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 직격탄> 대한민국 룸살롱은 지금…

“손님요? 아가씨들끼리 술마셔”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김영란법이 시행된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 ‘접대의 메카’였던 룸살롱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룸살롱은 경기침체로 인해 극심한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여기에 김영란법까지 시행되며 룸살롱 업계는 침울 그 자체. 업계 종사자들은 일자리를 잃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조만간 법망을 피해 편법이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고급 룸살롱서 이뤄지던 기업들의 접대 관행이 철퇴를 맞게 됐다. 한국유흥음식업중앙회에 따르면 전국의 유흥업소는 2만5000여개(종사자 22만622여명), 서울지역의 유흥업소는 2500여개(3만2605명)에 달한다. 업소가 밀집된 강남의 경우 현재 300여개가 운영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룸살롱·단란주점·스탠드바 등 유흥업소가 경기침체로 이미 극심한 경영난을 겪고 있는 가운데 김영란법이 시행되며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긴 상황이다.

단란, 스탠드바
노래방도 죽을맛

룸살롱 몰락에 대해 업계 관계자들은 음주 문화 변화와 성 개방 풍조, 지속적인 단속 등을 주요 원인으로 지적했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음주족이 줄고 독하고 비싼 술을 기피하는 현상이 뚜렷해졌다.

룸살롱 업계서 25년간 일했다는 최모씨는 “룸살롱은 부유층 남성들의 성 매수 장소로 수십년간 인기를 끌었다”면서 “요즘은 쉽게 ‘애인’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비싼 돈 주고 룸살롱을 찾아올 이유가 없다”고 했다.

나이트클럽이나 SNS서 이성을 만나는 남성이 늘어나고 룸살롱을 대체하는 업소가 늘어난 것도 룸살롱 몰락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룸살롱 업계에선 비교적 저가에 성 매수가 가능한 각종 유사 성행위 업소와 오피스텔 성매매 업소들로 룸살롱 손님들이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룸살롱의 경우 성매매 가격이 최소 20만원대이지만 신종 업소들은 10만원 안팎의 가격으로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과 연계하고 있는 음료, 위스키 업체들도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국내 위스키 수입 및 제조업체들은 각 유흥업소에 직접 영업 인력을 투입해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데 유흥업소는 위스키 업체들의 가장 큰 고객 중 하나다. 이미 국내 위스키 산업 규모가 매년 위축되고 있는 상황서 이번 김영란법 시행은 ‘결정타’가 될 수밖에 없다. 위스키 출고량은 2013년 200만 상자 밑으로 떨어진 이후 매년 감소하고 있다.

유흥업소 2만5000여개…줄폐업 가시화
연관된 주류업체들도 막대한 피해 예상

지난 상반기 출고량은 약 80만 상자로 올해도 하향세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 다른 위기는 위스키와 와인 등 고가 주류선물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위스키는 고급 이미지가 강해 많은 소비자들이 명절 선물용으로 구매한다. 와인 역시 비슷한 이유에서 선물로 이용되는데 5만원이라는 제한선이 생겨 소비자들의 발길이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로 룸살롱서 주로 팔고 있는 고급 위스키 소비량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국내 위스키 출고량은 2008년 감소세로 돌아선 이후 2009년 -10%, 2010년 -1.4%, 2011년 -4.8%, 2012년 -11.6%, 2013년 -12.8% 등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한 주류업계 관계자는 “독하고 비싼 술은 더 이상 우리 음주 문화에 맞지 않는 것 같아 업계서도 도수 낮은 위스키 등 신제품 개발에 열중하고 있다”면서 “위스키에 대한 거부감으로 룸살롱 손님 역시 함께 줄어들고 있다”고 했다.

기업 회식 자리서도 양주와 맥주를 섞은 ‘양폭’은 거의 사라지고 소주와 맥주를 섞은 ‘소폭’이 단골 메뉴가 된 지도 오래다. 다른 조직보다 ‘양폭’을 더 즐겼던 법조계서도 이제는 ‘소폭’이 대세라고 한다.


또 다른 위스키 업계 관계자는 “이미 죽어가는 시장에 김영란법까지 더해져 한치 앞을 예상하기 어려워졌다”며 “5만원 이하 주류 선물 시장 이외에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국회 업무를 담당하는 한 대기업 부장은 “과거엔 국회 보좌관들과 정기적으로 룸살롱을 갔지만 이제는 그들이 먼저 돈 들여 몸 망치지 말고 룸살롱 대신 골프나 치자는 제의를 해온다”고 했다. 등산·자전거 등 건강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면서 룸살롱서 술 먹는 것보다는 운동과 좋은 음식에 투자하는 남성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뭘 먹고 사나”
다 문 닫을 판

강남의 한 룸살롱 실장은 “경기 침체로 가뜩이나 장사가 안 되는데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매출 감소는 말할 것도 없다”면서 “빈 룸이 많이 발생할 게 뻔한데 웨이터를 줄여야 할 판”이라고 볼멘소리를 냈다.

역삼동 한 룸살롱 매니저는 “법 시행 전부터 매출이 엉망인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라면서 “평소 50∼60% 이상을 차지하던 대기업 등의 법인카드 고객들이 대부분 발길을 끊어 하루 매상이 반토막난 업소도 상당수에 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지난 7월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 이찬열(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세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법인 59만1694곳에서 법인카드로 결제한 접대비는 총 9조9685억원으로 집계됐다.

기업접대비는 2008년 7조502억원서 2014년 9조3368억원으로 매년 늘다 지난해 10조원에 근접하며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중 유흥업소서 쓴 금액은 1조1418억원으로 8년째 1조원을 넘겼다. 유흥업소별로는 룸살롱이 6772억원(59%)으로 전체 유흥업소 1위를 달렸고 단란주점(18%)과 극장식 식당(11%) 요정(9%) 나이트클럽과 카바레(3%)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김영란법 시행 이후 손해가 예상되는 만큼 고급 유흥업소 업주들은 전업을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로 실의에 빠진 상태다. 해마다 줄어드는 파이를 놓고 다투는 업소 간 경쟁도 룸살롱 영업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경쟁 업소를 없애기 위해 성매매 등 불법 영업을 경찰에 신고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논현동의 한 룸살롱 영업담당 전무는 “손님이 좀 있다 싶으면 주변 업소들이 그 업체를 경찰에 신고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면서 “가라앉는 배에서 살아남으려는 업체들 간 치사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경찰 단속의 배경엔 업계 내부 고발이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기다. 최근 박유천 사건 등 룸살롱 내에서 벌어진 일들이 법적 사건으로 쟁점화되는 것도 업계에 악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P 룸살롱 영업부장 장모씨는 “최근 단골 중엔 ‘아가씨들 무서워서 룸살롱 못 가겠다’는 손님들이 있다”면서 “불쾌한 행위를 강요당하면 룸을 나와 버리거나 반발하는 여종업원들이 늘어나고 있어 손님 입장에선 기분이 나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에 김영란법까지 시행되면서 이미 침체에 빠진 룸살롱 업계는 더욱 빠른 속도로 침몰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장사 어렵다면…
불법·편법 기승


하지만 김영란법이 본격 시행됐음에도 뿌리 깊은 접대문화가 100% 근절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법망을 피해 각종 편법행위가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얘기다. 소규모 업소들은 “여태껏 배운 게 이것뿐이라며 어떡하든 살아보겠다”는 의지로 업종 전환을 고려하는 모습이지만 중·대형 업소들은 법망을 피할 수 있는 편법 접대 방안을 모색하는 분위기도 감지되고 있다.

룸살롱은 1970년대 초반 서울 광화문 일대에 처음 생긴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최고 유흥주점은 삼청각·대원각·청운각 등의 요정들이었다. 요정에는 온돌방과 한복 입고 전통춤 추는 여종업원이 있었던 반면 룸살롱에는 소파와 양장을 한 여종업원이 있었다. 1980년대 초반 강남 개발과 함께 급격하게 늘어났던 룸살롱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요정들을 밀어내고 유흥업계 정점을 차지했다.

벤처 붐이 일었던 2000년 전후 최대 호황기에는 한 달 1000곳의 룸살롱이 개업할 정도였다고 한다. 논현동의 한 단란주점 전무는 “김영란법 시행 여파로 룸살롱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겠지만 유흥 문화의 중심에서 사라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며 “앞으로 10년 뒤면 룸살롱은 과거의 요정처럼 일부 업소만 명맥을 이어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여종업원 성매매 업소로 대이동
물어뜯기 경쟁…더 퇴폐적으로?

강남의 한 유흥업소서 발렛 파킹 일을 하는 D씨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시간에 자리에 앉지를 못했다. 밀려드는 손님들 차를 주차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며 “오늘은 정말 한가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다. 그냥 발렛 부스 안에 들어가서 휴대폰 게임이나 해야겠다”고 말했다.

해당 유흥업소를 운영하는 E씨 역시 “이렇게 손님이 없는 건 내가 장사하고 10년 만에 처음 보는 일”이라며 “보통 화류계는 명절 즈음해서 손님이 끊긴다. 다들 가정에 충실해야 할 시점이니까. 그런데 지금은 명절 기간의 5분의 1도 안 된다”고 흥분했다. 그는 또 “우리 가게만 이러진 않을 것이다. 주변에 다 연락해봤는데 더하면 더했지 덜한 가게는 없다”고 말했다.


강남서 또 다른 유흥업소를 운영하는 F씨도 “출근한 직원들이 손님이 없자 다 퇴근했다”며 “업주들뿐만 아니라 직원들 수입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는가 하면 F씨는 “그래도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말해 기자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는 “잠깐이면 된다. 지금 전부 시범케이스에 걸릴까 몸 사리는 것 아닌가”라며 “유흥 없는 사업과 로비가 어디 있나. 곧 어떤 식으로든 다시 가게를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종로의 한 노래바 사장은 “일단 더치페이로 계산한 뒤에 접대하는 측에서 현금 또는 상품권으로 식사비를 돌려주는 방식으로 편법을 쓸 수 있다”고 귀띔했다. 이어 “일부 유흥업소들은 단골손님들을 대상으로 금액을 미리 결제하는 ‘선결제 방식’도 사용하는 것으로 전해들었다”면서 “강남과 종로 등 일부 업소 여러 곳에서 이미 몇 백만원씩 선결제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2004년 도입됐다가 부작용만 키운다는 여론 속에 5년 만에 폐지된 접대비 실명제의 전철을 김영란법이 밟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접대비 실명제는 기업이 건당 50만원 이상의 접대비를 지출할 경우 접대 목적과 접대자 이름, 접대 상대방의 상호와 사업자 등록번호 등을 기재하도록 한 것이 골자다.

당시 접대비 실명제를 피하기 위해 ‘영수증 쪼개기’와 함께 ‘카드 나누기’라는 편법이 생겨났을 정도다. 일각에선 “김영란법에서도 식사비 한도인 3만원을 넘는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비슷한 편법을 쓰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말했다.

3만원 이상 식대비가 지불됐을 때는 접대 대상의 인원수를 부풀릴 수 있고 접대 대상자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법 시행 초기에 이런 편법을 쓰면서까지 접대를 하려는 이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 업계나 관가 쪽 반응이다.

한 기업 관계자는 “접대를 하는 입장에서는 사업 성공을 위해 편법을 쓰더라도 접대 자리를 원할 수 있지만 접대받는 입장에선 ‘시범 케이스’로 걸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얻어먹을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이미 몰락의 길
종사자들 어디로?

한국유흥음식업중앙회 한 지부회장은 “부정부패를 척결하자는 김영란법으로 인해 경제계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법이 본격 시행되도 편법에 기승한 접대문화는 사라지진 않을 것으로 전망되지만 업계의 현실이 녹록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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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