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사무라이 정신은 거짓이다 ①사쿠라 꽃향기의 진실

"사무라이 정신은 국민교육 차원에서 도입됐다"

올해는 광복 69주년이 되는 해다. 내년이면 벌써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지만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는 요원하기만 하다. 게다가 고노담화를 부정하고,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는 등 일본의 역사인식은 과거보다 오히려 퇴보하고 있어 국민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일본의 자랑인 ‘사무라이 정신’의 실체를 낱낱이 밝혀내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이 있다. <일요시사>가 화제의 책 <사무라이 정신은 거짓이다>를 입수, 단독 연재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로 세계무대에 등장한 일본은,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전에 참가하게 된다. 일본의 전쟁 참가는 그 당시 심각해진 국내 경제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

유럽과 중동 지역 등에서의 전쟁은 세계대전이라고 불릴 만큼 치열하였지만,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주축군의 세력 자체가 미약했으므로 전쟁이라고 할 만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침체된 자국 경제를 일으키기 위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전하면서 이렇다 할 노력도 손실도 없이 승전국의 일원이 된 일본은,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중국과 아시아 지역의 경제 기반을 손쉽게 획득함으로써 알토란 같은 전쟁 특수의 맛을 볼 수 있었다.

군국주의의 길

그 후 일본은 본격적인 군국주의의 길을 걷는다. 군국주의자들이 집권하고 침략을 준비하면서 자국민들에게 침략을 정당화하고, 전투에 임해서는 용감히 싸우라고 정신 교육을 시켰다. 자국민들의 정신 교육을 위하여 많은 어용학자와 어용종교가들이 나섰다. 어용 논리를 펴면서…….

심지어 당시 고승이라고 존경받던 스님들조차 나서서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옹호했다. 스님이 나서서 감히 사람을 많이 죽여야 한다고 대중에게 설법을 한 것이다.

당시 고승으로 알려진 ‘하라다 다이운(Harada Daiun)’은 “전쟁터에 몸을 던져 보지 않고 불법을 아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고, 또 다른 고승으로 당시 일본인들에게 신망을 받던 ‘야스타니 하쿠운(Yasutani Huku’un)’은 “우리는 용감하게 싸워야 하고 적군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죽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자비와 충성을 완벽하게 수행하려면 선을 돕고 악을 처벌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이는 순간, 죽이되 죽이지 않는다는 진리를 마음에 품고 눈물을 삼켜야만 한다”고 자국민들에게 설법을 했다. 일본에서 ‘사무라이 정신’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군국주의 아래에서, 침략을 준비하면서 자국민들에게 정신 교육을 강화하기 위하여 사무라이 정신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새로 권력을 잡은 메이지 유신(명치유신) 세력들은 집권 초기에는 사무라이들을 비난하고 격하시켰으나, 군국주의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다시 ‘사무라이 정신’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임진왜란은 끝났고, 일본은 그의 사후 권좌를 둘러싸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파’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파’ 간에 심한 권력 투쟁으로 들어갔다. 일본 전국의 영주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서군으로 나누어져 1600년 10월, 세키가하라 평원에서 양파의 운명을 건 일전을 벌였다. 이 전쟁이 세키가하라 전쟁으로 전국시대를 끝내는 마지막 대 혈전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를 거두면서 130년이나 계속되던 전국시대는 드디어 막을 내리고 ‘도쿠가와’ 가문에 의하여 통치되는 ‘에도 막부’가 열리게 되었다. 그 후 일본은 약 270년간의 평화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그로부터 약 250년 후인 1853년 7월, 일본 역사에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전환을 일으키는 사건이 일어난다.

1차 세계대전서 맛본 전쟁특수 못 잊어
메이지유신으로 근대국가 반열에 올라


바로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이었던 ‘매튜 페리(Matthew Perry)’ 제독이 네 척의 거함을 이끌고 지금의 동경 앞바다에 나타나 해안을 봉쇄하며 개항을 요구하는 통상 조약 체결을 요구한 것이다. 미국이 일본에 개항을 요구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태평양에서 고래잡이를 하는 미국 어선들의 기착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래 기름은 가정집의 등불을 밝히고 공업용으로도 사용되던 중요 산업으로 그 규모가 연간 9000만 달러에 이를 정도였다. 이 어선들이 어업 도중 필요한 식수와 식량을 구하거나, 또는 태풍을 만났을 때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가까운 곳의 항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중국 진출을 수월하게 하기 위하여 미국에서 아시아로 오는 중간에 기착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페리 함대의 기함은 그 크기가 무려 2450톤으로 당시 일본의 주력함들의 크기가 100톤에서 200톤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2450톤의 기함은 지금으로 치면 10만톤급의 항공모함과 같은 거함이었다. 
거기에 목재가 썩지 않게 콜타르 칠을 해, 일본인들은 이를 ‘흑선(黑船 : 구로후네)’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군함에서 쏘아대는 대포 또한 그 위력이 대단해 일본인들은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떨었다.

무력시위를 앞세워 개항을 요구하는 전형적인 서구의 열강 외교였다. 이듬해인 1854년 일본은 미국과 굴욕스런 통상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1858년까지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 등 유럽 열강들과 불평등한 통상 조약을 맺게 된다. 막부가 겁을 먹고 국익에 어긋나는 조약을 맺은 것이다.

당연히 내부에서 막부의 굴욕스런 태도에 반발이 생겼고, 일부 영주를 중심으로 반 막부 집단이 생기면서 막부와 반 막부 사이에 대립하는 정치 격동을 겪는다. 1866년 막부와 반 막부 사이 전투에서 막부가 패배하면서 270여 년이나 내려오던 에도 막부는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1867년에는 쇼군 통치로부터 왕이 직접 통치하는 ‘왕정복고’라고 하는 일대 혁신이 이루어진다. 아울러 서구식 의회 정치 제도도 도입되었다.

이 개혁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 명치유신)이라고 한다. 메이지 유신 세력은 집권을 하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도했다. 학제, 징병제, 토지 제도 등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하면서 봉건 제도도 없애버렸다.

봉건 제도를 없애면서 수백 년을 내려오던 다이묘(영주) 제도도 없애고, 그동안 영주들이 갖고 있던 영지는 국가로 환수시켰다. 더 이상 영주들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서양 열강들에게 무참히 침략당하는 중국을 보면서 또 하나의 중국이 되지 않기 위하여 서양 기술을 배우며 군사력 증가에도 힘을 기울였다.

군사력 증강

일본은 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봉건 국가에서 근대 산업 국가로 탈바꿈하는 역사적 전환점을 맞는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 역사에 있어 전환점이 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때 배운 서양 기술을 바탕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앞선 군사력을 갖추게 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우리 조선을 강점하고 중국을 점령하고 동남아시아로 침략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하게 된 계기는 두말할 것 없이 미국의 무력에 의하여 강요되어진 개방이었다. 흑선의 거대한 위용에 놀라고 거기서 쏘아대는 대포의 위력에 기겁한 나머지 저항 한번 못해 보고 백기를 든 결과이다. 총 한방 못 쏴보고 항복한 이 나약함이 바로 우리 조선보다 근대화를 앞당기는 기회를 가져다 준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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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까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 초,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가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