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초대석> 시간을 잡고 있는 레코드집 사장님 이석현

LP로 즐기는 3D 입체 사운드

[일요시사 경제2팀] 박효선 기자 = 서울 명동 도심, 신세계백화점 거리는 늘상 최신 유행으로 치장한 인파로 북적인다. 이곳 주변 회현 지하상가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레코드 가게가 있다. LP 역사의 나이테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리빙사'.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레코드 가게 중 하나다. 빽빽한 LP판으로 가득한 리빙사는 세월을 거슬러 현재를 버텨내고 있다. 60년 역사를 자랑하는 회현역 터줏대감 리빙사를 찾아가보았다.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 마루였을뿐 /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거기 부러진 나무 등걸에 걸터 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이석현 리빙사 사장이 LP 한 장을 턴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숨을 멈추고 아슬아슬하게 올린 바늘이 ‘지지직’ 소리를 내는 순간, 가수 김민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읇조리며 노래한 ‘봉우리’가 흘러나왔다. 바늘은 구불구불한 LP판의 골을 지나면서 만난 공기까지 김민기의 목소리로 전달했다. 한때 금지곡이었던 이 음악은 어느덧 추억이 됐다.

장인 가게 물려받아

한국에서 LP의 역사는 불운했다. 1970년대에 나온 김민기의 앨범은 판매금지를 당했다. 그 시대에는 많은 곡이 금기시됐다. 그래도 낭만이 살아있었다. 당시 자유를 향한 열망이 강했던 젊은이들이 많은 음악을 듣고 쏟아냈다. 그러나 LP를 구하기는 무척이나 어려웠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마음껏 음악을 들을 수 있다. 1980년대 LP에서 1990년대 테이프, 2000년대 CD와 MP3,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듣고 싶은 음악을 스마트폰으로 들을 수 있는 시대로 넘어왔다. 자연스레 음반판매상은 과거의 유물이 됐다.

그렇게 2000년대를 기점으로 수많은 음반점이 무너졌다. 광화문 등지의 중고 LP판매점도, 동네 골목에 있었던 소규모 매장들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불법 카피 음반은 활개를 쳤다. 음악은 더 이상 손에 잡히지 않는다. '소유'보다는 '공유'의 개념에 가까워지면서 음반에 대한 가치와 소중함도 점차 사라졌다.


1965년 리빙사의 문을 열었던 고 정호용 옹은 50년 동안 음반시장의 몰락을 직접 지켜봤다. 그렇게 열악한 상황에서도 리빙사를 지켜냈다. 지금은 쉰이 다 되가는 그의 딸과 사위 이석현 사장이 리빙사 문을 열고 있다. 2003년부터 10년이 넘도록 리빙사 공간을 턴테이블에 LP를 얹어 음악으로 가득 채웠다.
 

“어려웠죠. 많이 어려웠습니다. 리빙사를 지켜내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었어요. 저희 아버님(정호용 옹) 아니었으면 리빙사는 없어졌을 겁니다. LP판매는 수익 때문에 하는 게 아니거든요. 돈을 벌 생각이었으면 여기서 옷 장사를 했을 겁니다.”

리빙사는 전국 각지의 LP소매상들이 이곳을 뒤질 정도로 양질의 다양한 LP를 구비하고 있다. 리빙사 앞에는 종이 박스를 하나씩 옆에 낀 사람들이 쪼그려 앉아 LP를 고르는 풍경이 펼쳐진다.

“음악이란 게 다른 게 없어요. 느낌, 그리고 감동이죠. 이렇게 LP음반을 듣고 있으면 소리가 너무 생생해서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노래했는지 교감이 되거든요.”

60년 역사 자랑…회현역 터줏대감
클래식서 가요까지 5만여장 보유

처음 리빙사를 찾아갔을 때 그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인터뷰 해달라는 말 때문이었다. 락 밴드 ‘마이 모닝 자켓(my morning jacket)’ 음반을 찾으러 왔다는 요청에도 직접 찾아보라고 권했다.

“LP판은 직접 찾아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빠른 속도로 LP판을 넘기다보면 보물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LP판을 찾는 것을 ‘디깅(digging)한다’고 표현하지요. ‘파다’보면 예상치 못한 귀한 LP를 구하게 될 겁니다.”


이 사장은 1973년에 발매된 비틀즈 베스트 LP판을 추천했다. LP판 위로 카트리지가 살포시 내려앉으며 흘러나온 비틀즈의 ‘Till There Was You’ 소리는 생각보다 깨끗했다.

“LP에 대해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어요. LP판에서 잡음이 난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실제 LP판 자체는 소리가 깨끗해요. 턴테이블 문제였죠. 예전에 물자가 없다보니 턴테이블 자체가 불량인 제품이 많았어요. 바늘이 LP판에 상처도 많이 냈고요. 그 상처에 걸려서 나는 소리가 ‘지글’거리는 소리고요.”

“사실은 LP판 소리가 MP3나 CD보다 소리가 깨끗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MP3나 CD의 경우 지나친 고역대나 저역대 등 음역대를 일정한 톤에 맞춰 어느 정도 잘라내요. 그래서 소리가 인위적이고 왜곡되는 부분이 있어요. LP는 그러한 음역대를 그대로 담아냅니다. 그래서 LP판에서 나오는 음악소리가 더욱 풍성하고 질감 있게 느껴지는 거에요. 소리에 대한 3D라고 표현할 수 있죠.”

“어렵지만 버틴다”
나얼 장재인 단골

유명한 가수들도 이곳을 찾는다. 가수 나얼과 <슈퍼스타K> 출신 가수 장재인도 리빙사의 오랜 단골이다.

“잊을 수 없는 손님들이 많죠. 요즘은 못 뵀는데 아버님이 운영하셨던 때부터 오셨던 40년 단골손님이 생각나네요. 그분은 대학생 때부터 여기 오시곤 했어요. 지금은 예순이 넘으셨을 거예요. 아버님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눈물 흘리시던 분도 계셨고요. 가수들도 자주 찾아와요. 나흘 전엔 장재인도 여기 왔었어요. 여태껏 얼굴을 몰라서 유명한 가수인지 몰랐는데 나얼도 여기 와서 LP판 구입했어요. 자주 와요. 그 친구.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와요.”
 

리빙사에는 옛날 음반만 있는 게 아니다. 최신까지는 아니어도 요즘 가수들의 앨범도 LP판으로 판매하고 있다.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의 두 번째 앨범, 이승열의 세 번째 앨범, 영화 <만추> OST 등 LP음반도 볼 수 있었다. 지난해에는 빅뱅 지드래곤의 LP음반도 한정 판매했다.

요즘 노래도 판매

그가 말했다. LP는 한 번도 죽은 적이 없다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있어요. 요즘 언론에서는 LP가 부활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LP는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어요. 우린 그저 팔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죽었느니 살았느니 하는 게 새삼스럽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신신당부하셨어요. 돈 못 벌어도 리빙사를 계속 운영했으면 좋겠다고. 음악의 가치가 살아있는 한 LP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정호용 옹이 그토록 지키고 싶던 리빙사. 이석현 사장 부부가 장인어른의 약속을 2대에 걸쳐 지켜가고 있다. 아침마다 청소를 하고, 먼지를 털고, 턴테이블에 음반을 얹어 리빙사 공간 가득 음악을 채운다.

 

<dklo216@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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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