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떨어진 IT거성 스티브 잡스 애플 전 CEO

글로벌 IT업계 큰 별, 전설 속으로 사라지다

[일요시사=송응철 기자] 글로벌 IT업계의 큰 별,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등졌다. 애플 CEO에서 물러난 지 불과 40여일 만이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세계는 비통에 잠겼다. 각계각층의 조문행렬이 줄을 이었다.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살면서도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전진하면서(Stay Hungry. Stay Foolish) 항상 자신의 신념에 따라 치열한 삶을 살다 떠난 잡스. 그가 걸어온 굴곡진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미혼 동거 커플 사이에서 태어나 1주일 만에 입양
비행청소년→대학 중퇴→애플 창업→IT업계 큰 별


스티브 잡스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원생 동거 커플인 미국인 어머니와 시리아계의 아버지 압둘파타 존 잔달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주일 후 학교를 다니고 있던 그의 어머니에 의해 캘리포니아 주 산타클라라의 잡스 부부에게 입양됐다.

잡스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를 자주 빼 먹는 비행청소년이었다. 담임선생님이 돈과 사탕으로 구슬려 겨우 학교생활을 했다. 그런 잡스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 건 히스키트라는 아마추어 전자공학 키트를 얻은 순간이었다. 이 덕분에 잡스는 어려서부터 전자제품의 작동원리를 익히게 됐다.

대학교 중퇴 후
18개월 간 청강

197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잡스는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위치한 리드대학교에 진학해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1학기만 수강한 후 중퇴했다. 부모님들이 비싼 학비를 내주는 게 부담스러워서였다. 하지만 중퇴 후에도 잡스는 18개월 동안 학교에 머물면서 여러 강좌를 들었다. 특히 글자를 다루는 시각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수업은 이후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개발하면서 수려한 글자체를 만들어 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한다.

대학을 중퇴한 직후에는 컴퓨터게임회사인 아타리에 취직했지만, 사실상 전자공학이나 컴퓨터에 대한 그의 지식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탁월한 직관을 지닌 몽상가였고, ‘잔머리 굴리기’에 능숙한 수완가였으며, 이런 성격은 훗날 그의 성공과 실패 모두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잡스는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과 동업해 애플 컴퓨터를 설립했다. 여기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애플1을 공개했다. 애플1은 모니터도 없고 디자인도 투박했으나 의외로 큰 반응을 보이며 판매에 성공했다.

이어 출시한 ‘애플2’는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일종의 비싼 장난감 정도로만 여겨지던 PC의 위상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며 ‘애플신화’를 일궈냈다. 창립 4년 뒤인 1980년, 잡스는 PC 100만대 판매라는 위업을 달성하며 단숨에 거부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1981년에 IBM 사에서 ‘PC(Personal Computer)’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애플2의 독주가 위협받기 시작했다. IBM PC 시리즈의 최대 특징은 바로 완전한 공개형 아키텍처(Architecture: 시스템 전반의 구조 및 설계방식)를 내세웠다는 점이다. 때문에 IBM 외의 제조사에서도 이와 완전히 호환되는 PC 본체 및 주변기기, 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설계, 생산할 수 있었다. 애플2도 호환 기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애플에서 저작권을 상당히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플2 호환 기종의 대부분은 비공식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이런 애플2의 호환 기종들은 법적, 성능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1982년 새해에 잡스는 20대의 거부로 <타임>지 표지에 등장하며 명성이 절정에 달했지만, ‘사과’는 속부터 곪아가고 있었다. 물론 애플의 핵심은 잡스와 워즈였지만,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는 외부 자본과 인력이 필요했으며 그로 인해 여러 가지 갈등도 불가피했다. 잡스의 성공 요인이었던 특유의 오만과 고집은 이제 내실을 기해야 하는 애플에는 오히려 부담이 됐다.

애플2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매출은 점차 떨어졌다. 야심작 매킨토시를 내놓았지만, 당시에는 구매자의 요구를 파악하기보다는 그저 외양에만 치중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결국 1983년에 애플은 PC 시장에서 IBM에게 추월당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 권력다툼으로 인해 축출 위기를 맞은 잡스는 1985년에 이르러 애플을 떠난다. 잡스는 넥스트(NeXT)라는 회사를 설립해 새로운 PC를 내놓지만, 개인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참담한 실패를 맛보게 된다. 바로 그때, 오래 전부터 잡스의 소유였지만 이렇다 할 실적을 내지 못했던 컴퓨터 그래픽 업체 픽사(Pixar)가 디즈니와 제휴해 만든 <토이 스토리>가 대박을 터트린다. 연이은 픽사 제작 애니메이션의 히트 행진에 잡스는 드디어 회생의 발판을 마련했다.

잡스 떠난 애플
급격한 내리막길

반면 잡스가 떠난 애플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급기야 1997년 적자가 18억달러에 달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게 됐다. 결국 애플 이사회는 잡스에게 손을 내밀고, 잡스는 1997년 ‘임시 CEO’로 애플에 복귀했다.

굴욕의 퇴진을 당한 지 13년 만에 ‘왕의 귀환’을 이룬 잡스는 이듬해인 1998년 내놓은 아이맥이 히트를 치면서 적자에 시달리던 회사를 흑자로 돌려세웠다. 그리고 2000년 1월부터 잡스는 정식 CEO가 됐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애플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2001년 아이팟 출시가 시작이었다. 아이팟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사람들이 음악을 즐기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이팟은 세계적인 열풍과 함께 잡스를 다시 한 번 ‘성공 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줬다. 이와 같은 잡스의 업적과 영향력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했다. 일부 팬들은 잡스를 예수에 빗대어 추켜세우기도 했다.

1985년 내부 권력다툼으로 축출…다른 회사 창업
13년 만에 복귀해 전성기 이끌다 건강에 이상신호

성공에 취해 있을 당시 잡스에게 예기치 않은 비보가 날아들었다. 2003년 췌장암 선고를 받은 것. 다음해인 2004년에는 췌장암 수술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고 계속 악화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가운데 애플 측은 주가하락 등을 이유로 건강 이상설을 부인해왔다.

다행히 잡스는 2005년 췌장암을 극복했음을 알리며 화려하게 부활했고, 2007년에는 아이폰을 내놓으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잡스는 2008년 6월 아이폰3G 공개 행사 당시 수척해진 외모 때문에 와병설이 나돌기 시작했고, 그해 10월에는 애플 연례행사에 불참하면서 이 같은 의혹에 불을 지폈다.

아니나 다를까 잡스는 2009년 6월 간 이식 수술을 위해 두 번째 병가를 냈다. 호르몬 이상으로 체중 또한 지속적으로 줄어 2009년부터 호르몬 치료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건강 이상설에 따라서 주가가 무려 6%나 등락했다.

그해 9월 잡스는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치고 돌아오며 또다시 부활을 알렸다. 곧바로 아이패드를 선보이며 화려하게 컴백했다. 2010년 4월 발매한 아이패드는 연말까지 1000만대 이상 팔렸고, 아이폰4 역시 공급부족에 허덕일 정도로 높은 인기를 끌며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전진”

하지만 2011년 1월 잡스는 건강이 다시 악화돼 병가를 냈다. 이에 따라 애플의 주가는 6.5% 급락했다. 건강에 대한 우려가 나오던 가운데 잡스는 백악관에서 만찬을 가졌고 사진도 공개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이후 파파라치가 찍은 잡스의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이전보다 훨씬 수척해진 모습이어서 췌장암 악화로 인한 6주 시한부설이 사실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던 2011년 3월, 아이패드2를 발표하기 위해서 잡스가 모습을 나타냈다. 잡스는 언론에 보도된 것보다는 건강한 모습을 보여 경영에 문제가 없음을 입증했다. 하지만 잡스가 연단에 선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잡스는 다시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면서 지난 8월24일 CEO 자리를 후계자 팀 쿡에게 넘기며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불과 40여일 뒤인 지난 5일 영면에 들었다.

잡스는 성공과 좌절이 교차하는 ‘롤로코스터’와 같은 인생을 살면서도 스탠퍼드대 연설 말미에 밝혔듯이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전진하면서(Stay Hungry. Stay Foolish)” 항상 자신의 신념에 따라 치열한 삶을 살다 떠났다. 이 같은 삶 자체야말로 스티브 잡스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 아닐까.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회 문턱을 넘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이 사법부를 강타했다. 검찰은 1999년 특별검사제 도입 이후 권한을 조금씩 잃다가 올해 해체가 결정됐다. 검찰이 26년 전 느끼다가 현실이 된 불안을 이젠 사법부가 느낄 차례일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범여권이 지난 24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내란 사건만 맡는 전담재판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취지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다. 특별재판부 영장전담 법관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논평을 통해 ‘24일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날 법안 처리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박 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기자 간담회에서도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예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원래 처리하려던 법안은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법’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됐다면, 12·3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맡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고, 영장 심사를 맡을 특별영장 전담 법관이 따로 배정됐을 것이다. 이들은 국회·판사회의·대한변호사협회가 3명씩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규모의 추천위원회의 2배수 추천과 대법원장의 임명을 거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상고심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대법관은 모두 제척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에 대해선 각계에서 위헌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지난 16일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명칭도 특별재판부에서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 전담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장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 외부 인사를 제외한 후 법관으로만 구성될 예정이다. 추천위원회에 들어갈 법관 중엔 각급 판사회의·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포함된다. 전담재판부에 소속될 법관은 추천위원회·대법관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등 12·3 비상계엄 주요 연루자들은 이미 형사재판 제1심을 받고 있다. 전담재판부는 항소심부터 맡을 예정이다. 대법원은 민주당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대법관 행정회의를 열어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 및 심리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기로 했다. 여기엔 “형법상 내란·외환죄와 군형법상 반란죄 사건을 전담해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대법원이 규정하는 전담재판부는 무작위 배당을 거쳐 사건을 배당받을 재판부가 지정되는 방식이다. 전담재판부로 지정된 재판부가 원래 맡던 재판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된다. 예규엔 “해당 재판부는 이후 내란·외환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는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박 대변인은 “사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늦게 했느냐”며 “왜 그동안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의 입법권을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란 전담재판부 신설이 갖는 ‘진짜 함의’ 대법원 예규 제정…반격 혹은 타협안 제시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 중 “대법원이 헐레벌떡 자체 안이라고 내놨다”며 “더 일찍 해야 하지 않았느냐. ‘조희대 사법부’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국내 헌정사에서 특별재판부는 단 2회만 설치됐다. 제헌헌법 부칙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했다. 반민특위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 등 9명으로 구성됐고,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인 6명 ▲사회 저명 인사 5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국회가 선출했다. 두 번째 특별재판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개정된 제4차 개정 헌법을 근거로 설치됐다. 당시 개정 헌법엔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 관련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취지의 부칙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부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을 거쳐 설치됐다. 민주당조차 ‘특별재판부’를 ‘전담재판부’로 수위를 낮춰 처리했다는 이유로 내란 특별재판부에 대해 불거진 위헌 시비를 거론한다. 법원은 ‘무작위 전산 재판 배당’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재판부에 특정 재판을 배당한다”는 취지의 특별재판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위헌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관련 합헌·위헌 여부를 가린 적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 배당의 무작위성은 재판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영향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해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위헌 시비가 불거진 핵심 이유였다. 그래서 과거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기 전에 개헌 과정 중 헌법 부칙에 그 근거를 규정했다. 헌법 부칙은 헌법 본문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헌 시비가 불거질 일은 없었다. 피해 가는 위헌 시비 하지만 위헌 시비를 피하려고 제시한 ‘내란 전담재판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기존 재판부 배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사법부는 이미 무작위 배당의 예외를 운용하고 있다. ▲특허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역별 가정법원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원이 따로 설치돼있는 것도 무작위 배당의 예외다. 또 각급 법원은 이미 지식 재산·환경·의료 등 특정 전문 분야를 전담할 재판부를 분류한다. 법원장 재량에 따라,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특정 사건은 ‘적시 처리 필요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특정 재판부에 배당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추진한다. 기소된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재판과 사실 관계·쟁점·피고인이 같으면,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에 배당한다. 물론 민주당이 거둘 수 있는 실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민주당이 ‘특별’을 ‘전담’으로 바꿔가면서도 서둘러 개정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재판부는 내란·외환 사건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침대 축구하듯 질질 끌었다”며 “조 대법원장은 경고·조치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보다 못한 입법부가 나서기 전에 사법부가 진작 내란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면, 지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이 분통 터지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주장 중 핵심 단어는 ‘조희대’와 ‘지귀연’이다.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할 당시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지난 9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 부장판사를 지칭해 “재판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인사들을 전보·징계한다면, 굳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위한 입법 조치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 도중 “조희대 사법부는 특검 수사 훼방꾼이 됐다”며 “조 대법원장이 지휘하는 대법원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에 동조한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일부를 사실상 박탈하고, 지 부장판사를 내란 관련 재판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상당한 실익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판부 배당에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힘 실어준 진짜 이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인 지난 2018년 4월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설치됐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이를 일컬어 “지나치게 민주당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설치 직후 첫 의장으로 선출됐던 최기상 당시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지난 9월 민주당이 주장한 의제 ‘대법관 증원론’을 포함한 상고심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사법부는 대법관 증원안을 경청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공개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일컬어 “민주당에 힘을 설어주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한 게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제기됐다. 대법원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지난 9월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조 대법원장 사퇴 권고 등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예규 제정은 반격”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는 “내란 전담재판부를 줄곧 반대하다가 갑자기 예규 제정을 밝힌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외에도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꿀 만한 사법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대해선 “민주당의 공세를 적절한 선에서 수용해 더 큰 공세에 대비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가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사법개혁안 통과 시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으로선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꾸려는 민주당의 시도를 보면서 검찰이 해체되는 과정을 되새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법개혁안 자체가 사실상 ‘기존 법원 해체’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금씩 권한 잃다 해체 결정 검 종착역은 헌재 최고법원 등극? 민주당 등 범여권이 검찰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분리해 완수했던 검찰 해체에 대해선 “헌법은 검찰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검찰총장의 존재를 규정했다”면서 위헌 논란을 제기하는 반대 측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범여권은 이를 강행했다. 큰 틀에서 보면, 검찰은 ▲특별검사제도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분리 등 과정을 거쳐 해체됐다. 최초의 특별검사(이하 특검)는 지난 1999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과 한국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진행됐던 최병모 특검이었다. 특검이 성립됐던 배경은 “검찰이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회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한나라당은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흐름을 타고 강하게 밀어붙여 특검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별 특검법은 총 16개가 통과됐고, 상설 특검은 6회 추진됐다. 검찰로서는 1999년 최병모 특검 설치가 수사권·기소권 독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특검이 성립됐다는 것은 검찰에 대한 각계의 불신을 상징하는 중요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검찰을 노리는 다음 단계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최초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지난 2011년 진행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법경찰관이 검사의 수사 지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지휘 건의 제도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안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해 의결했다. 지난 2016년엔 ▲진경준 게이트 ▲정운호 게이트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연이어 발생해 검찰의 신뢰도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장기간 논의된 검경 수사권 논의로 연결된다. 공수처도 설치됐다. 민주당 집권 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강하게 기억하는 지지자들의 비원을 외면하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검찰은 서서히 권한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지난 9월에 이르러 검찰은 내년부터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갈라질 운명에 처했다. 특히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로 옮겨진다. 서서히 권한을 빼앗기다가 끝내 해체를 앞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안을 시도하고 있다. 범여권이 사법개혁안을 모두 통과시킨다면, 사법부로서는 “검찰에 이어 사법부도 한순간에 와해된다”고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순간에 와해된다 법원행정처가 없어지면 대법원장의 권한이 줄어든다. 법 왜곡죄가 도입되면, 판사의 재판도 법적 처벌 범위 안에 포함될 위험에 노출된다. 대법관이 늘어나 대법관의 권위·희소 가치가 줄어든 후 재판은 헌법소원 제기 범위 안에 포함된다. 최종 종착지는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을 제친 후 최상위 사법기관으로 규정될 순간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 24일은 사법부가 느낄 법한 공포가 처음 피부에 와닿은 날이었을 수도 있다. 새해엔 민주당과 사법부의 전쟁이 더욱 거칠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