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김우일의 한국재계 30년 비사

역대 대통령과 재벌총수 함수관계 ⑫전두환 편
“너 얘, 넌 쟤 먹어!”일방적 기업 짝짓기  봇물
 
정부와 기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나아가 대통령과 총수는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함수관계다. 그동안 기업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어떤 배에 타느냐에 따라 순항과 표류를 반복해 왔다. 유독 거침없이 승승장구한 신흥 재벌이 있는가 하면 하루아침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비운의 총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공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요시사>는 ‘대우 제국’의 마지막 구조조정본부장을 지낸 김우일 ㈜대우M&A 사장이 박정희 정권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정·재계 실세들과 부대끼면서 겪은 ‘한국재계 30년 비사’역대 대통령과 재벌총수간 애증관계를 연재하기로 했다.

1970∼80년대 중동아시아의 오일달러를 쫓아 앞뒤 안 가리고 진출했던 건설업체들은 신이 났다. 순식간에 오일달러가 들어오고 기업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여러 개의 신생 건설그룹도 생겨났다. 경남기업그룹, 삼익주택그룹, 삼호주택그룹, 라이프주택그룹, 한양주택그룹 등이다

건설업체 뿐만 아니라 일반시민들도 덩달아 그 분위기에 휩쓸렸다. 국내보다 월급이 4배나 많은 해외건설현장에 3년만 취업하면 귀국해서 집도 사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니 너도 나도 해외건설현장에 기능공으로 나가는 것이 지상 최대의 목표였고 꿈이었다.

해외기능공 부인 탈선 중도 귀국 등 악순환

각 해외건설업체에는 해외 기능공으로 나가고자 하는 수많은 인력들이 몰려들었다. 마치 노다지를 캐러 먼 길을 떠나는 광부의 심정과 같았다. 그래서 지금은 찾아보려야 찾아 볼 수가 없는 해외인력부라는 부서가 건설업체에 큰 비중을 가진 조직으로 부각됐다.

그러나 이 ‘신데렐라의 꿈’은 신기루로 변하기 시작했다. 오로지 처·자식을 위해 대박을 꿈꾸며, 사막의 열기를 온 몸에 덮으며, 불철주야 위험을 무릅쓰고 떠났던 해외기능공의 거친 손에는 고향의 동생으로부터 형수님의 자유분방한 행동을 알리는 편지가 쥐어지곤 했다.

“형님, 형수님이 요새 이상해졌습니다. 형님의 통장에 많은 돈이 꽂히자 나들이가 심해지고, 심지어는 밤늦게 집에 들어오지 않고 애들도 돌보지 않고 있습니다. 형님이 벌어 오신 귀중한 돈을 탕진하는 것 같아 저의 심정도 무겁습니다. 아마 제 생각에는 남자가 생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형님이 형수님에게 잘 타일러 보십시오.”

이역만리에서 이런 편지를 받아 본 사나이의 가슴에는 피 눈물이 솟구친다. 당시 가난하게 집에 얽매어 살던 서민층의 아낙들이 갑자기 일확천금으로 남편이 벌어다 준 돈 때문에 이성이 마비되고 일종의 해방감을 맛보는 카타르시스에 빠졌던 것이다. 이른바 그 유명한 ‘춤바람’이었다.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현란한 조명과 춤이 난무하지만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반드시 있듯이 이 조명과 춤에는 도처에 눈을 두리번거리며 자기의 먹이를 찾고자 헤매는 ‘제비족’이 기생해 살게 마련이다. 세상에는 낮과 밤, 양과 음, 성공과 실패, 선과 악, 하늘과 땅, 삶과 죽음, 천사와 악마, 원심력과 구심력 등 반대 방향의 극과 극에서 양단(兩端)을 구성해 팽팽하게 댕겨주고 느슨하게 해주는 동인(動因)이 반드시 존재해 왔다. 이 양단의 동인이 존재하지 않으면 이 세상의 자연법칙은 무너지고 우주가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양단의 동인은 동전의 양면이요, 손바닥의 앞과 뒤인 것이다.

제비족들은 춤바람 난 여자를 사냥했고, 이는 육체의 탈선과 가정의 탈선을 불러왔다. 탈선은 탈선에 그치지 않고 남편의 중도 귀국과 이에 따른 가정파탄, 혹은 현지에서의 자살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해외건설업체나 언론에 상당히 큰 사회문제로 떠올랐고, 이런 고정(苦情)처리가 건설업체의 주요사항으로 여겨졌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오로지 수출만의 대박을 향해 달음질치던 건설업체의 발이 땅 위의 돌에 걸린 셈이다. ‘무리하게 경쟁해서라도 수주부터 따야겠다’는 경영자의 좁은 안목으로 공사하면 할수록 손실이 커지는 덤핑수주가 유행했고, 이는 낙찰금액이 실행예산금액의 반에도 못 미치는 공사수주가 됐다.

설상가상으로 중동아시아 국가는 공사결제를 현금으로 하지 않고 현물로 대신했다. 원유였다. 가공해서 팔아야 하나 이의 가공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코스트가 대단했고 특히 저장할 탱크도 없었다. 심지어 현물도 주지 않고 기성 확인을 어렵게 해 공사대금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맡은 건설회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공사를 계속했다. 한번 정부의 눈 밖에 나면 앞으로 공사는 끝이었기 때문이다.

해외건설업체들은 곧 눈앞에 닥칠 사태를 청와대에 읍소했다. 달리 호소할 데가 없는 기업은 그래도 기댈 곳이 청와대라 생각했다. 국가차원에서 문제를 풀어 주는 것이 상수라 생각한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는 기업경영자의 오판에 불과했다. 청와대는 중동국가들에 대한 외교상의 채널 대신 읍소한 건설업체를 인수해 정상화시킬 새로운 경영자를 찾고 있었다. 중동국가들과는 별 친목관계를 갖지 않았던 전두환 정부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었겠지만, 정부를 믿고 정상화 지원을 요청했던 기업들로선 오히려 뒤통수를 맞은 셈이 됐다. 그렇게 해외건설업체의 줄도산이 눈앞에 다가 왔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대통령은 여러 해외건설업체의 매각을 발표했다. 또 인수 적격 업체도 밝혔다. 이런 경우 입찰에 붙이거나 아니면 인수자의 의향을 들어보고 적의 조정해야 하지만 청와대는 이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지정해버렸다.

해외건설업체의 부실이 예상보다 엄청나 교과서대로 인수자를 물색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도 이들 부실업체를 인수하려고 자원하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신문지상에 큼직한 기사가 떴다.
‘K기업은 대우, 삼호주택은 D산업, 삼익주택은 K기업, 라이프주택은 T기업, 한양주택은 A기업 등으로 매각업체와 인수업체를 결정했습니다.’

“정부에 말도 못하고…”‘울며 겨자 먹기’공사

각 인수기업은 실사팀을 구성, 전격적인 비상경영체제를 가동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의 일방적인 매도자와 매수자의 짝꿍을 만들었으니 짝꿍끼리 잘 맞춰 잘 살아야지 마음이 안 맞아 헤어지면 어떤 불이익이 초래될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대우의 경우 엄청난 기업실사단이 기획조정실을 중심으로 편성됐다. 사우디아라비아 해외현장을 거점으로 동남아시아 현장, 국내현장 등 많은 현장들이 공사를 제대로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K기업은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이 대주주인 S씨의 주식을 차압하고 은행관리상태로 있었다. 재미교포인 S씨는 당시 적은 돈으로 K기업을 인수해 해외건설 붐에 편승,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으나 합리적인 경영보다 자의적이고 불투명한 경영으로 순식간에 기업을 도탄지경에 빠트린 것이었다.

필자가 실사하면서 느꼈던 점은 기업 CEO는 절대 ‘GAG MAN’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GAG MAN은 웃기는 개그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CEO가 조심해야 할 룰을 가리키는 것이다.
‘G=GAMBLING(도박), A=ALCOHOL (술), G=GIRL(여자)’

이 세 가지 요소가 CEO를 가장 위태롭게 만드는 인자다. K기업의 대주주이며 CEO인 S씨는 제사보다는 잿밥에 더 욕심이 많았던 자였던 같았다. 싱글인 그는 ‘여자 사냥’을 밥 먹듯이 하면서 회사 돈을 축내기 시작했고, 실제로 영화배우인 T씨를 자기의 부인인양 데리고 있으면서 해외 P에 많은 회사 돈을 송금해 기업의 자금을 부도덕하게 손실내고 있었다.

여기에는 해외에서의 도박이 빠질 수 없었고, 또한 술이 약방의 감초로 작용되어 더욱 더 명석해야 할 CEO의 정신을 혼미에 빠트리고 정상적인 판단력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즉 이 GAG는 기업 CEO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어 결국은 기업을 깡통으로 만드는 마력을 지닌 것이다.

‘CEO = GAG MAN’도박·술·여자 ‘3불’

외로이 정상을 지키며 수많은 종업원의 생계와 사회경제를 책임져야 될 CEO는 무엇보다 심신이 청결하고 순수해져야 한다. 이 순수함이 국내외로 끊임없이 변하는 치열한 경쟁환경 속에 무엇이 사회와 국가를 위하고 기업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판단인지 구분할 수 있는 예지력을 주기 때문이다.

예지력이라 함은 깨끗한 심신의 순수함과 수많은 경험과 지식이 어울려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 있는 ‘PREDICT’를 의미하지 GAG로 얼룩진 심신의 불결 속에 점쟁이가 하듯이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임기응변식으로 마구 해대는 ‘FORETELL’을 의미하지 않는다. 필자의 경험상 적당을 벗어난 GAG를 즐기는 CEO 치고 기업을 망가뜨리지 않은 이가 별로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작금에 이르러 상장기업중 부도에 이르는 대부분의 이유가 CEO의 횡령 등 부도덕과 판단미스에 따른 것임을 보면 얼마나 CEO 역할이 중요한지 알 수가 있다. 각 인수기업들이 실사를 끝내고 엄청난 부실의 재무구조를 보며 인수가 불가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지시한 일이라 내놓고 얘기할 수 없었다.

‘대통령에 순응하느냐, 아니면 항명하느냐….’

각 인수기업 총수들은 인수를 할 수 없는 막막함에 속을 앓았다.
정리=김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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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