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레커 시동’ 떨고 있는 유튜버들

  • 김성민 기자 smk1@ilyosisa.co.kr
  • 등록 2025.03.04 11:24:05
  • 호수 15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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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욕했다간 잡혀간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거짓 영상 제작 및 유포로 논란을 빚은 유튜버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자, 정치권 개입이 시도됐다. 지난달 23일 더불어민주당 전용기 의원은 이른바 ‘사이버 레커 정보공개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일부 유튜버들은 정보의 공익성마저 침해당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표했다.

최근 사이버 레커로 지목된 유튜버 뻑가의 신상이 미국법원의 소송 결과에 따라 일부 제공됐다. 앞서 구글 측은 현행법을 준수하고 법적 요청에 협조한다고 밝혀왔다. 다만, 피해자가 가해자의 신원을 확보하려면 미국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야 하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이를 두고 전용기 의원은 “과도한 절차적 장벽이 존재해 실질적인 피해 구제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해석했다.

절차적 장벽
과도함 존재

일각에선 사이버 레커로 규정하는 기준을 구체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테면, ‘정치인의 부정행위를 폭로한 유튜버마저 반대 진영서 사이버 레커로 규정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특정인에게 일어난 이슈를 악의적으로 편집한 영상을 온라인에 게시해 시청자의 후원을 유도하는 유튜버를 사이버 레커라고 한다.

교통사고 현장에 난폭하게 출동해 사익을 추구하는 사설 구난차인 ‘레커(Wrecker)’에 비유한 것이다.

익명 뒤에 숨어 활동하던 유튜버 ‘뻑가’는 사이버 레커로 지목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뻑가의 신상은 BJ 과즙세연(인세연)과의 법적 공방 과정서 드러났다. 그는 과즙세연이 금전적 대가를 받고 성관계를 했고, 미국 라스베이거스서 도박을 했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영상을 제작해 유포했다.


이에 대해 과즙세연은 허위사실 유포 및 명예훼손 혐의로 뻑가를 고소했다.

소송을 대리한 정경석 법무법인 리우 변호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북부지방법원으로부터 뻑가의 개인정보 일부를 제공받았다”며 “이에 따라 그의 신원이 밝혀졌다. 현재 뻑가는 한국에 거주하는 30대 후반 남성 박모씨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구독자 114만명을 보유한 뻑가는 주로 타인을 비난하는 영상을 올리기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특정 인물의 신상정보를 공개하며 비판하는 영상을 다수 제작하면서도 본인의 신상은 감춰 모순적 행위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누가 죄인?’ 정치권 개입 시도
신상 탈탈···정치적 악용 우려

그의 콘텐츠 중에는 ‘반 페미니즘’ 성향의 영상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2022년에는 인터넷 방송인 BJ 잼미(조장미)를 남성 혐오 페미니스트로 규정하며 저격 영상을 제작했다. 이로 인해 잼미와 그의 어머니가 심적 고통을 겪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됐다.

논란이 커지자 뻑가는 사과 영상을 올린 뒤 활동을 중단했으나 약 6개월 후 영상을 업로드하며 복귀했다.

신상이 공개된 뻑가는 억울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저를 음해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에 대해 최대한 강력한 대응을 할 예정”이라며 “어차피 수익도 막혔고, 잃을 것이 없는 상황서 총력을 다해 맞서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1000개가 넘는 유튜브 채널 영상 중 96개의 동영상만 남기고 삭제했다. 지속적인 악의적 콘텐츠 제작에도 불구하고 뻑가의 신원 정보가 공개되지 않아 피해자들은 법적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최근에서야 미국 소송을 통해 그가 30대 박모씨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미국 현지 변호사 선임 비용은 8000만~9000만원 정도로 비싼 편에 속해 피해자들의 경제적 부담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전 의원은 유튜브를 운영하는 구글로부터 사이버 레커의 이름과 나이 등 기본적인 정보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봤다.

전 의원은 <일요시사>와 전화 통화에서 “해외 플랫폼을 악용한 사이버 레커들의 무책임한 행태가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며 “명예훼손 및 허위 사실 유포로 수사 대상이 된 익명 유튜버의 기본 정보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익명과 폭력
협박과 갈취

전 의원은 입법 토론회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경찰청 사이버수사대, 관련 소송을 진행한 변호사들과 협력해 법률 개정을 위한 국회 입법 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이며 토론회를 통해 해외 플랫폼과 협력해 가해자의 신원 확보 절차를 개선하고, 피해자가 더욱 신속하게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 의원이 ‘사이버 레커 정보공개법’ 추진에 나서자, 일부 유튜버는 ‘족쇄 채우기’라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유튜버는 취재진과 인터뷰서 “취지는 알겠으나, 사이버 레커의 기준이 모호하다. 누군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사이버 레커 취급받고, 신상이 공개된다는 것은 공익성마저 저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만약에 여당 정치인을 비판하면 권력을 쥔 여당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것”이라며 “해당 정치인의 비리가 사실임이 입증됐다 하더라도, 명예훼손 혐의는 성립될 수 있기에 유튜버의 신상 공개 청구로 이어질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공익과 자율성 침해 우려에 관해 전 의원은 “가짜 뉴스를 유포하고 피해 입힌 익명 유튜버의 신상 정보를 온 국민이 아닌, 최소한 수사기관에서만큼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재차 설명했다.

사이버 레커의 영향력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으로 번졌다. 앞서 1000만명 이상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 쯔양(박정원)을 협박해 돈을 갈취한 구제역 등이 최근 유죄 판결받은 가운데, 허위 사실과 음모론은 추가적으로 양산되고 있다.

쯔양은 매체와 인터뷰서 “중국 간첩설부터 정계 연루설 등 2차 가해가 이뤄지고 있다”며 “저는 중국에 가본 적도 없고, 진짜 전혀 아무것도 없다. 정치로 저와 연관을 지으시면, 저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듣지도 못한다”고 토로했다.

“정치 유튜버
무사 못할 것”

구제역의 법률대리인인 김소연 변호사(법무법인 황앤씨)와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는 쯔양이 ‘중국 간첩과 관련이 있다’는 음모론을 퍼트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쯔양은 가로세로연구소 등을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고소했다.


쯔양은 “(사생활에 대해)너무 공개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쪽에서 그런 루머들을 만들어내니까 공개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왔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검찰과 정치권에도 배경이 있는 거물이라는 가짜 뉴스에 대해서도 “제가 피해자 코스프레하고 있다면서 검찰 측에서 너무 빨리 움직이는 게 이상하다고 그쪽과 관계가 있다더라”라며 “어떻게든 저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 같다”며 괴로워했다.

법원은 지난달 20일 쯔양을 협박해 수천만원을 뜯어낸 혐의로 기소된 구제역에게 징역 3년, 최모 변호사에게는 징역 2년을 선고하고 이들을 법정 구속했다. 공갈 혐의 공범으로 기소된 유튜버 주작 감별사(전국진)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및 사회봉사 160시간을 선고했다.

또 구제역 등의 공갈 범행을 방조한 혐의로 기소된 카라큘라(이세욱)와 크로커다일(최일환)에게는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및 사회봉사 240시간과 벌금 500만원이 선고됐다.

구속된 구제역은 변호사를 통해 쯔양의 인터뷰에 대해 반박했다.

김 변호사는 지난달 24일 입장문을 통해 “JTBC 보도에는 마치 제가 ‘쯔양이라는 이름이 왜 생겼는지 모르겠다’ ‘쯔양이 중국 인민망과 관련 있고 비밀 경찰’이라는 식의 발언을 한 것처럼 전달됐다.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은 발언의 일부만 짜깁기 한 것으로 실제 맥락과 전혀 다르다”며 해당 보도를 정정했다.

김 변호사가 전달한 당시 발언 전문에는 ‘쯔양의 소속사 관계자들, 그리고 이번에 5000만원 구제역하고 협의 본 사람, 이런 사람들이 청년 페이 등 중국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업들이 있다’ 등의 발언을 했다.


쯔양-구제역 사건에 ‘중국 간첩설’
조만간 공익·자율성 사라질 수도?

아울러 김 변호사는 “위 발언 취지는 쯔양이 직접 중국 인민망이나 비밀 경찰 의혹에 연루됐다는 것이 아니라, 쯔양이 출시한 정원분식 위·수탁 운영과 소속사 이사와 협업 중인 박현철 액터코퍼레이션 대표 겸 S&S컨설팅 운영자가 왕해군, 동방명주 등 중국 비밀 경찰서 의혹 당사자들과 연관돼있다는 사실을 설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박현철이 운영하는 S&S컨설팅에는 쯔양 소속사 이사인 최소원이 이사로 등재돼있으며 박현철은 ‘청년페이 코인’으로 논란이 일었던 한국청년위원회 이사로 활동한 전력이 있다. 더 나아가 동방명주와 왕해군이 중국 인민망과 연관됐다는 보도가 쏟아지던 당시, 박현철은 왕해군과 접촉해 논란이 된 김두관 민주당 전 의원의 행사를 지원하는 게시물과 사진을 직접 올리기도 했다”며 쯔양이 중국 인민망 비밀 경찰서 의혹 당사자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한편, 구제역 등은 지난 2023년 2월 쯔양 사생활, 탈세 관련 의혹을 제보받고 쯔양을 협박해 5500만원을 갈취한 혐의로 구속된 바 있다. 또 두 사람은 사생활을 빌미로 지인의 식당을 홍보하라며 촬영을 강제하기도 했다.

일부 언론을 통해 공개된 녹취록에 따르면, 두 사람은 “네(쯔양)가 고소를 남발해 소상공인을 괴롭힌다는 영상을 올리겠다”며 쯔양을 협박하기도 했다. 이에 보석 석방으로 풀려났던 구제역은 다시 구속됐다. 1심서 징역형을 선고받은 구제역과 최 변호사는 항소했다.

지난달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구제역 측은 전날 법원에 ‘사실 오인’과 ‘법리 오해’ 등을 이유로 항소했다. 최 변호사 측도 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검찰은 이 과정서 주작감별사와 크로커다일, 카라큘라도 구제역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보고 함께 재판에 넘겼다. 이들은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서 각자 확보한 쯔양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가 하면, 서로 통화도 주고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비밀 경찰
의혹 연루

최 변호사는 쯔양에게 “유흥업소 경험 등 과거사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해 언론 대응 등 자문 명목으로 약 2300만원을 갈취한 혐의를 받는다. 그는 쯔양 탈세 의혹 등을 유튜버 가로세로연구소 측에 제공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밖에도 최 변호사는 구제역에게 쯔양 정보를 제공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후, 쯔양 전 남자 친구이자 소속사 대표였던 A씨(사망) 지시로 해당 정보를 제공한 것처럼 A씨 유서를 조작해 유포한 것으로 나타났다.

<smk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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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