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사르 습지 ③고창 운곡습지

자연의 무한 회복 탄력성성

자연은 스스로 피어난다. 고창 운곡습지에 필요한 건 무관심이었다. 사람 발길이 끊기고 30여년이 지난 2011년 4월, 버려진 경작지는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다. 꽉 막힌 대지에 물이 스며들고 생태가 살아났다. 호젓한 숲길과 원시 비경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총 860여종에 이르는 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 보고다. 생태관광지역으로 선정된 고창 운곡습지는 자연의 무한 회복 탄력성을 보여주는 우수 사례다.

재생을 넘어선 상생의 손길로 다시 사람들을 초대하는 운곡습지. 그 운명은 1980년대에 바뀌었다. 1981년 전남 영광에 한빛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다. 발전용 냉각수를 공급하기 위한 운곡댐 건설이 그 시작이다. 고창군 아산면을 관통해 지나가는 주진천을 댐으로 막아 운곡저수지가 생기면서, 그곳에 자리한 운곡리와 용계리가 수몰됐다. 물에 잠기거나 경작이 금지돼 삶터를 잃은 9개 마을, 158세대 360명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댐 건설로 버려져

습지를 개간한 계단식 논도 사라졌다. 30여년이 흘러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폐경지는 놀라운 변화를 맞이한다. 사람은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잃었지만, 인적이 끊기니 경작으로 훼손된 습지는 원시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운곡습지의 복원은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른다. 습지 인근에 분포한 고창 고인돌 442기가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면서, 무분별한 개발을 막을 두 번째 계기가 마련됐다.

물을 머금은 운곡 땅은 2009년 고창군 한웅재 부군수가 발견해 세상에 드러났다. 30년간 환경 담당 공무원으로 일한 덕분에 운곡습지의 변화를 한눈에 알아차렸다. 갓 태어난 아이의 잇몸 아래 손끝으로 만져지는 치근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제 운곡습지 탐방에 나서보자. 탐방안내소를 기점으로 출발하는데, 고인돌유적지 탐방안내소에서 1·3코스가, 친환경주차장에서 2·4코스가 시작된다. 1코스(3.6km, 왕복 1시간40분 소요)는 탐방안내소에서 운곡습지생태연못, 생태둠벙을 거쳐 운곡람사르습지생태공원까지 이어진다. 거리가 가장 짧아 일반적으로 선호하는 코스다. 

초입에 있는 고창고인돌군은 모르면 지나치기 쉽다. 고창 지역의 고인돌은 185개 군집에 1600여기가 확인되는데, 운곡습지 1코스 초입의 오베이골(오방골의 전라도 사투리) 주변은 고인돌 최대 집중 분포지다. 너른 들판에 바둑판식 53기, 탁자식과 바둑판식 중간 형태인 지상석곽식 20기 등 고인돌 128기가 흩어져 있다.


본격적인 습지 탐방은 습지 보호용 신발 털이개에 신발을 털면서 시작된다. 혹여 신발에 묻은 생태 교란 외래종 식물이 습지 안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습지 탐방로는 한 사람이 지나갈 너비의 나무 데크로 조성됐다. 팔을 양쪽으로 조금만 뻗어도 난간이 잡힐 만한 거리다. 발판은 일정한 간격으로 벌어져 데크 아래 식물이 햇볕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고 인위적 간섭을 막기 위함인데, 다시 찾아온 자연과 상생하기 위한 노력이다.

타박타박 걷다 보면 지천으로 깔린 고마리가 눈에 띈다. 자연환경해설사는 “물이 가득한 습지를 상상했는데 메마른 땅만 보인다는 탐방객이 많아요. 실제로 들어가면 물이 허리까지 차오르는 습지입니다”라고 전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어리연꽃, 낙지다리, 병꽃나무, 익모초, 노루오줌 등 푸른 숲으로 통칭할 수 없는 ‘생명의 세계’가 바로 운곡습지다.

사람 발길 끊기고 30여년 자연 습지로 탄생
860여종 이르는 생물 서식, 생태관광지역 선정

길잡이 역할을 하는 안내 표지판도 재밌다. 삵, 담비, 수달, 붉은배새매, 팔색조 등 운곡습지에 서식하는 동물의 모습을 나무 표지판에 새겼다. 생태둠벙으로 가는 길목에서 마을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외양간으로 보이는 벽돌 위로 무성한 수풀이 세월을 말해준다. 호젓한 걸음에 뻐꾸기와 꾀꼬리, 직박구리 소리가 박자를 맞춘다.

2코스는 운곡저수지를 따라 한 바퀴 둘러보는 구간으로, 2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저수지 동쪽과 서쪽 조류관찰대에서 철새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3코스는 회암봉과 옥녀봉, 호암봉을 거쳐 운곡서원으로 이어진다. 운곡서원에서 탐방안내소까지 도보로 빠져나와야 하기 때문에 5시간 정도 걸린다.
현재 네 코스가 모두 만나는 지점에 운곡람사르습지생태공원이 조성 중이다. 생태공원에서 오른쪽으로 5분 정도 걸으면 동양 최대 고인돌을 만난다. 덮개돌 둘레 16m, 높이 5m, 무게 300t으로 추청되는 고인돌 앞에 서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는 동안 보지 못한 꽃을 보았다. 바람은 흙이 머금은 물길을 따라 땅속으로도 다니는 듯했다. 어쩌면 운곡습지는 사람이 빼앗긴 땅이 아니라, 자연이 내민 화해의 손길인지도 모른다.

인근 고창고인돌박물관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과 고인돌을 이해하는 장이다. 청동기시대 각종 유물과 생활상을 알기 쉽게 전시해 고인돌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무엇보다 실제 유적이 지척에 있어 좋다. 박물관 앞에서 모로모로열차를 타면 드넓은 고인돌 유적과 마주한다.

고창고인돌박물관에서 5.7km 떨어진 고창읍성도 함께 둘러보자. 1453년 축조된 고창읍성(사적 145호)은 둘레 약 1.7km다. 봄날 철쭉 길과 답성 놀이 등으로 알려졌지만, 소나무와 어우러진 맹종죽을 놓칠 수 없다. 구불구불하게 자란 소나무 가지가 맹종죽을 껴안은 듯한 형상이 신비롭다. 운곡습지에서 시작된 고창 여행은 ‘상생’이란 단어가 떠오르게 한다.


‘누구나 책, 누구나 도서관’이라는 모토로 폐교가 살아 있는 책마을로 변신한 책마을해리에 가면 사람들의 따뜻한 정서가 느껴진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책의 저자가 되어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활자 꾸미기, 편집하기, 전통 방식 제본 등 기획부터 제작까지 책에 관한 캠프가 열린다. ‘누구나’에 방점이 찍힌 이곳은 아이부터 80세 노인까지 그림을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더욱이 고창을 여행하며 새롭게 만난 생태와 역사, 문화, 예술 등이 책의 소재가 되어 의미 깊다.

고창고인돌박물관

인근 상하농원은 건강한 재료로 먹거리를 직접 만들고 체험하고 맛보는 공간이다. 깨끗한 환경에서 방목한 젖소를 만나고, 동물과 교감하는 동물농장에서 온 가족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좋다. 햄·과일·빵·발효 공방에서 각각의 제품을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여행 정보>

당일 여행 고창고인돌박물관→운곡습지→책마을해리→상하농원

1박2일 여행 코스
첫째 날: 고창읍성→고창판소리박물관→고창군립미술관→고창고인돌박물관→운곡습지
둘째 날: 학원농장→책마을해리→상하농원→동호해수욕장

관련 웹 사이트 주소
- 고창군 문화관광 http://culture.gochang.go.kr
- 고창군 운곡람사르습지 www.gochang.go.kr/ungok/index.gochang
- 고창고인돌박물관 www.gcdolmen.go.kr
- 책마을해리 http://blog.naver.com/pbvillage
- 상하농원 www.sanghafarm.co.kr 

문의 전화
- 운곡습지탐방안내소 063)564-7076
- 고창고인돌박물관 063)560-8666
- 고창읍성 063)560-8067
- 책마을해리 070-4175-0914
- 상하농원 1522-3698

대중교통 정보
버스: 서울-고창,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하루 16회(07:05~19:00) 운행, 약 3시간10분 소요. 고창터미널 정류장에서 고창-죽림 농어촌버스, 고창고인돌박물관 정류장 하차, 약 30분 소요. 
*문의: 센트럴시티터미널 02)6282-0114 고속버스통합예매 www.kobus.co.kr 고창공용버스터미널 063)563-3388 

자가운전
서해안고속도로→고창 IC에서 아산·선운산 방면 오른쪽→동서대로→고인돌공원길→고창고인돌박물관 주차장, 도보 10분

숙박 정보
- 힐링카운티: 고창읍 석정2로, 063)560-7300, www.huespapension.com, 
- 선운산관광호텔: 아산면 중촌길, 063)561-3377, www.sushotel.com
- 책마을해리 북스테이: 해리면 월봉성산길, 070-4175-0914, http://blog.naver.com/pbvillage
- 고창읍성한옥마을: 고창읍 동리로, 063)563-9977, http://woko.kr/hosting/index.asp?pno=108

식당 정보
- 조양관(한정식): 고창읍 천변남로, 063)564-2026
- 청림정금자할매집(장어소금구이): 아산면 인천강서길, 063)564-1406
- 천변밥집(생선구이): 고창읍 천변남로, 063)561-1824


이색 체험
- 시티투어버스 ‘팜팜시골버스’ 시범 운행: 6월23일·7월28일
- 모니터링 투어(8월 본격 운영). 참가비 1만 원(체험·식사·교통비 포함). 고창읍성, 선운사, 운곡습지, 학원농장, 고인돌들꽃학습원 등 당일 여행

주변 볼거리
고창판소리박물관, 선운산도립공원, 동호해수욕장, 학원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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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