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 사람들 릴레이인터뷰 2>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

“DJ는 국민 속 영원한 지도자…역사가 평가할 것”



대학 시절 차별 없애기 위해 ‘김대중’에 평생 각오
DJ공적은 ‘화해와 용서’, 복지·문화에 대한 기여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동교동계 인사들이 주목받고 있다. 오랜 시간 김 전 대통령의 곁에 머물면서 그의 삶을 생생히 목도했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세간에 알려진 ‘김대중’보다 더 따뜻했던, 눈물 많고 정 많은 김 전 대통령을 보았고 민주화를 위해 끝없이 투쟁한 인동초 삶의 곁에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의 유훈도 이들에게는 평소 들어오던 말일 뿐이다. 동교동계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 전 대통령의 숨겨진 일면들과 그가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되새겨봤다.

‘새파랗다’고 할 만큼 젊은 나이에 ‘김대중’에 평생을 바치자고 각오했고 아내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더 좋다고 외친 이가 있다.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다.
김 전 대통령과 인생의 굴곡을 함께하면서 좋은 일보다는 궂은 일이 더 많았을 터이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을 모신 것이 내 인생의 가장 성공적인 일”이라며 “평생 존경하며 살아갈 것”이라고 단호히 말한다. 물고기가 바다를 떠나 존재할 수 없듯 김 전 대통령은 그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한 전 대표와의 일문일답.

- DJ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언제인가.
▲ 김대중 전 대통령과 나는 고향이 같다. 전라남도 신안이다. 대학 재학시절 고향 선배가 김 전 대통령을 찾아가는데 같이 가서 인사를 하자고 해서 찾아가게 된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 대학 재학시절부터면 상당히 오래된 인연이다. 그러나 DJ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
▲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 나는 가정교사 등을 하며 고학했다.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구하던 중 경상도 분이 나는 전라도 사람이라 안 된다고 했다. 출신 지역 때문에 차별을 당한 것이다. 이러한 차별이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봤다. 차별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차별철폐’는 내 평생 과업이 됐다.
나는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전라도 출신의 좋은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좋은 정치를 하고 국민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면 지역적 차별은 자연스레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할 수 있을까 생각했더니 김 전 대통령이 떠올랐다. ‘내 평생을 바치자’고 각오했다.

- 이후 계속 DJ 곁에 있었던 것인가.
▲ 1963년 김 전 대통령이 6대 총선에 출마했을 때 선거 운동원으로 뛰었다. 1967년 6·8 선거 때도 선거운동을 하러 내려갔었다.
1971년 대선에서는 김 전 대통령을 후보로 세우기 위해 도별 조직책이 마련됐다. 각 도마다 담당자를 둬서 민심을 모으는 것이었는데 당시 나는 경상남도와 부산에서 지지자를 끌어 모았다. 중앙 정치인이 지방 정당 당원들을 포섭한 것은 정당 사상 처음있는 일이었다.
결국 김 전 대통령이 1970년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 후보를 이겼다.

- 이후 DJ는 박정희 정권의 정적으로 지목되면서 모진 고생을 하게 되지 않나.
▲ 1972년 유신 후 1987년 복권될 때까지 16년 동안 함께 고생했다. 감옥에 갇히고 미행당하고 연금되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감시당했다.


- DJ의 대권 도전을 위해 경상남도, 부산에서 활동했다고 했는데 당시 지역감정을 생각하면 힘든 시도였을 것 같다.
▲ 김 전 대통령은 신안군, 목포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각 도에 사람이 배치돼야 하는데) 경상도 사람이 없었다. 내가 경상남도에 갔다. “전라도 사람이라 못 믿겠다”던 사람들이 “한 동지는 경상도 사람 같다”고 할 정도가 됐다. 그때 맺은 인연이 상당하다. 경남이나 부산에 가면 광주에 가는 것보다 더 알아줄 정도다.

- 국민의 정부 5년 동안 청와대나 내각에서 일할 기회가 많았을 것 같은데 국회에만 있었다는 점도 의외다.
▲ 1992년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그리고 1997년 대선이 치러졌다. 당시 동교동계 7인이 성명을 발표했다. 청와대에 들어가거나 장관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성명을 발표한 이들 중 남궁진 전 의원이 청와대 정무수석을 하고 문화부장관을 한 것 외에는 다른 이들은 약속을 지켰다.
1998년 원내총무가 됐고 2000년 사무총장, 2002년 최고위원선거에서 1등을 했다. 국회, 당을 지키겠다고 다짐했고 끝까지 약속을 지켰다.
 
- 개인적으로 본 DJ는 어떤 사람이었나.
▲ ‘보통 사람’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희로애락을 다 가지고 있었다. 손자 손녀들과 놀 때는 평소의 근엄함은 찾을 수 없을 정도다. 웃고 안아주고 장난치는 모습이 천진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눈물이 많고 정에 약했다. 동정심이 많았다.

-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준비된’ 이미지였는데.
▲ 공적인 면에서는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는 사람이었다. 자기 페이스대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매사를 철저히 준비했고 그날 일은 그날 해야 했다. 검토해야 하는 서류가 쌓여있으면 새벽 2시가 되었든 3시가 되었든 다 처리를 했을 정도다.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았다.

- 한 전 대표에게 DJ는 어떤 의미인가.
▲ 김 전 대통령과는 1967년 이래 43년의 인연이다. 살아오면서 김 전 대통령의 생활과 생각, 사고의 전부를 함께하게 됐다. 심지어 아내가 ‘김 전 대통령을 택하겠소, 나를 택하겠소‘ 했을 때도 김 전 대통령을 선택했을 정도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강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고기가 바다를 떠나 존재할 수 없듯 그는 내 생활의 전부였고 우리(동교동계 인사들)의 모든 것이었다.

- DJ에 관한 일화 중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 1980년 신군부는 내란음모죄로 김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광주민주화운동도 김 전 대통령이 사주했다고 했다.
당시 신군부는 김 전 대통령에게 타협을 하자고 했다. “대통령이 되는 거 빼고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주겠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은 하도 고통스러워서 ‘외국에서 여생을 보낼까’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군부가 읽어보라며 준 신문 한 부가 김 전 대통령을 결심하게 했다. 그 신문에는 광주사태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는데 김 전 대통령은 ‘광주의 수많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희생을 당했다.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 나도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죽기로 작정했다. 교수형을 당할 때 어떨까 해서 감방에서 목도 만져봤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대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내걸었고 타협해 본 적도 없다.

- 사석에서 동교동계 분들과는 어떻게 지냈나.
▲ 허물이 없었다. ‘동지’라고 불렀다. 김 전 대통령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총재님’이라고 호칭했다. ‘선생님’은 정계를 떠났다는 의미인 반면 ‘총재’는 현역 정치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992년 김 전 대통령이 정계은퇴를 선언할 때도 나는 믿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실 분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이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살아남은 것은 할 일이 있어서라고 생각했다. 그 할 일은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때문에 정계은퇴 선언에 다들 눈물을 흘릴 때도 나는 울지 않았다. ‘왜 울어’라고 생각했다. 절대로 정치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 DJ의 공과를 꼽는다면.
▲ 이희호 여사가 김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서울 시청광장에 들러 한 연설이 있다. ‘많은 오해를 받으면서도 오로지 인권과 남북의 화해 협력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 과정에서 권력의 회유와 압력도 있었으나 한 번도 굴한 일이 없다. 화해와 용서의 정신,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것이 남편의 유지다’라는 말이다.
김 전 대통령은 평생 ‘용서와 화해’, 남북의 평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노력했고 ‘행동하는 양심’이 되려고 했다. 납치를 당하고 사형 선고를 당하는 등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보복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피해자가 용서해야 진정한 화해가 이뤄지는 것인데 김 전 대통령은 피해자이면서 전부 용서하고 화해했다. 인간 김대중의 모습이다.

- 인간 ‘김대중’이 쌓은 공적도 있지만 그가 국가발전에 기여한 바도 크다.
▲ 대표적인 것은 노벨평화상,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간 교류와 협력에 이바지했다는 것이다. 또한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IT사업을 이끌었다.
하지만 난 복지와 문화에 대한 부분을 빼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국민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다. 국민을 편안하게 하려면 부자에게는 간섭하지 않아야 하고 가난한 이들은 부자가 될 수 있게 이끌어야 한다. 때문에 정치의 대상은 가난한 사람, 약자들인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으로 최저가족생계를 보장했다.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등 4대 보험을 정착시켜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최근 홍사덕 한나라당 의원이 칼럼에서 미국의 복지 대통령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한국의 복지 대통령으로는 김 전 대통령을 꼽았다. 외환위기 속에서도 국민연금 적용대상을 전국민으로 확대하고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한 것, 전국민 의료보험 실시,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의 확대, 장애수당과 저소득층 보육비 지원 및 경로연금의 증액, 사회복지 전문요원 증원 등 사회안전망을 본격적으로 구축했기 때문이다.

- DJ는 문화를 가까이한 대통령이기도 했는데.
▲ 김 전 대통령은 전체 국가예산에서 문화예산을 1% 확보했다. 파주에 출판단지를 조성해 400억 기금을 조성, 문화 창달에 기여했고 돈이 없어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이들에게 자금을 빌려줬다.
한류의 기틀을 세운 것도 김 전 대통령이다. 당시 문화를 개방하면 일본 문화에 잠식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지만 도리어 한류가 일본에 전해지는 계기가 됐다.
역사가 갈수록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은 두드러질 것이다. 지금은 내가 표를 줬느냐 안줬느냐, 내 지역의 사람이냐 아니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하지만 다음 세대는 제대로 된 평가를 할 것이다.


- DJ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바가 있는가.
▲ 김대중 도서관과 김대중 평화센터가 있다. 이미 김 전 대통령의 유산은 이곳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념사업은 기금을 모으면 그만큼 정부에서 보조를 해준다. 목포시, 전라남도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사상과 철학은 온 국민이 이어갈 일이다. 김 전 대통령은 국민 속에 영원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누군가 한두 명이 김 전 대통령을 계승하겠다는 건 욕심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DJ의 유언 중 하나가 민주개혁진영의 통합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민주당에서 구민주계의 복당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들었다. 어느 정도까지 진행됐나.
▲ 당 지도부와 복당에 대한 합의를 봤다. 절차상 문제만 남았다. 당에 들어가면 백의종군하겠다. 당에 협력할 것이다. 다만 민주당은 민주당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민주당에 바라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

- 동교동계가 계속해서 모임을 가질 것인지 궁금하다.
▲ 동교동계는 정치조직이 아니다. 친목을 위해 모일지는 몰라도 정치조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 49제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 주최로 동교동계와 상도동계의 만찬 회동을 준비돼 있는 걸로 안다. DJ와 YS의 화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
▲ 어른이 밥 한 끼 사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화해는 피해자가 용서해야 진정한 화해다. 가해자가 화해를 했다고 해서 화해가 된 것은 아니다. YS는 그동안 김 전 대통령을 많이 공격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를 받아친 적이 없다.
때문에 “화해를 했다”는 YS의 말을 ‘앞으로는 김 전 대통령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김 전 대통령을 모신 것은 일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일이었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할 것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평가는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국장에서 세계 각국에서 조의를 표명하고 조문사절이 찾아왔다. 이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외국 원수들을 만났을 때 어떤 원수든 존경으로 대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대한민국이 큰 나라이고 두려운 나라여서가 아니다. 김 전 대통령이 살아온 정신, 민주주의 인권 평화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에 존경의 염으로 대한 것이다. 이는 국위선양이며 대외적으로 큰 공적을 남긴 것이라 할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세기적 인물이다. 그 같은 인물이 다시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분을 모신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존경의 염으로 모시며 평생 살아갈 것이다.

▲1939년 전남 신안 출생
▲1959년 목포고등학교 졸업
▲1963년 서울대학교 외교학 학사
▲1992년 제14대 국민회의 국회의원
▲1996년 제15대 국민회의 국회의원
▲1998년 국민회의 원내 총무
▲2000년 제16대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
▲2001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한국기원 총재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 6·13지방선거대책위원장
▲2003년 재단법인 동서협력재단 이사장
▲2004년 새천년민주당 대표,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위원
▲2004년 제17대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
▲2005년~2006년 민주당 대표
▲2006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
▲2009년 현 동서협력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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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 바뀐’ 이재명 이유 있는 대변신

‘확 바뀐’ 이재명 이유 있는 대변신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코로나19 종식과 비상계엄, 대통령 파면으로 인한 조기 대선을 치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대 대선과 21대 대선 모두 운명의 길목서 치러진 셈이다. 국민의 삶과 밀접하게 닿아 있는 정치권도 큰 영향을 받았다. 코로나19 정국과 내란 정국서 대선을 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에게는 지난 3년간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3년 전, 20대 대선이 치러지던 2022년 당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는 코로나19 시기였던 점을 감안해 소상공인 정책과 경제 재건에 초점을 맞췄다. 민주당의 1호 공약 역시 ‘코로나19 팬데믹 완전 극복’과 ‘피해 소상공인에 대한 완전한 지원’이었다. 경제 대통령 앞세웠지만… 이 외에도 ▲오미크론 등 변이종 확산 대응 강화 ▲백신 및 치료제 확보 ▲의료보건체제 구축에 대한 충분한 재정 투입 ▲필수예방접종의약품 자급화 실현을 위한 국가지원체제 구축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당시 이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이하 선대위)는 ‘유능한 경제 대통령’에 초점을 맞춰 5대 비전으로 ▲신경제 ▲공정 성장 ▲민생 안정 ▲민주사회 ▲평화·안보 등을 제시했다. 10대 공약으로는 수출 1조달러를 비롯한 311만호 주택 공급, 문화 강국 실현 같은 경제 중심의 공약을 제시했다. 차기 정부의 큰 틀이 되는 10대 공약을 살펴보면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가 두루 담겼지만, 가장 주목을 받는 건 이 후보의 상징과도 같은 ‘기본 시리즈’ 정책이었다. 기본소득부터 기본주택, 기본금융을 합친 것으로 이 후보의 숨은 1호 공약이란 평도 나왔다. 기본 시리즈는 전 국민에게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하는 동시에 주거와 금융 면에서 보편적인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 공약이다. 가장 대표적인 공약으로는 ‘청년 125만원’ ‘전 국민 25만원’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을 꼽을 수 있었다. 기본소득은 이 후보가 경기도지사이던 때부터 추진하던 정책이다. 2021년 7월 경선 후보 2차 정책 발표 기자회견서 이 후보는 “대전환의 위기 시대에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대대적 정부 역할도 중요한 성장 수단이지만, 세계 최저 수준인 국가의 가계소득 지원과 가계소비를 늘리는 것도 경제 성장의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차기 정부 임기 내에 청년에게는 연 200만원, 그 외 전 국민에게 100만원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아울러 “지역 골목경제 활성화와 매출 양극화 해소를 위해 소멸성 지역화폐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현금과 달리 경제 활성화 효과가 극대화된다”며 “기본소득은 어렵지 않다. 작년 1차 재난지원금이 가구별 아닌 개인별로 균등하게 지급되고 연 1회든 월 1회든 정기 지급된다면 그게 바로 기본소득”이라고 설명했다. 코로나19·비상계엄 정신없이 도는 정치판 “전 국민 25만원 지원” 3년 사이 변화는? 당시 정치권에서는 이 후보의 기본소득 공약이 과거 보수 정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주장하던 ‘경제 민주화’와 닮았다고 봤다. 그러나 이 후보의 기본소득은 재원 확충 방안 등 실현 가능성이 작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에 민주당은 재원 마련 방안으로 재정개혁을 추진하는 동시에 국토보유세와 탄소세 도입 등 다양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 보수 진영에서는 “코로나19 지원금으로 나라 곳간이 텅 비었다”며 ‘포퓰리즘’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전 국민에게 25만원을 지원하는 방안은 20대 대선 이후에도 이 후보가 꾸준히 밀던 정책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등 지원, 분배 방식 등에 변화가 생겼지만 이 후보는 지난해 윤 전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서 “민생회복 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며 거듭 당부하기도 했다. 포퓰리즘이라는 보수 진영의 비판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부분적 기본소득은 아이러니하게도 2012년 대선서 보수 정당 박근혜 후보가 주장했다. 65세 이상 노인 모두에게 월 20만원씩 지급한다는 공약은 박빙의 대선서 박 후보 승리 요인 중 하나였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3년이 지난 지금 이 후보는 대선 정국이 시작됨과 동시에 1호 공약으로 “AI 인공지능 3강 도약”을 외쳤다. 경제 강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AI 대전환 시대를 위한 산업 육성을 약속했다. 고성능 GPU(그래픽처리장치)를 5만개 이상 확보하고 한국형 챗GPT를 국민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모두의 AI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사업이다. 국가 비전으로는 K-이니셔티브를 제시했다. 국내 AI 기술 등에 방점을 찍어 미래 먹거리를 선점하고 경제 성장 국가로 발돋움하겠다는 취지다. 이 후보는 K-이니셔티브를 지역별로 쪼개 맞춤형 공약을 제시하기도 했다. 경기 동탄서는 K-반도체를, 대전서는 K-과학기술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냈고 전북 전주서는 K-컬처를 겨냥해 국악인과 간담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 후보의 21대 대선 공약은 ‘K’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지난 대선서 기본소득 같은 ‘이재명표 공약’을 앞세웠다면 이번에는 12·3 내란 사태로 무너진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켜 세워 ‘진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방점을 찍은 것이다. 지원금 어디로? 공약 발굴 과정 역시 K-이니셔티브를 앞세웠다. 후보 직속인 K-문화강국위원회는 문화 강국 실현을 위한 공약을, K-경제성장위원회는 맞춤형 의제를 설정하는 데 주력할 전망이다. 선대위 산하에는 K-민주주의·평화위원회를 설치해 ‘빛의 혁명’에 참여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조직을 꾸렸다. 서울·인천·경기를 겨냥한 K-수도권 비전을 발표하며 “서울을 뉴욕에 버금가는 글로벌 경제 수도로, 인천을 물류와 바이오산업 등 K-경제의 글로벌 관문으로, 반도체와 첨단기술, 평화·경제의 경기로 수도권 K-이니셔티브를 만들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기본 시리즈의 존재감은 희미하다. 지난 대선서 기본 시리즈를 앞세운 것과 달리 이번 대선에서는 ‘기본 사회’라는 단어로 묶어 포괄적인 복지 정책으로 탈바꿈했다. 이 후보는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국가 공동체가 책임지는 사회, 기본 사회로 나아가겠다”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전담기구인 ‘기본사회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이 후보는 양극화로 인한 분열과 갈등이 만연한 사회에 우려를 표하며 “기본 사회는 단편적 복지나 소득 분배에 머무르지 않고 국민의 주거·의료·돌봄·교육·공공서비스 전반에 대한 실질적 보장을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본사회위원회는 기본 사회 실현을 위한 비전과 정책 목표, 핵심 과제 수립 및 관련 정책 이행을 총괄·조정·평가하게 된다. 아동수당 확대나 청년미래적금, 고용보험 사각지대 해소 등 생애주기별 소득 보장 체계를 구축하고 농어촌 기본소득과 햇빛·바람 연금 같은 지역 맞춤형 소득 지원도 점차 확대해갈 예정이다. 개헌에는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나 싶더니 선거 막판서 대통령 4년 연임제와 등을 골자로 한 구상을 밝혔다. 개헌 시기에 대해서는 “논의가 빠르게 진행된다면 2026년 지방선거서, 늦어져도 2028년 총선서 국민의 뜻을 물을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위해 국민투표법을 개정해 개헌의 발판을 마련하고 국회 개헌특위를 만들어 하나씩 합의하며 순차적으로 개헌을 완성하자”고 말했다. 이후 최종 공약집서 “위기의 민주주의를 개헌으로 지키겠다”고 밝히면서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우클릭? 융통성!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인 건 경제, 그중에서도 부동산 정책이다. ‘민주당 우클릭’이라는 표현이 나올 만큼 민주당은 중도우파까지 껴안는 방법을 마련했다. 우선 민주당은 주택 공급은 늘리되 부동산시장에는 최소한으로 개입하겠다는 방침을 밝혀 왔다. 문재인정부 당시 과도한 세금 규제로 집값이 오르는 등 발생할 각종 부작용과 혼란을 막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이 후보는 ‘경제 유튜브 연합 토크쇼’에 출연해 “주거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을 많이 바꾼 편이다. 집은 주거용이지 투자·투기용은 아니어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더라”고 밝힌 바 있다. 부동산시장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하는 만큼 규제를 완화하는 방법을 택해야지, 억눌러서는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한 민주당 관계자 역시 “우클릭, 태세 전환,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시장과 경제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정책을 수정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 후보는 지난 대선서 “부동산 투기를 막으려면 거래세를 줄이고 보유세를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 저항을 줄이기 위해 국토보유세는 전 국민에게 고루 지급하는 기본소득형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세금으로 집값을 잡는 시대는 지났다”며 선을 그었다.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 등 부동산의 핵심 세제 역시 큰 틀에서 손대지 않고 현행 체계를 유지할 전망이다. 다만 이 후보뿐만 아니라 모든 대선후보들이 이렇다 할 부동산 공약을 내놓지 않고 있어 비교 대상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표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후보 모두 부동산 정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공약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지난 3년간 일부 노선이 수정된 반면, 이 후보가 뚝심 있게 밀고 나간 공약도 있다. 앞서 이 후보는 지난 대선서 “여성가족부를 평등가족부나 성평등가족부로 바꾸고 일부 기능을 조정하는 방안을 제안한다”고 밝혔는데 이번 역시 “성평등가족부로 확대·개편하겠다”고 밝혔다. ‘기본 소득’ 내리고 ‘K-시리즈’ 올리고 갈라치기 대신 ‘중도 실용주의’ 노선으로 이 후보는 사전투표가 진행되기 하루 전날인 지난달 28일6 자신의 SNS에 ‘성평등가족부 확대 공약 메시지’를 내고 “여성들이 여전히 우리의 사회 많은 영역서 구조적 차별을 겪고 있음에도 윤석열정부는 성평등 정책을 후순위로 미뤘다”고 꼬집었다. 이어 “향후 내각 구성 시 성별과 연령별 균형을 고려해 인재를 고르게 기용하고 성평등 거버넌스 추진 체계도 강화하겠다. 중앙 부처와 지자체의 양성평등정책담당관제도를 확대해 성평등 정책 조정과 협력 기능을 강화하겠다”며 “지자체 내 전담부서를 늘려 성평등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겠다”고도 약속했다. 대법관 구성과 다양성 및 전문성 강화를 위한 ‘대법관 증원’도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현재 대법관 한 명이 맡는 사건의 수가 많아 증원은 불가피하다는 게 민주당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이번 공약집에도 민주당은 상고심에 대한 국민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대법관 증원과 전원합의체 변론 공개 확대를 추진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다만 공약집에는 구체적인 증원 규모를 적시하지 않았다. 앞서 민주당은 대법원이 이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되자 사법개혁을 예고했다. 이때 민주당이 대법관의 수를 100명으로 늘리는 법안을 발의했는데, 선대위가 해당 법안의 철회를 지시하면서 한때 논란이 되기도 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 역시 20대 대선서도 주장했다. 앞서 이 후보는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필요한 정책을 취하고, 김대중·박정희 정책을 따지지 않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번에도 이 후보는 국민 통합을 제시하며 좌우를 가리지 않고 오직 경제를 살리는 데 집중하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비상계엄으로 치러진 조기 대선인 만큼 급진적인 변화와 이념 갈라치기보다는 대한민국을 안정 궤도에 되돌리는 ‘중도 실용주의’ 노선을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리미리 착착척척 선대위 소속인 한 민주당 의원은 “조기 대선인 만큼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선거가 치러졌다. 그동안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만큼 바빴지만 국민 의견을 적극 수용해 좋은 공약이 나올 수 있었다”며 “대부분 이 후보 머릿속에 원래 있던 공약들이다. 여기에 지난 3년 동안 각종 위원회서 활동한 의원들의 시너지가 합쳐져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이재명 공보물, 분위기도 바뀌었다? 대선서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책자형 선거 공보물도 눈에 띈다. 지난 공보물은 ‘경제’ ‘일하는 대통령’ 등 유능함을 내세웠다면 이번에는 ‘내란 극복’ ‘빛의 혁명’을 반복적으로 강조해 희망에 초점을 맞추었다. 책자 한 면 전체를 응원봉 시위대 사진으로 채워 이번 조기 대선을 내란 세력 심판 성격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대선 출마 영상도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는 평이다. 20대 대선 경선 당시 이 후보는 검은 배경의 스튜디오서 파란 넥타이와 정장을 갖춰 입은 채 출마를 선언했다. 반면 21대 대선 출마 영상서 이 후보는 밝은 분위기의 실내서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등장해 부드러운 면모를 강조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