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호상박’ 영풍-고려아연 신경전

  • 김성민 기자 smk1@ilyosisa.co.kr
  • 등록 2024.03.21 10:53:50
  • 호수 14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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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질락 말락’ 불안한 75년 동맹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3세대에 걸쳐 동업 관계를 이어온 영풍과 고려아연 사이의 균열이 커지고 있다. 고려아연이 제시한 주총 일부 안건에 대해 영풍 측이 반대하고 나서면서다. 두 집안의 대리인은 정관 변경과 배당금 증액 여부 등을 두고 공방전을 펼치고 있다. 다만, 업계에선 “환경법 위반과 인명사고를 초래한 영풍이 고려아연에 주주권익 훼손을 논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라고 비꼬았다.

고 장병희·최기호 영풍그룹 공동창업주서 3세대로 이어진 75년간의 동업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영풍그룹은 장씨와 최씨 양가가 역할을 분담해 왔다. 장씨 일가는 장형진 고문을 중심으로 영풍과 영풍전자 등 전자 부문을, 최씨 일가는 최윤범 회장을 중심으로 고려아연 등 비철금속 부문을 맡아왔다. 다만, 지분 측면에선 경계가 불명확하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3대 혈맹
집안싸움

당초 업계에선 두 회사가 정기주주총회서 정면충돌할 것이라는 예측이 쏟아졌다. 고려아연은 영풍그룹 전체 매출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핵심 계열사다. 그만큼 경영적 측면서 고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일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다만, 지분 측면에선 장형진 영풍 고문 일가 쪽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리는 양상이다. 25%가량의 지분을 보유한 고려아연 최대주주인 영풍의 지분 절반 이상을 장씨 일가 측이 보유해 왔다. 장씨 일가인 영풍은 계열사에 지급된 배당금으로 고려아연 지분을 확대했다.

최씨 일가인 고려아연은 한화그룹과 LG그룹, 현대자동차그룹 등 국내 주요 대기업 등을 우군으로 확보하며 지분을 늘려 나갔다. 이를 통해 서로를 견제하는 분위기가 짙어졌다.


영풍은 지난달 20일 공시를 통해 고려아연의 정기주주총회 안건 중 정관 변경의 건과 배당 결의의 건에 반대 의사를 밝히면서 고려아연 주주들에게 의결권 위임을 요청했다. 고려아연은 지난 19일 주총서 “‘표준정관’ 반영을 이유로 기존 정관의 제17조(신주인수권) 및 제17조의 2(일반공모증자 등)의 조항을 변경하겠다”는 입장이다.

고려아연의 바람대로 정관이 개정되면 국내외 투자자를 대상으로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할 수 있게 된다. 현행 정관은 ‘경영상 필요 시 외국의 합작법인’에게만 제3자 신주발행을 허용함으로써 상법보다 엄격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이 조항을 삭제하는 것이 고려아연 측이 제시한 정관 개정안의 핵심이다. 

이에 대해 영풍은 주주권익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며 반대 입장을 밝혀왔다.

영풍 관계자는 <일요시사>와 통화서 “고려아연의 의도대로 정관이 변경돼 아무런 제한 없이 제3자 배당 방식의 유상증자가 이뤄질 경우, 기존 주주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 가치가 희석돼 전체 주주의 이익을 해친다”며 “현 경영진의 ‘경영권 방어, 유지’라는 지극히 사적인 편익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일 위험성이 대단히 높다”고 말했다.

주주 입장에선 고려아연 안건대로 정관 개정이 이뤄지고 최 회장 측이 지배력 확대를 위해 국내외 투자자를 대상으로 증자를 단행할 경우, 희석 효과가 관건이다. 액면가로 400억원의 신주인수권은 약 800만주. 최근 시가에 비춰볼 때 약 3조6000억원(800만주×약 45만원)의 증자 효과로 추산된다.

정관 개정을 두고 영풍 측이 반대하자 고려아연 측은 “영풍도 2019년에 같은 내용의 정관 변경을 실시했다”며 “영풍이 지나치게 경영 간섭을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어 “당시 영풍이 밝힌 정관 변경 목적은 ‘관계 법령 내용 반영 개정 및 조문 정리’로 고려아연이 밝힌 정관 변경 목적과 동일하다”며 “(영풍이)자가당착에 빠졌다”고 날을 세웠다.

배당금 증액 요구한 영풍···지분 박빙
무제한 제3자 배정 유상증자 ‘반대’


이에 대해 영풍 측은 “정관을 변경한 것은 맞지만 당시 정관을 변경한 것은 자본시장법에 따라 내용을 세분화하기 위해서였다”며 “문제가 되는 ‘신주발행 대상을 외국 합작법인으로 제한하는 정관’은 영풍 정관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영풍은 고려아연이 1주당 5000원의 결산 배당을 주총 의안으로 상정한 것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다. 두 집안은 주총 안건서 배당안과 정관 변경안을 놓고 정면충돌했다. 고려아연은 이번 주총에 주당 5000원을 결산배당금으로 지급하고, 신주 발행 대상을 외국 합작법인으로 제한하는 현 정관을 삭제하는 안건을 상정했다.

다만, 액면 총액 400억원이라는 신주발행 한도는 그대로 유지한다. 이를 두고 영풍 측은 배당금이 너무 적다며 주당 1만원으로 올려 달라고 주장한다.

앞서 지난해 8월 반기 배당금 1주당 1만원을 포함해도 현금 배당금은 1주당 1만5000원이다. 이는 전기(1주당 2만원) 대비 5000원 줄어든 것이기 때문이다. 영풍은 고려아연이 이익잉여금 등 배당 여력이 충분한 만큼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전년과 동일한 수준으로 배당이 이뤄지도록 결산 배당으로 1주당 1만원을 배당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영풍 측은 고려아연의 배당 성향을 두고 “배당 성향이 높아진 것은 최근 경영 실적이 좋지 않아 수익성이 나빠진 데다 제3자 배정 유상증자, 자사주 맞교환 등으로 배당 대상 주식 수가 급격히 늘었기 때문”이라며 “시가배당률은 감소세”라고 말했다.

배당 성향은 배당금을 해당 연도 당기순이익으로 나눠서 구하며, 시가배당률은 주당 배당금을 현 주가로 나눠 구한다. 영풍 측 설명처럼 실적 부진으로 당기순이익이 줄면 배당금이 그대로여도 배당 성향이 좋아진 것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반면, 고려아연은 주주가치 제고를 꾸준히 추구해 왔으며 일관적이고 예측 가능한 주주환원 정책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배당 두고
정면충돌

고려아연은 “시가배당률은 당일 주가 변동에 따라 수시로 변동되는 자료로 특정 기업의 주주환원 수준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지표가 아니다”라며 “고려아연은 현재 7조4000억원의 이익잉여금과 1조5000억원 규모의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어 배당 여력이 충분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영풍은 4조원 가까운 잉여금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2022년 연간 배당금은 170억원대, 배당 성향은 고작 5%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업계에서는 양가의 갈등이 어떤 형태로 귀결될지 주목하고 있다.

고려아연이 속한 영풍그룹은 공동창업주인 고 장병희·최기호 회장이 1949년 설립한 영풍기업사가 모태다. 2세대에서는 공동창업주 자녀인 장형진 영풍 고문,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을 주축으로 영풍·전자 계열은 장씨 집안, 고려아연은 최씨 집안이 각각 담당해 왔다.

크게 지분구조상 장씨 일가가 그룹을 소유하되 경영은 최씨 일가가 맡는 식이다. 영풍과 고려아연은 모두 서울 강남구 논현동 소재 영풍빌딩을 본사로 쓴다. 


그러면서도 두 집안은 상호 지분을 가지며 견제했다. 고려아연 최대주주이자 영풍그룹 지주사인 영풍은 장씨 집안 지분율이 50%를 넘지만, 최씨 집안 지분도 13% 이상이다. 이런 이유로, 고려아연은 영풍의 관계회사로 분류된다.

통상 투자자가 유의미한 수준의 지분을 갖고 있지만, 실질적인 지배력을 온전히 행사하는 데 제약이 따를 경우, 이를 관계회사로 분류한다.

2022년 최창걸 명예회장의 아들 최윤범 회장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진 뒤 양가는 고려아연을 둘러싼 지분경쟁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 8월 고려아연 이사회가 ‘한화H2에너지 USA’를 대상으로 제3자 유상증자를 결의하면서 두 가문 간 갈등이 본격화됐고, 1년 넘는 공방전이 시작됐다.

당시 한화H2에너지 USA는 4717억여원을 투자해 고려아연 지분 5%를 취득했다. 미국서 동문 수학한 것으로 알려진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과 최 회장 간의 인연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최 회장 일가는 한화에 이어 LG화학, 현대차그룹 등을 상대로 유상증자를 진행해 우군으로 확보했다.

한 지붕
두 가족

결국 최 회장이 2022년 한화로부터 투자받은 것을 시작으로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두고 양가의 신경전이 첨예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시 장 고문은 최 회장 주도로 새로운 주주(한화에너지)를 끌어들이는 걸 반대했다. 이사회 참석마저 거부함으로써 불만을 표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두 번째 지분 확보 경쟁은 6%가 넘는 대규모 자사주를 최 회장이 의도한 대로 일시에 처분한 일이다. 고려아연은 이미 2차전지 소재사업 분야에 진출하면서 LG화학과 전구체 합작 사업을 진행해 왔고, 지분 맞교환 방식의 자사주 매각 또한 경영 전략상 타당해 보였다.

그러나 장씨 일가 입장에서 보면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의결권이 없던 중립 지대의 대규모 자사주가 한순간에 최 회장에게 우호적인 여러 업체로 한꺼번에 넘겨진 셈이다.

최씨 가문의 고려아연 지분율이 순식간에 20%대 후반까지 치솟았다. 장씨 가문도 이에 질세라 계열사를 동원해 지분을 추가 매입하는 데 열을 올렸다. 최씨 가문도 지분경쟁에 밀리지 않았다. 영풍-고려아연 그룹 계열사 가운데 최씨 가문 측이 경영을 지배하고 있는 영풍정밀이 여유 자금을 동원해 고려아연 지분을 추가 매수했다. 

최씨 가문서 결정적인 한 방을 터뜨린 건 현대차 해외법인(HMG Global LLC)을 대상으로 또다시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성공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고려아연의 소유권은 1974년 설립 이래 줄곧 장씨 가문에 속해 있다가 최씨 가문에 ‘소유와 경영’ 모두 장악당한 것이다.

현재 특수관계인·우호 지분을 모두 합쳐 최 회장 일가와 장 고문 일가의 고려아연 지분율은 각각 33%, 32%다.

LG화학·현대차그룹 우군 확보
불안한 장씨가···지배구조 흔들

일각에선 장씨 가문의 대응이 안일했다는 지적도 있다. 장씨 가문이 경영하는 영풍은 이미 고려아연과는 비교하지 못할 만큼 경영 성과가 좋지 않다. 동업자 관계이자 계열 자회사인 고려아연이 내실을 다지는 동안, 영풍은 ‘환경오염 문제’조차 대처하지 못해 환경 당국으로부터 조업 중단 제재를 받는 굴욕을 겪었다.

제련소 내에서 작업 중이던 근로자들이 독성 물질 유출 등으로 인해 사망한 사고에 이어 석포제련소 냉각탑 청소에 투입된 하청 노동자가 추락사한 사고가 또다시 일어났다. 지역 환경단체와 주민 피해 대책위원회 등에서는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석포제련소 폐쇄 및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영풍 경영진의 인권 의식 부재가 낳은 결과”라며 “고려아연이 주주 권익을 훼손한다고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2010년 이후 지난해까지 최근 14년 동안 양사의 영업실적만 비교해도 영풍은 고려아연과 경쟁 자체가 어려운 수준이다. 

2010년 이후 지난해까지 영업실적을 누적 기준으로 합산해서 비교해 보면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누적 매출액 규모만 보면 고려아연이 영풍에 비해 2.2배 정도지만, 누적 영업이익 규모는 18.4배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를 기반으로 최씨 일가는 최근 2년 동안에 고려아연 지분율을 대폭 끌어올려 마침내 장씨 일가의 지분율을 넘어섰다.

영풍의 계열사가 고려아연이라는 틀이 무색할 만큼, 장씨 일가는 ‘고려아연 지배주주’의 위치마저 위협받는 상황이다.

초박빙 지분
주주 입장은?

한편, 올해 주총을 앞두고 장 고문 측은 정관 변경 안건과 기말 배당금 지급안에 대해서 반대 의사를 표하고, 소액주주들로부터 위임장을 받기 위해 분주했다. 주주 입장에선 양가 누구라도 경영 능력이 더 뛰어난 자가 경영권을 장악하고 안정적으로 고려아연을 키워 주길 바랄 뿐이다. 오히려 지분율 차이가 초박빙인 상태서 서로를 갉아먹는 사태가 지속될 것을 우려하는 상황이다.

<smk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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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정청래 인싸 플랜

‘아웃사이더’ 정청래 인싸 플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독주가 이어지고 있다. 당원의 명령인 개혁을 완수하기 위한 질주다. 당의 ‘아웃사이더’였던 그가 당을 휘어잡기까지 수많은 당원이 등을 밀어줬다. 비주류에서 주류 ‘인싸’로 자리 잡기 위한 정 대표의 다음 스텝이 주목된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행보가 매섭다. 윤석열정부에서 막힌 과제를 해치우는 동시에 공약이었던 각종 개혁을 빠르게 완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 대표는 같은 당 박찬대 의원보다 덜 알려졌다는 평이 나오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위원장으로서 보여준 ‘사이다’ 면모가 주목받으면서 강성 지지층의 환호를 받았다. 정청래가 걸어온 길 비주류였던 그가 당 대표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21대 국회 때는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 수석 최고위원을 지냈고, 22대 국회에선 법사위원장으로서 국민의힘에 호통을 치며 유튜브 단골 주제가 됐다. 당시 정 대표는 국민의힘이 반대하는 쟁점 법안을 밀어붙이고 상대편 의원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었다. 그동안 정 대표는 언론 대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유튜브 등 SNS를 통해 지지자와 직접 소통해 왔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보다 주목도가 떨어진다는 평이 나오지만 팬덤 정치에 최적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정 대표는 최근에도 자신을 둘러싼 의혹과 청-명 프레임에 대해 직접 입장을 밝혔다. 그는 SNS에 ‘언론의 자유와 횡포 그리고 언론의 게으름의 관성’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조국 전 대표의 사면·복권을 놓고 일부 언론에서 ‘정청래 견제론’을 말한다.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근거 없는 주장일뿐더러 사실도 아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바로 반박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어 “정청래는 김어준이 밀고, 박찬대는 이재명 대통령이 밀었다는 식의 가짜 뉴스가 이 논리의 출발”이라며 “어심이 명심을 이겼다는 황당한 주장, 그러니 정청래가 이재명 대통령과 싸울 것이란 가짜 뉴스에 속지 말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이재명 대통령과 각을 세울 일이 1도 없다. 당정대가 한 몸처럼 움직여 반드시 이재명정부를 성공시킬 생각이 100(이다)”이라고 덧붙였다. 계파 갈등 프레임이 씌워질 조짐이 보이자 이를 사전에 차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 대표의 정치적 뿌리를 따지자면 친노(친 노무현)에 가깝다. 그러나 문재인 전 정부서는 친문(친 문재인),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는 친명(친 이재명)으로 분류되는 등 계파색이 비교적 옅은 편이다. 1989년 미국 대사관저 점거 농성을 주도한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은 등 학생 운동권 출신이지만, 대표 운동권인 민주당 86 그룹과의 친분을 공개적으로 과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 대표는 당의 주류보다 비주류에 가깝다는 게 여의도에 떠도는 평이다. 친문? 친명? 오히려 ‘계파 청산파’ “잘못된 586 문화 배운 97도 청산” 전당대회가 한참이던 당시 한 민주당 의원은 “사석에서 만난 정 의원은 아주 뚝심 있는 사람이었다. 박찬대 의원은 특유의 재치로 호감을 얻는 편이라면 정 의원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할 말은 제대로 하는 캐릭터”라며 “그래서 계파를 분류하기 어려운 것 같다. 나만의 길을 가는 것 같으면서도 한번 정한 길은 꺾지 않고 걷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정 대표는 ‘계파 청산’을 외치는 인물이다. 그는 당 대표 후보이던 당시 “국민께서 비판하시는 586의 운동권 문화는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라디오에 출연해서는 “계파는 당을 좀먹는 독약”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정파와 노선은 필요하지만, 계파는 없어져야 한다. 저 스스로 계파에 가입하지 않고, 그런 데서도 저는 안 불러준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586의 질서, 운동권의 수직적 관계가 싫었다. 그런 분들과 몰려 다니는 게 너무 비생산적”이라며 “586의 안 좋은 문화를 따라 배운, 너무 빨리 늙어버린 97 세대들의 그런 것도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가 민주당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원들의 요구를 파악해 발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8·2 전당대회에서 정 대표는 당선 이후 “이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것은 민주당 주류가 바뀌었단 뜻이고, 민주당에서 정청래가 대표가 됐다는 것은 당의 주인인 당원들이 당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대가 왔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했다. 이날 전당대회를 “예전에는 당원들이 국회의원 눈치를 봤지만, 이제는 국회의원들이 당원 눈치를 봐야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민주당의 민주화’가 드디어 그 깃발을 높이 든 8·2 전당대회”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 대표를 탄탄히 받쳐주는 건 여의도 인맥이 아닌 당원이었다. 정 대표는 이들을 대주주 삼아 힘을 키워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당원권에 힘을 쏟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평당원 최고위원’ 선출을 시도하는가 하면 당원 주권 정당 실현을 강조하기 위해 ‘대의원 1인1표제’를 띄우기도 했다. 대의원 1인1표제는 당원들의 권한을 대폭 향상하는 방안이다. 정 대표는 지난 18일 열린 국회 당원주권 정당특위 출범식에서 “10년 넘게 당원주권정당, 1인1표를 주장해 왔지만, 아직까지도 열리지 않았다”며 “헌법에서 얘기하고 있는 평등 선거가 민주당에서도 구현이 될 수 있도록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3대 개혁 풀가동 이어 “대한민국 헌법에는 평등 선거가 명시돼있고, 많은 선거에서 1인1표가 행사되지만 유독 더불어민주당에선 누구는 1표, 누구는 17표를 행사한다”며 “헌법적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재명정부가 국민주권시대를 강조하는 만큼 이에 발맞추기 위해서라도 민주당은 권리당원의 권리를 보장하고 상징적인 ‘1인1표’ 시대를 반드시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도 정 대표는 당헌·당규 개정을 비롯한 ▲평당원 선출 준비 지원 ▲연말 당원 콘서트 지원 등을 약속했다. 당원의 힘이 커질 수록 정 대표의 정치적 입지도 넓어진다. 정 대표는 연일 국민의힘 때리기에 집중하며 당원으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민주당의 목표로 3대 개혁 완수를 내걸었다. 이는 비주류였던 자신의 정체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으로도 읽힌다. 이 대통령이 ‘사이다’ 발언으로 당권까지 올랐다면 정 대표는 각종 특위를 띄우며 거침없는 개혁가의 모습을 굳히겠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강성 지지층의 요구에 따라 검찰개혁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검찰청을 폐지하는 대신 가칭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과 공소청을 신설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다음 달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정 대표는 지난달 21일 의원총회에서 이 대통령과 당 지도부의 만찬 회동을 언급하며 “검찰청 폐지, 공소청·중수청 설립을 담은 정부조직법을 9월 내 본회의에서 처리하자고 당과 대통령실이 입장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약속드린대로 추석 귀향길 뉴스에서 ‘검찰청은 폐지됐다’ ‘검찰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는 기쁜 소식을 국민 여러분께 전해드릴 수 있도록 당에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임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 추미애 의원 역시 “법사위원장 선출은 검찰과 언론, 사법개혁 과제를 완수하라는 국민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전폭적으로 힘을 실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위원회도 속속들이 들어섰다. 우선 민주당은 ‘국민주권 검찰정상화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정 대표는 출범식 및 1차 회의에 참석해 “지금의 시대적 과제는 내란 종식, 내란 척결, 이정부 성공에 있다”며 “가장 시급히 해야 할 개혁 중 개혁이 검찰개혁”이라며 “개혁도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저항이 거세져서 좌초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시기가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특위의 주요 과제로는 ▲수사·기소 완전 분리 ▲국민 주권 실현 및 민생 뒷받침 등을 제시했다. 새로운 구심점 이어 언론개혁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언론 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추석 전까지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언론의 허위·조작 보도에 대해 피해자에게 손해액의 최대 5배 배상을 의무화하는 법적 장치다. 언론뿐만 아니라 ‘유튜버’도 포함하는 안이 논의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중심 사법개혁특별위원회’도 출범했다. 정 대표는 “대법관의 증원과 추천 방식을 변경하는 내용의 사법개혁안을 추석 전까지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구석구석 눈도장을 찍기 위한 지역별 공략에도 나섰다. 지난 21일 호남발전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다들 대한민국 민주화에 대해서 호남이 기여한 바가 지대하다는데, 국가는 ‘호남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답을 이제 할 때가 되지 않았나”라고 꼬집었다. 정 대표는 “호남만 발전시키면 되겠느냐”며 영남발전특위도 띄웠다. 이는 내년 6월에 있을 지방선거를 대비해 대구·경북 등의 표밭을 다지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광폭 행보를 보이는 정 대표를 구심점으로 신흥 세력이 탄생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정 대표는 계파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고 거듭 밝혔지만, 권력자의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는 해석이다. 정 대표의 편에 선 동료 의원들에게도 시선이 쏠린다. 전당대회에서 정 대표를 공식적으로 지지했거나 개혁 선봉에 함께 섰던 의원 등이다. 정 대표가 당권 도전을 선언한 국회 기자회견장에는 장경태·최기상·문정복·임오경·양문석 의원 등이 자리했다. 여의도 이야기를 종합하면, 정 대표는 ‘당원 중심 정당’ 철학에 부합하는 인사로 장 의원을 꼽았다. 현재 장 의원은 평단원 최고위원 선출 절차를 위한 특위위원장을 맡고 있다. 최민희 의원은 정 대표를 공개 지지한 인물이다. 당시 정 대표가 수박 논란에 휩싸였을 당시 최 의원은 “심하게 비난받는 정청래 후보를 지켜보면 짠하다”며 “비난에도 역비난하지 않고 여전히 유쾌·상쾌하게 선거운동하는 정 후보를 격하게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 밖에도 한민수·김영환·이성윤 의원은 경선 유세 현장에 함께하며 힘을 실어줬다. 왼쪽으로 붙는 민주당…좁아지는 공간 강성 지지층 등에 업고 개혁가의 길로 개혁가의 길을 걷는 정 대표의 존재감이 커지자 일각에서는 조기 대선을 거치며 ‘중도 보수론’으로 넓혀놨던 민주당의 정치 공간이 다시 좁아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 대표의 강경한 태도가 민주당의 기조가 된다면 야당과의 협치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평이다. 실제 정 대표는 “악수는 사람하고만 한다”며 국민의힘을 척결 대상으로 대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6주기 추모식에서 정 대표는 국민의힘 송언석 비상대책위원장(이하 비대위원장)과 악수는커녕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송 비대위원장 역시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그야말로 ‘국회 빙하기’ 시대가 열렸다. 여당인 민주당은 좌우를 넓게 아우르는 정당이 돼야 앞으로 다가올 선거에서 유리한 구도를 유지할 수 있다. 지금처럼 국민의힘이 보수로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왼쪽은 조국혁신당, 진보당 등에 맡겨둔 채 중도 보수를 자처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당원의 힘으로 대표가 된 만큼 그는 개혁을 완수하기까지 지금과 같은 태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민주당 상임고문단도 “집권여당은 당원만 바라보고 정치를 해선 안 된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당 상임고문단 간담회에서 “정당의 주인은 당원이어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면서도 “우리 국민은 당원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도 “내란의 뿌리를 뽑기 위해 전광석화처럼, 폭풍처럼 몰아쳐 처리하겠다는 대목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과유불급이다. 의욕이 앞서 결과를 내는 게 지리멸렬한 것보다는 훨씬 나으나, 지나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또 다른 민주당으로 민주당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포스트 이재명’ ‘이재명 키즈’가 아닌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 대표가 민주당의 새로운 길을 열어야 당이 계속해서 순환하는 등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어 “민주당의 주류는 강성 지지층이다. 당원이 당을 좌지우지하는데 그들의 숫자가 얼마가 되든 목소리가 커 여론을 만드는 것”이라며 “이 주류의 흐름에 올라탄 사람이 정 대표다. 이 대통령이 대표이던 때와는 다른 모습의 민주당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아직 남은 정 견제 세력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SNS에 올렸다 곧바로 삭제한 게시글이 화제다. 민주당은 지난달 19~20일 양일간 경주를 찾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준비 상황을 점검했는데 정 대표가 마치 천마총 금관을 쓰고 있는 듯한 착시 사진이 문제가 된 것이다. 정 대표가 금관을 직접 착용한 것은 아니지만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시에 왕 노릇을 한다” “벌써 왕인 것처럼 군다” 등 거친 비판이 쏟아졌다. 현재 해당 사진은 삭제됐지만 8·2 전당대회 때 불거진 박찬대 의원과의 앙금이 아직 남은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온 이유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