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정국> 쏟아지는 여론조사 ‘제대로’ 보는 법

‘지지율’ 보이는 대로 다 믿지 마세요!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그야말로 여론조사의 시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조성된 조기 대선 국면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숫자 놀음’이 한창이다. 언론을 통해 보도된 지지율에 민심도 요동치기 마련. 선거를 예측하는 도구서 어느새 선거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한 여론조사. 범람하고 있는 여론조사 물결 속에서 ‘진짜’를 가릴 수 있는 방법을 <일요시사>가 살펴봤다.

오는 5월9일이면 19대 대통령이 결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되면서 60일 안에 차기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국민들은 물론 정치권조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상황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여론조사의 범람. 쏟아지는 여론조사의 향연은 대선후보를 경마장의 경주마로 만들었다.

쏟아지는 조사
후보들은 민감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여론조사 전문기관 A사의 B대표는 “웬만한 공약보다 여론조사의 영향력이 더 크다”며 “후보 캠프서 여론조사 결과에 민감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공약보다 언론에 보도된 여론조사 결과가 훨씬 더 파괴력이 있다는 주장이다. 지지율에 따라 지지자들의 마음은 물론 캠프 관계자들까지 긴장한다.

최근에는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이 수직상승하면서 독주 체제였던 대선구도가 양강 체제로 바뀌었다. 일부 조사에선 안 후보의 지지율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넘어서면서 다 결정된 듯 보였던 대선판을 뒤흔들고 있다. 멀찌감치 타 후보들을 앞서 나갔던 문 후보 측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쫓아가는 입장인 안 후보 측은 고무된 모습을 보였다.

여론조사를 두고 문·안 후보 양측의 기 싸움이 시작된 건 지난 3일 <내일신문>의 보도가 발표되면서 부터였다. <내일신문>에 따르면 문·안 후보와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 정의당 심상정 후보간 5자 가상대결서 문 후보와 안 후보의 지지율 격차가 줄고, 문·안 양자 가상대결에선 안 후보가 앞섰다.


조기 대선 국면에 접어든 이후 처음으로 안 후보가 양자대결서 문 후보를 이긴다는 결과가 발표되면서 정치적 파장이 일었다.

가상의 양자대결이지만 처음으로 우위를 빼앗긴 문 후보 측은 <내일신문>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질소 포장 과자” “의도가 불순하다” “신빙성이 떨어진다” 등의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조사를 의뢰하는 등 발 빠른 대응에 나섰다.
 

<내일신문> 측은 “더문캠이 문제 삼은 이번 조사는 특정 시점과 주제를 염두에 둔 특별조사가 아니라 매달 초 진행한 정례조사”라며 “수년째 조사방식이 그대로인데 자신들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왔다는 이유로 공정성을 깎아내리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태도”라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문 후보 측이 <내일신문> 여론조사를 두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제시한 근거는 조사방법과 시기 등이다. 박광온 수석대변인은 “(<내일신문>조사는) 여론조사의 기본인 무선전화 조사는 아예 없었다”며 “유선전화(40%)와 인터넷(모바일 활용 웹조사 60%)으로 단 하루 동안 조사가 이뤄졌다”고 분석했다.

이어 “성·연령·지역별 조사대상의 대표성도 취약했다. 조사가 이뤄진 4월2일은 전날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경기지역 경선서 압승해 언론노출이 극대화된 날”이라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조사 대상을 선정하는 방식이나 조사일 등이 특정 후보에게 지나치게 유리했다는 설명이다.

박 대변인이 지적한 것처럼 여론조사의 신뢰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무궁무진하다. 그 중에서도 최근 가장 관심을 끄는 부분이 바로 유·무선 비율이다. 조사를 진행할 때 유선전화와 무선전화 이용자 비율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가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 떠올랐다.

리서치 1등이 진짜 1등?
일부는 ‘숫자 장난’도


여론조사의 신뢰도 문제는 선거 때마다 불거지는 해묵은 주제 중 하나다. 이 때문에 여론조사 전문기관들은 정확한 조사 방식을 찾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다. B대표는 “처음에는 집 전화(KT) 이용자를 대상으로 조사가 이뤄졌지만 신뢰도가 너무 낮아 유선 RDD(Random Digit Dialing, 무작위 전화걸기) 방식을 사용했다”며 “그마저도 결과를 맞히지 못하자 이제는 무선전화를 섞고 있다”고 말했다.

장덕현 한국갤럽 부장은 “무선 비율이 마냥 높다고 정확한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최근 여론조사 관련 기사를 보면 ‘무선 100%가 아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댓글이 종종 있는데 장 부장은 “무선 비율을 100%로 할 경우 고령층, 여성, 주부의 표본을 잡아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B대표 역시 “우리 회사에선 유선과 무선의 비율을 25대 75 정도로 잡고 있다”며 “그 근거는 실제 집에서 유선전화를 사용하는 비율”이라고 했다.

일각에선 유·무선 비율을 어떻게 배합하느냐에 따라 특정 후보에게 유리한 결과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9일과 10일 양일간 보도된 7종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다자구도 기준으로 문 후보가 앞선 조사는 4종, 안 후보가 앞선 조사는 2종이었다. 하나는 문·안 후보의 지지율이 같았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유‧무선 조합 비율에 따라 결과가 널을 뛰었다.
 

다자구도서 안 후보의 지지율이 문 후보와 같거나 앞선 3개 조사를 보면 유선 비율이 모두 40% 이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안 후보(34.4%)가 문 후보(32.2%)를 오차범위 내에서 앞선 칸타퍼블릭(<조선일보>) 조사에선 유선과 무선 비율이 44.9대 55.1이었다.

유선과 무선 비율을 4대6 비율로 섞어 조사한 코리아리서치(KBS·연합뉴스) 결과 역시 안 후보(36.8%)가 문 후보(32.7%)에 앞섰다. 문·안 후보가 나란히 37.7%를 기록한 리서치플러스(<한겨레신문>)의 조사에선 유선 비율이 54%, 무선 비율이 46%였다.

유·무선에 따라
결과 천차만별

반면 무선 비율이 높은 조사에선 문 후보가 강세를 보였다. 유선 23.5%, 무선 76.5% 비율인 한국리서치(<한국일보>) 조사에서 문 후보는 37.7%로 안 후보(37.0%)에 오차범위 내에서 앞섰다. 유선과 무선의 비율이 19대81인 KSOI(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는 문 후보(41.8%)가 안 후보(37.9%)보다 높게 나타났다.

유선 14%, 무선 86%로 조사한 리서치앤리서치(MBC·<한국경제>)는 문 후보 35.2%, 안 후보 34.5% 결과였다. 무선 비율이 90%로 가장 높았던 리얼미터 조사에선 문 후보가 42.6%를 기록, 안 후보(37.2%)에 가장 우세한 결과가 나왔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유·무선 비율을 두고 “최적의 비율을 정하긴 어렵다”(장덕현 부장) “여론조사 기관마다 천차만별”(A사 B대표) 등 정답이 없다는 입장이다.

장 부장은 “표본의 대표성만 제대로 확보된다면 유·무선 비율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다시 말해 유·무선 비율이 5대5라 할지라도 표본만 잘 뽑으면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며 “누구든지 표본이 될 확률이 같아야 한다. 어떤 조건 때문에 누군가의 응답 확률이 낮아진다고 하면 대표성이 떨어진다”고 덧붙였다. 다만 “조사 방식에 있어서 유·무선을 혼합한 RDD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표본 대표성이 중요
경마식 보도 대응해
비판적 시각 길러야


응답률도 유심히 봐야 할 부분이다. 여론조사가 선거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ARS(자동응답시스템) 방식이 등장했다. ARS조사는 사람이 직접 전화를 걸어 조사하는 전화면접 방식과 비교해 시간과 비용이 덜 든다는 장점이 있다. ARS조사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문제 삼는 부분은 낮은 응답률이다. 누리꾼은 지나치게 낮은 응답률의 조사를 신뢰할 수 있는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인다.

응답률을 두고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ARS조사방식을 사용하는 여론조사 전문기관 C사의 D대표는 “낮은 응답률은 문제 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D대표 역시 ‘표본의 대표성’을 거론했는데, 다시 말해 표본만 정확하다면 응답률이 높고 낮은 것은 신뢰도에 큰 영향이 없다고 주장했다.

여론조사가 일정 수준의 표본을 가지고 민심을 예측하는 방법인 만큼 얼마나 응답하는지보다는 조사기관서 뽑은 표본이 얼마나 민심을 대변하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밝혔다.

반면 전화면접 방식을 사용하는 장 부장의 입장은 다르다. 현재 수준서 응답률이 최소 10%서 15% 이상 나오는 조사의 신뢰도가 높다는 생각이다. ARS조사는 적극적 응답층만 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양 극단의 생각을 가진 지지층만 조사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ARS조사의 응답률이 2~3%에 머무는 만큼 정치에 관심이 정말 많거나 특정 후보를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의 참여 비율이 높아지면 결과가 비틀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장 부장은 “지난 대선 투표율은 75.8%로, 유권자의 4분의 3이 투표장에 나왔다. 정치에 관심이 높든 낮든 대다수의 유권자가 한 표를 행사했다는 것”이라며 “ARS조사로는 보편적인 여론을 잡아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전화면접 방식은 사람이 직접 응대하기 때문에 응답자가 정치에 대한 관심이 낮다 해도 잡아둘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일부 여론조사 전문기관은 ARS와 전화면접 방식을 혼용하기도 한다.

박시영 윈지코리아컨설팅 부대표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응답률이 낮은 것은 여론조사만의 문제는 아니고 광고성 전화나 일종의 전화 공해가 많아지면서 전화 거절률이 높아진 게 1차적 영향”이라며 “선거 시즌이 되면 여론조사가 굉장히 많이 진행되면서 그에 대한 피로감도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응답률이 높을수록 좋겠지만 낮은 응답률을 보완하기 위해 성‧연령‧지역 등 유권자들의 구성 비율을 맞출 수 있도록 적절히 통제하고 있다”며 “응답률이 높아서 나쁠 건 없지만 낮은 경우에도 보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응답률 낮으면
보완이 필요해

유·무선 비율이나 응답률, 조사방식 등에 있어서는 전문가별로 주장이 다르지만 ‘표본의 대표성’ 문제만큼은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부분의 여론조사 기관은 성·연령·지역별 유권자 비율에 맞춰 할당조사를 진행한다.

인구학적 특성에 따라 표본 수를 정한 후 그 숫자가 채워질 때까지 조사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채 조사기간이 종료됐을 경우엔 가중치를 주는 방식으로 통계 보정에 들어간다.

여론조사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등장한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이하 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에는 언론에 공표된 여론조사와 관련한 자세한 사항이 게재돼있다. 최근 진행된 여론조사를 보면 ‘3월 말 행정자치부 주민등록 인구통계 기준 성·연령·지역별 가중치 부여’로 통계를 보정했다는 문구가 어김없이 기재돼있다.

일각에선 인구비례할당 방식으로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성·연령·지역별 투표율이 다르고 최근 선거가 세대·지역 대결 경향을 보이는 상황서 단순히 인구를 잣대로 조사를 진행하는 것은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주장이다.

A사 B대표는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현재 성·연령·지역별 할당 조사를 직업·소득으로까지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며 “그보다 더 정확한 방법은 안심번호를 바탕으로 할당조사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심번호는 이용자의 휴대전화 번호가 노출되지 않도록 생성한 임의의 번호를 말한다. 기존에는 정당만 자체 조사를 위해 이동통신사에 안심번호를 요청할 수 있었지만 지난 2월 관련법이 개정되면서 공표·보도 목적의 선거 여론조사를 수행하는 기관은 가상번호를 요청해 조사에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승희 여론조사심의위 주무관은 “여론을 폭넓고 고르게 대변하는 샘플을 확보하는 게 중요했는데 가상번호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안심번호 사용이 유·무선 RDD 방식보다 신뢰도가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여론조사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B대표에 따르면 같은 표본을 가지고도 주말, 주말+평일, 평일 등 조사요일에 따라 결과가 각각 다를 수 있다. 시간대는 말할 것도 없다. 대선 지지율을 가지고 분석하면, 평일 낮 시간 조사에서는 문 후보의 지지율이 낮게 나타난다.

문 후보를 지지하는 비율이 높은 사무직 등의 직업군에서 응답률이 낮기 때문이다. 정당지지율도 영향을 끼친다. 정당지지율이 높은 당일수록 응답률이 높고 적극적으로 답한다. ‘샤이○○○’ 이라는 숨은 표가 이 지점서 발생할 수 있다.

장 부장은 질문지 역시 중요하게 봐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질문은 앞에 다른 이슈 질문을 하지 않고 묻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슈 질문을 한 이후에 지지도 조사를 할 경우 응답이 오염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숫자만 보지 말고
고려 대상도 분석

장 부장은 “조사방법이 전혀 다른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추이나 추세를 분석하는 오류를 범하는 언론이 많다. 유·무선 비율을 두고 과장하는 경우도 있다”며 “여론조사 결과를 가지고 검증 없이 마구잡이로 인용하는 경우에도 왜곡된 정보가 전파될 수 있다”고 꼬집었다.

B대표는 “언론은 여론조사 결과만 보도하는 경향이 크다. 유권자 역시 숫자에만 관심을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대선 직전까지 쏟아지는 여론조사에서 진짜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스스로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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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