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목줄 잡은 트럼프 막전막후

이러다 주한미군 철수까지?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한국이 ‘트럼프 태풍’의 영향권에 들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모든 국가와 각을 세우고 있다. 한국도 그 대열에 줄 서는 모양새다. 문제는 한국의 경우 마땅한 대응 카드가 없다는 점이다.

지난 1월2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을 대신해 민주당 후보로 나선 카멀라 해리스 전 부통령을 큰 표 차로 이기고 8년 만에 백악관에 재입성했다.

전 세계
흔들다

민주당의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 ‘DEI(Diversity·Equity·Inclusion, 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에 반대하는 유권자를 잡은 게 승리의 요인으로 분석됐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미국에 성별은 남성과 여성, 두 개뿐”이라면서 트랜스젠더 문제에 쐐기를 박고 DEI 정책 폐기를 선언하는 등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대선서도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MAGA)’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미국이 지금까지 맡아온 ‘세계의 경찰’ 역할 대신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겠다는 뜻도 피력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는 관세를 내세운 ‘통상 전쟁’으로 번졌다.

미국을 상대로 무역 흑자를 기록한 국가에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캐나다와 멕시코, 중국이 첫 번째 표적이 됐다. 취임 당일에 멕시코와 캐나다에 관세 25%를 붙이고 중국에는 10%의 추가 관세를 예고했다. 마약 유입과 불법 이민 문제 대응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본질은 무역 적자라는 게 중론이다.


영토 전쟁에도 시동을 걸었다. 특히 전쟁 지역 원조를 빌미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야욕을 보이면서 ‘제국주의’ 시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관련해 ‘가자지구’를 미국이 장악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가자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주민을 주변국으로 이주시키고 휴양지로 개발하겠다는 것이다.

덴마크령 그린란드, 파나마 운하를 미국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도 고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일, 워싱턴DC 상·하원 합동 의회 연설서 “파나마 운하는 미국인을 위해 미국인이 건설한 것”이라며 “중국이 아닌 파나마에 운하를 넘겼지만 협정은 매우 심각하게 위반됐다. 미국은 파나마 운하를 되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취임하자마자 관세 폭탄
겁주는 줄 알았는데 진짜

또 그린란드 주민을 향해 “여러분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를 강력히 지지한다”며 “만약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우리는 미국으로 들어오는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그린란드 주민은 2009년 덴마크와 합의해 제정한 자치정부법에 따라 주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추진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 부분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됐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은 종전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 과정서 미국이 자유 진영서 원조해 온 우크라이나가 아닌 러시아 쪽으로 미묘하게 기울어진 움직임을 보이면서 유럽에 비상이 걸렸다. 특히 최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이 미국의 외교 방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원조의 대가로 광물 개발권을 요구했다. 3년여 동안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서 미국은 군사 장비를 지원했다. 독일 킬 연구소 집계에 따르면, 2022년부터 약 3년간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금액은 1197억달러(174조5000억원)에 달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광물협정에 협조하지 않자 모든 군사 원조를 끊겠다는 강수를 놨다. 미국이 원조를 중단하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공세에 3개월도 못 버틸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결국 젤렌스키 대통령이 백기를 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하원 합동 의회 연설서 “젤렌스키로부터 중요한 서한을 받았다”고 말했다. 광물협정에 응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여러 국가가 ‘트럼프 태풍’에 휘말려 대응책을 논의하는 와중에 한국은 상대적으로 언급이 적었다. 한국도 미국을 상대로 무역 흑자를 기록한 국가인 만큼 어떤 식으로든 보복이 있으리라는 관측은 있었지만 그게 가시화되진 않았다는 뜻이다.

전쟁 국가도
원조 끊어

한국은 중국과 멕시코, 베트남, 아일랜드, 독일, 대만, 일본 등에 이어 대미 무역 흑자 8위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의 대미 무역 흑자액은 557억달러(약 81조원)가량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기 정부의 첫 연설서 한국을 ‘콕’ 짚었다. 99분에 걸친 연설서 한국을 공개 지목하다시피 한 것이다. 각국의 대미 관세를 언급하는 과정서 “한국의 평균 관세는 (미국보다)4배 높다”고 말했다. 그 근거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우리는 군사적으로, 또 많은 다른 방법으로 한국을 엄청나게 돕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나. 이게 우리 동지와 적에 의해 벌어지는 일”이라고 우려했다.

우리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산업통상자원부(이하 산자부)는 자료를 내고 대미 평균 관세율이 0.79% 수준이라고 밝혔다. 한국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국가로 사실상 상호 수출입 품목 대부분이 무관세다. 미국서 들어오는 공산품에 부과되는 관세율은 0%다.

다만 한국이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에 부과하는 평균 최혜국 대우(MFN) 관세율은 13.4%로 미국(3.3%)의 4배 수준으로 높다. 최혜국 대우는 통상·항해 조약 등에서 한 국가가 외국에 부여하는 가장 유리한 대우를 상대국에도 부여하는 일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 국가와 FTA를 체결한 상태여서 이 관세율이 적용되는 국가는 많지 않다.

산자부 관계자는 “현지 대사관과 최근 구축한 다양한 실무협의체 채널, 방미 예정인 통상교섭본부장 등 고위급 접촉을 통해 한국이 미국에 부과하는 관세가 거의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오해를 불식시키겠다”고 말했다.

마구잡이 주장
대응 못 하고

하지만 다음달 2일로 예정된 상호 관세와 관련해 한국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이 어떤 관세를 매기건 우리도 그들에게 관세를 매길 것”이라고 말했다. 비관세 장벽도 거론했다. 규제와 쿼터제, 환율 등 직접적인 관세가 아니라 각국의 제도를 빌미로 조치에 나서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꼭 관세가 아니더라도 무역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를 건들겠다는 것이다. 여기엔 한국이 도입하고 있는 부가가치세가 유력하게 거론된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관세보다 훨씬 더 가혹한 부가가치세 제도를 사용하는 국가를 관세 국가와 유사하게 간주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날 연설서 군사 지원을 언급한 점도 한국으로선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정부 시절부터 주한미군 주둔과 방위비 분담에 불만을 토로했다. 방위비 분담금 재협상을 넘어 주한미군과 관련한 논의가 진행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온다.

현재 전쟁 중인 국가(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원조를 단칼에 끊어버리는 트럼프식 외교가 한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퍼지고 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1기 정부 때부터 한국에 일방적으로 군사 지원을 하고 있다는 인식을 보여줬다. 한국이 막대한 방위비를 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혜택을 베푼다는 식으로 굴고 있는 셈이다. 올해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은 약 1조4900억원에 이른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재협상을 통해 방위비 분담금 추가 인상 가능성이 제기돼왔다.

첫 의회 연설에서 콕 집어
모든 논리가 돈으로 통해

여기에 ‘칩스법’ 폐지를 언급하면서 한국 기업까지 뒤흔들 기세다. 칩스법의 공식 명칭은 ‘반도체 과학법’으로 미국에 반도체 제조와 연구·개발시설을 짓는 기업에 보조금과 세제 혜택 등을 제공하는 법이다.

바이든정부서 시행된 정책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그 영향권 아래 있다. 총 지원 규모가 2800억달러(약 408조원)에 달하고 대만 TSMC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에 직접 지급하는 보조금만 527억달러(약 77조원)에 이른다.


트럼프 대통령은 “반도체법은 끔찍하고 끔찍한 일이며 우리는 수천억달러를 갖고 있지만 (반도체법은)의미가 없다. 그들은 우리 돈을 가져가고 지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대선 때에도 칩스법을 ‘나쁜 법’으로 규정하고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기업을 겨냥해 “그들은 자신들을 보호해 주길 원하면서 제대로 돈을 내지 않는다”고 했다.

대통령에 당선됐으니 보조금이 축소되거나 법 자체가 폐지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할 가능성도 커진 셈이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과도한 요구에 한국이 내세울 마땅한 카드가 딱히 없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협상에 나서야 할 수뇌부가 불완전한 상태라 대응이 어렵다는 게 더 큰 문제로 꼽힌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국무총리는 탄핵심판대 위에 서 있고 권한대행의 권한대행을 맡은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과 아직 통화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가 간 관행이나 국제질서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른 국가의 영토에 노골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전쟁 원조를 돈으로 환산하는 등 그동안 미국을 통치했던 지도자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다시 말해 한국을 상대로 어떤 ‘깜짝쇼’도 벌일 수 있다는 뜻이다.

정상 외교는
사실상 막혀

지난 5일 신원식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이 트럼프정부 고위 당국자들과의 회동을 위해 방미했다. 신 실장은 “한반도 및 동북아, 글로벌 안보 이슈를 논의하고 경제 안보와 관련해 특히 조선 협력을 비롯해 다양한 논의를 하려 한다”고 배경을 밝혔다.

신 실장은 2기 트럼프정부 출범 이후 미국 측 카운터파트와 만나는 세 번째 장관급 인사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지난달 뮌헨안보회의서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과 회담했고 안덕근 산자부 장관은 최근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과 만났다.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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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