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디지털 보부상’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

삼성 일등공신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일요시사=송응철 기자] 다음 달 하순 삼성 사장단 인사가 발표된다. 삼성전자는 DS(디바이스 솔루션, 부품) 총괄과 6개 사업부로 나누어진 조직을 세트(완제품)와 부품 2개 부문으로 단순화하는데 이 중 완제품 부문을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이 총괄하게 된다. 최 부회장은 반도체, 디지털미디어(DM), 정보통신총괄 등 핵심 부서를 모두 거친 CEO로 지금의 삼성을 만들어낸 일등공신이다. 그런 그가 삼성과 함께 걸어온 지난 30여년의 행적을 따라가 봤다.

삼성 무명에 가깝던 시절 유럽에서 신발 판매
발로 뛰면서 개척하는 특유의 도전적 경영활동

삼성 고위관계자에 따르면 삼성은 통상 12월 중순에 하던 사장단 인사를 다음 달 25일로 앞당겼다. 고 이병철 창업주의 24기 추도식 며칠 뒤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이날 삼성전자 조직개편이 함께 이뤄진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DS(디바이스 솔루션, 부품) 총괄과 6개 사업부로 나누어진 조직을 세트(완제품)와 부품 2개 부문으로 단순화하는데 이 중 완제품 부문을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이 총괄하게 된다. 완제품과 부품의 ‘쌍두마차’ 체제인 셈이다.

직접 운전하면서
유럽 종횡무진

체제의 변화가 생겼지만 최 부회장이 삼성전자를 전면에서 이끌어 간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자리를 굳건히 지킨 것. 이를 지켜보는 재계는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새다. 최 부회장은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의 상무 시절부터 해외 전시행사를 함께하는 등 사실상 경영을 가르치면서 ‘포스트 이건희 회장 시대’의 핵심으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재계에선 이건희-이학수의 관계처럼, 이 사장과 최 부회장을 연결 짓는 이들이 많다.

최 부회장은 30여년간 삼성에서 근무, 기술과 영업에 정통한 CEO다. 본래 최 부회장은 1977년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뒤 삼성물산을 통해 삼성과 인연을 맺었다. 최 부회장은 1979년부터 삼성물산 직원으로 유럽에 근무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에서 ‘무명’에 가깝던 삼성에서 최 부회장이 한 일은 신발 판매였다.
최 부회장은 1981년 삼성 회장 비서실 기획팀으로 발령받았으나 1985년 삼성반도체 구주법인장으로 발령받으면서 다시 유럽무대에 뛰어들었다. 이때부터 최 부회장의 마케팅 수완이 발휘됐다. 최 부회장은 당시 ‘황무지’나 다름없던 유럽 반도체시장에서 직접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유럽 곳곳을 종횡무진 누볐다. 최 부회장은 당시 사명에 PC란 말이 붙은 곳이면 어디든 빠짐없이 연락해서 반도체 판매를 시도했다.

최 부회장은 또 1985년 법인이 없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1인 사무소장으로 발령 받은 뒤 1000여 페이지 분량에 달하는 반도체 기술교재를 달달 암기해 부임 첫 해 100만달러 어치의 반도체를 팔았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이처럼 해외시장을 발로 뛰면서 개척하는 특유의 도전적 경영활동을 통해 최 부회장은 ‘디지털 보부상’이란 별칭을 얻었다.

최 부회장은 6년여의 유럽생활을 끝낸 뒤 1991년에 삼성 반도체 기흥관리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 1992년에는 반도체판매사업본부 메모리수출담당 부장을 맡아 경영진의 관심을 넘어 신뢰를 받기 시작했다.

최 부회장에 대한 삼성의 무한 신뢰는 1993년 삼성 회장 비서실로 복귀했다는 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현재 남아 있는 삼성전자 주요 부회장과 사장단 중에서 비서실에서 2차례 근무한 이력은 최 부회장이 유일하다.

그러던 1994년 최 부회장에게 ‘삼성 반도체 브랜드를 본격적으로 높여보라’는 경영진의 지시가 떨어졌다. 그는 이 같은 지시를 실행에 옮길 전략을 마련, 삼성전자 반도체본부 메모리영업담당 이사로 자리를 옮겼다.

14년에 걸쳐
반도체 장사꾼

최 부회장의 삼성 본사 생활은 1998년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을 맡으면서 시작됐다. 14년간의 ‘반도체 장사꾼’ 생활을 마친 직후였다. 담당분야는 디스플레이, 디지털미디어 등 새롭게 떠오르는 IT 제품이었다. 2001년에는 고전을 면치 못하던 TV 사업까지 떠맡았다.

2006년, 삼성전자의 TV를 세계 1위에 올려놔
2007년, 핸드폰 사업 글로벌 시장 2위 만들어

그리고 2004년 디자인경영센터장을 겸임하면서 DM총괄 사장으로 승진한 최 부회장은 2006년 ‘보르도’를 출시하면서 삼성전자의 TV를 세계 1위로 올려놓았다. 삼성전자가 TV사업을 시작한 지 34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 소니를 제치면서 세계 시장을 정복한 것이다.

‘승기’를 잡은 삼성전자는 지금까지도 세계 TV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한 때 한국의 반도체 기업으로 인식됐던 삼성전자가 이제는 ‘TV 명가’로 불리는 것도 결국은 ‘최지성의 힘’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최 부회장은 2007년 정보통신총괄로 자리를 옮기면서 정체돼있던 삼성의 휴대폰 사업의 구원투수로 나섰다. ‘최지성 효과’는 휴대폰에서도 금세 나타났다. 2007년 정보통신총괄 사장을 맡고부터는 다양한 휴대폰 라인업으로 전 세그먼트를 공략하는 이른바 ‘글로벌 플레이어’로 전략을 수정해 새로운 도약을 이끌어냈다. 삼성 휴대폰은 2007년 2분기 글로벌 시장 2위에 올라선 이래 1위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삼성전자 휴대폰이 세계 1위를 달성할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이처럼 손대는 사업마다 빛나는 성과를 거둔 때문에 최 부회장에겐 ‘전자업계 미다스의 손’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를 바탕으로 최 부회장은 2004년 사장으로 승진한데 이어 5년 만에 대표이사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 이후 2009년 세트(DMC) 부문 부문장을 맡아 삼성전자의 완제품 사업을 총괄 지휘해 왔으며, 올해 1월부터 삼성전자 대표이사 사장(CEO)에 전격 취임했다.

삼성전자 새로운
도약의 원동력

최 부회장은 반도체, 디지털미디어, 정보통신분야를 두루 거치며 오늘날 삼성전자가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하는데 기여한 ‘일등공신’ 중 한명이다. 그럼에도 최 부회장은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최 부회장의 이 같은 끊임없는 허기가 글로벌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새로운 도약의 원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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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회 문턱을 넘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이 사법부를 강타했다. 검찰은 1999년 특별검사제 도입 이후 권한을 조금씩 잃다가 올해 해체가 결정됐다. 검찰이 26년 전 느끼다가 현실이 된 불안을 이젠 사법부가 느낄 차례일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범여권이 지난 24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내란 사건만 맡는 전담재판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취지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다. 특별재판부 영장전담 법관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논평을 통해 ‘24일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날 법안 처리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박 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기자 간담회에서도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예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원래 처리하려던 법안은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법’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됐다면, 12·3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맡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고, 영장 심사를 맡을 특별영장 전담 법관이 따로 배정됐을 것이다. 이들은 국회·판사회의·대한변호사협회가 3명씩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규모의 추천위원회의 2배수 추천과 대법원장의 임명을 거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상고심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대법관은 모두 제척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에 대해선 각계에서 위헌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지난 16일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명칭도 특별재판부에서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 전담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장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 외부 인사를 제외한 후 법관으로만 구성될 예정이다. 추천위원회에 들어갈 법관 중엔 각급 판사회의·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포함된다. 전담재판부에 소속될 법관은 추천위원회·대법관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등 12·3 비상계엄 주요 연루자들은 이미 형사재판 제1심을 받고 있다. 전담재판부는 항소심부터 맡을 예정이다. 대법원은 민주당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대법관 행정회의를 열어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 및 심리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기로 했다. 여기엔 “형법상 내란·외환죄와 군형법상 반란죄 사건을 전담해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대법원이 규정하는 전담재판부는 무작위 배당을 거쳐 사건을 배당받을 재판부가 지정되는 방식이다. 전담재판부로 지정된 재판부가 원래 맡던 재판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된다. 예규엔 “해당 재판부는 이후 내란·외환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는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박 대변인은 “사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늦게 했느냐”며 “왜 그동안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의 입법권을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란 전담재판부 신설이 갖는 ‘진짜 함의’ 대법원 예규 제정…반격 혹은 타협안 제시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 중 “대법원이 헐레벌떡 자체 안이라고 내놨다”며 “더 일찍 해야 하지 않았느냐. ‘조희대 사법부’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국내 헌정사에서 특별재판부는 단 2회만 설치됐다. 제헌헌법 부칙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했다. 반민특위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 등 9명으로 구성됐고,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인 6명 ▲사회 저명 인사 5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국회가 선출했다. 두 번째 특별재판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개정된 제4차 개정 헌법을 근거로 설치됐다. 당시 개정 헌법엔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 관련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취지의 부칙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부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을 거쳐 설치됐다. 민주당조차 ‘특별재판부’를 ‘전담재판부’로 수위를 낮춰 처리했다는 이유로 내란 특별재판부에 대해 불거진 위헌 시비를 거론한다. 법원은 ‘무작위 전산 재판 배당’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재판부에 특정 재판을 배당한다”는 취지의 특별재판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위헌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관련 합헌·위헌 여부를 가린 적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 배당의 무작위성은 재판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영향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해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위헌 시비가 불거진 핵심 이유였다. 그래서 과거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기 전에 개헌 과정 중 헌법 부칙에 그 근거를 규정했다. 헌법 부칙은 헌법 본문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헌 시비가 불거질 일은 없었다. 피해 가는 위헌 시비 하지만 위헌 시비를 피하려고 제시한 ‘내란 전담재판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기존 재판부 배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사법부는 이미 무작위 배당의 예외를 운용하고 있다. ▲특허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역별 가정법원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원이 따로 설치돼있는 것도 무작위 배당의 예외다. 또 각급 법원은 이미 지식 재산·환경·의료 등 특정 전문 분야를 전담할 재판부를 분류한다. 법원장 재량에 따라,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특정 사건은 ‘적시 처리 필요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특정 재판부에 배당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추진한다. 기소된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재판과 사실 관계·쟁점·피고인이 같으면,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에 배당한다. 물론 민주당이 거둘 수 있는 실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민주당이 ‘특별’을 ‘전담’으로 바꿔가면서도 서둘러 개정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재판부는 내란·외환 사건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침대 축구하듯 질질 끌었다”며 “조 대법원장은 경고·조치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보다 못한 입법부가 나서기 전에 사법부가 진작 내란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면, 지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이 분통 터지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주장 중 핵심 단어는 ‘조희대’와 ‘지귀연’이다.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할 당시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지난 9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 부장판사를 지칭해 “재판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인사들을 전보·징계한다면, 굳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위한 입법 조치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 도중 “조희대 사법부는 특검 수사 훼방꾼이 됐다”며 “조 대법원장이 지휘하는 대법원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에 동조한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일부를 사실상 박탈하고, 지 부장판사를 내란 관련 재판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상당한 실익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판부 배당에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힘 실어준 진짜 이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인 지난 2018년 4월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설치됐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이를 일컬어 “지나치게 민주당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설치 직후 첫 의장으로 선출됐던 최기상 당시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지난 9월 민주당이 주장한 의제 ‘대법관 증원론’을 포함한 상고심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사법부는 대법관 증원안을 경청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공개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일컬어 “민주당에 힘을 설어주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한 게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제기됐다. 대법원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지난 9월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조 대법원장 사퇴 권고 등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예규 제정은 반격”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는 “내란 전담재판부를 줄곧 반대하다가 갑자기 예규 제정을 밝힌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외에도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꿀 만한 사법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대해선 “민주당의 공세를 적절한 선에서 수용해 더 큰 공세에 대비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가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사법개혁안 통과 시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으로선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꾸려는 민주당의 시도를 보면서 검찰이 해체되는 과정을 되새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법개혁안 자체가 사실상 ‘기존 법원 해체’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금씩 권한 잃다 해체 결정 검 종착역은 헌재 최고법원 등극? 민주당 등 범여권이 검찰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분리해 완수했던 검찰 해체에 대해선 “헌법은 검찰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검찰총장의 존재를 규정했다”면서 위헌 논란을 제기하는 반대 측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범여권은 이를 강행했다. 큰 틀에서 보면, 검찰은 ▲특별검사제도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분리 등 과정을 거쳐 해체됐다. 최초의 특별검사(이하 특검)는 지난 1999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과 한국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진행됐던 최병모 특검이었다. 특검이 성립됐던 배경은 “검찰이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회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한나라당은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흐름을 타고 강하게 밀어붙여 특검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별 특검법은 총 16개가 통과됐고, 상설 특검은 6회 추진됐다. 검찰로서는 1999년 최병모 특검 설치가 수사권·기소권 독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특검이 성립됐다는 것은 검찰에 대한 각계의 불신을 상징하는 중요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검찰을 노리는 다음 단계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최초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지난 2011년 진행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법경찰관이 검사의 수사 지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지휘 건의 제도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안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해 의결했다. 지난 2016년엔 ▲진경준 게이트 ▲정운호 게이트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연이어 발생해 검찰의 신뢰도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장기간 논의된 검경 수사권 논의로 연결된다. 공수처도 설치됐다. 민주당 집권 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강하게 기억하는 지지자들의 비원을 외면하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검찰은 서서히 권한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지난 9월에 이르러 검찰은 내년부터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갈라질 운명에 처했다. 특히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로 옮겨진다. 서서히 권한을 빼앗기다가 끝내 해체를 앞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안을 시도하고 있다. 범여권이 사법개혁안을 모두 통과시킨다면, 사법부로서는 “검찰에 이어 사법부도 한순간에 와해된다”고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순간에 와해된다 법원행정처가 없어지면 대법원장의 권한이 줄어든다. 법 왜곡죄가 도입되면, 판사의 재판도 법적 처벌 범위 안에 포함될 위험에 노출된다. 대법관이 늘어나 대법관의 권위·희소 가치가 줄어든 후 재판은 헌법소원 제기 범위 안에 포함된다. 최종 종착지는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을 제친 후 최상위 사법기관으로 규정될 순간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 24일은 사법부가 느낄 법한 공포가 처음 피부에 와닿은 날이었을 수도 있다. 새해엔 민주당과 사법부의 전쟁이 더욱 거칠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