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깊이 잠든 한국을 깨우다’ 노벨문학상 한강

[일요시사 취재1팀] 스웨덴 한림원이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한 순간 한국문학 앞에 놓여있던 벽이 허물어졌다. 노벨문학상은 외국 작가의 전유물이라고 지레짐작했던 국민을 놀라게 한 기분 좋은 충격이기도 했다. ‘아시아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과 함께 벼락처럼 찾아온 소식이 ‘깊이 잠들어 있던 한국’을 깨웠다.

지난 10일 오후 8시경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속보로 쏟아졌다. 특정 작가의 집 앞에 취재진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도, 수상을 기대하며 작가의 이력을 보도하는 기사도 없었다. 마츠 말름 한림원 사무총장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호명하는 순간 나온 ‘Han Kang’이라는 단어가 한국은 물론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맨부커상
세계적 명성

한림원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는 표현으로 한강의 작품세계를 언급했다. 이어 “한강은 자신의 작품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지배에 정면으로 맞서며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다”면서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간의 연결에 대해 독특한 인식을 지니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됐다”고 선정 배경을 밝혔다. 

노벨위원회는 세계 각국 전문가의 자문을 거쳐 후보를 좁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명가량의 최종 후보 가운데 그해 수상자를 선정하는 식이며, 후보는 공개되지 않는다. 매년 해외 도박사이트서 수상자를 점치지만 번번이 틀리곤 한다. 심지어 수상자조차 발표 10여분 전에야 소식을 알 수 있는 정도다.

실제 한강은 한림원 발표 전까지 유력 후보로 거론되지 않았다. 미국 유력 언론 <뉴욕타임스>서도 한강의 수상을 ‘놀라운 일(Surprise)’라고 보도했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깜짝’ 수상으로 비쳐질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한림원이 한강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와 그의 작품을 논평한 기자회견을 보면 30여년 동안 작가가 우직하게 그려온 작품세계가 보인다.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으로 한강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 <채식주의자>부터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등의 작품에 드러나는 인류 보편적 가치가 노벨위원회가 추구하는 그것과 맞아떨어졌다는 분석이다. 특히 ‘민간인 학살’ 등 한국서 일어난 폭력적인 역사를 소설에 담아내면서 그 안에 인간의 본성을 녹였다는 평이 주를 이룬다. 

인간의 폭력성이 만들어내는 비극, 이타심이 주는 위로. 한강이 30년의 문학 인생 동안 천착한 주제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그린 <소년이 온다>와 제주 4‧3 사건을 담은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 한강 문학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한림원은 한강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할 때 두 작품을 비중 있게 다뤘다.

<소년이 온다>는 <채식주의자>와 함께 한강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지난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 총에 사망한 열여섯 살 소년 동호와 그 주변 인물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인물의 면면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현대사 비극을 인류 보편적 가치로

한강은 2014년 <소년이 온다> 출간 당시 소설을 집필하는 내내 ‘압도적인 고통’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열두세 살 무렵 아버지가 건넨 사진첩을 보고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간접적으로 목격한 것이 계기가 됐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참혹하게 변한 시신, 그리고 그들을 위해 헌혈을 하려 병원 앞에 모인 시민들.

한강은 그 모습을 양립할 수 없는 숙제처럼 느꼈다고 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과 또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망설임 없이 나서는 광경은 한강에게 수수께끼로 남았다. ‘이 소설을 통과하지 않고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고 느꼈다’는 그는 <소년이 온다>에 그 질문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담았다. 

한림원은 “한강은 자신이 자란 도시 광주서 1980년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을 정치적 배경으로 삼는다”며 “소설은 희생자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잔혹한 현실을 생생히 그려낸 ‘증인 문학’이라는 장르에 접근해간다”고 <소년이 온다>에 대해 논평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경하, 인선,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 등 세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경하가 인선이 기르던 앵무새의 죽음과 맞물려 환영을 보는 마지막 부분은 폭발적인 흡인력을 자랑한다. 폭설이 내리는 제주서 인선의 집에 고립된 경하가 정심의 과거사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부분은 ‘고통스러운 애도’를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2021년 한강은 간담회서 “지극한 사랑에 관한 소설”이라고 <작별하지 않는다>를 정의했다. 그러면서 “<소년이 온다>를 쓴 이후 나의 삶은 이전과 다른 것이 됐다. 이 소설을 쓰면서는 이상하게도 나 자신이 많이 회복됐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지난해 11월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수상했다. 메디치상은 페미나상, 공쿠르, 르노도상과 함께 프랑스 4대 문학상의 하나로 한국 작가 작품이 이 상을 받은 건 한강이 처음이었다. 

인간 폭력성
집요한 탐구

한림원은 “(<작별하지 않는다>는)1940년대 후반 한국 제주서 벌어진 학살 사건의 그림자를 들춘다”며 “압축적이고 정확한 이미지로 과거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뿐 아니라 집단 망각에 빠진 상태를 드러내려고 끈질기게 시도한다”고 논평했다. 또 “악몽 같은 이미지, 진실을 말하려는 증언 문학 사이를 독창적으로 오간다”고 덧붙였다.

<채식주의자>는 한강의 세 번째 장편소설로 2004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처음 소개됐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등 소설 3편을 하나로 연결한 연작 소설집이다.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면서 생기는 주변 인물과의 마찰을 다뤘다. 인간의 폭력적 본성을 집요하게 탐구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다.

한강은 <채식주의자>로 2016년 영국인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와 함께 비영연방 작가의 번역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했다. 심사위원장인 영국 <인디펜던트> 문학 선임기자 보이드 턴킨은 “잊혀지지 않는 강력하고 근원적 소설”이라며 “정교하고 충격적인 이야기로 아름다움과 공포의 기묘한 조화를 보여줬다”고 논평했다. 

한강은 “<채식주의자>를 쓰는 것은 인간에 대해 내게 끊임없이 질문하는 과정이었다”며 “가능한한 그 질문 속에 오래 있으려 했다. 그것은 종종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었지만 최대한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이려 했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깊이 잠든 한국에 감사드린다”며 한국의 독자에게도 인사를 남겼다. 

맨부커상, 메디치상 등 굵직한 문학상을 휩쓸며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거듭난 한강은 이번 수상으로 ‘한국 최초’ ‘아시아 여성 최초’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이 됐다. 1970년 11월 광주서 태어난 한강은 서울 풍문여고,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계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시로 등단한 그는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붉은 닻>으로 당선돼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강의 부친은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작가 한승원, 오빠인 한동림도 등단한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문인 집안서 자란 한강은 어린 시절부터 책과 밀접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노벨위원회와 진행한 전화 인터뷰서도 “어릴 때부터 번역서뿐 아니라 한국어로 된 책을 읽으며 자랐다”며 “나는 한국 문학과 함께 자랐다고 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출판업계
대박났다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진행하지 않았다. 당초 그의 작품을 출간한 출판사 문학동네, 창비, 문학과지성사는 합동 기자회견을 조율했지만 작가가 끝내 고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한강의 부친 한승원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서 “딸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이 치열해서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겠느냐면서 기자회견을 안 하기로 했다더라”고 밝혔다. 

대신 한강은 출판사 창비를 통해 “수상 소식을 알리는 연락을 처음 받고는 놀랐고 전화를 끊고 나자 천천히 현실감과 감동이 느껴졌다. 수상자로 선정해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하루 동안 거대한 파도처럼 따뜻한 축하의 마음들이 전해져온 것도 저를 놀라게 했다.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는 짤막한 서면 소감을 전했다. 

공식 반응 없이 두문불출하던 한강은 최근 한 시상식을 통해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지난 17일 서울 강남구 아이파크타워 포니정홀서 열린 제18회 포니정 혁신상 시상식에 참석했다. 포니정 재단은 지난달 19일 제18회 포니정 혁신상 수상자로 한강을 선정한 바 있다. 

이날 시상식서 한강은 포니정 혁신상 수상소감을 발표하기에 앞서 양해를 구한 뒤 노벨상 관련 소감을 말했다. 그는 “노벨위원회서 수상 통보를 막 받았을 때는 사실 현실감이 들지 않아서 그저 침착하게 대화를 나누려고만 했다”며 “전화를 끊고 언론 보도까지 확인하자 그때에야 현실감이 들었다”고 했다. 수상 당일 밤 조용히 자축했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저는 제가 쓰는 글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사람이니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써가면서 책 속에서 독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차기작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한강은 “지금은 올봄부터 써온 소설 한 편을 완성하려고 애써보고 있다”면서 “바라건대 내년 상반기에 신작으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소설을 완성하는 시점을 스스로 예측하면 늘 틀리곤 했기에 정확한 시기를 확정지어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뒤이어 밝힌 포니정 혁신상 수상소감에서는 “쓰고 싶은 소설을 마음속에서 굴리는 시간”을 가장 좋아하는 일로 꼽았다. 한강은 “약 한 달 뒤 저는 만 54세가 된다. 작가들의 황금기가 보통 50세에서 60세라고 가정한다면 6년이 남은 셈”이라며 “일단 앞으로 6년 동안은 지금 마음속에서 굴리고 있는 책 세 권을 쓰는 일에 몰두하고 싶다”고 밝혔다. 

독자와 주변 관계자, 지인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기자회견은 극구 고사
포니정 시상식에 등장

한강은 “지난 30년의 시간 동안 저의 책들과 연결되어주신 소중한 문학 독자들께, 어려움 속에서 문학 출판을 이어가고 계시는 모든 출판계 종사자 여러분과 서점인들께, 그리고 동료, 선후배 작가들께 감사를 전한다.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다정한 인사를 건넨다”고 말했다. 

한강은 “나의 일상이 이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기를 믿고 바란다”고 했지만 국내는 ‘한강 열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들썩이고 있다. 특히 출판업계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을 ‘원서’로 읽으려는 독자들의 쇄도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여기에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직후부터 치솟기 시작한 한강 작품의 주문량을 맞추느라 인쇄업체도 덩달아 난리가 났다. 

실제 서점가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 후 6일 만에 한강 작가의 책이 누적 100만부 넘게 팔렸다. ‘날개 돋친 듯 팔린다’는 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교보문고·예스24·알라딘 등 시장점유율을 90% 가까이 차지하는 서점 3곳에서 각각 36만부, 43만2000부, 24만부를 판매했다.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를 비롯해 전 작품이 고르게 팔려나가는 중이라고 한다. 

출판업계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서 시작된 독서 열풍이 정착되길 바라고 있다. 한국 성인 가운데 절반이 1년에 책을 1권도 읽지 않는 극악의 독서율이 개선됐으면 하는 기대감도 보인다. 유통업계도 노벨문학상 특수에 기대 ‘한강 마케팅’에 올라타는 모양새다. 기획전, 낭독회, 작품해설 등 다양한 루트로 한강의 작품을 경험할 방법을 고심하는 중이다. 

정치권도 말을 얹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강의 수상 당일 “대한민국 문학 사상 위대한 업적이자 온 국민이 기뻐할 국가적 경사”라며 “작가님께서는 우리 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는 내용의 글을 SNS에 게재했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도 SNS에 글을 올려 “한강 작가님을 그분의 책이 아니라 오래전 EBS 오디오북 진행자로서 처음 접했었다. 조용하면서도 꾹꾹 눌러 말하는 목소리가 참 좋아서 아직도 가끔 듣는다”면서 “오늘 기분 좋게 한강 작가님이 진행하는 EBS 오디오북 파일을 들어야겠다. 이런 날도 오는군요”라고 축하를 전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굴곡진 현대사를 문학으로 치유한 노벨문학상 수상을 국민과 함께 축하한다”면서 “고단한 삶을 견디고 계실 국민들께 큰 위로가 되길 기원한다”고 페이스북에 올렸다.

한마음 
한뜻으로

한국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에 이어 두 번째다. 수년 전부터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예상하고 기대한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들 역시 ‘지금일 줄은 몰랐다’고 입을 모은다. 한강의 수상이 문학계에 미친 파급력은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한·중·일 3국 중 한국만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없어 문학적인 면에서 ‘아시아의 변방’ 취급을 받던 일도 과거가 됐다. 한국을 넘어 세계의 한강이 된 작가가 해낸 일이다.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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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 올인’ 민주당 그래도 불안한 이유

‘서울시장 올인’ 민주당 그래도 불안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내년 6월 치러질 지방선거의 최대 격전지는 단연 서울시다. 서울시에 깃발을 꽂는 쪽이 전체 선거의 승리라 봐도 무관하다는 해석도 나온다. 진보 진영에서는 당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오세훈 대항마’를 자처하는 후보군이 속속 등장했지만, 서울 시민의 마음까지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난 10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전국 지역위원장 워크숍에서 제9회 지방선거(이하 지선) 승리라는 목표를 세웠다. 이달 중으로 지선 공천 룰을 확정해 빠르게 선거에 임하겠다는 방침이다. 큰 틀로는 ▲당원 민주주의 실현 ▲완전한 민주적 경선 ▲깨끗하고 유능한 후보 선출 ▲여성·청년·장애인 기회 확대 등 4대 방향이 제시됐다. 출사표 만지작 민주당은 이번 지선의 성격을 ‘완전한 내란 종식’으로 규정했다. 민주당 전국 지역위원장은 워크숍에서 ‘이재명정부 성공과 지선 승리를 위한 더불어민주당 전국지역위원장 결의문’을 통해 “국민의 준엄한 명령을 받들어 민생회복·내란청산·개혁완수라는 역사적 사명을 반드시 이루어 낼 것을 결의한다”고 밝혔다. 내년 지선서 압도적 승리를 이끌어냄으로서 ‘무능 부패한 국민의힘 지방권력’을 심판하고 ‘진짜 자치분권 균형성장’의 시대를 만들겠다는 방침이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 또한 “이정부 성공을 위해 당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모든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다가오는 지선은 민주당의 책임과 기회의 시험대다. 당의 힘을 모아 이정부의 성공과 지선 승리라는 두 목표를 함께 이뤄낼 것”이라고 밝혔다. 주목도가 높은 서울시장 선거 최종 후보가 되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키울 수 있다. 차기 서울시장 임기는 2030년으로 21대 대통령선거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그동안 서울시장은 대선주자로 가는 지름길로 여겨졌던 만큼 정치인으로서 큰 꿈을 꾸는 이들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다. 민주당은 서울시장 선거 본선행 티켓을 놓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원내 의원들의 공식 출마 선언 이후에도 자칭타칭 물망에 오른 진보 인사들이 시기를 재고 있어 다양한 경선 구도가 그려질 것으로 관측된다. 박주민 의원은 민주당 내에서도 가장 먼저 공식 출마 의사를 밝힌 인물이다. 그는 “서울이 ‘맏이’ 역할을 하며 지방 도시들과 함께 성장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며 일찌감치 선거판을 예열했다. 뒤이어 민주당 서영교 최고위원이 출사표를 던졌다. 조희대 대법원장 저격수를 자처하며 존재감을 키운 그가 이번에는 “서민을 위해 일 잘하는 시장이 필요하다”며 오세운 서울시장 대항마로 나섰다. 서 최고위원은 “(오 시장은) 토지거래허가구역을 무리하게 해제하면서 부동산 폭등을 자초했다”며 “이태원 참사의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시점에서 큰 책임이 있는 용산구청장에게 서울시 주최 지역축제 안전관리 대상을 주는 등 시민의 요구, 시대의 요구를 전혀 읽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전현희 최고위원은 “국정감사 이후 결단을 내리겠다”며 가능성을 열어뒀다. 그는 지난달 오마이TV ‘박정호의 핫스팟’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적 중요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할 후보가 서울시를 탈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그런 자리에 과연 제가 적합한 후보인지 고민을 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큰 판 향하는 의원들 오세훈만 꺾으면 끝? 지난 조기 대선 당시 ‘민주당 골목골목선대위 서울위원장’을 맡아 서울시 정책 로드맵을 짜는 데 참여한 만큼 출마 명분은 충분하다는 평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원내 인사인 박홍근 의원과 김영배 의원도 몸풀기에 나섰다. 특히 박 의원은 자신의 거취와 관련해선 지난해 8월 당시 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과 사전 논의가 있었던 점을 강조만 만큼 오랜 고심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낸 홍익표 전 의원도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생각하고 준비 중”이라며 도전을 시사했다. 홍 전 의원은 가장 민감한 서울 부동산 문제를 겨냥하는 등 오 시장의 강남권 토지거래허가구역 해제를 집값 상승의 원인으로 꼽으며 저격에 나섰다. 박용진 전 의원의 출마 가능성도 점쳐진다. 박 전 의원은 “아직 정해진 건 없다”면서도 연일 오 시장을 때리며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최근에는 “민주당의 정치가 ‘영포티(젊어 보이려 애쓰는 40대)’ 정치로 전락하지 않도록 몸부림쳐야 한다”며 청년세대와의 통합을 강조하기도 했다. 원외에서는 정원오 성동구청장의 이름이 눈에 띈다. ‘K-브랜드지수’에서 서울시 지자체장 부문 1위 타이틀을 따낸 그는 활발한 SNS 활동으로 두터운 지지층을 보유한 인물이다. “나 서울 시민인데, 구청장님 좀 같이 씁시다” 등 밈(인터넷 유행 콘텐츠)이 온라인에 퍼지면서 팬덤을 등에 업고 민주당 원내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지 이목이 쏠린다. 민주당 후보군은 일동 ‘오세훈 때리기’에 집중하고 있다. 오 시장의 야심작인 한강버스가 연일 구설수에 오른 데 이어 최근 서울시가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서울 종묘 맞은편에 높이 145m 건물이 들어설 수 있도록 재정비촉진계획을 변경한 것을 두고 맹공에 나선 것이다. 지난 11일 민주당 문화예술특별위원회는 기자회견을 통해 종묘 재개발 논의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당내 서울시장 후보군인 박주민 의원과 서영교 최고위원을 비롯한 전현희·김영배·박홍근 의원 등이 대거 참석했다. 특히 박홍근 의원은 “차기 시장, 그리고 대권 놀음을 위해 종묘를 제물로 바치겠다는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서울 종묘가 서울시장 선거의 새로운 전장이 된 셈이다. 이리저리 혼돈의 표심 민주당에서는 윤석열정부 조기 퇴진으로 치러진 조기 대선 승리의 후광효과가 지선까지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지선 기조를 내란 청산으로 내세운 것 역시 ‘내란 VS 헌법 수호’ 프레임이 유효하다고 본 것이다. 다시 꺼내든 내란 종식 키워드가 내년 지선에서도 먹힐지는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지선 압승이라는 낙관론에 젖어 서울시 민심을 제대로 훑지 못한다면 ‘이정부 심판론’으로 되치기당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지점이다. 민주당 출신의 한 정치권 관계자는 “서울시 선거는 ‘오세훈만 꺾으면 당선’ 같은 일차 방정식이 아니다. 오 시장이 명태균 게이트, 한강버스 등 각종 리스크에 발목 잡혀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울시민이 내란 종식을 외치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겠냐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다시 출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구 특성만큼 변수도 많은 서울시 자체가 첫 번째 허들이다. 서울은 마포·용산·영등포·광진·동작·성동·강동·중구 등 13개 선거구를 일컫는 한강벨트를 따라 보수층이 포진해 있어 보수 텃밭으로 여겨지지만, 지난해 치러진 총선에서 민주당이 서울 48석 중 37석을 얻어 과반이 넘는 지역에 파란 깃발을 수놓았다. 그럼에도 조기 대선에서 당시 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서울시에서 각각 47.1%, 41.6%를 얻어 두 후보 간의 격차는 5.5%p에 불과했다. 여기에 범보수로 여겨지는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가 얻은 9.9%를 더하면 보수 진영이 진보 진영을 앞서게 된다. 비상계엄이라는 특수 상황을 경험했지만 40%에 달하는 서울 시민이 국민의힘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두 번째는 한강벨트를 따라 빼곡히 자리 잡은 부동산이다. 정부의 10·15 부동산 정책을 통해 서울시 민심을 움직이는 건 진영 간의 논리 싸움이 아닌 정책, 그중에서도 집값이라는 게 명확해졌다. 서울 전역을 토지거래허가구역과 투기과열지구·조정대상지역으로 지정하는 이재명표 부동산 대책이 발표된 지 약 보름 뒤 민주당 지지율이 1주일 새 10%포인트 하락하며 국민의힘에 오차범위 내에서 역전됐다. 지지층에 휩쓸릴라 한국갤럽이 지난달 28~30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민주당의 서울 지지율은 31%로 전주 대비 10%p 떨어졌다. 반면 국민의힘은 12%p 오른 32%로 집계됐다. 서울을 대상으로 고강도 대책이 발표되자 서울 민심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해석이 나왔다.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전체 긍정 평가는 전주 대비 1%포인트 상승해 57%를 기록했지만,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서울 지역에서는 8%p 하락한 47%로 나타났다. 해당 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로 응답률은 12.6%다. 이동통신 3사가 제공한 무선전화 가상번호를 무작위로 추출해 전화 조사원이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와 한국갤럽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결국 이번 서울시장 선거는 진영 간의 대립구도가 아닌 인물과 정책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의견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진보 진영 후보들은 본선 진출을 위해 당원의 표심을 얻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졌다. 지선을 앞두고 민주당 지도부가 권리당원 권한을 대폭 강화하겠다고 밝힌 만큼 국민의힘과 잘 싸우는 ‘전투적인 후보’가 경선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차기 서울시장 후보 적합도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진보·여권 후보 가운데 정 구청장이 1위를 차지했다. 만일 정 구청장이 출마 의지를 굳히더라도 박주민·서영교 의원 등 쟁쟁한 원내 인사를 제치고 당원의 선택을 받을지 확신할 수 없다. 인지도면은 물론 민주당 지선 기조가 내란 청산으로 자리 잡은 한 12·3 비상계엄을 해제한 인물에게 더 많은 정치적 유산과 서사가 쥐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 전 의원은 출마 가능성을 시사한 동시에 민주당 강성 지지층에게 집중적으로 질타 받았다. 2023년 8월 당시 이재명 대통령이 당 대표이던 시절 체포동의안을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지던 중 불체포특권 포기 성명에 이름을 올린 31명의 의원 중 한 명인 만큼 경선 통과가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반면 민주당 지지층으로부터 꾸준히 이름을 알려온 경우 경선 통과가 수월하지만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개딸(개혁의 딸들)이 밀어준 강경파 후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면 정책이나 행정가로서의 자질은 묻히고 이에 거부감을 느낀 중도층의 표가 분산될 것이란 점에서다. 당원 마음 잡으랴, 중도층 안으랴 김민석·강훈식 ‘투톱’ 차출설도 경선과 본선을 놓고 민주당의 딜레마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김민석·강훈식 차출설’이 돌면서 서울시장 선거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인지도가 높고 행정가 면모가 돋보이는 김민석 국무총리와 강훈식 대통령실비서실장을 서울시장 후보로 내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국정 투톱이 또다시 정치의 한가운데에 들어섰다. 앞서 김 총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서울시장 출마 가능성에 선을 그어왔지만 종묘 재개발 논쟁에 뛰어들면서 다시 불을 댕겼다. 지난 10일 김 총리가 서울 종묘 일대를 찾아 “무리하게 한강버스를 밀어붙이다 시민의 부담을 초래한 서울시로서는 더욱 신중하게 국민적 우려를 경청해야 한다”고 우려를 표했는데, 이를 두고 오 시장이 “국민 감정을 자극하려 하는데 이는 선동”이라며 지선을 겨냥한 발언이라고 의심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 차례 서울시장에 도전했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이름도 다시 거론된다. 김 총리가 서울시장 대신 당 대표로 나서고, 직을 내려놓은 정 대표가 서울시장 도전 후 대권 코스를 밟는 시나리오다. 3대 개혁을 두고 당정 불협화음이라는 의심의 눈초리가 따라붙는 만큼 교통정리를 통해 당정 서로에게 윈윈(win-win)하는 방법으로 꼽힌다. 우선 민주당 관계자들은 앞선 두 사람의 출마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보고 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총리나 대통령비서실장 자리에 생긴 공백은 국정 운영에 차질이 빚을뿐더러 정부 출범 1년도 되지 않은 시기에 지선 후보로 차출할 시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게 공통된 설명이다. 정 대표의 서울시장 도전 여부 역시 “이제 겨우 (취임) 100일이 지났다”며 일축했다. 이처럼 ‘스타 정치인’ 후보군이 물망에 오르자 당 일각에서도 지역 일꾼을 뽑는 지선의 의미가 퇴색될까 우려하는 모양새다. 경선 당락을 결정할 당원의 표심을 사로잡기 위해 지나친 선명성 경쟁이 이어질 경우 중도층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거라는 지적도 나온다. 수많은 변수들 여권 관계자는 “지선 결과를 미리 예단하기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차분하게 기다리면서 후보들의 공약을 분석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어 “앞으로 종묘 재개발 같은 이슈가 전방으로 나올 텐데 그때마다 (민주당도) 네거티브로 맞받아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우리 당원도 내란 종식과 민생회복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사람을 최종 후보로 뽑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터줏대감 눈치 보는 국힘? 더불어민주당과 마찬가지로 국민의힘 역시 서울시장을 이번 지방선거의 최대 격전지로 보고 있다. 서울시 사수를 위해 후보군을 물색하고 있지만, 오세훈 시장의 임기가 남은 만큼 누구 하나 선뜻 도전장을 내밀지 못하는 분위기다. 이에 오 시장의 재도전이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지는 모양새다. 오 시장은 “시민들이 어떤 평가를 해줄지 지켜보며 거취를 분명히 하겠다”며 3선 도전 가능성을 내비쳤다. 명태균 게이트, 한강버스, 종묘 재개발 등 리스크를 안고 있지만 현역 프리미엄에 기댄다면 시도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 셈이다. 한때 경기도지사 후보로 거론됐던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이 이번에는 서울시장 물망에 올랐다. 서울시장 출사표를 던진 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오 시장이 아닌 나 의원을 상대할 가능성이 있다”는 취지로 말하면서 이목이 쏠렸지만 정작 나 의원은 서울시장 도전 가능성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