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특집> ⑩명절만 되면 생각나는 추억의 스타들

  • 최현경 mw2871@naver.com
  • 등록 2013.09.17 07: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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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켜면 아이돌 일색…어르신들은 따분하다

[일요시사=특별기획팀]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만 되면, TV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아이돌’ 특집 프로그램들이 수없이 쏟아진다. 우리 부모들에게도 한 때 로망이었던 스타들이 있었다. 이젠 추억이  된 그 스타들. ‘어른’을 위한 스타, 누가 있을까.




요즈음 TV에는 수많은 아이돌이며, 다들 비슷하게 생긴 배우들 등 정신없이 많은 연예인들의 얼굴이 지나간다. 얼굴도 알아보기 어려운 어린(?) 스타들 사이에서 가끔씩 떠오르는 옛 스타들이 있다. 예쁜 외모 또는 뛰어난 노래실력들로 당시의 화제가 되었던 스타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잊혀진 스타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지금도 후배 연예인들의 성대모사 대상이 되고 있는 ‘꺾기’창법의 대가, 나훈아는 1966년 당시 19세 나이로 ‘천리길’을 발표하면서 가요계에 데뷔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 ‘강촌에 살고 싶네’ ‘님 그리워’ 등의 히트곡을 만들어내며 정통 트로트를 고수했다. 71년 ‘가지 마오’를 통해 KBS 음악대상을 수상하고 그 이후로도 ‘고향역’ ‘머나먼 고향’을 차례로 히트시켰다.

나훈아는 노래실력뿐만 아니라 뛰어난 작곡, 작사 능력으로 100곡 이상의 곡을 만들어 내면서 ‘대한민국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린다. 데뷔 이후 약 2500곡을 녹음하고 19개의 정규앨범을 포함하여 총 200개의 앨범을 발표했다.

행적에 대한 관심
언론의 억측들로

가수로서 완벽했던 나훈아는 완벽하지 못한 사생활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다.


75년 첫 번째 아내, 이숙희씨와 이혼한 그는 76년 당시 유명했던 배우 김지미와 결혼하며 화제를 일으켰다. 그는 공식적으로 3번의 결혼을 했는데 85년 김지미와의 이혼 이후, 후배가수였던 정수경씨와 결혼했지만 현재 이마저도 순탄치 못했다. 2007년 예정됐던 공연 취소를 끝으로 그가 노래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러던 그가 2008년 돌연 기자회견을 자청해 ‘신체절단설’을 부인했고 그것이 공식석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간혹 그의 근황이 들리고 있지만 그의 모습은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다. 최근 한 종편방송에 출연한 나훈아의 지인은 “나훈아가 양평의 실버타운 같은 비싼 요양원에 있다”고 전했다.

영화 <변강쇠> ‘옹녀’역의 영화배우 원미경은 당시 짙은 농염함으로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섹시배우다.

원미경은 78년, 18세에 미스 롯데 선발대회에서 ‘미스롯데’로 선발됐고 TBC 공채탤런트 20기로 데뷔하며 이미숙, 정애리와 함께 80년대 트로이카로 불렸다.

70∼80년대 스타덤 올랐다 홀연 사라져
은퇴 후 억측기사와 황당소문에 시달려

연기자로서 그의 첫 작품인 79년 MBC 드라마 <청춘의 덫>은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로 방송 도중 중단되었다. 이어 영화 <청춘의 덫>이 제작되며 영화배우 원미경으로서 영화계에 데뷔했다. 영화 <청춘의 덫>은 박근형, 한진희, 유지인이 함께 출연한 영화로 2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했다. 당시 그의 나이 20살.

영화 <청춘의 덫>에 이어 영화 <제3 한강교>를 통해 깊이 있는 멜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원미경은 ‘제 18대 대종상-신인상’ ‘백상예술대상-신인상’을 받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색깔있는 여자> <F학점의 천재들> <심장이 뛰네>등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인기를 이어나갔다.

단아함과 청순함의 대표 아이콘이던 원미경은 86년 영화 <변강쇠>에서 섹시한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보이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다음 해인 87년 당시 출연 중이던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의 담당PD인 이창순과 2년 열애 끝에 결혼했다. 결혼 후, MBC 드라마 <아줌마>에서 억척스러운 ‘주부’역할을 하며 ‘MBC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상’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섹시스타에서 억척스러운 아줌마까지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며 연기자의 길을 걷던 그는 2002년 MBC 드라마 <고백>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활동을 중단한 원미경은 현재, 남편인 이창순PD와 미국 버지니아주에 거주 중이다. 원미경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당분간은 계획이 없다. 다만 언제라도 좋은 작품이 있으면 실망스럽지 않은 좋은 모습으로 찾아뵐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귀여운 아역배우 출신
시대흐름에 외면당해

“아저씨∼계란 드실라우?”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귀여운 목소리의 아역배우 전영선.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전영선은 영화배우였던 고모 나애심(본명 전봉선)의 권유로 영화 <종말 없는 비극>을 통해 데뷔했다.

아역 전영선의 연기력이 단연 돋보였던 영화는 1961년에 제작된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이다.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최은희, 김진규, 도금봉 등 최고의 배우들이 출연하며 많은 인기를 끌었던 작품으로 ‘옥희’역의 전영선 또한 앙증맞은 표정연기와 똑부러진 소녀의 아역배우로 거듭났다.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통해 천재적인 자질을 보여준 전영선은 안성기, 안인숙 등과 함께 '꼬마별'로 불리며 <불효자> <슬픔은 없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등 약 25편의 작품에서 아역을 도맡아 출연했다. 

그 중 신상옥 감독의 영화 <이 생명 다하도록>은 전영선에게 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영화<이 생명 다하도록>에 출연한 전영선은 62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국내 최초로 아역특별연기상을 수상했다. 당시 분단의 아픔을 겪었던 독일의 분위기가 분단과 전쟁을 소재로 한 한국영화에 관심을 갖기 충분했다고.




69년 영화 <암살자>를 마지막으로 영화계에서 사라졌던 그는 75년 고영남 감독의 영화 <서북청년>의 주연을 맡았다. 아역스타답게 탄탄한 연기력이 뒷받침되었지만 외모를 중요시하는 시대 흐름 때문에 성인 여배우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다시 영화계의 별이 되고자 했던 전영선은 81년 영화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조연으로 출연했고 이 작품이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70년대 당시 연애잡지였던 <아리랑>과 <명랑>은 문희, 남정희, 윤정희를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라 칭했다. 그 이후로 당대 인기있는 여배우들을 ‘2세대, 3세대 트로이카’라고 지칭하곤 했다.

여배우 트로이카
여전히 아름다워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에 이어 70년대 후반에는 유지인, 장미희, 정윤희가 2대 여배우 트로이카로서 그 뒤를 이었다. 이 중에서도 단연 외모가 돋보였다는 정윤희. 지난 2005년 한 여성잡지에서 영화계 리더들을 대상으로 ‘한국 여배우 최고 미인’에 대한 설문조사에서는 ‘정윤희’가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젊은 층에게 배우 수애와 닮아 관심이 높아진 영화배우 정윤희는 75년 영화 <욕망>으로 데뷔했다. 영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여자와 비> 등의 작품을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아 각종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및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인기 절정이던 84년, 정윤희는 조규영 중앙산업개발 회장과 결혼하며 영화계 은퇴선언을 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2대 여배우 트로이카, 유지인, 장미희와는 달리 배우의 길을 선택하지 않은 정윤희에 대한 팬들의 관심은 계속됐지만 결혼 이후 단 한 차례도 공개석상에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그는 2005년 MBC 한가위 특집다큐 <우리가 사랑한 여배우들-카페 정윤희>를 통해 “직접 만나 뵙고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아직까지 저를 잊지 않고 기억해준 분들께 감사하다”는 자필편지로만 소식을 전했다. 최근 한 언론사에 의해 공개된 그녀의 최근 모습에 대한 네티즌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배우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소탈하고 검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팬들의 바람대로
조용히 활동 재개도

70년대 소녀들의 우상이던 포크계의 전설, 그룹 ‘어니언스’. 당시 가요계는 신나는 ‘팝계열’의 음악이 등장하고 있었다. 72년 ‘작은 새’로 가요계에 데뷔한 포크 그룹 어니언스의 등장은 포크음악의 대중화에 본격적으로기여했다. ‘편지’ ‘저 별과 달을’ ‘외길’ 등 이들의 앨범에 수록된 곡 전부가 히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쾌하고 잘생긴 외모 또한 여고생들의 마음을 흔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들의 인기를 당시 한 음악잡지에서는 “이대강당에서 지난 74년 5월 4일 열렸던 어니언스의 리사이틀은 모여든 관객들을 제 시간에 입장시키지 않고 있다가 관객들이 강당에서 이대교문까지 장사진을 이루는 등 대학가에서 흔치 않은 진풍경을 보인 뒤에야 뒤늦게 시작됐다. 교복차림의 중고교생들이 대부분인 것 같은 관객들은….”이라고 했다. 이후 멤버였던 이수영은 영화 <그대의 찬 손>에 출연하는가 하면 74년 KBS 방송가요 대상을 받으며 실력을 검증받았다. 

이들은 75년 멤버 이수영의 군입대와 함께 해체됐다. 홀로 남은 임창제는 ‘어니언스 임창제’라는 이름으로 가수 생활을 이어갔다. 이후 이수영은 군 제대를 하며 79년 ‘하얀 면사포’와 80년 ‘숙녀’라는 이름의 두 앨범을 마지막으로 가요계를 떠났다. 가요계를 떠난 그는 종합건설회사에서 근무하다 2002년 건설업 중견 사업가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이수영과 임창제는 ‘어니언스’라는 이름의 와인바와 카페를 각자 운영해오며 팬들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난 2004년, 어니언스는 그들의 음악을 듣고 싶다는 팬들의 바람에 따라 ‘추억의 낭만 콘서트’를 통해 해체 후 30년 만에 변하지 않는 호흡을 보여줬다. 같은 해, 8월 이수영은 ‘프레셔스 메모리즈’를 발표하며 홀로 음악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다른 멤버인 임창제는 지난 2월 KBS의 한 프로에 딸 임나경과 함께 출연해 과거 싱어스 누들(성대에 생긴 양성종양)로 인한 후유증 등을 고백하며 근황을 전했다.


좋은 작품으로 볼 수 있다면…
복귀 언제쯤? 기약 없는 귀환

66년 걸쭉하고 허스키한 저음으로 무대를 압도하던 소녀, 문주란. 당시 16세란 나이와 앳된 소녀얼굴과 달리 카리스마있는 저음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은 가수다. 데뷔와 함께 주목을 받았던 10대 신인스타, 문주란은 ‘보슬비오는 거리’ ‘파란 이별의 글씨’ ‘낙조’ 등의 히트곡을 내며 무명생활없이 스타가 되었다.

65년 잡지 아리랑에서 주최한 연말 시상식에서 최고 인기상 독수리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MBC 10대 가수 가요제 가수상, TBC 신인상 수상 등을 수차례 수상하며 당대 최고가수였던 남진, 이미자와 같은 선배들과 한 무대에서 섰다. 어린 나이에 데뷔하며 인기를 누리던 문주란은 데뷔 3년 만에 한 방송국 PD와의 스캔들과 언론의 억측기사들로 힘들어하다 음독자살을 시도를 하며 연예계에서 사라졌다.

80년대 다시 가요계로 돌아온 문주란은 일본에서 활동하며 국내에서도 ‘백치 아다다’ 등의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교통사고로 인해 곧 활동을 중단했다. 그 이후에도 국내 가요계에 간혹 앨범을 발표하며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이 또한 길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지난해 신곡 ‘양재동 거리’를 발표하며 SBS <도전 1000곡>, KBS <불후의 명곡>에 출연했다. 최근에는 한 방송에 출연해 인간 문주란으로서의 모습을 공개했다. 청평의 한 카페를 운영하며 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던 그는 데뷔 45년만인 지난 6월 첫 대형 콘서트를 시작으로 중후한 매력의 가수 문주란으로 돌아왔다.

 

최현경 기자 <mw287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제2의 전성기 스타들
안방 여왕들 속속 귀환

연예계를 은퇴했던 스타들이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다시 복귀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MBC 드라마 <모래시계>를 끝으로 배우 고현정은 결혼과 동시에 연예계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10년만에 이혼하며 연예계에 컴백한 고현정은 SBS 드라마 <봄날>을 시작으로 <선덕여왕> <대물> <여왕의 교실>등의 드라마를 통해 실력있는 연기파배우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미스코리아 진 출신의 배우 오현경 비디오 파문으로 은퇴한 지 2년 만에 결혼하며 배우활동을 중단했다. 지난 2006년 안타까운 이혼소식과 함께 돌아온 오현경은 SBS 드라마 <조강지처 클럽>로 연예계에 복귀한 이후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 등을 통해 다양한 매력의 연기활동을 선보이고 있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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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