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온 미술품 뒷거래 미스터리 <추적>

공중에 붕 뜬 40억 주인 누구?

[일요시사=김성수 기자] 검찰이 ‘오리온 비자금’을 캐기 시작한지 3개월이 흐른 지금, 수사의 초점이 ‘그림’쪽에 맞춰지고 있다. 미술품으로 ‘검은돈’을 조성하지 않았냐는 의혹이다. 앞서 돈을 세탁해준 혐의로 미술계 ‘큰손’이 쇠고랑을 찬 상태. 이제 그 수사망이 ‘최종 타깃’으로 좁혀지고 있다. 막바지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검풍’이 담철곤 회장에 이어 누구를 덮칠지 시선이 쏠리고 있다.

검찰 막바지 수사 총력…‘그림매매’에 초점
청담 마크힐스 땅 매각차익 최종 수수처 타깃

국세청이 오리온그룹에 대한 세무조사 과정에서 횡령과 탈세 등의 의혹을 포착해 검찰에 고발한 지난해 8월. 그 즈음 <일요시사> 편집국으로 우편물 한통이 날아왔다. 익명의 제보였다. 그리 두껍지 않는 서류 봉투 속엔 눈을 의심할 만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재벌-미술상 이상한 관계’란 제목의 오리온그룹과 서미갤러리 간 미술품 거래 의혹이었다.

오리온-서미 거래
수사전 본지 제보

‘오리온그룹과 국내 미술시장 큰손이 운영하는 서미갤러리가 각종 미술품들을 자주 거래하고 있습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입니다. 금액은 어마어마합니다. 과연 정상적으로 거래를 했을까요. 그 의혹을 풀어줬으면 합니다.’

자신을 고위 공직자의 아내라고 밝힌 제보자는 제보 이유에 대해 “밝고 투명한 사회를 위해서”라고만 밝혔다. 그러나 제보자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근거나 증거가 없었다. 그저 그럴만한 정황만 빼곡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리온그룹에서 별다른 잡음이 들리지 않아 제보 자체를 의심케 했다. ‘부부 경영’으로 유명한 담철곤 회장과 이화경 사장이 ‘열린 경영자’ ‘클린 오너’란 그룹 안팎의 평가도 부담이었다.

<일요시사>는 우선 ‘보관 장소로 양평 별장이 의심된다’는 제보자의 힌트에 따라 취재 동선을 잡고 추적에 나섰다. 양평 별장은 오리온그룹 건설 계열사인 메가마크가 시공을 맡아 2008년 오픈한 연수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 북한강변 경사지에 위치한 연수원은 대지면적 3540㎡(약 1072평)에 지상1∼2층 규모다.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 한국건축가협회상, 한국공간디자인 우수상, 경기도건축문화상 특별상 등을 수상할 정도로 깔끔하고 세련되게 지어졌다.

설계를 담당한 T사 측은 “자유로움과 휴식을 담은 건축을 원하는 건축주의 요구에 따라 뗏목을 물에 띄워 보내는 듯한 자유로움을 건축물에 담아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T사는 2000년 서미갤러리 설계도 맡은 바 있다.

제보를 접하고 얼마 뒤 <일요시사>가 취재차 방문했을 당시 연수원의 문은 잠겨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내부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관리인으로 보이는 한 남성은 “무슨 일로 왔냐”며 경계했다. 기자 신분을 밝히고 구경 좀 할 수 있냐고 하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황급히 모습을 감췄다.

당시 오리온그룹과 서미갤러리는 미술품 의혹에 대해 강력하게 부인했다.

{40억원 어디로…}
[오리온]→[시행사]→[서미갤러리]→[?]

회사 관계자는 “무슨 근거로 그런 얘기를 하냐. 그저 소설이고 추측일 뿐”이라며 “직원들 연수원에 그림이 왜 있고, 그림 창고가 왜 있겠냐. 미술품은 없다. 서미갤러리와도 거래한 적이 없다”고 일축했다. 서미갤러리 측도 “오리온그룹과 개인적인 친분은 몰라도 거래 내역을 밝힐 순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검찰이 ‘오리온 비자금’을 뒤지기 시작했고, 다른 대기업 총수들의 사건과 달리 전례가 없을 정도로 초고속으로 수사가 진행됐다.

‘3월22일 오리온 본사 등 압수수색…5월6일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 구속…5월11일 조경민 오리온 사장 구속…5월14일 담 회장 자택 압수수색…5월23일 담 회장 소환 조사…5월26일 담 회장 구속…’

160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담 회장을 구속한 검찰의 수사는 현재 ‘그림’쪽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미술품으로 ‘검은돈’을 조성하지 않았냐는 의혹이다.

검찰은 지난 3월 오리온그룹 본사와 계열사 등을 압수수색할 당시 <일요시사>가 먼저 두드렸던 양평 연수원 등도 뒤져 미술품 창고가 있다는 사실과 여기에 수십 점의 미술품이 보관된 것을 확인했다. 이 미술품들은 그룹의 비자금 조성 창구로 활용됐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서미갤러리를 비롯해 여러 화랑에서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요시사> 확인 취재 당시 “연수원에 무슨 그림이 있냐”며 딱 잡아뗐던 오리온그룹 측은 검찰의 압수수색 사실이 알려지자 “연수원에 그림창고가 있는 것은 맞다”고 말을 바꿨다. 다만 “이 창고는 회사가 구입한 뒤 미처 전시하지 못한 미술품을 보관해둔 곳으로, 모두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구매한 것이라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검찰은 오리온그룹이 양평 창고 등에 보관 중이던 그림의 구입 경위와 출처 파악에 나섰다. 압수한 구매내역과 실제 보유현황, 거래내역 등이 일치하는지 들여다봤다. 또 담 회장의 성북동 자택도 압수수색해 고가의 미술품들을 발견, 비자금 조성에 활용됐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유통 경로를 추적했다. 동시에 오리온그룹이 주로 거래해온 서미갤러리와 홍송원 대표 집까지 뒤져 미술품 내역 등을 확보했다.

오리온 땅 판 돈
어디로 흘러갔나


홍 대표는 오리온 계열사 등 고객이 위탁판매를 맡긴 고가의 미술품들로 담보 대출을 받아 수십억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다. 위탁 미술품 중엔 오리온그룹 미디어 계열사인 미디어플렉스 소유의 미국 팝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스틸라이프’시리즈 중 한 작품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스틸라이프는 리히텐슈타인이 1970년대 주로 시도한 정물화 시리즈물로 가격은 수십억원에 이른다.

특히 검찰이 중점을 두고 수사 중인 사안은 오리온-서미갤러리간 거래 여부다. 공중에 붕 뜬 미스터리한 돈은 40억원에 이른다. 이 돈은 담 회장의 혐의엔 일단 포함되지 않았다. 담 회장은 ‘금고지기’조 사장 등에게 비자금 조성을 지시하고, 조성된 자금을 유용한 혐의로 쇠고랑을 찼다.

검찰은 담 회장 건과 별개로 미술품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수사선상에 오른 인물은 담 회장의 부인 이 사장과 국내 미술계 ‘큰손’홍 대표다. 둘의 거래관계를 밝히는 게 미술품 수사의 관건이다.

홍 대표는 이미 구속된 상태. 검찰은 홍 대표가 미술품 비자금의 실체를 규명하고 이 사장의 개입 여부 확인에 ‘핵심 고리’로 판단하고 있다.

검찰은 “홍 대표는 오리온그룹의 청담동 땅을 매각한 차익 40억6000만원을 시행업자로부터 송금 받아 미술품 판매대금인 것처럼 가짜로 꾸며 되돌려 줬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비자금 돈세탁을 도왔다는 것이다.

검찰은 오리온 비자금 ‘키맨들’수사 과정에서 비자금 수수처로 이 사장을 의심했다. 이 사장은 미술품 거래를 통한 비자금 조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의혹을 받고 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고급빌라 ‘마크힐스’부지 매매에 어떤 역할을 했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40억원은 어떻게 조성됐으며, 어디로 흘러들어간 것일까.

오리온, ‘양평창고’ 없다더니…
검찰이 뒤지자 “있다” 말 바꿔
이화경-홍송원 관계는?
모종의 ‘빅딜’ 있었나

검찰에 따르면 홍 대표는 마크힐스를 짓는 과정에서 허위·이중 매매계약으로 부풀린 40억원을 서미갤러리와 거래한 것처럼 세탁해줬다. 오리온 건설사인 메가마크는 지난해 3월 마크힐스를 완공했다. 19가구 규모의 건물 2개동으로 이뤄진 마크힐스는 분양가만 40억∼70억원에 달하는 초호화 빌라다.

오리온그룹은 2006년 7월 물류창고 부지로 쓰던 청담동 땅(1755.7㎡·약 530평)을 시행사에 매각했다. 이 과정에서 실제 금액보다 낮은 가격으로 매각하고 남은 차액이 40억원이란 게 검찰의 설명이다.

검찰이 파악한 이 땅의 실거래 가격은 209억원. 이중 169억원은 오리온 쪽에, 나머지 40억원은 미술품 구입 명목으로 홍 대표에게 송금됐다. 실제 미술품은 오가지 않았다.

검찰은 이 돈이 다시 오리온에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이화경-홍송원 둘 사이에 모종의 거래를 의심하고 있다. 홍 대표는 돈의 일부를 이 사장의 친언니 이혜경 동양그룹 부회장 등에게 보낸 것으로 드러났지만, 이 사장과의 돈거래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 없다.

오리온 땅 매매 차익을 홍 대표에게 보낸 시행업자는 검찰 조사에서 “40억원은 이 사장에게 건네줄 돈이란 얘기를 들었다”고 털어놨다고 한다. 다른 시행사 관계자도 “(40억원은) 오리온 돈”이란 취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홍 대표를 상대로 돈을 입금 받은 경위와 출처, 성격, 사용처 등 자금 흐름과 관련한 사항을 중점 조사하고 있지만, 홍 대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홍 대표는 “40억원 가운데 16억원은 정상적으로 미술품을 판매하고 받은 돈이고, 나머지 24억은 시행업체와 채권채무 관계를 정리한 것”이라며 “오리온 비자금과는 무관하다. 비자금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과의 돈거래에 대해선 “개인 간 거래일 뿐”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장도 마찬가지다. 검찰은 지난 6일 이 사장을 소환해 서미갤러리를 통해 조성된 것으로 의심되는 40억원을 집중 추궁했다. 그러나 이 사장은 “전혀 모른다. 그룹 비자금 조성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는 후문이다.

부부 함께 처벌?
관행상 한 명만?

검찰은 그동안 수사 결과를 검토한 뒤 이 사장의 처벌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담철곤-이화경 부부가 함께 처분을 받는 재계 초유의 일이 벌어질지 세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하지만 보통 부부가 비슷한 혐의일 경우 한 명은 입건하지 않거나 불구속 기소하는 것이 관행이다. 담 회장이 이미 구속됐기 때문에 이 사장은 안심(?)해도 된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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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