992년 대선 이후 은퇴를 선언한 김 전 대통령은 3년 뒤 지방선거 지원 유세를 계기로 정계에 복귀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7년 5월 당내 경선서 대선 후보로 선출되며, 대통령이 될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 이 여사는 여느 선거 때처럼 남편의 유세를 적극 지원했다.
 

▲ ⓒ사진공동취재단

특히 여성단체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지지를 호소했다. 과거 분열로 낙선의 쓴맛을 봤던 김 전 대통령은 15대 대선서 자민련의 김종필, 박태준씨와 손을 잡아 3전4기의 신화를 완성했다. 헌정 사상 처음 평화로운 정권교체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청와대 안주인이 된 이 여사는 아동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두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김대중정부서 여성부가 신설되고 여성의 공직 진출이 확대되자 ‘국민의 정부 여성 정책 뒤에는 이희호가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 여사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남편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기억했다. 이 여사도 2000년 펄 벅 인터내셔널이 주는 ‘올해의 여성상’을 수상했다.

이희호는 
이희호다

이 여사는 2009년 8월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47년 동안 함께했던 ‘동지’와 작별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 서거 후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 동교동계의 구심점이자 재야인사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2011년 말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때 조문단 자격으로 방북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자서전 <동행>서 “참으로 먼 길을 걸어왔다. 문득 돌아보니 극한적 고통과 환희의 양극단을 극적으로 체험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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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빅텐트 타령 국민의힘, 왜?

또 빅텐트 타령 국민의힘, 왜?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이 당심 반영 비율을 늘린 지방선거 경선 규칙을 발표했다. 이어 장동혁 대표를 필두로 지방선거 전략으로 ‘반명 빅텐트론’을 지난 대선에 이어 또 거론했다. 국민의힘이 6년째 내리 실패한 전략을 또 끌고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의힘이 지난달 25일 지방선거 경선 규칙을 발표했다. 국민의힘 지방선거 총괄기획단 대변인을 맡은 조지연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진행된 기획단 회의 후 “내년 지방선거 경선에서 당원투표 비중을 기존 50%에서 70%로 늘리기로 했다”고 밝혔다. 민심보다 당심으로? 국민의힘 지방선거 공천은 당원투표 70%와 국민 여론조사 결과 30%가 혼합돼 결정된다. 만 44세 이하 청년은 가점을 부여받고, 여성 신인은 만 45세 이상이어도 가산점이 부여된다. 광역의원 비례대표 후보자는 청년 인재 오디션을 거쳐 선출해 최우선 순위로 당선권에 배치할 예정이다. 지난 2022년 지방선거 당시 국민의힘 대표였던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시행했던 공직 후보자 기초 자격 평가는 기초자치단체장·기초의원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다. 국민의힘 지방선거 총괄기획단장은 5선 나경원 의원이 맡고 있다. 나 의원은 서울시장 출마 후보군 중 1명으로 거론된다. 현 시점에선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로 오세훈 서울시장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일각에선 “나 의원이 사심 때문에 경선 규칙을 정한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대중적 인기는 높지만, 당내 기반은 약하다”는 평가로부터 비롯되는 의심이다. 새로 정한 경선 규칙에 대해선 당내에서도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던 김용태 의원은 지난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내년 지방선거를 시작으로 실질적인 수권 전략을 실현하려면, 공직선거 후보자 선출 규칙은 국민경선 100% 제도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도 같은 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비판했다. 윤 의원은 “민심이 곧 천심이고, 민심보다 앞서는 당심은 없다”며 “민의를 줄이고 당원 비율을 높이는 것은 민심과 거꾸로 가는 길이고, 폐쇄적 정당으로 비칠 수 있는 위험한 처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최근 사법부 압박 논란과 대장동 항소 포기 문제까지 있었는데도 우리 당 지지율은 떨어지고 여당 지지율이 오르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며 “여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성찰과 혁신 없이 표류하는 야당에 대한 국민적 실망이 더 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갤럽이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정당 지지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지지율은 43%였고, 국민의힘의 지지율은 24%였다. 지난 7월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만 18세 이상 100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전화 면접 여론조사 당시 국민의힘 지지율이 19%를 기록했던 것에 비하면 높지만, 두드러진다고 보긴 어렵다. 내부 비판 이어지는데 당심 비중↑ 비상계엄 사과 두고도 ‘옥신각신’ “국민의힘의 지지율이 당분간 크게 오르긴 어렵다”는 일각의 예측도 있다. 다음 달 3일은 비상계엄 1주년이라서 윤석열 전 대통령의 재임 중 실정과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불참 ▲윤 전 대통령 체포 저지 시도 ▲심야 대선후보 교체 시도 등 지난 1년 동안 국민의힘이 여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행보들이 다시 주목받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국민의힘 일부 소장파 의원들은 비상계엄 사과 등을 통한 윤 전 대통령과의 확실한 절연을 요구하고 있다. 국민의힘 박수민 의원은 지난 24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좀 더 명확한 메시지를 낼 필요가 있다는 얘기가 당내에서도 나온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역사와 국민 앞에 누군가 사과해야 할 상황이고, 국민의힘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예측할 수 없었던 돌발적인 계엄이 있었고, 탄핵에 이어 정권을 잃은 후 국정의 주도권을 넘겨줬다”고 강조했다. 반면 같은 당 김재원 최고의원은 같은 달 26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일회성 사과로 과거의 잘못을 끊어내고 새로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사과를 자꾸 하는 것은 오히려 현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어떤 정치를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며 “사과하는 것보단 앞으로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는 게 더 낫다”고 역설했다. 장 대표도 부정적인 의견을 밝히고 있다. 그는 같은 달 25일,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한 후 “사과 메시지를 내는 것은 지금 말씀드릴 단계는 아닌 것 같다”며 “국민의힘이 지금 싸워야 할 대상은 무도한 이재명정권과 의회 폭거를 이어가는 민주당”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구미역 광장에서 진행된 민생 회복·법치 수호 경북 국민대회에 참석해 “저들이 똘똘 뭉쳐 우리를 공격하고 손가락질할 때, 우리가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비판하는 게 부끄럽다”고 목소리 높였다. 그러면서 “대한민국과 자녀 세대를 위해 소리치는 우리가 아스팔트 세력이라고 손가락질당하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나라가 쓰러져가는데도 한마디도 못하는 게 부끄러운 것”이라고 강조했다. 해당 발언은 “사과해야 한다”는 일부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풀이된다. 돌발적인 계엄이다? 이재명 대통령·민주당에 대한 투쟁을 강조하는 장 대표의 주장은 빅텐트론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나 의원도 지난 1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 대통령과 민주당을 비판하면서 “국민의힘은 네 탓 공방을 벌이면서 분열에 빠져 있다”며 “정당의 뿌리를 흔드는 내부는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하나로 뭉쳐 민주당의 독재 완성 계략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고 했다. 국민의힘에선 각종 선거와 정국에 대응할 때마다 빅텐트론이 거론됐다. 시작은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 재임했던 지난 2019년이다. 이듬해엔 “각 정당·정파가 참여하는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모든 자유민주 세력과 손을 맞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 전 대표는 “통합 없이는 절대 이길 수 없단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며 “이 나라를 망치려는 사람들은 통합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황 전 대표가 주장했던 빅텐트론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란 헌법 가치를 공유한다면, 태극기 세력부터 중도 보수 인사까지 아우른다”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을 토대로 자유한국당은 미래통합당으로 바뀌었다. 황 전 대표는 제21대 총선 패배 후 물러났다. 이 대표는 빅텐트론에 일관적으로 반대하면서 세대 포위론을 토대로 지난 2022년 대선을 지휘했다. 지난 6월 대선에 출마했던 이 대표는 국민의힘 등 보수 각계로부터 후보 단일화 요구를 받았다. 이 대표는 당시에도 국민의힘 등에서 주장했던 ‘반명 빅텐트론’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대선을 완주했다. 일각에선 국민의힘의 빅텐트론을 놓고 “혁신 요구가 나올 때마다 제기되는 주장”이라고 비판한다. 빅텐트론의 핵심은 통합이다. 통합은 정치권에서 반대 계파·의견을 억압하는 수사로 활용되는 예가 잦다. 빅텐트의 핵심은 조정 능력이다. 여기엔 다양한 계파·의견을 조율해 갈등을 최소화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장 대표는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체제 전쟁 깃발 아래 모일 수 있는 모든 우파가 함께 모여서 이재명정권이 사회주의 독재체제로 가려는 걸 막기 위해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주장하는 ‘체제 전쟁’의 근거는 ▲검찰의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 ▲민주당의 배임죄 폐지·대법관 증원 시도 등이다. 장 대표는 공식적으로 국민의힘과 관계없는 황 전 대표가 지난 12일 내란 선동 혐의를 받아 내란 특검에 의해 체포되자 “우리가 황교안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어지는 재탕 삼탕 이어 “국민의힘만으로 이재명정부·민주당과 싸우긴 어렵다”며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주도하는 자유통일당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주도하는 자유민주당 ▲새누리당 조원진 전 의원이 주도하는 우리공화당 ▲황 전 대표가 주도하는 자유와혁신 등을 연대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들은 모두 부정선거론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에 반해 개혁신당과 이 대표는 부정선거론을 강하게 비판한다. 장 대표가 주장하는 빅텐트론은 김문수 전 대선후보 등이 주장했던 빅텐트론과 큰 차이가 없다. 당시 김 전 후보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이기기 위해선 어떤 경우든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한덕수 전 총리 ▲황 전 대표 ▲이낙연 전 총리 ▲이 대표 등을 통합 대상으로 지명했다. 권성동 당시 원내대표는 김 전 후보·한 전 총리의 단일화를 지지하면서, 당시 당내 주류와 불화했던 국민의힘 김상욱 당시 의원(현 민주당 의원)에게 “스스로 거취를 결정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장 대표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에게 당원 게시판 의혹 관련 압박을 가한 것과 비슷하다. 당시 권 전 원내대표는 “당원 대부분은 민주당 이 후보에게 대항하기 위해선 반명 빅텐트가 필요하단 의견을 갖고 있다”며 “지도부는 당원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는 부정선거론을 주장하는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연대를 주장하면서, 개혁신당과의 연대설도 공개적으로 부정하진 않는다. 일각에선 “오 시장이 장 대표·이 대표의 가교 역할을 한다”고 관측하고 있다. 오 시장은 지난 9월 “개혁신당과의 연대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 이후 꾸준히 개혁신당과의 연대를 주장하고 있다. 이후 정치권 일각에선 “오 시장이 서울시장으로 다시 출마하고, 이 대표가 경기도지사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하면 수도권에서 보수 진영이 선전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다. <미디어토마토>가 지난달 28일부터 이틀 동안 서울특별시 거주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무선·ARS 방식으로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오 시장은 보수 진영에서 민심 27.5%·당심 50.3%의 지지를 얻어 서울시장 후보 중 가장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민주당이 서울시장 후보를 선출한 후 ‘여당 프리미엄’을 앞세워 오 시장에 대한 공세를 이어간다면, 재선을 장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국민의힘이 중도층의 민심을 끝내 얻지 못하면, 오 시장으로선 힘겨운 선거가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체제 전쟁” 명분으로 사과 거부 홍 “국힘은 보수 참칭 사이비 레밍” 당내에서도 나 의원 등 막강한 경쟁자가 있어 본선행을 확실하게 장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대표는 지난달 23일 “국민의힘 내부에서 변화·쇄신 목소리가 전혀 안 나온다”며 “연대를 함께할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국민의힘은 지난 대선에 이어 1990년대식 ‘뭉치면 이긴다’ 구호만 내세운다”며 “그 전략으로 패배한 사람은 황 전 대표였는데, 같은 선택을 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길 기대하는 건 이해가 안 간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내부에도 연대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국민의힘 지도부에서 강경 보수의 주장을 가장 강하게 내세우는 김민수 최고위원은 같은 달 25일, 채널A 유튜브 채널 ‘정치시그널’에 출연해서 “이 대표는 당내 많은 분쟁을 가져온 사람이라서 화합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며 “개혁신당과의 연대는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김 최고위원의 주장은 오 시장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해석되고 있다. 김 최고위원은 “개혁신당은 보수 정당인지, 진보 정당인지 모르겠고, 그 사이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저는 최고위원이 되기 전부터 우측으로의 연대를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대선은 기동전·총력전 성격이 강한 반면, 지방선거는 진지전 성격이 강하다. 선거의 성격이 다르지만, 국민의힘에선 똑같이 ‘반명 빅텐트’라는 구호를 거론하고 있다. 역사엔 위기 상황에서 변화를 거부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맞이한 사례가 다수 기록돼있다.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이 그 집단을 주도할 때, 이 사례는 더욱 빈번하게 재현된다. 중국 청나라에선 수구파를 이끌던 서태후가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하던 광서제에게 반대해 정변을 일으켜 성공한 후 광서제를 유폐했다. 중국 정부가 지난 2008년 광서제의 능을 공식 발굴 조사한 결과, 광서제는 급성 비소 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어 3세 나이로 즉위한 청나라 황제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의 주인공인 선통제다. 선통제는 영화 제목 그대로 마지막 황제였다. 광서제의 개혁 시도는 청나라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취사 선택해 그 정보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불리한 정보는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성향을 확증편향이라고 한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지역구 관리에만 능하고, 기득권·이익 추구에만 관심을 두는 의원들이 당을 주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언더 찐윤’이란 집단이 거론된다. 확증편향 소탐대실 일각에선 국민의힘이 변화·혁신에 거부감을 느끼면서 같은 선택을 반복하는 핵심 이유로 언더 찐윤을 거론한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지난 6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은 이념도 없는, 보수를 참칭한 사이비 레밍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여러 번 선거에서 패배한 전략임에도 확증편향·소탐대실을 근거로 같은 선택을 고집한다면, 무리 지어 절벽에서 떨어지는 레밍과 비교되는 수모를 또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의힘에선 또 빅텐트론이 반복되고 있다. 빅텐트는 국민의힘 주변을 배회하는 유령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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