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특집] '파란만장' 박근혜 60년 인생사 탐구

  • 한종해 han1028@ilyosisa.co.kr
  • 등록 2012.12.26 11: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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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에서 여왕으로…33년 만에 궁궐로 돌아가요

[일요시사=경제1팀] '공주'가 '여왕'이 됐다. 33년 만에 '궁궐'로 돌아간다. 대통령의 딸도, 퍼스트레이디도 아닌 대한민국 최초 여성대통령 자격이다. 대통령의 맏딸이자 5선 국회의원으로 마침내 대권을 향한 꿈을 이룬 박근혜 당선인. 우리 현대사만큼이나 굴곡진 그녀의 60년 인생을 <일요시사>가 집중 조명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월2일 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에서 당시 육군본부 작전차장 박정희 대령과 중학교 교사 출신 육영수씨의 1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나 2살 때부터 서울에서 자랐다.

9살이 되던 해인 1961년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박정희 소장이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2년 뒤인 1963년 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큰 영애'로 불리며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박 당선인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가혹한 운명의
퍼스트레이디

박 당선인은 이 시기부터 각종 외교행사에 참석했다. 1966년 존슨 미국대통령의 방한 당시 '한국의 밤' 행사에 등장했고 1968년 9월에는 대통령 부부의 호주 방문에 동행했다. 1969년에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당시 세계 최대의 유조선인 '유니버스 코리아호'의 진수식에서 샴페인을 떠드리기도 했다.

성심여중에 입학한 박 당선인은 성심여고까지 재학하는 동안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고 1974년 서강대 이공학부(전자공학 전공)를 4년 평균 학점 4점 만점에 3.82로 수석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그해 8월15일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의 총격을 받아 숨졌다. 갑작스런 서거로 귀국한 박 당선인은 어머니 장례식을 치른 뒤 일주일도 안 돼 퍼스트레이디 직무대행을 했다.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퍼스트레이디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 박 당선인의 첫 일정이었다. 박 당선인은 당시 일기에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고 적었다. 그녀의 나이 22세의 일이었다.

1974년 걸스카우트 명예총재를 맡은 박 당선인은 새마을운동 정신을 더욱 구체적으로 이어가자는 의미의 '새마음운동'을 전개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영세한 기업과 소외된 계층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토시찰이나 산업현장을 방문할 때 수행하기도 했다. 1979년 주한미군 철수를 두고 미묘한 시점에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주한미군철수 계획이 취소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비극은 갑자기 찾아왔다. 어머니를 잃은 지 5년 뒤 10·26 사태로 아버지를 흉탄에 잃었다. 삽교천 준공식 행사에 참석한다고 나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에 비보를 전해들은 박 당선자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전방은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요람에서 당선까지' 박근혜 당선인의 발자취
부친 서거 소식에도 "전방 이상 없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권력의 대이동이 시작되자 박 당선인은 지만, 근영 두 어린 동생과 함께 1980년 18년간 머물렀던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집으로 옮겼고, 이어 성북동 자택에서 칩거에 들어갔다. 박 당선인은 당시 전두환 합수부장으로부터 9억원(후에 3억원은 돌려줌)을, 1982년에는 신기수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300평 규모의 성북동 자택을 받았다. 박 당선인은 2년 뒤 성북동 집을 팔아 장충동에 집을 샀고, 1990년 다시 그 집을 팔고 현재 삼성동 자택으로 이사했다.

이후 18년 동안 박 당선인은 육영재단과 박정희·육영수기념사업회, 1994년 인수한 정수장학회 운영에 몰두했다. 1980년 영남대 이사장직과 함께 육영수 여사가 남긴 육영재단 이사장직도 맡았다. 일기와 독서, 시 작성, 단전호흡, 불교경전 읽기 등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며 '훗날'을 준비했다. 1990년 아버지 일대기를 다룬 책 <겨레의 지도자>를 출간했고, 영화 <조국의 등불>을 제작하며 아버지 명예 회복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박 당선인이 정치에 뛰어들게 된 것은 1997년 발생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문이다. 박 당선인은 자서전에서 "나라가 이렇게 흔들리는데 혼자 편하게 살면 훗날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을까"라고 회고했다. 마침내 1997년 12월10일, 대선을 8일 앞둔 시점에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지지 선언을 통해 '정치인 박근혜'로서 정치권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듬해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박 당선인은 2000년에는 선출직 부총재 경선에 참여해 최병렬 후보에 이어 2위에 올라 부총재로 당선됐다.


'천막당사' 배수진
'선거의 여왕' 애칭

2001년 이회창 총재가 당 개혁안을 거부하자 이에 반발해 탈당하고 2002년 5월에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이던 2002년 5월12일에는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내준 특별기를 타고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들어갔다. 2박3일 머무는 동안 김 위원장과 만나 1시간 동안 단독회담을 한 적도 있다. 들어올 때는 김 위원장의 배려로 판문점을 통해 육로로 들어왔다.

2002년 11월 16대 대선을 앞두고 정치개혁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한나라당과 합당한 박 당선인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과 '차떼기 사건' 등으로 당이 위기에 처하자 2004년 3월 당 대표를 맡아 '천막당사'로 배수진을 쳤다. 당 대표 첫날 명동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했고 조계사에서 108배를 한 데 이어 영락교회에서 반성의 기도를 올렸다. 과거를 반성하고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의미였다. 그 결과 17대 총선에서 50석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완승을 이끌어내 '선거의 여왕'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박 당선인이 당 대표로 있던 2년3개월간 한나라당은 4번의 재보궐선거를 모두 승리했다. 2006년 5월20일 박 당선인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서울 신촌로터리 지방선거 유세 도중 오른쪽 뺨이 면도칼에 의해 11cm나 찢기는 테러를 당했다. 의사들은 5mm만 더 찔렸더라도 경동맥을 스치며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했다. 큰 상처를 입고 병원에 간 박 당선인은 "대전은요?"라고 선거 판세를 물어 지지층을 단결, 호남을 제외한 전 지역 광역단체장 석권을 만들어냈다.

이후 2007년 유력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던 박 당선인은 2006년 6월16일 대표직을 사퇴하고 대선 경쟁에 돌입, 서울시장으로서 당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이명박 후보와 경쟁했다. 박 당선인은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 모두 승리했지만 전화 여론조사에서 뒤져 이 후보에게 패했다. 박 당선인은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 이 후보를 지원해 '아름다운 패배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하지만 박 당선인은 이명박 정부 하에서 여러 차례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친이' '친박'계 간 갈등이 본격화 된 것. 18대 총선 때는 "국민도 속았고 나도 속았다"며 친이계와 정면 대립했고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에 맞서 본회의장에서 직접 연설을 하며 원안을 고수했다. 친박계 정치인들의 한나라당 복당을 꾸준히 요구해 친박계 60여 명의 복당이 관철되기도 했다.

18년간의 '공주' 생활과 18년간의 '칩거' 생활
1997년 정치권 등장, 2012년 대통령 당선

박 당선인은 2011년 말 한나라당의 서울시장 보선 패배, 디도스 공격 파문으로 한나라당이 휘청거리자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김종인·이상돈·이준석 등 중도적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영입하며 쇄신작업을 진행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새누리당은 선거전 초반 부정적 여론을 극복하고 4·11 총선에서 152석으로 1당을 차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박 당선인은 지난 7월10일 "국민 한분 한분의 꿈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며 18대 대선에 출마했다. 8월20일 김문수 경기지사, 안상수 전 인천시장,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김태호 의원 등과 벌인 당내 경선에서 84%라는 압도적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하며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

박 당선인은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대통령 후보에게 우위를 지키며 대선 레이스를 달려왔다. 중간 중간 과거사 논란·정수장학회 문제·경제민주화 갈등 등의 악재가 돌출됐지만 지지율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고비라 평가되던 문재인·안철수 간 단일화도 박 당선인의 벽을 넘지 못했다.

박 당선인은 마침내 지난 19일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여성대통령, 첫 과반대통령이라는 진기록을 세우며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박 당선인은 1577만3128표를 얻어 문재인 후보(1469만2632표)를 3.6%p(108만496표) 차이로 눌렀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부녀가 처음으로 대통령에 오르는 기록도 세우게 됐다.

신뢰의 정치로
대선 승리


박 당선인은 지난 20일 오전 국립현충원 참배를 시작으로 내년 2월25일 공식 취임 전까지 정권 인수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박 당선인은 지난 주말 인수위원회 구상을 마친 뒤 이번 주께 인수위원장과 위원 인선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약 두달 여간 정권 인수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벌이게 될 대통령직인수위 사무실은 서울 삼청동 금융연수원으로 결정됐다. 내년 1월 중순까지는 국무총리 후보자를 먼저 지명한 뒤 상의를 거쳐 1월 말쯤에는 각부 장관 후보들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박 당선인의 대통령 임기는 2018년 2월24일까지다.

한종해 기자<han1028@ilyosisa.co.kr>

 

 

<박근혜 당선인 프로필>

출생 1952년 2월2일
본적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 171
출생지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 5-2
혈액형 B형
신장 162cm
특기 피아노연주
취미 산책, 문화유산답사
좌우명 바르고 현명하게 살자

학력
1970년 성심여고 졸업
1974년 서강대 전기공학과 졸업
1987년 대만 중국문화대 명예 문학박사
2001년 대만 중국문화대 대학원 최고산업전략과정 수료
2008년 한국과학기술원 명예 이학박사
2008년 부경대 명예 정치학박사
2010년 서강대 명예 정치학박사


경력
1974~1979년 퍼스트레이디 대리
1974년 재단법인 육영수여사 기념사업회 이사장(현)
1993년 한국문화재단 이사장(현)
1994~2005년 정수장학회 이사장
1994년 한국문인협회 회원(현)
1997년 한나라당 고문
1998년 제15대 국회의원
1998~2002년 한나라당 부총재
2000~2004년 제16대 국회의원
2002년 한국미래연합 대표운영위원, 한나라당 대통령선거대책위원회 공동의장
2003년 한나라당 상임운영위원
2004~2006년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
2004년 제 17대 국회의원
2007년 한나라당 제17대 대통령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2011~2012년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비례대표, 새누리당)
2012년 12월19일 제18대 대통령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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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