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잘 나가는 ‘디지털 장의사’를 아십니까

당신의 과거를 깨끗하게 지워드립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묻혀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의 발달로 온라인에 글이나 사진을 올리는 행위가 보편화되면서 흔적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흔적은 때론 족쇄가 돼 삶을 파괴하는 흉기로 변한다. 이런 이들을 위한 새로운 직업군이 나타났다. ‘디지털 장의사’가 바로 그들이다.
 

사례1. A(30대)씨는 최근 집에서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해외 음란물 사이트에 자신의 사진이 버젓이 올라가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이트에 게재된 사진에는 A씨의 얼굴까지 뚜렷하게 나와 있었다. 얼마 전 결혼해 아이까지 둔 A씨는 아연실색해 사진을 삭제하려 했지만 방법을 알 수 없어 애를 태웠다.

인터넷 발달
신직업 각광

사례2. 고등학생 B양은 어느 날 친구에게서 전화 한통을 받았다. 인터넷 서핑 중 음란 동영상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영상 속 여자가 B양과 닮았다는 내용이었다. B양은 친구가 보내준 영상을 보고 몇 년 전 자신이 동급생 친구와 찍은 것임을 알아챘다. B양은 당시 함께 동영상을 촬영한 반 친구를 추궁했지만 모른다는 말만 돌아왔다.

사례3. 고등학생 C군은 온라인 학급 카페에 자신을 비난하고 욕하는 글이 수십 개 게시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반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패거리들이 한 일이었다. C군은 카페에 올라와 있는 글을 지워달라고 그들에게 부탁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C군은 카페에 매일 늘어나는 자신에 대한 악성글을 보면서 자살 충동을 느꼈다.

최근 SNS의 발달, 스마트폰 보급·사용률 증가로 다양한 내용의 온라인 피해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글이나 사진을 올리는 게 매우 쉬워진 것과 비례해 게시물 유포 속도나 범위 역시 빠르고 넓어졌기 때문이다.


게시물을 실수로 올렸다 급히 삭제했다 해도 그 잠깐 사이에 퍼져나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몇몇 유명 연예인은 자신의 SNS에 실수로 올린 글을 네티즌들이 캡처하고 유포해 곤욕을 치른 경우도 있다.

인터넷상에 남은 자신의 흔적을 전부 깨끗하게 지우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겨졌다. 게시글이 어디까지 퍼졌는지 추적이 어려울 뿐더러 발견했다 해도 삭제 과정이 복잡해 일반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작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디지털 장의사라는 신 직업군이 등장하면서 그 과정이 크게 간소화되고 있다.

본래 디지털 장의사는 미국서 시작된 개념이다. 이들은 회원들이 사망한 이후 생전에 남긴 인터넷 흔적을 청소해주는 온라인 상조회사다. 미국의 대표적인 온라인 상조회사인 ‘라이프인슈어드닷컴’은 우리나라 돈으로 약 30여만원을 내면 고인이 인터넷 정보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적은 유언을 확인한 후 SNS에 올린 사진은 물론 다른 사람 페이지에 남긴 댓글까지 지워준다.

사후관리보다
현재에 중점

우리나라는 미국과 방향이 조금 다르다. 미국은 회원이 사망한 이후 디지털 유산을 삭제해 주는 사후 관리에 가깝다면 우리나라는 생전에 자신의 평판에 문제가 생길 법한 정보 등을 삭제 요청하는 게 더 보편화돼있다.

업계 관계자 K씨는 “2013년부터 이 일을 해왔지만 사후 관리를 요청 받은 적은 딱 한 번뿐이었다”며 “그것도 본인이 아니라 아들이 죽은 아버지의 정보를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라고 했다.

디지털 장의사가 생겨나게 된 배경을 따져보면 ‘잊혀질 권리’라는 개념을 봐야한다. 잊혀질 권리는 인터넷서 생성·저장·유통되는 개인 정보에 대해 소유권을 강화하고 이를 삭제·수정·영구적인 파기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 개념을 말한다.
 


여전히 몇몇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인 이 권리는 2010년 스페인 변호사 마리오 코스테자 곤잘라스가 구글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면서 촉발했다. 곤잘라스 변호사는 자신의 이름을 구글에서 검색했을 때 나온 과거 기사가 삭제되길 바랐다.

1998년 연금을 제때 내지 않아 집이 경매에 처해졌던 사실이 빚도 다 갚은 현재에 비춰 적절하지 않은 내용이라고 본 것이다. 곤잘라스 변호사는 스페인 개인정보보호원에 기사와 검색 결과 노출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스페인 개인정보보호원은 기사 삭제는 하지 않되 구글 검색 결과 화면에서 관련 링크를 없애라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구글이 이의를 제기해 제소하면서 법정 다툼으로 번졌다.

2013년 등장해 최근 ‘블루오션’으로
‘사후관리’ 미국과 달리 현재 평판 중심

지난 2014년 5월 유럽사법재판소는 “구글 검색 결과에 링크된 해당 웹페이지의 정보가 합법적인 경우에도 링크를 삭제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이른바 잊혀질 권리를 인정한 판결이다. 인터넷 역사에 이정표가 될 판결이 나온 이후 전 세계적으로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우리나라는 지난 4월29일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가 ‘인터넷 자기 게시물 접근 배제 요청권 가이드라인’(이하 가이드라인)을 내놓으면서 논의에 발을 담갔다. 방통위는 “사각지대에 있는 자기 게시물에 대한 관리권을 상실한 이용자를 효과적으로 구제하면서도 표현의 자유 침해 등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범위에서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자기 게시물에 댓글이 달려 삭제가 어려운 경우 ▲회원 탈퇴 또는 1년간 계정 미사용 등으로 회원 정보가 파기됨에 따라 이용자 본인이 직접 삭제하기 어려운 경우 ▲회원 계정 정보를 분실해 이용자 본인이 삭제하기 어려운 경우 ▲게시판 관리자가 사업의 폐지 등으로 사이트 관리를 중단한 경우 ▲죽은 사람이 생전에 접근 배제 요청권의 행사를 위임한 지정인 또는 유족이 죽은 사람의 인터넷 게시물에 대한 접근 배제를 요청하는 경우 ▲게시판 관리자가 게시물 삭제 권한을 제공하지 않아 이용자가 스스로 게시물을 삭제할 수 없는 경우 등에는 게시판 관리자, 검색서비스 사업자 등에게 게시물 접근 배제 조치를 요청할 수 있다.

방통위는 지난 6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가이드라인 시행에 돌입했다. 하지만 접근 배제 요청 방식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게 자료를 준비해 신청해도 요청을 거절당하는 경우가 있어 방통위의 가이드라인이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틈새를 파고든 게 디지털 장의사 업체들이다. 업체들은 방통위의 가이드라인뿐만 아니라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44조2항 ‘정보의 삭제요청’ 등을 이용해 좀 더 넓은 범위에서 게시물 삭제를 진행하고 있다.

가이드라인
유명무실 지적

업체들은 이용자에게 신분증 사본과 위임장을 받아 포털사이트에 직접 삭제를 요청하는 일을 한다. K씨는 “각 사이트마다 삭제 요청 양식이 있다”면서 “양식대로 서류를 제출해 게시물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프로그램 등을 이용해 일괄적으로 삭제하는 방식은 법에 저촉될 위험이 있어 사용하지 않는다고.

현재 국내에서 운영되고 있는 디지털 장의사 업체는 15∼20개 남짓이다. 보통 게시물 한 건당 삭제 비용이 30만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업계 기준이라는 게 없어 매우 유동적이다. K씨에 따르면 “미성년자가 의뢰해 오거나 삭제해야 할 정보가 많은 경우에는 이용자와 의논해 가격을 조절한다”고 밝혔다.

음란 동영상이 유출됐을 경우에는 특별한 관리가 필요하다. 음란 동영상은 한번 온라인에 게재되면 거미줄처럼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영상을 본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1회성 조치로 뿌리 뽑기 어렵다. 그래서 한 업체는 1년 단위로 관리 계약을 맺는다. 1년 동안 삭제를 의뢰한 영상이 온라인에 올라오는 족족 추적해 차단하는 것이다.
 


또 다른 업체 관계자 P씨는 “한 고등학생이 중학생 때 찍은 음란 영상이 퍼졌다며 삭제 요청을 해온 적이 있다”면서 “영상을 삭제해도 다음 날이면 다시 올라오는 경우가 있어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구석구석 찾아내 깔끔히 ‘청소’
잊혀질 권리 vs 알 권리 ‘충돌’

타인이 올린 자신에 대한 악의적인 비방 글은 삭제하기가 더 수월하다. 앞서 언급한 사례2의 상황처럼 타인에게 욕설을 하거나 근거 없는 글을 쓸 경우에는 ‘명예훼손’ 혐의가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P씨는 “디지털 장의사가 하는 일은 개인도 모두 할 수 있다. 다만 우리 같은 경우에는 오랫동안 이 일을 했기 때문에 노하우가 쌓여 있다”면서 “(사이트에) 한 번 요청해서 안 되면 두 번, 세 번 요청해 꼭 지우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하지만 디지털 장의사에게 의뢰한다고 해서 온라인 상 모든 정보를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이트에서 회원탈퇴를 했는데 게시글이 남아있을 경우 개인정보 보관 기간이 지나면 삭제가 불가능하다. 사이트에서 탈퇴 회원에 대한 개인 정보를 파기했을 시에는 게시글을 본인이 썼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카카오톡 등 메신저 내에 돌아다니는 자료도 삭제가 불가능하다.

P씨는 “최근 카카오톡에 자신의 음란 영상이 퍼졌다면서 삭제가 가능한지 여부를 묻는 문의가 심심치 않게 온다”면서 “온라인에 게재되지 않은 자료는 삭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P씨는 “디지털 장의사가 만능은 아니다”라면서 “온라인상에 글을 쓸 때는 꼭 여러 번 생각하고 쓰는 게 좋다”고 당부했다.


디지털 장의사의 등장은 잊혀질 권리와 알 권리의 충돌을 불러 일으켰다. P씨는 “기업에서 의외로 연락이 많이 오는데, 사이트에 게재된 악평을 지워달라는 요청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교수, 정치인 등이 개인사이트에 게재된 자신의 범죄 관련 게시글을 삭제해 달라는 의뢰도 자주 들어오는 편이라고 덧붙였다.

이 때문에 잊혀질 권리에 대한 인식이 확대될수록 국민의 알 권리와 사회적 감시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에 방통위 관계자는 “게시물이 공익과 상당한 관련성이 있는 경우엔 관리자나 사업자가 접근 배제 요청을 거부할 수 있다”면서 "문제가 될 만한 부분에 대해서는 애초에 사이트에서 삭제를 해주지 않기 때문에 디지털 장의사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설명했다.

민간자격증 등
규제 나올 듯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디지털 장의사에 대한 최소한의 규제나 기준 등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 디지털 장의 업계 관계자는 “자격시험, 일정 정도의 교육시간 이수 등 디지털 장의사 양성 체계가 필요하다”며 “민간자격증 발급 등 방법으로 최소한의 허들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방통위 역시 “최근 민간자격증 검토 요청이 들어오고 있다”며 “민간자격증이 곧 생길 것 같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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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