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답 노트’ 쥔 이재명 풀어야 할 용산 방정식

‘시간을 편으로’ 급할 게 없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이재명 2기’가 순조롭게 출범했다. 192석을 등에 업은 채 용산을 향해 거칠게 노를 저을 일만 남았다. 상대는 이미 한 번 겪어봤다. 대권주자로 쑥 발돋움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앞으로 어떤 관계도를 그려나갈지 이목이 쏠린다.

불볕더위보다 더 뜨거운 열기 속 8·18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전당대회가 그 끝을 알렸다. 이재명 신임 당 대표는 85.40%라는 압도적인 지지 속 연임에 성공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굳혔다. 그동안은 전당대회를 준비하면서 신중을 가했지만 이제는 두려울 게 없다. 몸풀기에 돌입한 이 대표가 여의도 1선서 다시 뛸 준비를 하고 있다.

대화가
필요해

당이 재정비를 마치는 대로 이 대표는 그동안 밀려 있던 업무를 처리할 예정이다. 당의 선두서 메시지를 내고 정부여당을 압박하며 쌓여 있는 현안을 들여다볼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민주당은 전당대회를 준비하면서도 영수회담에 대한 의지를 꾸준히 드러냈다.

이 대표는 지난 6일 당 대표 후보 방송 토론회서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참 많습니다만, 그중에도 절박한 과제가 있기 때문에 윤석열 대통령을 다시 한번 만나 뵙고 싶다”고 답했다.


악화된 경제 상황과 꽉 막힌 정국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다음 날인 7일에는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가 다시 한번 운을 띄웠다. 박 원내대표는 여야 영수회담을 제안하며 “현재 위기는 윤석열정부 혼자의 힘으로는 돌파가 어렵다. 여야가 ‘톱다운 방식(하향식)’의 논의를 통해 상황 인식을 공유하고 대책을 모색하는 노력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실은 민주당 전당대회가 끝난 후 검토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꽉 막힌 정국서 어느 정도 해결의 실마리가 잡혀야 이를 토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겠냐는 의미에서다.

여권에서는 영수회담 제안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다. 지난 4월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영수회담을 가졌지만 ‘대통령 망신주기’가 목적이었냐는 비판이 제기되면서다.

당시 이 대표는 대통령 집무실서 모두발언을 마친 뒤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를 말리며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서 왔다”며 상의 주머니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이후 이 대표는 A4용지 10장 분량의 글을 18분 동안 읽어 내려가며 윤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여당 소식에 밝은 한 관계자는 당시 상황을 두고 “기삿거리가 될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한 퍼포먼스라고 볼 수밖에 없다”며 “이미 (이 대표에 대한)신뢰가 깎였다. 만약 이번에 영수회담이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또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르니 대통령실 입장에서는 불안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야당 대표의 소통을 미루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 대표의 영수회담 요청을 두고 용산이 딜레마에 빠졌다. 가뜩이나 지지율이 뒷받침하지 않는 상황서 ‘불통 정치’라는 꼬리표까지 달 수 없으니, 언젠가는 받아들여야 하는 도전장인 셈이다.


영수회담 띄워도 미지근한 반응
윤과 미묘한 ‘한 카드’ 어떻게?

이를 두고 여권에서는 압도적인 지지율을 손에 쥔 이 대표가 영수회담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속셈이라고 꼬집었다. 지난 영수회담과 마찬가지로 여권 당 대표는 무시한 채 곧바로 대통령 옆에 서려는 의도가 뻔하다는 지적이다.

회담 후 손에 넣을 실익도 문제다. 영수회담 직후 대통령실은 “소통과 협치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다”고 호평한 반면 민주당은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평가절하했다. 또다시 ‘하나 마나 한 빈손 회동’이라는 평가가 나온다면 윤 대통령에게 뼈아픈 실점이 된다.

2차 영수회담의 윤곽조차 잡지 못하는 상황서 이 대표가 얼마나 빠르게 만남을 약속받고 안건을 상정하는지가 성공의 지표로 떠오른다. 지금처럼 22대 국회가 꽉 막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서 이 대표가 먼저 손을 내민다면 그것만으로도 대권주자로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와의 관계도 눈길을 끈다. 윤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듯 아닌 듯 아슬아슬한 줄타기 중인 한 대표를 민주당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한 야권 관계자는 “한 대표가 ‘잠재적 우리 편’일지 아닐지 지켜보는 분위기 같다”며 “(한 대표는)윤 대통령과 차별화를 두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과 윈윈 전략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대표가 ‘윤석열’ ‘한동훈’ 두 장의 카드를 적절히 사용하는 게 관건”이라고 전망했다.

22대 국회는 개원식도 하지 못했을 만큼 최악이라는 평을 받는다. 개원한 지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특별법을 비롯한 각종 쟁점 현안이 몰아쳤다. 여기에 밤을 꼬박 새우는 필리버스터가 몇 날 며칠 이어지면서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다.

어렵사리 법안을 상정하면 윤 대통령이 거부권으로 이를 반대하면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상황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형국이다.

애태우는
밀당 전략

지난 13일에는 정부가 ‘전 국민 25만원 지원법(이하 25만원 지원법)’과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안건을 의결하면서 여야가 다시 한번 격돌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25만원 지원법은 이 대표가 지난 4·10 총선서 공약으로 내걸었던 법인 만큼 민주당으로서는 크게 반발할 수밖에 없다.

25만원 지원법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정부가 1인당 25만서 35만원을 ‘지역화폐’로 지급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최소 12조8000억원서 최대 17조9000억원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한덕수 국무총리는 대규모 국채 발행이 물가와 금리를 상승시켜 오히려 민생의 어려움을 가중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총리는 “정부가 법안 공포 후 3개월 안에 지원금 지급을 위한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한다고 규정하고 지원금 지급 대상과 액수, 지급 시기까지도 규정하고 있다”며 “재정 상황과 지급 효과 등을 고려해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는 것은 행정부의 고유 권한인데 그런 재량을 박탈하고 입법부가 행정의 세부 영역까지 강제하며 권한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번 전당대회서 이 대표는 ‘먹사니즘’에 방점을 찍었다. 윤 대통령이 25만원 지원법에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서 이 대표가 맞서 싸울 수 있는 지점을 제공한 것이다.

한 야권 관계자는 <일요시사> 취재진과 만난 자리서 “(25만원 지원법이)‘표퓰리즘’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분명 있겠지만 돈을 준다는 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겠느냐”며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시기가 민주당 전당대회 직전이다. 이 대표가 매번 강조하는 ‘민생’이라는 키워드가 오히려 돋보이게 된 셈”이라고 말했다.

오는 28일 여야가 비쟁점 법안 처리에 합의롤 보겠다고 밝히면서 마침내 숨통이 트일지 관심이 집중된다. 양당이 각 상임위원회서 쟁점 요소가 없는 합의 법안을 통과시켜 본회의에 상정하기로 의견을 모은 것이다. 이날 국회에는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을 비롯한 간호법 제정안과 이른바 ‘구하라법’(민법 개정안) 등 3건이 상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빨간불?
주황불?

그럼에도 곳곳에 깔린 뇌관을 피할 수 없다. 오는 20일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서 윤 대통령을 겨냥한 ‘마약 수사외압 의혹 청문회’가 열린다. 운영위원회는 ‘뉴라이트’ 독립기념관장 임명 논란과 국민권익위원회 간부 사망 사건 등에 대한 질의를 벼르고 있다.


국회 방송통신위원회는 이전부터 ‘N차 청문회’를 진행하며 이진숙 신임 방통위원장에 대한 갑론을박을 이어가고 있다. 거칠어진 분위기를 잠재울 수 있는 건 거대 야당의 수장인 이 대표인 만큼 그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라도 비판의 강도를 높이는 때와 다소 힘을 빼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다가가는 이른바 ‘밀당 전략’을 사용할 것이란 관측도 제시된다. 정부여당과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서 어떤 식으로 화합을 조율하고 메시지를 내는지에 따라 이 대표의 리더십이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름 휴가철을 맞아 2주간 중단됐던 전국 법원의 재판이 다시 시작되면서다. 멈춰있던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 시계가 다시 흐르는 만큼 ‘방탄 국회’ 논란이 불거지는 건 시간문제다.

그동안 대통령실은 이 대표를 피의자로 보고 “협상 테이블에 함께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내비친 바 있다.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걸을 것만 같던 지금 시점서 사법 리스크에 발목 잡힌다면 이 대표는 다시 한번 휘청일 수밖에 없다.

서울중앙지법에서는 이 대표의 재판을 재개했다. 이 대표는 ▲대장동·위례 개발비리 및 성남 FC 불법 후원금 ▲공직선거법 위반 ▲위증교사 등 3건의 재판을 받고 있다. 대장동·위례 개발비리 및 성남 FC 불법 후원금 의혹 관련 재판은 지난 13일 재개돼 주 1∼2회씩 진행된다.

이 중 공직선거법 위반과 위증교사 혐의에 대한 결심공판일은 이미 정해진 만큼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도 초읽기에 들어섰다.

‘사법 리스크 암초’ 마주한 민주당
명심 경쟁 뒤로하고 중도층 챙긴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결심공판은 다음 달 6일로 예정돼있다. 위증교사 혐의에 대한 재판 역시 다음 달 30일 결심공판이 열릴 가능성이 크다. 대체로 결심공판을 마친 뒤 한 달 이내에 선고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이르면 10월 중에는 유·무죄가 가려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는 꾸준히 제기됐던 문제지만 그만큼 무뎌지기도 했다. 불체포특권 표결 등 법원의 문제가 국회로 넘어올 때마다 당에 분열이 일고 갈등이 터졌다.

그러나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지곤 했다. 게다가 지금처럼 당이 이 대표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상황에서는 적어도 당내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는 어렵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

사법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몸집을 키워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9월 법원은 이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을 한 차례 기각했다. 당시 법원은 “피의자의 상황과 정당의 현직 대표로서 공적 감시와 비판의 대상인 점을 감안할 때 증거인멸 염려가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던 바 있다.

이번 전당대회서 ‘명심’은 충분히 확인했으니 이제는 ‘중도층’으로 국면전환을 할 때다. 전당대회 경선 과정서 이 대표가 종합부동산세 재검토와 금융투자소득세에 대한 소신을 밝힌 것 역시 중도층을 염두에 둔 ‘우클릭’이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 21대 국회서 끝내 마침표를 찍지 못한 연금개혁도 중요한 관전 포인트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협치’ ‘화합’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강경 노선만 보인다는 평이다. 토론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정쟁만 남았다. 탄핵과 윤석열정부 조기종식을 암시하는 현수막이 즐비한 국회처럼 여야 모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한 기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서 이 대표는 한 대표와 용산을 상대로 정치력을 키우면서도 중도층을 포섭해 당내 지지율을 끌어 올리는 막중한 책임감을 도맡은 셈이다.

산적한
과제들

이 대표 앞에 새롭게 놓인 과제 중 대부분은 정부와 머리를 맞대야 하는 문제들이다. 구체적인 틀조차 잡히지 않은 영수회담 성공 여부가 이재명 2기의 분수령이 될 것이란 관측이 제시되는 이유다. 새로운 지도부로 출범한 이 대표가 용산을 상대로 포용의 정치를 보여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용산 역시 이에 화답할지 지켜봐야 한다. 어느 쪽이 됐든 꽉 막힌 정치에 갈증을 느끼던 국민에게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일 것이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공회전’ 여야정 협의체

여야가 비쟁점 민생 법안 처리에는 뜻을 모았지만 여야정 협의체 구성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8월 초 여야는 정부와 함께 민생 정책을 논의할 협의체 구성을 위해 실무 협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로부터 약 3주가 지났지만 논의가 더디게 진행되면서 오히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사이 갈등의 불씨가 살아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협의체 구성 전제는 대통령의 국정기조 전환”이라며 영수회담을 제안한 반면 국민의힘은 “아무런 조건과 단서 조항 없이 구성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대통령실은 여야정 협의체든 영수회담이든 국회 정상화가 우선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어 합을 맞추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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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