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 사람들 릴레이인터뷰 ④> 김옥두 전 의원

“다음 세상에서도 DJ 모시겠다”



민주화운동 함께한 동교동계, 인동초 삶도 함께 견뎌
모진 고문·수감생활…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몰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동교동계 인사들이 주목받고 있다. 오랜 시간 김 전 대통령의 곁에 머물면서 그의 삶을 생생히 목도했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세간에 알려진 ‘김대중’보다 더 따뜻했던, 눈물 많고 정 많은 김 전 대통령을 보았고 민주화를 위해 끝없이 투쟁한 인동초 삶의 곁에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의 유훈도 이들에게는 평소 들어오던 말일 뿐이다. 동교동계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 전 대통령의 숨겨진 일면들과 그가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되새겨봤다.

김대중 전 대통령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머물렀다. 그러나 동교동 사람들 중에서도 ‘동교동계’라 불리는 이들은 좀 더 특별하다. 김 전 대통령이 자신의 이름도 쓰지 못하고 ‘동교동 재야인사’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소통할 때 그와 함께하며 민주화 운동을 했던 ‘동지’들이기 때문이다.
그중 한 명이 김옥두 전 의원이다. 수십 년 세월 동안 모진 고문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김 전 대통령과 같은 곳을 봤고, 죽어서도 김 전 대통령을 모시고 싶다고 말하는 이. 그에게는 김 전 대통령이 인동초 꽃을 피우기까지 살아왔던 모진 겨울이 아직까지 눈에 선하다.
완연한 가을 날씨를 보이던 지난 14일 광화문에서 그를 만났다. 다음은 김 전 의원과의 일문일답.

- 국장 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
▲ 종종 김 전 대통령의 묘지를 찾고는 한다. 오늘도 다녀왔다. 이희호 여사와 권노갑 고문 등 김 전 대통령을 그리는 이들과 함께 참배를 하고 바로 오는 길이다. 49재는 치르지 않기로 했지만 애도기간으로 여기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 아직도 DJ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나나.
▲ 일본에서 납치를 당하셨다가 가까스로 돌아오신 후 매년 8월13일은 ‘제2의 생일’로 기념해왔다. 올해도 도쿄 피랍 생환 36주년을 기념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던 중 입원을 하셨다. 이전에도 입원을 하셨지만 건강을 회복하셨기 때문에 당연히 강건하게 돌아와 행사에 참석하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심장이 터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국장을 치르면서 자녀의 손을 잡고 가족끼리 빈소를 찾은 이들을 많이 보았다. 진심으로 슬프게 울더라. 나도 굉장히 많이 울었지만 지금도 눈물이 난다. 김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여전히 살아계신 것만 같다. 동교동 자택 거실에 있으면 김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곧 들어오셔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주옥같은 말씀을 해주실 것만 같다.
 
- 동교동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된 것인가.
▲ 나는 오랜 기간 김 전 대통령의 비서로 있었지만 처음부터 동교동 자택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다. 1965년 초 김 전 대통령이 자비를 털어 운영하던 정책연구실인 한국내외문제연구회에 비서로 들어갔다. 거기서 성실성을 인정받아 1966년 말 동교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김 동지! 내 그동안 자네를 유심히 지켜봤는데 성실성이 참 마음에 드네. 내일부터는 동교동으로 출근해 일을 하도록 하소. 도와주기 바라네”라고 하셨다.

- DJ가 걸어온 길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 김 전 대통령이 걸어온 길은 탄압의 역사였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모진 탄압을 받았다. 암울한 시대에는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으로 국민과 민족,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평생을 살아오셨다.
정의가 아닌 것은 행하지 않으셨다. 말뿐 아니라 실천하셨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며 인동초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나는 그 역사의 증인 중 한 사람일 뿐이다.
 
- DJ에 대한 탄압은 1971년 대선에서 DJ가 박정희 정권을 위협하는 결과를 보이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 1971년 대선에서 우리는 수많은 표를 잃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대권을 두고 승부를 벌였을 때 동교동의 표는 다 무효가 됐다. 부정선거라는 이유로 김 전 대통령과 그 가족, 동교동 사람들 1600명의 표가 전부 효력을 잃었다. 게다가 영남지역에는 공명선거 감시단 참관인들이 아예 발을 붙일 수도 없었다. 협박해서 쫓아버리거나 술과 밥과 돈으로 매수했다.

- 이후 어떤 고초를 겪은 것인가.
▲ 1972년 박 전 대통령이 영구집권을 위해 유신을 선포했다. 그 이튿날쯤이다. 나는 동교동 자택으로 막 들어가다 중앙정보부 기관원들에게 끌려가야 했다. 광화문 분실에서 갖은 고문을 당했다.
동교동 사람들 대부분이 4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로지 한길을 걸어왔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형무소에 가고 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나도 여러 번 겪었는데 1980년 5·18때가 가장 심했다. 두 달간 내란음모죄로 고문을 당했다.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나쁘다’ ‘김대중과 가까운 군인, 경제인, 학생, 교수, 언론인은 누구냐’ 몰아치듯 질문이 이어졌다. 김 전 대통령의 사상이 이상하다는 글만 써 주면 원하는 대로 돈도 주고, 국회의원도 시켜주고,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겠다고 회유하기도 했다.

- DJ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 없나.
▲ 오히려 정반대였다. 고문이 극심해지자 “너희들이 내 몸을 찢어발긴다 해도 내 정신을 뺏을 수는 없다. 차라리 죽여라”라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을 모셨던 동지, 가족, 친지들이 탄압을 받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자기가 싫어서 나간 사람은 있어도 김 전 대통령을 배신한 이는 없다. 김 전 대통령의 인간성, 정, 행동하는 양심을 그분을 모시며 모두 봐왔기 때문이다.
정권이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온갖 비방을 했지만 모시고 있는 사람이 봤을 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장기집권을 위해 김 전 대통령을 탄압한 것에 불과했다.
당시에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분이 대통령이 될 거라고는 꿈도 못 꿨다. 한길을 걷다 보니 나도 국회의원이 됐다. 김 전 대통령 밑에서 공부했던 비서들은 의원회관에서 날을 새가며 공부를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국감스타가 됐고 ‘과연 훌륭한 이에게 배워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 DJ의 감옥생활은 어떠했나.
▲ 1980년 내가 서울구치소에 수감됐을 때 김 전 대통령도 다른 곳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이중 감옥생활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 전 대통령이 머무는 감방 양 옆을 비워서 누구도 접촉하지 못하게 했다. 면회를 갈 때도 그분만 다니는 길이 따로 있었다.
면회를 하기 위해 어두운 길을 걸어오는데 가족들이 항의해서 겨우 불을 켤 수 있도록 했다. 인터폰으로만 이야기하고 볼펜도 주지 않았다. 하루는 운동을 하다가 못을 하나 구해서 책을 읽다가 중요한 부분이 있으면 점자식으로 찍어서 표시했다. 그런 책들이 한두 권이 아니다. 한 달에 한 번 밖으로 엽서를 보낼 때는 엽서 한 장에 깨알같이 글자를 써서 수만 자를 적어 보냈다.
 
-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DJ는 사형을 선고받게 되지 않나.
▲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최후진술에서 “나는 아마도 사형판결을 받고 또 틀림없이 처형당하겠지만 내가 처형당한다는 것도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 기회를 빌어 유언을 남기고 싶다. 내 판단으로는 머지않아 1980년대에는 반드시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확실히 믿고 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다. 이것이야말로 내 마지막 남은 소망이기도 하고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내 마지막 유언이다”라고 했다.
재판부는 “김대중 사형!”을 선고했다. 짜여진 각본에 따라 일사천리로, 속전속결로 진행된 재판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일본과 미국 등 전 세계의 여론이 들끓었고 대대적인 석방시위가 벌어졌다. 카터 행정부로부터 김 전 대통령의 제를 정식으로 인계받았던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국 방문의사를 매개로 사형이 확정된 김 전 대통령을 구명하고자 애썼다.

- 워낙 생명의 위협을 많이 받았던 DJ였으니 경호도 철저했을 것 같다.
▲ 김 전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했을 때 경호를 책임졌었다. 김 전 대통령은 여러 번 생명의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 경호에 만전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2층에서 계단으로 내려올 때 누가 뒤에서 밀지 않을까, 식사를 하면 누가 독극물을 넣은 것은 아닌가, 자동차를 타면 타이어에 구멍이 나서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경호원 한 사람 한 사람이 24시간 경호체제로 김 전 대통령을 철통경호했다.
일화도 많다. 오후 7~8시쯤 날이 저물 무렵 김 전 대통령이 연설을 하고 있으면 창살이 날아왔다. 옷에 스치면 옷이 찢어질 정도였고 그 창살을 맞고 다친 이도 있다. 식사를 할 때마다 항상 옆에서 은수저를 준비해 독이 들었는지 확인했다.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전방에 간 일이 있다. 청와대 경호실 책임자가 당선자에게 방탄조끼를 줬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내가 우리 군인을 믿지 않으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며 끝내 그 방탄조끼를 입지 않았다.
 
- 대선기간 동안 경호문제뿐 아니라 건강문제에도 크게 신경 써야 했을 것 같은데.
▲ 워낙에 건강하셨다. 대선기간 동안 하루에 19군데에서 유세를 펼쳐 연설을 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악수를 했다. 유세를 하고 곧장 다른 장소로 이동하다 보니 제대로 식사를 할 시간도 없었다. 차에 군것질거리를 뒀는데 많은 사람들과 악수한 손 그대로 집어 드셨다.
5분간의 토막잠도 그분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많은 영향을 줬을 것이다.
대선기간 중 ‘DJ가 쓰러졌다’ ‘유세를 못 한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당시 대선주자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토론회를 했는데 매주 TV토론회에 건강한 모습이 나왔다. 상대후보 측에서 퍼뜨린 유언비어는 그 TV토론회 때문에 거짓으로 탄로 났다.


- 곁에서 지켜본 DJ는 어떤 사람이었나.
▲ 온화하고 따뜻한 분이셨다. 비서에게도 반말하는 일이 없이 항상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손이 따뜻했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참 따뜻한 분이셨다. TV에서 슬픈 장면이 나오면 눈물을 흘리곤 하셨다. 이희호 여사와 산책을 하거나 드라이브를 다니셨는데 꽃을 좋아해 꽃이 많이 핀 곳으로 드라이브를 가시고는 했다.
새도 좋아했지만 키우지는 못했다. 새를 키우려면 가둬야 하는데 그게 철창 아니냐. 김 전 대통령 본인이 철창에 갇혀봤기 때문에 가두는 것을 싫어했다. 자택에 참새들이 모이면 모이를 주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 DJ 하면 깊은 학식이 생각난다. 그 학식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나.
▲ 워낙 명석하신 분이셨다. 어느날 신문에 기사가 났는데 한 달여 전에 난 기사를 보지 않고서는 이해가 어려운 기사였다. 김 전 대통령은 “한 달 전 모일에 무슨 신문 몇 면에 이런 기사가 났는데 찾아오라”고 하셨는데 해당 신문을 찾으면 찾으시는 기사가 분명 있었다. 사람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놀라울 정도였다.
책을 정말로 많이 읽으셨다. 책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보니 주무실 때도 책을 보다 잠드는 경우가 많았다. 종종 글귀를 인용하시고는 했는데 그 말이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게 말씀하셨다.
또한 선거 때 수행을 하다 보면 시간 날 때마다 영어 단어를 외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평생 공부를 하신 것이다.
예전에 권노갑 고문의 지인 중 한국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진 이가 있었다. 몇 년 동안 공부를 해왔는데 김 전 대통령을 만나 두 시간여를 이야기하더니 “몇 년간 배운 것을 두 시간 동안 다 알게 됐다. 존경스럽다”고 하더라. 그 정도로 학식이 깊으셨다.
 
- DJ의 공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김 전 대통령이 당선되고 임기동안 IMF를 극복하면 대통령으로서 해야 할 일은 다 하는 거라고 했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일 내에 IMF를 극복해냈을 뿐 아니라 외환보유고를 최고로 만들었다. 전 세계에 경제위기가 몰아쳤을 때 이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그것이 기반이 된 때문 아니겠냐.
정치, 경제 문제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토대도 닦았다. 중산층과 서민을 위해 애썼다. 남북 화해협력시대를 열자고 하셨고 서거 후에는 북한에서 특사가 와 이명박 대통령을 만남으로써 남북관계 개선에 일조했다.
입원하시기 전에 9~10월경이면 북미간 대화가 이뤄질 거라고 하셨는데 지금 그렇게 되지 않았나. 김 전 대통령이 클린턴 전 대통령과 힐러리 장관에게 대북관련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안다. 이 중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함으로써 북미간 대화의 장을 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국내보다는 외국에서 김 전 대통령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것 같다. 내가 봤을 때 전 세계를 통틀어 김 전 대통령처럼 고통 받고, 생명의 위협을 받은 사람이 없다. 감옥에 가고 사형선고를 당하고 57회의 연금까지.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한번도 굽히지 않았다.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라 부르며 진지한 경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과거 군사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유포한 퍼트린 유언비어와 그로 인해 김 전 대통령을 비판하게 된 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이제 와서는 그들이 김 전 대통령이 어떤 이였는지 알게 되고 있는 것 같다.
 
- 시간이 더 흐르면 DJ에 대한 평가가 더 나아질 것으로 보는가.
▲ 역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은 높이 평가될 것이다. 어떤 직책에 있었느냐가 아니라 과연 ‘행동하는 양심’으로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대한 부분이 평가받을 것이다.
 
- 정치권에 바라는 바가 있다면.
▲ 정치는 노장의 조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당과 시민단체가 잘 뭉치길 바란다. 또한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당이 됐으면 좋겠다. 민주당은 정통 있는 정당인 만큼 서민과 중산층을 대변해 잘해나갈 것으로 믿는다.
민주주의가 튼튼하고 국민들이 잘사는 세상이 되도록 정치가 잘해야 할 것이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 김 전 대통령을 모신 것은 내 인생 최고의 행복이었다. 항상 그분의 비서였으며 죽어서도 김 전 대통령을 모실 것이다. 그분의 유업인 국민화합에 만분지일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김옥두는 누구?

▲1938년 8월 18일 전남 장흥 출생
▲1985년~1992년 김대중 총재 비서실차장
▲1987년 평화민주당 김대중 대통령후보 경호실장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1999년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비서실장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2000년 새천년민주당 사무총장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단독> 정보사, ‘북한 무인기’ 30대 남 수차례 접촉 확인

[단독] 정보사, ‘북한 무인기’ 30대 남 수차례 접촉 확인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북한에 무인기를 보낸 당사자’라고 주장한 30대 오모씨의 행위와 이력을 두고 파장이 일고 있다. 그는 윤석열정부 대통령실 출신이자 ‘평양 무인기 작전’을 목적으로 설립된 무인기 설계·제작 업체 이사였다. 2년 전부터의 행적도 수상하다. 정보사령부 휴민트 요원들과 수차례 접촉해 사실상 대북 공작을 준비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지난 17일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오씨와 정보사의 직접적 연결고리가 형성된 건 2024년 5월 이후다. 정보사와 오씨와의 접촉은 A 대령의 승인하에 이뤄졌다. 그는 정보사 블랙요원 명단 유출 사건 이후 속초 HID 부대장을 마치고 돌아온 인물로 조직개편 TF(태스크포스) 팀장 및 기반조성단장을 맡았다. 수상한 접촉 앞서 윤석열정부 대통령실 출신인 오씨는 윤정부 시절 ‘북한 무인기 대통령실 상공 침투’에 대응할 목적에서 설립된 무인기 설계·제작 업체의 이사로 근무했다. 그는 지난 16일 채널A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공개한 무인기 외관과 위장 무늬, 색 등이 자신이 북한으로 보낸 무인기와 일치한다”며 북한에 무인기를 보낸 목적에 대해 “북한 우라늄 공장의 방사선과 중금속 오염도 측정”이라고 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무인기를 북한으로 보냈다는 취지로 읽힌다. A 대령은 ‘정보사 기능·역량 강화’를 위해 추가적인 수도권 안가 설립을 기획했다. A 대령의 계획대로 B 소령은 오씨와 C 상사는 김모씨를 접촉했다. B 소령은 휴민트(HUMINT·820·인간정보) 요원이다. 이들은 오씨와 김씨를 통해 북한으로 무인기를 날려 확보한 영상 증거를 확인했다. 이 시기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박선원 의원이 언급했던 정보사의 국방과학연구소(ADD) 접촉 및 무인기 개발 의혹이 시작되던 때와 겹친다. 당시 정보사는 ADD에 “드론에 전단통을 달 수 있느냐”고 문의한 바 있다. ADD 관계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다”고 내란 특별검사팀에 진술했다. 정보사 간부는 “누구의 지시로 국방과학연구소에 드론과 관련해 연락했냐”는 특검팀의 질문에 “문상호의 지시였고 문 전 사령관이 원천희 전 국방정보본부장에게도 관련 내용을 보고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오씨의 영상 증거가 북한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A 대령은 이후에도 B 소령과 오씨의 접촉을 허가했다. ‘지속적 협력 관계’가 된 것으로 풀이된다. A 대령은 오씨에게 이른바 ‘협조비’를 제공한 의혹을 받는다. 사비가 아닌 ‘정보사 공작금’ 수십만원을 정기적으로 전달했다는 게 골자다. 이 같은 행위는 정보기관과 협조·정보원 간 이뤄지는 통상적 거래로 알려져 있다. 실제 정보기관은 국제범죄 및 마약 관련 첩보를 제공한 ‘야당’에게 많게는 수백만원의 금품을 제공하기도 한다. 정보사가 오씨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2024년 여름 ‘대북 공작’ 의심 정보사와 지속적 접촉 정보사·ADD 연락 시기 겹쳐 ‘김태효 안보실’ 연루설도 <일요시사>와 접촉한 복수의 정보기관 관계자들은 A 대령과 오씨가 일반적 협력 관계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대북 공작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정보기관이라면 늘 하는 업무다. A 대령이 오씨에게 ‘무인기를 북으로 보내라’는 지시를 한 적이 없고 그저 오씨가 회사를 설립하는 데 지원해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A 대령의 부하인 B 소령은 오씨가 북한 전문 매체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줬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 언론사는 오씨가 발행인으로 있는 곳으로 2025년 3월 중순부터 첫 기사가 작성되기 시작했다. 지난 11일을 끝으로 기사가 작성되지 않은 걸 보면 오씨가 언론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회사 운영에도 차질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정보사 출신 한 소식통은 “오씨가 채널A 인터뷰에서 무인기를 세 번 날렸다고 하는데 그건 사실이 아닌 걸로 보인다. 적어도 수십번은 날렸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북한으로 무인기를 날린 건 정보사 조직 차원의 지시가 아니라 오씨의 독단적 행동이다. 오씨와 접촉했던 담당자들도 그의 무리수 때문에 거리를 둬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군 안팎에서는 단순히 넘길 일이 아니라는 목소리가 거세다. 오씨가 대통령실 출신임과 동시에 정보사와 접촉한 배경을 명확하게 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정부 안보실 2차장 산하 정보현안대응팀에 파견됐던 HID 출신 오모 중령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오 중령은 2022년 8월 국정원장 비서실에 근무하다가 다음 해 3월 대통령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자신이 확보한 첩보를 인성한 전 2차장이 아닌 ‘안보실 실세’ 김태효 전 1차장에게 수차례 보고했다. 오 중령의 행위를 두고 대통령실 내부에서는 “비정상적 보고”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김 전 1차장은 국방이 아닌 외교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대북 문제에 어떤 군사적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전략을 세우는 데는 신원식 전 안보실장보다 한 수 아래였다는 평가다. 사실상 ‘국방 문외한’인 김 전 1차장은 2023년 강원도 속초에 위치한 HID 부대를 방문했다. 그는 “2023년 6월 초 정보당국 관계자들과 HID 부대를 격려 방문한 바 있지만 1년7개월 전에 있었던 군 부대 격려 방문을 이번 계엄 선포와 연결 짓는 것은 터무니없는 비약”이라고 반박한 바 있다. "'평양 작전' 준비하려 일종의 테스트 아니었나 의심” "오씨 독단적 행동 무인기 날리라 지시한 적 없어” 정보사 고위 관계자는 <일요시사>에 “윤석열 전 대통령도 오려고 했다는 건 사실이다. 김태효가 그때 왜 왔는지 모르겠다. 와선 안 되는 건 아닌데 올 일이 없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해 가지 않는 해명”이라고 지적했다. 다른 정보사 관계자도 “윤 전 대통령이 오고 싶어 했고 안보실이 그의 HID 방문이 검토된 바 없다고 하는데 (이건) 말도 안 된다. 당시에 대통령 방문 가능성 때문에 대비 회의까지 한 바 있다”고 강조했다. 오 중령이 2023년 12월 안보실 2차장 산하 국가위기관리센터 정보현안대응팀에 들어가게 된 건 김 전 1차장이 HID를 방문한 직후다. 오 중령은 인 전 2차장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인 전 2차장도 “공개된 자리서 말하기 어렵지만 제가 통제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오 중령을 포함한 팀원들의 보고서는 인 전 2차장이 아닌 김 전 1차장이 검토했다. 안보실은 이 비밀 TF가 “규정화된 테두리 밖에서 대북 특수정보를 분석하는 팀”이라며 계엄과 관련해 정보사와 소통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또 “비밀 조직이 아니라 위기관리센터에 배치된 ‘정보융합팀’이다. 정보융합팀은 문재인정부의 정보융합비서관실을 대북 정보 분석에 특화시켜 슬림화한 조직으로, 2022년 5월1일 대통령직 인수위 브리핑서도 해당 조직의 신설 취지와 배경을 밝힌 바 있다”고 설명했다. 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정보사 차원에서 북한으로 무인기를 보내는 건 부담이 크다. 그래서 민간과 협업해 일종의 테스트를 진행한 후 ‘나쁘지 않다’고 판단한 안보실이 평양 무인기 침투 작전을 적극적으로 기획 및 실행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했다. 대북 공작 준비? 그러나 이는 아직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다. 오 중령의 경우 내란 특검팀 소환 조사에서 김 전 1차장에게 정보 보고를 했던 사실은 인정했으나 ‘평양 무인기 침투 작전’을 기획하지는 않았다고 진술했다. 정부는 현재 군·경합동조사TF를 꾸려 무인기를 북한에 보낸 정확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등을 수사 중이다. 무인기를 보냈다고 주장한 사람의 과거 이력과 정보사와의 접촉이 확인된 만큼 숨겨진 목적에 대해 수사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