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따금 재개봉하는 홍콩 왕자웨이 감독 영화의 주 관객은 2030세대다. 그들은 왜 30년 전 개봉된 왕 감독의 작품에 소리 없이 열광하는 걸까? 정치권이 정책으로 풀어야 할 청년의 현실은 왕 감독의 옛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홍콩 왕자웨이 감독이 2000년 연출한 영화 <화양연화> 특별판이 지난해 12월31일 개봉했다. 특별판엔 지난 25년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약 9분 분량의 미공개 에피소드가 수록됐다. 1958년생인 왕 감독은 1990년대에 집중적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팬들이 경배하는 왕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당시 제작·공개된 작품이다.
단점이 곧 장점
특이할 만한 것은 그의 영화에 몰두하는 한국 영화 관객은 주로 2030세대에 집중돼있다는 점이다. 지난 2020년 재개봉했던 <화양연화 리마스터링>은 20대·30대 관객 비율이 각각 33%로 드러나 총 66%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2021년 재개봉했던 <해피 투게더 리마스터링>의 20대 관객은 51%였고, 30대 관객은 35%로 확인됐다. 이들을 합치면 총 86%다. 지난 2024년 개봉된 <중경삼림 리마스터링>은 20대 관객 43%, 30대 관객 32%로 총 75%는 2030세대 관객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왕 감독의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극단적으로 나뉜다. 스텝 프린팅은 1990년대엔 파격적인 영상 촬영기법이었다. 하지만 뚜렷한 구조 없이 감정의 파편을 나열하고, 자기 연민·독백을 영화에 가득 채우는 왕 감독의 서사는 “왕 감독의 열성 팬이 아니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듣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재개봉하는 왕 감독 영화에 대한 2030세대의 호응이 높다는 것과 관련해선 “그 단점이 그들에겐 장점”이란 분석이 다수 나온다. 이 분석은 “왕 감독이 취하는 서사 구조·영상 미학처럼 2020년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2030세대의 현실을 잘 반영하는 영화의 내적 구조는 없다”는 결론으로 연결된다.
왕 감독은 기승전결이란 서사의 전형적인 구조를 취하지 않으며 오로지 나열하는 식이다. 이 때문에 서사 구조를 중시하는 관객의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SNS에서의 소통에 몰두하면서 현실과의 소통엔 주저하는 2030세대의 현실과 곧바로 연결된다.
SNS 내 소통은 단문 중심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기성세대 등 원치 않는 사람들과는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갖춘 후 소통해야 한다.
기승전결이 없는 서사는 결국 “노력해도 결과가 보장되지 않아서 내일이 없다”는 2030세대의 좌절과 맞물린다. 기성세대는 2030세대에게 ‘노력’을 강조한다. 이는 오랫동안 이어졌던 역사의 관행이다.
옛 홍콩 영화에 소리 없는 2030 열광
‘탈 홍콩’ ‘탈 조선’ 묘한 오버랩
정치권은 정치인 개개인이 자신을 알리기 위한 형식적인 SNS 소통에 나선다. 그러면서 자신의 영향력이 닿는 청년에게 공직을 부여하는 것을 ‘청년 영입’이라고 포장한다. 이는 결국 2030세대가 “누구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절망으로 연결되도록 한다.
남은 것은 자기 연민과 독백이다. 들어줄 준비가 돼있지 않은 자들과의 소통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홀로 말하고, 홀로 달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암호화된 언어와 취향이다. 그들은 왕 감독의 파편 같은 서사 구조에서 자신을 달래줄 암호를 본다.
왕 감독의 데뷔작인 1988년작 <열혈남아>엔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도 부족해 사고뭉치 동생을 챙기다가 모든 걸 망치는 어설픈 뒷골목 건달 아화(유덕화 분)가 등장한다. 아화는 끝까지 현실에서 도망가지 못한다. 대한민국의 전통적인 노인 부양 구조는 가족 부양이다.
동생을 챙기다가 자신의 삶까지 무너지는 아화는 그들에게 ‘불안한 미래’로 해석된다.
1994년 작 <중경삼림>의 핵심은 파인애플 통조림이다. 주인공 하지무(카네시로 타케시 분)에게 5월1일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생일이자 옛 애인과 헤어진 후로부터 한 달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매년 4월30일이 되면 유통기한이 5월1일인 통조림만 찾는다.
5월1일은 정치권의 숙제일 수도 있다. 2030세대에겐 안정된 삶이란 꿈같이 느껴진다. 그들이 일자리를 찾는 채용 사이트에선 기간제 일자리가 더 많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SNS 중심 인간관계는 ‘차단’으로 한순간에 정리되는데 여기에서도 안정은 없다.
1994년 작 <동사서독>의 등장인물들은 황량한 사막에서 고립된 객잔에서 정신적 교감만을 갈구하며, 밖으로는 나가지 못한다. 거절당하는 상처를 받기 전에 먼저 거절한다. 그래서 빙빙 돌려 말하거나 상대를 공격한다. 2030세대에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어야 그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가 된다.
1995년 작 <타락천사>엔 다른 사람의 가게에 들어가 각종 기행을 벌이는 언어장애인 하지무(카네시로 타케시 분)가 등장한다.
2020년 이후 대한민국엔 철구·신태일·김윤태·이술인 등 막장·기행 유튜버 계보가 이어졌다. 2030세대 중 상당수는 물론 10대까지 그들의 욕설·기행에 열광한다. 이들은 정치권에서 직접 나서서 비난할 정도로 과격했다. 하지만 “청년이 왜 그들을 보면서 웃느냐”는 질문엔 답하지 않는다.
청년의 삶 모두 담긴 ‘오래된 미래’
정치권이 청년에 보낼 새해 응답은?
1997년 작 <해피 투게더>는 겉보기엔 퀴어 영화다. 주인공 퀴어 커플은 언제나 “우리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 그런데 파멸이 이어진다. “다시 시작하자”는 것도 희망이란 담보가 있어야 한다. 과연 2030세대에게 희망은 있는 걸까?
이 커플의 이상향은 홍콩의 정반대인 아르헨티나로 ‘탈 홍콩’이다. 대한민국 2030세대에겐 ‘탈 조선’으로 다가온다.
<화양연화>의 주인공들은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가장 정갈한 치파오를 잃는다. 경제 상황과 무관한 패션은 곧 체면이다. 저임금 시대가 구조화되면서 ‘스몰 라이프’를 추구하는 청년이 많아졌다. 기성세대는 그들의 소비를 비난하지만, 과연 그들이 그 소비를 온전히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일까?
2004년 작 <2046>에선 모든 게 변하지 않는 기억의 저장소 ‘2046’이 나온다. 2046행 열차 속 안드로이드들은 감정 반응 속도가 매우 느리다. 기성세대가 보기에 2030세대는 빠릿빠릿하지 않고 속을 알 수 없다. 반대로 2030세대에게 안정된 미래란 기억소에 처박힌 과거의 유물이다.
왕 감독의 영화엔 중국 반환을 앞둔 1990년대 중반 홍콩을 살아가는 청년의 불안 정서가 고스란히 반영돼있다. 2030세대가 바라보는 2020년대 대한민국은 그들에게 영화 속 1990년대 홍콩으로 투영된다. 주인공들에겐 ▲구조적 빈곤 ▲일회성 청년 정책 ▲불안정한 일자리 ▲보장되지 않는 최소한의 존엄 등 문제가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청년 과제의 양대 핵심은 주거·일자리”라며 “월세 지원 확대·일자리 첫걸음 보장제 등을 추진하면서 청년의 삶 전반을 포괄하는 근본적 해결책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용한 항의
국민의힘은 지난해 6월 대선을 치르면서 ▲주거 지원 강화 ▲저출산 극복 ▲일자리·경제 활성화 등을 제안했다. 2030세대 관객은 왜 옛날 홍콩 영화 재개봉관에 몰리고 있을까? 정치권은 2030세대의 새해 벽두 조용한 항의에 무엇으로 응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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