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특집] '파란만장' 박근혜 60년 인생사 탐구

  • 한종해 han1028@ilyosisa.co.kr
  • 등록 2012.12.26 11: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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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에서 여왕으로…33년 만에 궁궐로 돌아가요

[일요시사=경제1팀] '공주'가 '여왕'이 됐다. 33년 만에 '궁궐'로 돌아간다. 대통령의 딸도, 퍼스트레이디도 아닌 대한민국 최초 여성대통령 자격이다. 대통령의 맏딸이자 5선 국회의원으로 마침내 대권을 향한 꿈을 이룬 박근혜 당선인. 우리 현대사만큼이나 굴곡진 그녀의 60년 인생을 <일요시사>가 집중 조명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월2일 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에서 당시 육군본부 작전차장 박정희 대령과 중학교 교사 출신 육영수씨의 1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나 2살 때부터 서울에서 자랐다.

9살이 되던 해인 1961년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박정희 소장이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2년 뒤인 1963년 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큰 영애'로 불리며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박 당선인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가혹한 운명의
퍼스트레이디

박 당선인은 이 시기부터 각종 외교행사에 참석했다. 1966년 존슨 미국대통령의 방한 당시 '한국의 밤' 행사에 등장했고 1968년 9월에는 대통령 부부의 호주 방문에 동행했다. 1969년에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당시 세계 최대의 유조선인 '유니버스 코리아호'의 진수식에서 샴페인을 떠드리기도 했다.

성심여중에 입학한 박 당선인은 성심여고까지 재학하는 동안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고 1974년 서강대 이공학부(전자공학 전공)를 4년 평균 학점 4점 만점에 3.82로 수석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그해 8월15일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의 총격을 받아 숨졌다. 갑작스런 서거로 귀국한 박 당선인은 어머니 장례식을 치른 뒤 일주일도 안 돼 퍼스트레이디 직무대행을 했다.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퍼스트레이디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 박 당선인의 첫 일정이었다. 박 당선인은 당시 일기에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고 적었다. 그녀의 나이 22세의 일이었다.

1974년 걸스카우트 명예총재를 맡은 박 당선인은 새마을운동 정신을 더욱 구체적으로 이어가자는 의미의 '새마음운동'을 전개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영세한 기업과 소외된 계층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토시찰이나 산업현장을 방문할 때 수행하기도 했다. 1979년 주한미군 철수를 두고 미묘한 시점에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주한미군철수 계획이 취소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비극은 갑자기 찾아왔다. 어머니를 잃은 지 5년 뒤 10·26 사태로 아버지를 흉탄에 잃었다. 삽교천 준공식 행사에 참석한다고 나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에 비보를 전해들은 박 당선자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전방은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요람에서 당선까지' 박근혜 당선인의 발자취
부친 서거 소식에도 "전방 이상 없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권력의 대이동이 시작되자 박 당선인은 지만, 근영 두 어린 동생과 함께 1980년 18년간 머물렀던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집으로 옮겼고, 이어 성북동 자택에서 칩거에 들어갔다. 박 당선인은 당시 전두환 합수부장으로부터 9억원(후에 3억원은 돌려줌)을, 1982년에는 신기수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300평 규모의 성북동 자택을 받았다. 박 당선인은 2년 뒤 성북동 집을 팔아 장충동에 집을 샀고, 1990년 다시 그 집을 팔고 현재 삼성동 자택으로 이사했다.

이후 18년 동안 박 당선인은 육영재단과 박정희·육영수기념사업회, 1994년 인수한 정수장학회 운영에 몰두했다. 1980년 영남대 이사장직과 함께 육영수 여사가 남긴 육영재단 이사장직도 맡았다. 일기와 독서, 시 작성, 단전호흡, 불교경전 읽기 등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며 '훗날'을 준비했다. 1990년 아버지 일대기를 다룬 책 <겨레의 지도자>를 출간했고, 영화 <조국의 등불>을 제작하며 아버지 명예 회복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박 당선인이 정치에 뛰어들게 된 것은 1997년 발생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문이다. 박 당선인은 자서전에서 "나라가 이렇게 흔들리는데 혼자 편하게 살면 훗날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을까"라고 회고했다. 마침내 1997년 12월10일, 대선을 8일 앞둔 시점에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지지 선언을 통해 '정치인 박근혜'로서 정치권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듬해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박 당선인은 2000년에는 선출직 부총재 경선에 참여해 최병렬 후보에 이어 2위에 올라 부총재로 당선됐다.


'천막당사' 배수진
'선거의 여왕' 애칭

2001년 이회창 총재가 당 개혁안을 거부하자 이에 반발해 탈당하고 2002년 5월에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이던 2002년 5월12일에는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내준 특별기를 타고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들어갔다. 2박3일 머무는 동안 김 위원장과 만나 1시간 동안 단독회담을 한 적도 있다. 들어올 때는 김 위원장의 배려로 판문점을 통해 육로로 들어왔다.

2002년 11월 16대 대선을 앞두고 정치개혁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한나라당과 합당한 박 당선인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과 '차떼기 사건' 등으로 당이 위기에 처하자 2004년 3월 당 대표를 맡아 '천막당사'로 배수진을 쳤다. 당 대표 첫날 명동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했고 조계사에서 108배를 한 데 이어 영락교회에서 반성의 기도를 올렸다. 과거를 반성하고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의미였다. 그 결과 17대 총선에서 50석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완승을 이끌어내 '선거의 여왕'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박 당선인이 당 대표로 있던 2년3개월간 한나라당은 4번의 재보궐선거를 모두 승리했다. 2006년 5월20일 박 당선인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서울 신촌로터리 지방선거 유세 도중 오른쪽 뺨이 면도칼에 의해 11cm나 찢기는 테러를 당했다. 의사들은 5mm만 더 찔렸더라도 경동맥을 스치며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했다. 큰 상처를 입고 병원에 간 박 당선인은 "대전은요?"라고 선거 판세를 물어 지지층을 단결, 호남을 제외한 전 지역 광역단체장 석권을 만들어냈다.

이후 2007년 유력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던 박 당선인은 2006년 6월16일 대표직을 사퇴하고 대선 경쟁에 돌입, 서울시장으로서 당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이명박 후보와 경쟁했다. 박 당선인은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 모두 승리했지만 전화 여론조사에서 뒤져 이 후보에게 패했다. 박 당선인은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 이 후보를 지원해 '아름다운 패배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하지만 박 당선인은 이명박 정부 하에서 여러 차례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친이' '친박'계 간 갈등이 본격화 된 것. 18대 총선 때는 "국민도 속았고 나도 속았다"며 친이계와 정면 대립했고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에 맞서 본회의장에서 직접 연설을 하며 원안을 고수했다. 친박계 정치인들의 한나라당 복당을 꾸준히 요구해 친박계 60여 명의 복당이 관철되기도 했다.

18년간의 '공주' 생활과 18년간의 '칩거' 생활
1997년 정치권 등장, 2012년 대통령 당선

박 당선인은 2011년 말 한나라당의 서울시장 보선 패배, 디도스 공격 파문으로 한나라당이 휘청거리자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김종인·이상돈·이준석 등 중도적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영입하며 쇄신작업을 진행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새누리당은 선거전 초반 부정적 여론을 극복하고 4·11 총선에서 152석으로 1당을 차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박 당선인은 지난 7월10일 "국민 한분 한분의 꿈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며 18대 대선에 출마했다. 8월20일 김문수 경기지사, 안상수 전 인천시장,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김태호 의원 등과 벌인 당내 경선에서 84%라는 압도적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하며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

박 당선인은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대통령 후보에게 우위를 지키며 대선 레이스를 달려왔다. 중간 중간 과거사 논란·정수장학회 문제·경제민주화 갈등 등의 악재가 돌출됐지만 지지율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고비라 평가되던 문재인·안철수 간 단일화도 박 당선인의 벽을 넘지 못했다.

박 당선인은 마침내 지난 19일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여성대통령, 첫 과반대통령이라는 진기록을 세우며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박 당선인은 1577만3128표를 얻어 문재인 후보(1469만2632표)를 3.6%p(108만496표) 차이로 눌렀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부녀가 처음으로 대통령에 오르는 기록도 세우게 됐다.

신뢰의 정치로
대선 승리


박 당선인은 지난 20일 오전 국립현충원 참배를 시작으로 내년 2월25일 공식 취임 전까지 정권 인수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박 당선인은 지난 주말 인수위원회 구상을 마친 뒤 이번 주께 인수위원장과 위원 인선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약 두달 여간 정권 인수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벌이게 될 대통령직인수위 사무실은 서울 삼청동 금융연수원으로 결정됐다. 내년 1월 중순까지는 국무총리 후보자를 먼저 지명한 뒤 상의를 거쳐 1월 말쯤에는 각부 장관 후보들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박 당선인의 대통령 임기는 2018년 2월24일까지다.

한종해 기자<han1028@ilyosisa.co.kr>

 

 

<박근혜 당선인 프로필>

출생 1952년 2월2일
본적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 171
출생지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 5-2
혈액형 B형
신장 162cm
특기 피아노연주
취미 산책, 문화유산답사
좌우명 바르고 현명하게 살자

학력
1970년 성심여고 졸업
1974년 서강대 전기공학과 졸업
1987년 대만 중국문화대 명예 문학박사
2001년 대만 중국문화대 대학원 최고산업전략과정 수료
2008년 한국과학기술원 명예 이학박사
2008년 부경대 명예 정치학박사
2010년 서강대 명예 정치학박사


경력
1974~1979년 퍼스트레이디 대리
1974년 재단법인 육영수여사 기념사업회 이사장(현)
1993년 한국문화재단 이사장(현)
1994~2005년 정수장학회 이사장
1994년 한국문인협회 회원(현)
1997년 한나라당 고문
1998년 제15대 국회의원
1998~2002년 한나라당 부총재
2000~2004년 제16대 국회의원
2002년 한국미래연합 대표운영위원, 한나라당 대통령선거대책위원회 공동의장
2003년 한나라당 상임운영위원
2004~2006년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
2004년 제 17대 국회의원
2007년 한나라당 제17대 대통령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2011~2012년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비례대표, 새누리당)
2012년 12월19일 제18대 대통령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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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