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코리안 특급’ 박찬호 야구인생 19년 희로애락

'IMF 시련' 국민에 희망을 던졌다

[일요시사=연예팀]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전격 은퇴를 선언하며 프로인생을 마감했다. 1994년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LA다저스에 진출해 아시아 선수로는 최다승인 124승을 기록한 박찬호. 이제 마운드 위에서 당당했던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IMF 금융위기 때 희망을 던진 박찬호의 불같은 강속구는 국민의 뇌리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야구영웅 박찬호가 마운드를 떠난다. 단지 소속팀을 이전한다는 게 아니다. 현역을 은퇴하며 19년 프로선수의 화려한 삶을 마감한다는 것이다. 지난달 29일 한화 구단은 “박찬호가 금일 오후 본인의 은퇴 의사를 구단에 전달했고, 구단은 박찬호의 은퇴 결정을 존중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한국야구의 ‘살아있는 레전드’ 박찬호는 정든 마운드를 떠나게 됐다.

국민영웅 등극

박찬호는 한국야구의 선구자나 다름없다. 충청도 공주 출생인 그는 공주중동초-공주중-공주고를 거쳐 한양대에 입학했다. 학창시절부터 빠른 강속구를 던지며 유망주로 주목을 받았던 박찬호는 한양대에 진학한 후 최고 구속 156km를 찍는 등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다.

그는 공주고 3학년 시절인 지난 1991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를 통해 처음 다저스스타디움에 발을 디뎠다. 이후 1993년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1승2세이브 평균자책점 1.10으로 활약해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후 대학교 2학년이었던 지난 1994년, 박찬호는 LA 다저스와 120만달러의 금액을 받고 성공적인 계약을 이끌며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게다가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17번째 선수라는 타이틀도 얻게 됐다.


그러나 미국 프로야구의 벽은 높았다. 단 2경기 만에 마이너리그로 내려가게 된 것. 그는 마이너리그에서 2년간 칼을 갈며 재기할 생각만 다졌다. 1996년이 되던 해, 2년 간 다잡았던 노력과 땀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중간계투로 종횡무진 활약하며 5승(5패)을 거둔 박찬호는 마침내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되는데 성공했다. 이듬해부터는 믿고 쓰는 선발투수로 발돋움하며 승승장구했다.

이어 그는 1997년 14승(8패), 1998년 15승(9패), 1999년 13승(11패), 2000년 18승(10패), 2001년 15승(11패)으로 5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따내며 다저스의 에이스이자 메이저리그에서도 손에 꼽는 특급 선발투수로 자리 잡았다. 특히 이 시기는 우리나라가 IMF라는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었기 때문에 박찬호의 빛나는 활약이 국민에게는 실낱같은 희망과도 같았다. 즉 박찬호는 국민 영웅으로 우뚝 올라선 것이다.

국가의 위상을 드높인 그는 이윽고 슈퍼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와 계약했고, 시즌 후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최대 6500만달러라는 초대형 FA 계약을 터뜨리며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기대를 한몸에 받고 간 텍사스에서 박찬호는 첫 번째 시련을 맞이했다. 2002년 9승(8패)으로 기대에 한참 못 미친 성적을 보여준 그는 허리와 햄스트링 부상을 차례로 당하며 2003년 1승(3패), 2004년 4승(7패)에 머물렀다. 박찬호를 향한 텍사스 주 지역여론은 차갑게 식었고 팬들의 비난이 들끓면서 육체적·정신적으로 고초를 겪었다.

긴 시련 끝에 부상에서 회복된 그는 2005년 텍사스에서 8승을 거두며 개인 통산 100승을 채우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박찬호는 고액 연봉에 비해 한참 못 미친 성적으로 ‘먹튀’라는 오명을 떠안게 됐고,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샌디에이고 파드레스로 트레이드 돼버리고 말았다.

숱한 좌절과 고비에도 박찬호는 같은 해 2005년, 12승(8패)을 거두며 재기에 성공, 2006년에는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7승(7패)을 거뒀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일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다름 아닌 장출혈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건강악화에 박찬호의 재기는 기약할 수 없을 듯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그가 아니었다. 박찬호는 생애 첫 포스트시즌을 위해 불굴의 의지를 보이며 빠르게 회복을 찾아갔고, 데뷔 후 처음으로 가을잔치 무대를 밟는 영광을 누렸다.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거…아시아 선수 최다승
‘굿바이 마운드’ 한화 유니폼 입고 전격 은퇴


축제도 잠시 그에게는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2007년 뉴욕 메츠와 계약한 박찬호는 단 1경기 출전이라는 굴욕을 맛봐야만 했다. 이어 불안한 성적 때문에 시즌 중 방출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방출된 뒤 그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계약했다. 그런데 이는 메이저 계약이 아닌 마이너 계약이었다. 또 다시 마이너리그로 추락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해 박찬호는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이후 가장 오랜 시간 마이너리그에서 보냈다. 모두가 “포기하라”며 고개를 저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2008년 친정팀 LA다저스로 돌아온 박찬호는 선발투수가 아닌 불펜투수로 4승(4패)을 거두며 보란 듯이 부활했고, 2009년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옮겨 3승(3패)으로 불펜의 한축을 맡으며 생애 첫 월드시리즈 무대까지 밟았다. 이듬해 2010년 박찬호는 우승반지 하나만 노리고 뉴욕 양키스로 이적했으나 부진을 면치 못해 시즌 중 웨이버 공시됐고,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로 옮겼다. 시즌 성적은 4승(3패) 평균자책점 5.12로 다소 인상적인 성적을 거두진 못했다.

지난 1994년 처음으로 발을 디딘 후 17년간 9개의 팀을 옮겨 다닌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통산 성적 476경기 124승98패, 평균자책점 4.36, 탈삼진 1715개로 통산 승수는 아시아 출신 선수로는 최다승이며 1993이닝으로 최다 투구이닝을 달성했다.

오랜 시간 동안 야구인생을 엮어나갔던 메이저리그 생활을 청산한 뒤 그는 일본프로야구 오릭스에서 7경기 중 1승5패, 평균자책점 4.29를 기록했다. 그리 훌륭한 성적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는 1년 동안 일본에서 메이저리그와는 다른 야구를 배웠다.

18년간의 해외 선수 생활을 뒤로 한 그는 우여곡절 끝에 오랜 꿈이었던 고향 팀 한화이글스 유니폼을 입었다. 명성에 걸맞게 연봉을 백지위임하며 최소 연봉 2400만원, 옵션 6억원 전액을 야구발전 기금으로 쾌척하는 위엄을 보였다.

개막 후 7경기 연속 선발등판한 날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티켓파워’를 대대적으로 과시한 박찬호는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녹슬지 않은 기량을 펼치며 국가대표 에이스 류현진과 함께 원투펀치를 이뤘다.

‘먹튀’ 오명도

베테랑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국내 야구팬들은 살아있는 레전드 박찬호가 투구를 던질 때마다 환호를 내지르며 열광했다. 그러나 허리와 팔꿈치 통증이 도진 후반기에 그는 타 팀 타자들로부터 난타 당하기 일쑤였고, 체력도 예전만큼 받쳐주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 프로인생 1년 동안 23경기 5승10패 평균자책점 5.06의 아쉬운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시즌 마감 후 박찬호는 오랜 고민 끝에 은퇴라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며 20여 년에 이르는 프로선수로서의 삶을 내려놓았다.

이제 프로야구선수 박찬호는 없다. 그러나 그가 몸소 보여준 야구 열정과 힘들 때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해준 불꽃같은 희망은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김지선 기자 <jisun86@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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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특집 대담> 정치 9단 김종인 대한민국을 묻다

[추석특집 대담] 정치 9단 김종인 대한민국을 묻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박희영 기자 =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더불어민주당의 검찰개혁에 대해 “검찰을 3개로 찢어놓는다고 해서, 검찰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란 확신은 못하겠다”고 비판했다. 김 전 비대위원장은 국민의힘에 대해서도 “강경 보수로 회귀하면, 희망이 있다고 보이진 않는다”고 경고했다.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개혁신당 공천관리위원장을 끝으로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있다. <일요시사>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김 전 비대위원장을 만나 그가 제시하는 정국 진단 결과와 향후 우리 정치가 나아가야 할 길을 들었다. 다음은 김 전 비대위원장과의 일문일답. -출범 100일을 넘긴 이재명 정부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100일 동안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잘했다고 본다. 국민과 소통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추석을 앞두고 지급된 2차 민생회복 소비쿠폰에 대한 의견은? ▲민생 경제가 굉장히 어렵고, 우리나라의 총수요가 낮아졌다. 한국은행이 진단한 올해 성장률도 0.9%밖에 안 된다. 쿠폰을 풀면, 약간의 소비 촉진 효과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경제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엔 부족하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겉보기엔 훈훈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3500억달러 투자 펀드 조성 요구와 노동자 317명 추방 등 사태와 맞물려 이 대통령에 대한 비판 여론이 불거졌다. ▲우리 경제 부처 장관들이 미국 월가를 이해하지 못한 채 막연하게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미국의 요구는 보증·대출을 거쳐 이행하면 될 것”이라고 이해한 것 같다. 근본적인 시각 차이 때문에 협상이 타결되지 못했다. 그런데 국민에겐 마치 타결된 것 같은 인상을 줬다. 한 달도 안 돼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국민은 의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하는 미국의 MAGA 진영은 우리나라 일각의 부정선거론을 지지하면서 “한국이 공산주의에 진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보는가? ▲그들은 미국이 어떻게 위대한 나라가 됐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트럼프의 MAGA 프로젝트는 성공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우리와도 관계가 없다. “MAGA 진영이 우리 정치에 개입할 것”이란 믿음은 국내 보수 진영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검찰 해체를 서둘러 마무리하려고 한다. 민주당이 새로 구상하는 검찰 체계에 대한 평가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검찰의 문제는 지금까지 권력자가 검찰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때문에 검찰도 못된 버릇이 들어 이렇게 됐다. 개혁보다 “검찰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진짜 문제다. 검찰을 3개로 찢어놓는다고 해서, 검찰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란 확신은 못하겠다. -이 대통령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씨를 주중대사로 임명했다. 노 대사가 어떤 역할을 할 것 같은가? ▲노 전 대통령은 한중 수교를 이끌었다. 노 대사는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으로서 한중 문화 교류와 관련된 많은 역할을 했다. 이 대통령이 이를 참작해 중국 대사로 임명하는 신선한 인사를 한 것 같다. 이 대통령도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했으니 노 대사를 임명했을 것이다. -최근 민주당의 내부 구도를 놓고 ‘김어준 상왕설’이 불거지고 있다. 이 주장은 정국을 강경하게 이끄는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대응과 맞물리고 있는데… ▲김어준씨가 유튜브를 시청하는 일정 부류엔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런데 대중에게 크게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보진 않는다. 대통령이 엄연히 있기 때문이다. ‘상왕설’은 너무 과장된 얘기라고 생각한다. -최근 특검 수사 기간 연장과 관련해 정 대표와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가 충돌했다. ▲내부 의견 충돌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내가 보기엔 김 원내대표가 독단적으로 합의한 것 같진 않다. 합의 후 강성 지지층이 반발해서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합의를 파기하려다 보니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그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 대통령과 정 대표는 과거에 갈등이 많았고, 최근 민주당에 대해선 “친명과 구 친문이 갈등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그건 다 괜히 하는 소리다. 대통령이 엄연히 있는데, 당 대표가 대통령을 상대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기가 쉽진 않다. -민주당 일각에선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에 합당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혁신당 조국 비대위원장은 목표가 정해진 사람이다. 합당이 그 목표 실현에 유리할지 많이 생각할 것이다. 아울러 조 비대위원장으로선 혁신당만으로 전국 단위 선거를 치를 수 있을지 고민할 텐데, 상황에 직면하면 합당 여부를 정하지 않겠나? 합당은 민주당 내부에서도 받아들일 의사가 있어야 진행될 수 있다. 자신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서 합의점에 도달하면 합당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대통령 있는데 당대표가 어떻게 의사 관철?” “장동혁은 대권 욕심 갖고 계속 변화할 것”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이끌던 국민의당과 혁신당은 총선을 치르면서 호남에서 선전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호남 민심이 어떤 선택을 할 거라고 보나? ▲두고 봐야 안다. 호남 민심은 제19대 대선에선 안 의원이 아니라 문재인 전 대통령을 선택했다. 호남 유권자들은 상당히 전략적으로 투표한다. 그들은 정권 재창출이 가능한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다. 그러니 선거를 치러봐야 알 수 있다. 지금은 뭐라고 얘기하기 어렵다. -장 대표가 취임하자, 강경 보수 유튜버들은 “군소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국민의힘과 강경 보수 유튜버들이 너무 밀착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국민의힘이 계속 지금과 같은 자세를 유지하면, 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국민의힘은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사태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이후 우리 정치 지형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냉철하게 분석해야 한다. 변화가 있어야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강경 보수로 회귀하면, 희망이 있다고 보이진 않는다. -장 대표는 강경 보수와의 밀착과 중도층 공략 사이에서 계속 의견이 바뀐다. ▲장 대표에게도 정치적 목표가 있을 텐데 그는 목표 달성을 위해 많은 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강경 보수의 지원을 받아 당 대표가 됐지만, 자신의 정치적 지향점을 어떻게 결정할지 잘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지나치게 강경 보수와 밀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그들과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선을 긋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에게는 크게 정치적 기대를 하기 힘들다고 본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가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어차피 당 대표가 됐으니, 대권 욕심을 가질 것이다. 정치인은 언제나 시대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장 대표 스스로 “변화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계속 많이 변할 것이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장 대표가 당선되면서 위상이 많이 훼손됐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 전 대표의 행보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국민의힘 당원들은 상당한 분노에 차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강경해졌다. 세월이 흘러 당원들이 당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면, 또 변할 수도 있다. 지금 상황만으로 판단하기엔 굉장히 이르다. 한 전 대표가 당시 여당 대표로서 비상계엄 선포 직후 반대 의견을 밝히면서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에 찬성한 것은 굉장히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앞으로 어떻게 정치적으로 발전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국민의힘에선 가장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 본다. -장 대표가 한 전 대표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장 대표로선 당연히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쫓아낼 수 있겠는가? 어떻게 쫓아내겠나? 오늘의 장 대표는 한 전 대표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대표는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 오세훈 서울시장 등과 지방선거에서 연대할 가능성을 내비친다. ▲뻔한 사람들끼리 하는 거라서 큰 효과가 있을 것 같진 않다. 모두 국민의힘 사람이거나 국민의힘 출신인데 특별한 효과가 있겠는가? -진영 간 대결 구도가 성별·세대 갈등 구도로 번졌다. 정치권 원로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시대·사회·경제 구조가 변하고, 새 기술이 도입되면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국민 사이에 형성되는 ‘그룹’을 조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이 필요하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 “이준석·안철수·오세훈? 뻔한 사람들” “국힘, 강경 보수로? 희망 보이지 않아” -일부 정치인은 갈등을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후원금을 벌고 있다.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갈등을 전체적으로 포괄한 후 최대공약수를 찾아 정치해야 한다. -과거 정치와 현재 정치의 가장 큰 변화와 차이점은? ▲못 살던 시절엔 먹고사는 게 가장 중요해서 경제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지금은 국민의 의식 구조가 과거와 다르다. 이 시대의 젊은 세대는 우리 국민 중 성숙도가 가장 높다.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도 가장 좋다. 이들은 공정하지 못하고, 불평등하며, 민주적이지 않은 것에 크게 저항한다. 세대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극우화됐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4050 남성이 2030 남성에게 가장 불만을 품는 부분은 “너희는 왜 국민의힘을 지지하면서 보수화되느냐”는 것이다. ▲2030 남성은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게 아니다. 최근 국민의힘은 장외 집회를 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너무 소란을 피우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흔히들 “장 자크 루소가 얘기하는 계몽주의가 프랑스 대혁명을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계몽주의가 뭔가? 성숙지 못한 국민을 성숙하게 만들어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의 성숙도는 매우 높아졌다. 이 때문에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도 실패했다.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 정치가 이를 따라가야 하는데, 접근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정계의 킹메이커로 알려졌다.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대통령은 정직해야 한다. 시대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대통령들이 모두 실패한 원인은 너무 탐욕스러웠고, 시대 변화를 제대로 못 따라갔다는 것이었다. -최근 한국 정치·사회에서 작게나마 희망을 봤거나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 반대가 된 일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제일 시급한 과제는 아주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다. 이를 완화하지 않으면, 한국 정치는 국민통합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초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고, 출산율은 매우 낮다. 경제의 역동성이 거의 없어지고 있다. 정치인이 말로만 소통·통합을 외친들 아무 소용이 없다. -추석 연휴를 앞둔 <일요시사> 독자에게 남길 덕담 한마디가 있다면? ▲대통령을 선출하는 기준이 여론조사에 휩쓸리는 식으로 정해지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윤 전 대통령도 그렇게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랫동안 검사였던 사람이 지도자가 된 사례가 세계적으로 별로 없다. 이들은 남의 부정적인 측면만 따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창의적·긍정적 역할을 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제가 그를 호의적으로 봤던 것도 큰 잘못이었다. 당시 국민의힘엔 대통령감이 없었다. 그래서 저는 윤 전 대통령의 여론조사 지지율이 높은 것을 일컬어 “별의 순간을 잡았다”고 말했다. 결국 윤 전 대통령은 제가 우려했던 행동을 했다. 저는 이승만 전 대통령 외엔 모든 대통령을 만나봤다. 직접 자문도 했고,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적도 있다. 이 경험을 토대로 <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라는 책도 출간했다. 이들이 실패한 원인은 초심을 관철하지 못했단 것이었다. 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된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이미 우리나라에선 오래전에 보수·진보가 사라졌다. 지난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됐던 제15대 대선도 보수·진보의 싸움이 아니었다. 모두 보수였다. 19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은 정치권에 진출한 후 스스로 대단한 진보를 자처했다. 그런데 이들은 진보의 뜻도 모른다. 이들은 정권을 네 번 잡을 동안 양극화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무슨 진보 정권인가? 국민이 정치 상황을 냉철하게 관찰하시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자세를 갖추셔야 한다. 대통령·국회의원도 결국 국민이 선출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란다. <ctzxp@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