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계별로 본 북한 미사일 60년 개발사

김정은 깔봤다간 큰 코 다친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북한의 미사일 개발 역사는 60여년에 달할 정도로 오래됐다. 이제는 대기권을 재진입하는 중·장거리 탄도미사일뿐 아니라 가장 고난도인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미사일과 핵기술 분야서 강성대국을 눈앞에 둔 셈이다. 과연 북한의 미사일 개발은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돼 왔는지 알아보도록 한다.
 

북한의 미사일 개발 역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이 처음 탄도미사일 보유에 나서게 된 계기는 주한미군의 전술 핵미사일 배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북한은 이에 대응하고자 1960년대 말 옛 소련으로부터 지대함미사일 및 FROG-5/7 미사일을 획득하고 1970년경에는 중국으로부터 지대함미사일, 지대공미사일 및 기술지원을 제공받았다. 

1960년대부터…
자체개발 시작

북한은 1960년대 중반에 소련의 탄도미사일을 획득하려고 했었지만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시초프’(Nikita S. Khrushchyov)는 스탈린과 같은 개인숭배체제를 강하게 비판하던 수정주의자 입장이었기 때문에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해 나가던 김일성의 요청을 거절한 바 있다. 

이후 1971년 북한은 탄도미사일 및 다른 무기체계를 획득, 개발 및 생산할 수 있도록 중국과 합의서에 서명했다.

당시 북한은 러시아와 같은 미사일 기술 선진국으로부터 하드웨어 및 기술의 이전이 필요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미사일 기술이전에 부정적이었다. 결국 북한은 역설계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위해 소련제 스커드-B 미사일을 획득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이 한창이던 이집트에 MIG-21 전투기 1개 중대를 파병해주고 그 대가로 이집트로부터 스커드-B 미사일과 발사차량, 정비 매뉴얼과 운용교범까지 넘겨받는 데 성공한 것. 

당시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소련의 충분치 않은 원조에 불만을 가지고 파견된 소련 기술자들을 추방하는 등 외교적으로 삐걱거리던 시기였기 때문에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을 허락 없이 북한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1984년경에 북한은 스커드-B 미사일의 독자개발 버전인 화성 5 미사일을 생산하고 비행시험을 수행했다. 1985년에는 미사일 개발 및 생산을 위해 재정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 이란과 합의문에 서명했고 향후 이란은 북한의 미사일을 구매했다. 

당시 이라크와 전쟁을 수행했던 이란에게 탄도미사일을 판매했던 북한은 외화를 벌고 미사일 생산의 경제성을 증진시키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화성 5 미사일의 대량생산 이후에 바로 북한은 화성 6(스커드 C) 미사일의 개발을 시작했다. 이후 1987년과 1989년경에 노동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됐다. 이러한 급격한 개발은 놀라운 일이었으며 역사적으로 작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구소련 기술이전 거부
이집트에서 우회 입수

1980년대 후반에 북한은 중거리탄도미사일(MRBM; Medium Range Ballistic Missile) 개발을 시작했다. 1990∼1991년경에 화성 6 미사일의 양산이 시작됐고 첫 번째의 노동미사일 시제품이 제작됐다. 다른 한편으로 북한은 중동 국가들에 기술이전 및 완제품 스커드 공장 등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1990년 5월에 미국의 정찰위성은 무수단리 미사일 발사장의 발사대에 장착된 노동미사일을 탐지했다. 그러나 당시 영상에선 발사대에 검게 탄 자국만 보였기 때문에 시험의 실패로 추정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93년 5월 말, 북한의 유일한 독자적인 노동미사일 비행시험을 진행했다. 
 

지리적인 이유로 노동미사일의 완전한 사거리 시험을 할 수 없었던 북한이었지만 1995년부터 노동미사일을 전력화 배치하기도 했다.

북한 미사일이 전 세계에 각인된 것은 ‘대포동’ 시리즈부터다. 1998년 8월31일 북한은 노동미사일보다 사정거리가 훨씬 길고 한 차원 높은 대포동1호를 일본 상공을 건너 태평양을 향해 발사하며 대륙간탄도탄(ICBM)의 발판을 마련했다. 

대포동미사일은 노동미사일과 스커드미사일을 조합한 3단 로켓으로 3단계 로켓은 첨단기술인 고체연료 로켓으로 제작됐다. 

미사일은 약 1600km를 날아갔지만 최종 단계의 3단계 로켓을 우주궤도에 진입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미국의 충격은 컸다. 

그동안 북한 미사일 수준에 대해 ‘별 것 아니다’는 인식을 가졌던 미국은 북한의 기술력이 상당하다는 데 경각심을 느꼈고 미사일 잔해 일부가 베링해 알래스카 앞바다까지 날아가면서 미국과 일본을 경악시켰다.

전 세계에 각인
‘대포동’ 시리즈

북한은 2006년 7월 대포동1호를 개량한 대포동2호를 시험발사했다. 그러나 1단 추진체가 분리되기 전 42초 만에 기술적 결함으로 공중서 폭발했다. 대포동 미사일의 사정거리는 6700km로 미국 알래스카를 직접 타격할 수 있는 성능으로 추정됐다. 

북한 외무상은 이 발사를 자체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정규적인 군사훈련이고 북한이 미사일 발사훈련을 지속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2006년 7월15일 UN 안전보장이사회(UN Security Council)는 만장일치로 결의안 1695를 통과시켰고 북한이 미사일 관련 행위를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UN 회원국은 미사일 관련 소재 및 기술을 북한으로 이전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2000년대 후반 들어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 간격은 좁혀진다. 2009년 4월5일 북한은 은하 2호 위성발사체를 발사했다. 이는 대포동 2 미사일을 변경한 장거리 로켓이었다. 비록 북한 언론매체가 위성이 궤도로 발사됐다고 주장했지만 누구도 우주궤도서 북한의 위성 물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3단 로켓의 발사는 1단 로켓이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수역에 낙하되면서 기술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보였다. 탑재체와 함께 나머지 단은 태평양 해역으로 추락한 것으로 추정됐다.


2012년 4월12일 북한은 김일성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은하 3호 로켓을 이용해 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발사를 시도했다. 발사는 1단 엔진의 연소 종료시점에서 실패해 로켓 추진체는 서해 앞바다로 추락했다. 

미사일 기술의 이중용도 때문에 미국과 한국은 이 발사를 장거리미사일을 시험하지 않는다는 UN 결의안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식량 원조를 중단했다. 

3일 후 북한은 평양 시내서 김일성 탄생 100주기를 기념해 군사퍼레이드를 했으며 여기서 KN-08이라는 이동식 ICBM의 목업을 선보였다. KN-08 이동식 ICBM은 6대의 중국제 8축 트럭인 이동식 미사일발사대(TEL)에 실려 전시됐다.

2012년 12월에 북한은 서해발사장서 은하 3호 장거리로켓을 재발사해 성공적으로 위성을 궤도에 올려놨다. 북한이 이 로켓을 우주발사체로 주장했지만 기술은 장거리로켓과 매우 유사했다. 

정치적 목적 위해
여러 가지 실험

핵탄두를 운반하기 위해서 로켓은 재진입체를 추가해야 하는데 이는 첨단기술 및 고급 소재를 필요로 하며 북한은 이러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평가했다. 


북한은 대기권 재진입에 대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2016년 3월15일 스커드 엔진으로부터 내뿜는 배기가스에 견디는 재진입체 형상의 소재 삭마 특성시험을 보여준 바 있다. 그리고 2013년 2월에는 북한이 핵탄두를 소형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북한은 2016년 4월 새로운 타입의 ICBM용 엔진 지상연소시험을 수행했다. 엔진은 옛 소련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인 R-27의 4D10 엔진과 유사한 것으로 보였다. 이 엔진은 2015년에 무려 8차례나 발사를 시도했던 무수단미사일의 엔진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수단엔진은 고에너지 추진제를 사용하고 고성능의 엔진성능을 제공한다. 
 

하지만 무수단엔진 탑재 시뮬레이션 결과 250kg의 소형 경량 탄두를 장착해도 최대사거리는 9000km 이하였다. 2015년 9월 북한은 80톤급의 고추력 대형액체로켓엔진을 개발해 지상시험을 수행했다. 1기의 80톤 엔진 및 무수단엔진 탑재 시의 시뮬레이션 결과 1만2000km 이상의 사거리를 얻을 수 있었다.

무수단미사일은 2010년 10월에 외국 언론을 초청한 군사퍼레이드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퍼레이드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노동미사일의 파생 미사일을 처음으로 공개하기도 했다. 이는 이란의 가더(Ghader)-1 미사일과 매우 유사한 삼중콘(Triconic Nose-Cone)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대포동 위성 궤도에…늘어가는 기술
ICBM에 놀란 미, 군사 대응 가능성도

2016년 전까지 단 한 차례도 무수단미사일의 시험비행을 수행한 적이 없었던 북한은 2016년 들어 연속적으로 무수단미사일 시험발사를 시도했다. 4월15일 첫 발사에 실패한 이후 13일 만인 4월28일 2∼3차 발사를 시도했다. 

5월31일에는 4차 발사를 시도했으며 6월22일 5∼6차 발사시험을 연속적으로 감행했다. 이 과정서 오직 6차 발사시험 한 차례만 성공했을 뿐이고 나머지 시도에선 모두 실패했다. 

10월15일과 20일에는 발사장소를 강원도 원산 인근서 서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평안북도 구성시서 무수단미사일의 7번째와 8번째 발사시험이 진행됐다. 전문가들은 결국 북한의 무수단미사일 시험발사가 미사일의 성능 검증보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추진한 것으로 추정됐다.

북한은 지난 5월14일 중거리 탄도미사일 ‘화성-12형(KN-17)’ 발사에 이어 지난 4일 탄도 미사일 ‘화성-14형’을 쏴 올리며 문재인정부 출범 후 6번째 미사일 도발을 감행했다. 특히 이번 ‘화성-14형’은 최소 사거리 5500㎞ 이상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분석돼 관심을 끌고 있다. 이젠 ICBM 성공을 선언하는 단계에 이른 셈이다. 

화성-14형은 거의 수직으로 발사돼 2802㎞ 상공까지 치솟았고 약 933㎞ 거리를 날아갔다. 국방부는 각도를 조절해 북한 원산 지역서 발사한다면 최소 6000㎞서 최대 1만㎞를 날아가 알래스카(5800㎞)와 하와이(7500㎞)는 물론 로스앤젤레스와 같은 미국 서부지역까지 타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이 운반과 로켓단 분리 과정을 담은 동영상을 공개하자 미국 국방부는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은 이전에 보지 못한 것”이라며 ICBM 개발에 성공했다는 북한의 주장을 대부분 인정했다. 

제프 데이비스 국방부 대변인은 지난 5일(현지시간) “미사일 사정거리가 5500km에 달할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의 미사일이 ICBM이란 뜻”이라고 밝혔다. 

데이비스 대변인은 북한이 재진입 기술을 완성했는지는 알 수 없다면서도 ICBM에 재진입체가 탑재된 것은 확인됐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이동식 평상형 트럭에 미사일을 실어 평안북도 방현 일대 공군기지로 옮겼지만 발사가 트럭서 이뤄지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이동식 발사대서 즉각 발사할 수 있는 기술이 완성되면 사전에 발사를 감지할 수 없어 한미 양국은 이 부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번에는 북한이 미사일을 다른 발사대로 옮기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돼 사전탐지가 가능했다. 

데이비스 대변인은 “북한이 아직 미사일에 핵탄두를 탑재할 기술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북한을 면밀히 지켜봤다. 북한 미사일 위협에 대응할 우리의 방어능력을 자신한다”고 덧붙였다. 

<폭스뉴스>도 국방부 관계자를 인용해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전 연료주입 단계부터 (미사일 발사 움직임을) 지켜봤다”며 “미 국방부는 역내 미사일방어(MD)시스템을 통해 북한이 발사한 ICBM을 격추하는 결정을 할 수도 있었지만 북미 지역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격추를 시도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계속되는 도발
ICBM까지 성공?

항공우주연구기관 에어로스페이스의 존 실링 연구원은 이날 북한전문매체 ‘38노스’ 기고를 통해 “우리는 당초 북한이 2020년 초쯤 ICBM 능력을 갖출 것으로 생각했었으나 북한이 가진 시간표는 이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며 “(북한이) 미국의 특정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한 위협이 되려면 1∼2년 더 개발 과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북한이 이동식 발사대서 미사일을 내려 다른 발사대를 활용한 것에 대해 “발사 시험 실패로 미사일이 폭발할 경우 값비싼 이동식 발사대가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라며 실전에서는 북한이 이동식 발사대서 즉각 발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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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