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령 700호 특집> ⑥ 직장인‘밤문화’변천사심층해부

네온사인 아래 ‘휘청’ 시름은 ‘훨훨’

“퇴근 후 맥주 한잔 어때?” 피곤한 하루를 보낸 직장인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이 말은 언제부터 유행했을까. 정답은 ‘샐러리맨들의 등장과 함께’일 것이다. 시대에 따라, 유흥문화의 변화에 따라 다르지만 샐러리맨들이 있는 곳엔 퇴근 후 밤문화도 늘 존재했다.
직장인들을 잡기 위한 업주들의 노력도 끝없이 진화했다. 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서비스로 이들의 발길을 잡으려는 유흥업소의 변화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산업화가 시작되고 직장인들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7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직장인들의 밤문화를 돌아봤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1970년대는 직장인들의 밤문화가 꽃피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경제개발이 본격화되고 도시에 일자리가 늘어나 샐러리맨들이 중산층으로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도시의 밤도 변화를 맞이했다.

샐러리맨들의 지친 하루 맥주 한잔으로 모두 잊어

그 시절 직장인들이 퇴근 후 자주 찾는 곳 중 하나는 막걸리와 소주를 파는 포장마차였다. 열악한 근무환경과 고된 노동에 지친 샐러리맨들은 소주 한잔에 싸구려 안주 한 접시로 시름을 달랬다.
50~60년대까지만 해도 광목으로 바람만 겨우 가린 채 잔소주를 팔던 포장마차는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금의 형태와 비슷하게 변화했다.

회식이나 단합대회 등 한국의 독특한 직장문화가 생겨난 것도 이 무렵이다. 일자리가 부족해 취직이 어려운데다 직장 안에서의 경쟁도 심했던 그 시절, 상사가 주도하는 회식자리에 불참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강압적인 회식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도 당시의 시대상과 무관치 않다. 한창 맥주소비가 늘었던 70년대 말에는 서구화된 맥주집에서의 회식도 함께 늘었다. 술과 함께 춤, 노래를 즐길 수 있는 유흥업소도 70년대 들어 성행했다. 집에 들어가는 시간까지 나라가 관리했던 독재정권 아래에서도 음주가무 문화는 꾸준히 발전했다.

도시화 본격화된 70년대부터 직장인들 밤문화도 서서히 시작
통금시간 속에서도 대포집, 고고장 등 직장인들 유흥문화 발전
 직장인들 소비능력 향상되면서 유흥업소도 고급화물결
성매매특별법으로 변종 성매매업소 생겨 직장인들 유혹

술과 음악, 쇼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업소 중 하나는 스탠드바. 1930년대에 생긴 스탠드바는 70년대 들어 크게 유행했다. 음악연주를 하고 쇼를 보여주는 무대를 앞에 두고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는 것이 그 시절 스탠드바의 형태였다.

이른바 ‘고고장’이라고 불리던 나이트클럽이 대중화된 것도 70년대다. 밴드가 직접 연주하는 라이브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 그때의 나이트클럽이다.
직장인들은 퇴근 후 고고장에서 춤을 추고 술을 마시다가도 자정이 가까워 오면 집에 갈 채비를 서둘렀다.
자칫 잘못해 통금시간을 넘겼다간 여관신세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카바레, 룸살롱 등 유흥업소 역시 급격히 늘어났다. ‘아가씨’가 술을 따러주는 고급 술집도 70년대 말 속속 생겨났다. 이때부터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직원들의 성문제와 윤리문제가 사회적 쟁점이 되기도 했다.
고도성장의 결실이 맺어지기 시작한 1980년대는 ‘밤문화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유흥문화가 초고속으로 발전한 시기다.
정권이 바뀌면서 통금이 해제되고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호화로운 룸살롱 등의 유흥업소가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직장인들의 퇴근 후 풍경도 크게 변했다. 직장인들의 월급이 오르고 소비능력이 향상되면서 서민들의 안식처였던 포장마차와 대포집의 인기는 서서히 식어갔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호프집과 카페다. 이로 인해 막걸리와 소주의 소비량은 점차 줄었고 맥주와 양주의 소비량이 급격히 늘었다. 또 기업의 접대문화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폭탄주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술자리는 2, 3차로 이어져 새벽까지 유흥을 즐기는 직장인들이 증가했다.
기계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는 가라오케가 확산된 것도 80년대의 일이다. 음악을 듣고 쇼를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노래를 부르는 유흥문화가 시작된 것이다.

나이트클럽의 형태도 변화했다. 고고장을 대신해 등장한 것은 ‘디스코텍’. 디스코 춤의 열풍과 함께 확산된 업소였다.
또 하나 80년대 밤풍경의 특징은 성의 상품화가 두드러졌다는 것. 술자리에 여종업원이 나와 ‘서비스’를 하는 형태의 업소가 크게 증가했고 퇴폐적인 쇼를 보여주는 업소 등 선정적인 유흥문화가 확산됐다.

경제 상황에 따라 유흥업소도 변화일로

윤락산업 역시 발전했다. 천호동 텍사스촌, 청량리 588등의 집창촌 뿐만 아니라 증기탕, 퇴폐이발소, 마사지업소, 티켓다방 등 다양한 형태의 윤락업소가 생겨 직장인들을 유혹했다.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수도 크게 늘었다. 88년 한국여자기독교청년회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성을 파는 여성의 수는 120만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처럼 윤락산업이 활황을 맞으면서 술을 마신 뒤 윤락여성과 잠자리를 가지는 직장인들도 늘어났다.

경제성장의 절정을 맞은 1990년대는 밤문화의 고급화를 더욱 부추겼다. 특히 1991년 주류 수입이 개방되면서 세계 각국의 술이 밀려왔다. 고급 양주부터 와인, 맥주 등 다양한 술이 들어오면서 술집 역시 다변화의 길을 걸었다.
이런 가운데 뜬금없이 소주가 인기 술로 떠오르기도 했다. ‘소주방’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주점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과즙 등을 첨가한 달콤한 맛의 칵테일소주가 등장하면서 술이 약한 여자 직장인들도 부담 없이 술집을 드나들 수 있었다. 9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또 하나의 ‘방’은 노래방이다.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던 가라오케가 쇠퇴할 무렵 생긴 노래방은 순식간에 전국의 유흥풍속도를 바꿨다. 직장인들의 회식문화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1차 술자리가 끝나고 난 뒤 노래방으로 향하는 것이 코스처럼 정착된 것도 이 무렵이다. 또 음주와 함께 가무를 즐기길 원하는 이들을 위해 단란주점이 유행하기도 했다.
날로 치열해지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룸살롱도 변화를 맞았다. 이른바 ‘하드코어’를 표방하는 ‘북창동식’ 룸살롱이 확산되면서 보다 화끈하고 질펀한 유흥을 원하는 직장인들을 유혹하기도 했다.
윤락산업도 발전을 거듭했다. 성매매 시장은 90년대에 들어 보다 체계적인 산업으로 변모했다. 성매매 알선업자들이 성매매 여성들을 관리하는 보도방도 90년대에 들어 성업했다.

9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가정주부, 직장여성, 대학생 등 평범한 여성들까지도 매춘에 뛰어들어 사회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또 외환위기 이후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원조교제’로 미성년자 성매매가 등장해 연일 뉴스를 장식했다. 당시 10대 여학생들과 중년의 직장인 남성들이 성을 사고파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IMF가 남긴 상처를 안고 출발한 2000년대는 밤문화에도 하락세를 가져왔다. 불황과 실직의 여파로 마시고 노는 문화는 그리 빛을 보지 못했다. 경기침체로 인해 주점, 클럽 등도 불황을 맞았다. 그러나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고급 술집이나 강남 일대의 클럽 등의 유흥업소는 불황에도 굴하지 않고 손님들이 몰리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직장인들의 회식문화와 접대문화도 간소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외환위기 이후 사회 곳곳에서 나타난 ‘거품 빼기 운동’이 이 같은 문화를 확산시킨 것.

성매매특별법 생기면서 변종 성매매업소 우후죽순

그러나 유흥업소들은 환골탈퇴를 거듭하며 직장인들의 구미를 맞춰갔다. 그 중에서도 룸살롱업계의 판도를 바꾼 것은 일명 ‘텐프로’란 업소다. 텐프로는 룸살롱에서 일하는 여종업원들 중 자신의 수입의 10%만 업주에게 주는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팁의 10%만 업주에게 줘도 업주들이 서로 데리고 갈 정도의 출중한 외모와 몸매를 가진 것이 보통이다.

이 같은 ‘얼짱’ 여종업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광고하는 것이 텐프로 업소다. 북창동식 룸살롱도 황금기를 맞이했다. 주머니사정이 어려워진 직장인들은 유흥업소를 선택할 때도 본전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룸살롱들은 날이 갈수록 화끈한 서비스를 고안해냈다. 룸살롱에서 성매매까지 원스톱으로 이뤄지는 ‘풀살롱’이 등장한 것도 불황을 타계하려는 업주들의 아이디어였다.
여자 직장인들을 위한 유흥업소도 등장했다. ‘호스트바’가 그것. 여자 손님들을 위해 일명 ‘선수’라 불리는 남자 접대부가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부르는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소다. 그리고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직장인들의 밤문화는 걷잡을 수 없이 자극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단속을 교묘하게 피한 변종 성매매업소들이 우후죽순 생겨난 것. 이른바 ‘유사 성매매 업소’로 불리는 업소의 대표주자는 ‘대딸방’이다. 여성의 손이나 신체부위를 이용해 남성의 자위행위를 돕는 대딸방은 비교적 저렴한 가격과 성매매 단속을 피할 수 있다는 점으로 인해 남성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노래방도 변화했다. 여자도우미를 고용해 남자 손님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한 것. 이는 주부들의 탈선을 조장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안마시술소, 페티시클럽, 키스방 등의 퇴폐업소들도 속속 생겨 직장인들을 유혹하고 있다. 성매매업소에 비해 단속으로부터 자유로울 거라는 생각을 한 직장인의 발걸음은 끝없이 이들 업소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퇴근 후 직장인들의 밤문화는 시대상을 고스란히 반영하며 변화를 거듭해왔다. 화려한 조명과 음악 속에서 시름을 떨쳐버리려는 직장인들의 밤문화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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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 바뀐’ 이재명 이유 있는 대변신

‘확 바뀐’ 이재명 이유 있는 대변신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코로나19 종식과 비상계엄, 대통령 파면으로 인한 조기 대선을 치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대 대선과 21대 대선 모두 운명의 길목서 치러진 셈이다. 국민의 삶과 밀접하게 닿아 있는 정치권도 큰 영향을 받았다. 코로나19 정국과 내란 정국서 대선을 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에게는 지난 3년간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3년 전, 20대 대선이 치러지던 2022년 당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는 코로나19 시기였던 점을 감안해 소상공인 정책과 경제 재건에 초점을 맞췄다. 민주당의 1호 공약 역시 ‘코로나19 팬데믹 완전 극복’과 ‘피해 소상공인에 대한 완전한 지원’이었다. 경제 대통령 앞세웠지만… 이 외에도 ▲오미크론 등 변이종 확산 대응 강화 ▲백신 및 치료제 확보 ▲의료보건체제 구축에 대한 충분한 재정 투입 ▲필수예방접종의약품 자급화 실현을 위한 국가지원체제 구축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당시 이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이하 선대위)는 ‘유능한 경제 대통령’에 초점을 맞춰 5대 비전으로 ▲신경제 ▲공정 성장 ▲민생 안정 ▲민주사회 ▲평화·안보 등을 제시했다. 10대 공약으로는 수출 1조달러를 비롯한 311만호 주택 공급, 문화 강국 실현 같은 경제 중심의 공약을 제시했다. 차기 정부의 큰 틀이 되는 10대 공약을 살펴보면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가 두루 담겼지만, 가장 주목을 받는 건 이 후보의 상징과도 같은 ‘기본 시리즈’ 정책이었다. 기본소득부터 기본주택, 기본금융을 합친 것으로 이 후보의 숨은 1호 공약이란 평도 나왔다. 기본 시리즈는 전 국민에게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하는 동시에 주거와 금융 면에서 보편적인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 공약이다. 가장 대표적인 공약으로는 ‘청년 125만원’ ‘전 국민 25만원’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을 꼽을 수 있었다. 기본소득은 이 후보가 경기도지사이던 때부터 추진하던 정책이다. 2021년 7월 경선 후보 2차 정책 발표 기자회견서 이 후보는 “대전환의 위기 시대에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대대적 정부 역할도 중요한 성장 수단이지만, 세계 최저 수준인 국가의 가계소득 지원과 가계소비를 늘리는 것도 경제 성장의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차기 정부 임기 내에 청년에게는 연 200만원, 그 외 전 국민에게 100만원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아울러 “지역 골목경제 활성화와 매출 양극화 해소를 위해 소멸성 지역화폐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현금과 달리 경제 활성화 효과가 극대화된다”며 “기본소득은 어렵지 않다. 작년 1차 재난지원금이 가구별 아닌 개인별로 균등하게 지급되고 연 1회든 월 1회든 정기 지급된다면 그게 바로 기본소득”이라고 설명했다. 코로나19·비상계엄 정신없이 도는 정치판 “전 국민 25만원 지원” 3년 사이 변화는? 당시 정치권에서는 이 후보의 기본소득 공약이 과거 보수 정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주장하던 ‘경제 민주화’와 닮았다고 봤다. 그러나 이 후보의 기본소득은 재원 확충 방안 등 실현 가능성이 작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에 민주당은 재원 마련 방안으로 재정개혁을 추진하는 동시에 국토보유세와 탄소세 도입 등 다양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 보수 진영에서는 “코로나19 지원금으로 나라 곳간이 텅 비었다”며 ‘포퓰리즘’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전 국민에게 25만원을 지원하는 방안은 20대 대선 이후에도 이 후보가 꾸준히 밀던 정책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등 지원, 분배 방식 등에 변화가 생겼지만 이 후보는 지난해 윤 전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서 “민생회복 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며 거듭 당부하기도 했다. 포퓰리즘이라는 보수 진영의 비판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부분적 기본소득은 아이러니하게도 2012년 대선서 보수 정당 박근혜 후보가 주장했다. 65세 이상 노인 모두에게 월 20만원씩 지급한다는 공약은 박빙의 대선서 박 후보 승리 요인 중 하나였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3년이 지난 지금 이 후보는 대선 정국이 시작됨과 동시에 1호 공약으로 “AI 인공지능 3강 도약”을 외쳤다. 경제 강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AI 대전환 시대를 위한 산업 육성을 약속했다. 고성능 GPU(그래픽처리장치)를 5만개 이상 확보하고 한국형 챗GPT를 국민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모두의 AI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사업이다. 국가 비전으로는 K-이니셔티브를 제시했다. 국내 AI 기술 등에 방점을 찍어 미래 먹거리를 선점하고 경제 성장 국가로 발돋움하겠다는 취지다. 이 후보는 K-이니셔티브를 지역별로 쪼개 맞춤형 공약을 제시하기도 했다. 경기 동탄서는 K-반도체를, 대전서는 K-과학기술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냈고 전북 전주서는 K-컬처를 겨냥해 국악인과 간담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 후보의 21대 대선 공약은 ‘K’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지난 대선서 기본소득 같은 ‘이재명표 공약’을 앞세웠다면 이번에는 12·3 내란 사태로 무너진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켜 세워 ‘진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방점을 찍은 것이다. 지원금 어디로? 공약 발굴 과정 역시 K-이니셔티브를 앞세웠다. 후보 직속인 K-문화강국위원회는 문화 강국 실현을 위한 공약을, K-경제성장위원회는 맞춤형 의제를 설정하는 데 주력할 전망이다. 선대위 산하에는 K-민주주의·평화위원회를 설치해 ‘빛의 혁명’에 참여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조직을 꾸렸다. 서울·인천·경기를 겨냥한 K-수도권 비전을 발표하며 “서울을 뉴욕에 버금가는 글로벌 경제 수도로, 인천을 물류와 바이오산업 등 K-경제의 글로벌 관문으로, 반도체와 첨단기술, 평화·경제의 경기로 수도권 K-이니셔티브를 만들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기본 시리즈의 존재감은 희미하다. 지난 대선서 기본 시리즈를 앞세운 것과 달리 이번 대선에서는 ‘기본 사회’라는 단어로 묶어 포괄적인 복지 정책으로 탈바꿈했다. 이 후보는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국가 공동체가 책임지는 사회, 기본 사회로 나아가겠다”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전담기구인 ‘기본사회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이 후보는 양극화로 인한 분열과 갈등이 만연한 사회에 우려를 표하며 “기본 사회는 단편적 복지나 소득 분배에 머무르지 않고 국민의 주거·의료·돌봄·교육·공공서비스 전반에 대한 실질적 보장을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본사회위원회는 기본 사회 실현을 위한 비전과 정책 목표, 핵심 과제 수립 및 관련 정책 이행을 총괄·조정·평가하게 된다. 아동수당 확대나 청년미래적금, 고용보험 사각지대 해소 등 생애주기별 소득 보장 체계를 구축하고 농어촌 기본소득과 햇빛·바람 연금 같은 지역 맞춤형 소득 지원도 점차 확대해갈 예정이다. 개헌에는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나 싶더니 선거 막판서 대통령 4년 연임제와 등을 골자로 한 구상을 밝혔다. 개헌 시기에 대해서는 “논의가 빠르게 진행된다면 2026년 지방선거서, 늦어져도 2028년 총선서 국민의 뜻을 물을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위해 국민투표법을 개정해 개헌의 발판을 마련하고 국회 개헌특위를 만들어 하나씩 합의하며 순차적으로 개헌을 완성하자”고 말했다. 이후 최종 공약집서 “위기의 민주주의를 개헌으로 지키겠다”고 밝히면서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우클릭? 융통성!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인 건 경제, 그중에서도 부동산 정책이다. ‘민주당 우클릭’이라는 표현이 나올 만큼 민주당은 중도우파까지 껴안는 방법을 마련했다. 우선 민주당은 주택 공급은 늘리되 부동산시장에는 최소한으로 개입하겠다는 방침을 밝혀 왔다. 문재인정부 당시 과도한 세금 규제로 집값이 오르는 등 발생할 각종 부작용과 혼란을 막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이 후보는 ‘경제 유튜브 연합 토크쇼’에 출연해 “주거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을 많이 바꾼 편이다. 집은 주거용이지 투자·투기용은 아니어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더라”고 밝힌 바 있다. 부동산시장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하는 만큼 규제를 완화하는 방법을 택해야지, 억눌러서는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한 민주당 관계자 역시 “우클릭, 태세 전환,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시장과 경제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정책을 수정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 후보는 지난 대선서 “부동산 투기를 막으려면 거래세를 줄이고 보유세를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 저항을 줄이기 위해 국토보유세는 전 국민에게 고루 지급하는 기본소득형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세금으로 집값을 잡는 시대는 지났다”며 선을 그었다.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 등 부동산의 핵심 세제 역시 큰 틀에서 손대지 않고 현행 체계를 유지할 전망이다. 다만 이 후보뿐만 아니라 모든 대선후보들이 이렇다 할 부동산 공약을 내놓지 않고 있어 비교 대상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표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후보 모두 부동산 정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공약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지난 3년간 일부 노선이 수정된 반면, 이 후보가 뚝심 있게 밀고 나간 공약도 있다. 앞서 이 후보는 지난 대선서 “여성가족부를 평등가족부나 성평등가족부로 바꾸고 일부 기능을 조정하는 방안을 제안한다”고 밝혔는데 이번 역시 “성평등가족부로 확대·개편하겠다”고 밝혔다. ‘기본 소득’ 내리고 ‘K-시리즈’ 올리고 갈라치기 대신 ‘중도 실용주의’ 노선으로 이 후보는 사전투표가 진행되기 하루 전날인 지난달 28일6 자신의 SNS에 ‘성평등가족부 확대 공약 메시지’를 내고 “여성들이 여전히 우리의 사회 많은 영역서 구조적 차별을 겪고 있음에도 윤석열정부는 성평등 정책을 후순위로 미뤘다”고 꼬집었다. 이어 “향후 내각 구성 시 성별과 연령별 균형을 고려해 인재를 고르게 기용하고 성평등 거버넌스 추진 체계도 강화하겠다. 중앙 부처와 지자체의 양성평등정책담당관제도를 확대해 성평등 정책 조정과 협력 기능을 강화하겠다”며 “지자체 내 전담부서를 늘려 성평등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겠다”고도 약속했다. 대법관 구성과 다양성 및 전문성 강화를 위한 ‘대법관 증원’도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현재 대법관 한 명이 맡는 사건의 수가 많아 증원은 불가피하다는 게 민주당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이번 공약집에도 민주당은 상고심에 대한 국민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대법관 증원과 전원합의체 변론 공개 확대를 추진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다만 공약집에는 구체적인 증원 규모를 적시하지 않았다. 앞서 민주당은 대법원이 이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되자 사법개혁을 예고했다. 이때 민주당이 대법관의 수를 100명으로 늘리는 법안을 발의했는데, 선대위가 해당 법안의 철회를 지시하면서 한때 논란이 되기도 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 역시 20대 대선서도 주장했다. 앞서 이 후보는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필요한 정책을 취하고, 김대중·박정희 정책을 따지지 않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번에도 이 후보는 국민 통합을 제시하며 좌우를 가리지 않고 오직 경제를 살리는 데 집중하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비상계엄으로 치러진 조기 대선인 만큼 급진적인 변화와 이념 갈라치기보다는 대한민국을 안정 궤도에 되돌리는 ‘중도 실용주의’ 노선을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리미리 착착척척 선대위 소속인 한 민주당 의원은 “조기 대선인 만큼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선거가 치러졌다. 그동안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만큼 바빴지만 국민 의견을 적극 수용해 좋은 공약이 나올 수 있었다”며 “대부분 이 후보 머릿속에 원래 있던 공약들이다. 여기에 지난 3년 동안 각종 위원회서 활동한 의원들의 시너지가 합쳐져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이재명 공보물, 분위기도 바뀌었다? 대선서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책자형 선거 공보물도 눈에 띈다. 지난 공보물은 ‘경제’ ‘일하는 대통령’ 등 유능함을 내세웠다면 이번에는 ‘내란 극복’ ‘빛의 혁명’을 반복적으로 강조해 희망에 초점을 맞추었다. 책자 한 면 전체를 응원봉 시위대 사진으로 채워 이번 조기 대선을 내란 세력 심판 성격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대선 출마 영상도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는 평이다. 20대 대선 경선 당시 이 후보는 검은 배경의 스튜디오서 파란 넥타이와 정장을 갖춰 입은 채 출마를 선언했다. 반면 21대 대선 출마 영상서 이 후보는 밝은 분위기의 실내서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등장해 부드러운 면모를 강조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