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특집> ‘뿌리박힌’ 일제 잔재들 ①‘힘깨나 쓰는’ 친일파 후손들

각계각층 요직에 앉아 ‘떵떵’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윈스턴 처칠이 말했고, 단재 신채호 선생이 받은 이 문장처럼 역사는 그 민족의 청사진과 같은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매년 8월15일을 기점으로 사회 각계 인사들에 대한 친일 의혹이 터져 나온다. 국민들이 바라는 과거사 청산은 요원하기만 한 것일까.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친일파와 그 후손들에 대한 의혹을 <일요시사>가 정리했다.

친일파 의혹에 대해 말하기 전 한 가지 질문이 전제되어야 한다. 과연 친일파는 존재하는 것일까? ‘야권에서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말 아닐까’하는 데서 오는 의문이다. 마치 여권의 종북 프레임처럼 말이다. 실상 그렇게 악용되지 않았던가. ‘종북’처럼 ‘친일’도 명백한 기준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둘 다 대한민국이 청산해야 하는 과거사와 연결되어 있다는 측면에서도 유사하다.

친일파 청산
과거사 문제

그렇기 때문에 정치권은 물론 사학계에서도 지난 70년간 그 기준을 찾기 위해 고심해왔다. 이른바 ‘역사 바로잡기’라는 큰 줄기를 토대로 여러 프로젝트가 사회각계에서 진행됐다. 그러나 그 시작과 끝에는 친일의 기준이라는 문제가 발목을 잡아왔다.

사전적 의미로 친일과 친일파는 다르다. 친일이 행위를 기준으로 한다면 친일파는 집단을 기준으로 한다. 각각 제국주의 시절 일본을 옹호한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나 일반적으로 친일이 과거와 현재를 아우른다면 친일파는 과거의 특정인물의 행적을 규정하는데 많이 쓰인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과거 총리로 내정됐다가 낙마한 문창극 전 후보자의 경우 엄밀히 말해 친일을 한 것이지 친일파는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또한 사람에 따라 차이가 발생할 여지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2009년 11월8일에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은 큰 의미를 지녔다. 민문연은 1991년 설립돼 사학계와 함께 과거사 연구에 몰두해왔다. 2001년부터는 120여명의 학자들로 구성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사전 발간을 위한 연구에 들어갔다. 중간에 보수단체로부터 각종 소송과 발행금지 신청 등을 받긴 했지만 이를 이겨내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사전을 출간해 논란의 중심에 섰던 민문연도 친일파 후손에 대한 언급에는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사전 출간을 연구했던 한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전화통화에서 “(친일인명)사전의 출간 목적은 과거에 친일을 한 사람을 가려내서 기록으로 남기자는 것”이라며 “연좌제처럼 자손에게 그 책임을 묻자는 목적이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또한 그는 “민문연에서는 가계도 연구 등 친일파와 그 후손들을 연결 짓는 연구는 하지 않고 있다”고 확실히 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8·15를 맞아 다시 한 번 친일 논란에 휩싸일 분위기다. 언론에서는 친일파와 그 후손들로 추정되는 인사들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가장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다. <한겨레>신문에서는 최근 『‘친일’ 김무성 아버지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있다』는 제하의 칼럼을 통해 통렬히 꼬집었다.
 

칼럼에서 볼 수 있는 김 대표 부친의 친일 행적은 다음과 같다. 김 대표 선친의 이름은 김용주, 전 전남방직의 회장으로 일찍이 일제강점기 때 친일 행적을 보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는 당시 일본의 조선인 징병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1943년 10월3일에 발간된 <매일신보>를 보면 김 전 회장이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는 길은 일본 정신문화의 앙양으로 각 면에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를 건립하여 경신숭조 보은감사의 참뜻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하여야 하며 미영 격멸에 돌진할 것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기사가 존재한다. 또한 김용주는 경북도회 의원을 지냈으며 조선임전보국단 간부로서 ‘황군에게 위문편지를 보내자’는 운동을 펼쳤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다수의 언론은 최근 김 대표가 방미 일정 중 보여준 ‘큰절’ 등을 보면서 ‘과공비례’라고 지적했다. <한겨레> 신문은 이번 칼럼을 통해 미국을 향해 큰절한 김 대표와 일본을 향해 감사를 표한 김 전 회장과의 연결고리를 주장하고 있다.

박정희·박근혜 끊이지 않는 의혹
영원히 자를 수 없는 평생 꼬리표

역대 대통령 중 50∼70년대 활동했던 대통령은 친일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표적으로 이승만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꼽을 수 잇다. 이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후 정부를 구성하는데 있어 친일파를 중용하고(정부 수립이 용이하도록 기존 인물들을 그대로 썼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수 있다.) 반민특위를 해산시켰다는 측면에서 후대에 친일 행적을 의심받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친일 논쟁은 매년 이맘때 나오는 최고의 화두 중 하나다. 일부 언론에서는 칼럼을 쓸 때 ‘다카기 마사오’라는 박 전 대통령의 일본식 이름으로 게재되기도 한다. 공개석상에서는 2013년 7월경 당시 통합진보당 이정희 전 대표가 서울 시청광장에서 일본식 이름을 말해 논란이 된 바 있다. 이 전 대표는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을 제기하며 “친일 매국 세력, 다카기 마사오가 반공해야 한다면서 쿠데타로 정권잡고 유신독재 철권 휘둘렀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을 두고 친일파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의 과거행적을 지적한다. 일제강점기 때 자발적으로 만주군관학교를 찾아간 것이 그 중 하나다. 당시 만주는 일본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 전 대통령의 행위를 두고 일본군에 자원입대한 것과 같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당시 발간된 신문에서는 박 전 대통령이 당시 일본을 찬양하는 듯 한 편지를 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39년 3월31일자 <만주신문>에는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쓴 편지가 실려 있는데 내용에는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라고 적혀있다.

박 전 대통령의 영애가 현재 18대 대통령이라는 점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은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치권에서는 이를 지속적으로 언급해왔다. 특히 친일 성향이 강한 인사들을 요직에 임명하는 것 아니냐며 야권으로부터 친일정부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박정희·박근혜
김용주·김무성

대표적인 예가 이인호 한국방송공사(이하 KBS) 이사장과 문창극 전 총리후보자의 친일 논란이다.

이인호 KBS 이사장은 지난 2014년 9월 내정 당시 “과거 일제시대 친일행위를 비호하거나 옹호하기 위한 인사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했다. 조부의 과거 친일 행적 때문이다. 조부인 이명세는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인물로 일제강점기 시절 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발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이사장은 조부의 행적에 대해 인정했다. 2014년 10월22일에 열렸던 KBS에 대한 국정감사 자리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이 이사장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이 ‘조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하자, “조부의 행적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중일전쟁 이후에 한국에서 직업을 가지고 산다는 것 자체가 오역이었다”며 “일본과 타협하고 체제에 안주했던 분”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오히려 이 이사장 본인의 발언이 구설에 올랐다. 대중의 정서와 괴리가 느껴지는 발언을 한 사실이 문제로 지적됐다. 이 이사장은 강연을 다니며 “백범 김구 선생은 건국 공로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해 논란이 된 적 있다.

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는 본인의 친일 발언이 구설수에 올랐다. KBS는 문 후보자가 내정된 직후 교회에서 ‘일제의 식민지배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고 보도했다. 논란이 일파만파 퍼지자 위안부 할머니들과 시민단체는 총리 후보 사퇴를 촉구했고 결국 문 후보자는 청문회에 서지도 못하고 낙마했다.

문 후보자는 독립운동가의 자손으로 알려져 아이러니함을 자아냈다. 앞서 국가보훈처는 문창극 후보자의 할아버지와 건국훈장을 추서 받은 문남규 선생이 동일 인물로 보인다고 밝힌 바 있다. 문남규 선생은 지난 1921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전투하다 전사한 대한독립단 소속 독립투사로 알려져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정치인 선친
자유롭지 못한 고위공직자도

전·현직 국회의원들도 자유롭지 못하다. 현직에서는 새정치연합 신기남·이미경 의원이, 전직 국회의원으로는 정동영·유시민 전 의원이 대표적이다. 신 의원은 아버지 신상묵은 일본 헌병을 지낸 이력이 있으며, 이 의원의 부친 이봉권은 황군 헌병오장으로 활동했다는 주장이 있다.

정 전 의원의 부친 정진철은 조선 농민들의 자금과 인력을 동원을 담당했던 금융조합에서 서기로 5년간 근무한 경력이 있다. 유 전 의원의 부친 유태우는 일제가 세운 전쟁으로 빼앗아 세운 만주국에서 역사 훈도로 재직했는데, 당시 역사 훈도는 일본 군국주의 역사를 찬양하는 내용을 교육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친의 친일 또는 본인의 행적을 공개적으로 사과한 사람도 있다. 신 의원은 지난 2005년 부친의 친일 행적을 사과하며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직을 사퇴하는 용단을 보였다. 신 의원은 당시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부친의 친일인사 명단 포함 여부와 관계없이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 진정으로 화해하는 새로운 국민통합의 역사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친일 논란이 거짓으로 드러난 사례도 있다. 한민구 국방부장관은 과거 청문회 자리에서 조부가 친일파였다는 논란에 휩싸였으나, 사실과 다름을 밝혀냈다. 학계의 뒷받침이 결정적이었다. 한 장관 측은 “(아버지) 한봉수 의병장에 대한 행적은 이미 학계에서 검증됐고, 친일 행적은 없었다”고 일부 언론에서 주장하는 것과 사실이 다름을 알렸다.

신기남·이미경
정동영·유시민

이항녕 전 홍익대 총장은 살아생전 자신의 친일 행위를 반성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그는 경남 하동초등학교 강당에 올라 “저는 하동군수로 1년, 창녕군수로 3년간 있었는데 그때는 징용·징병·학병을 보내기 위한 일을 했다”며 “그때 그렇게 집을 떠나야 했던 분들 가운데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일본의 앞잡이로서 그런 일을 저질렀던 나쁜 죄인이었다”고 고백했다.

대중을 향해 고해성사를 한 이 전 총장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적어도 당시 군수 이상의 관리는 친일파로 볼 수 있다.” 과연 이 전 총장의 말처럼 구분을 하면 친일파, 또 그의 후손들을 모두 골라낼 수 있을 것인가. 그 과정에서 자칫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하는 건 아닐까. 후손들에 대한 책임 추궁은 연좌제가 아닐까. 아직까지 국민들이 바라는 수준의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에 대한 논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chm@ilyosisa.co.kr>



<광복 70주년 특별기고> 일본의 무사도는 짝퉁이다

무사도는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사랑하고 자랑으로 여기는 정신이다. 가히 일본의 국민정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정신은 일본 고유의 정신이 아니라 서양의 기사도를 모방한 정신이라고 믿어진다.  일본역사에 있어 ‘무사도(사무라이 정신)’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에 의하여 1899년 <BUSHIDO -The Soul of Japan>이라는 책이 미국에서 영어로 출판하면서이다. 당시 니토베 이나조는 37세에 불과한 젊은이였다.

무사도라는 글자가 최초로 등장하는 문헌은 1585년의 <고요군칸>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책에서 무사도의 뜻은 무사의 용감한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지 오늘날 같이 충성, 명예, 청빈 등 여러 가지의 뜻을 포함한 무사도개념(사무라이정신)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글자의 모양은 같지만 그 뜻은 완전히 다른 글자인 것이다.

니토베 이나조는 일본 문헌에서 무사도라는 글자가 사용된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뜻을 전혀 모른 채 무사도라는 글자를 스스로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전에 나오는 무사도라는 글자와 그의 무사도 글자는 모양만 일치할 뿐 뜻은 전혀 다른 글자가 된 것이다.

모양만 일치할 뿐 그 뜻은 전혀 다른 별개의 글자라는 면에서 니토베 이나조 이전에는 무사도라는 개념뿐 아니라 글자도 없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저자 니토베 이나조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에 유럽과 미국에서 유학하고, 미국인 여자와 결혼까지 한 서구 문화에 상당히 익숙한 젊은이였다. 반면 일본 역사에는 매우 어두워 당시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읽는 수필집 <쓰레즈레구사(徒然草)>조차도 몰랐다고 한다. 

그가 유학시절 유럽의 교수로부터 “일본은 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치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학생들에게 도덕적 규범을 가르치며 일본의 도덕적 가치관은 무엇인가?” 하는 당혹스런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한 답변이 궁색해 자존심이 상했던 그는 며칠을 생각해 보니, 그것은 무사도였다 라는 것을 겨우 생각하게 됐다고 책 서두에서 말하고 있다. 그가 여기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지 않지만, 서구 문화에 익숙해 있던 그는 여기서 기사도를 생각했던 것 같다.

옛날 서양의 기사들에게 있었던 ‘기사도’라고 하는 규범이, 오늘날 서구인들에게 신사도라고 하는 도덕적 규범의 모태가 되었듯이, 옛날 일본의 무사들에게도 나름대로 어떤 규범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규범을 인용해 오늘날 일본인의 도덕적 규범을 설명하면 서구인들에게 보다 쉽게 이해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일본인으로서의 자긍심도 내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작가 스스로 “서양의 기사도와 일본의 무사도처럼 비슷한 것도 없을 것”이라고까지 책에서 밝힌 것처럼, 일본 사무라이들의 행태를 서양 문화와 기사도에 비교하면서 설명하고 있으나, 책을 쓴 과정과 환경 등을 살펴보면 서양 문화와 기사도의 여러 행태에 일본 문화와 사무라이의 행태를 끼워 맞추어 쓴 것이라는 강한 의구심이 든다.

<전쟁터의 정신사(한글판: 무사도는 없다)>를 쓴 ‘사에키 신이치’도 “니토베 이나조는 무사도를 쓰면서 기사도를 뼈대로 하여 새로운 개념을 덧붙일 생각으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깊이 있게 조사하고 분석하였다”고 씀으로써 무사도가 기사도의 모방임을 밝히고 있다. 

니토베 이나조는 무사도는 충(忠)·의(義)·용(勇)·인(仁)·예(禮)·성(誠)을 기본으로 하며, 이 무사도가 바로 일본 민족의 아름다운 이상이자 도덕적 규범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상상력에 근거하여 저술한 창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영어로 출간된 이 책이 미국에서 유명해지자, 일본으로 역수입하게 되고 일본에서 또한 유명해지게 된다. 당시 침략을 준비하던 군국주의의 일본정부가 자국 군인과 국민들에게 충성심과 용맹성을 강조하는 교육을 시키기 위한 정신 교육용으로 이 책의 주 내용을 채택하게 된다.

그러면서 근거도 없이 저자가 상상을 하며 제멋대로 쓴 책의 주장을, 정훈교육 관점에서 홍보하고 교육시키면서 더욱 과장하고 미화시켰다. 그리고 한번 과장하고 미화하기 시작한 바람은 더욱 거세지면서 많은 어용학자들이 나서서 시시콜콜한 사무라이들의 이야기조차도 무슨 대단한 일인 양 부풀려 가면서 자국 국민들을 세뇌시켰다. 일본정부는 문단총동원(文壇總動員)령을 내려 문인들로 하여금 침략전쟁을 선동하고, 어용 논리를 만들어 주변국 침략을 정당화하면서 침략전쟁을 일본민족의 성전이라며 선동하고 참전 열풍을 일으켰다.

사무라이와 관련된 논문과 책이 대량으로 발행된 것도 이때였다. 이렇게 하여 정확한 역사 사실에 대한 조사도 없이, 단지 37세의 젊은이가 기사도를 모방하며 멋대로 쓴 엉터리 창작품 무사도가 오늘날 일본인들의 기본 정신인 양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사무라이 정신은 거짓이다> 저자 장성훈

 

*본 내용은 일요시사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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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