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대담> 떠난 이상민 마지막 쓴소리

“민주당 이젠 개딸당” 마침내 헤어질 결심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내년 총선이 다가올수록 더불어민주당 내 비명(비 이재명)계의 입지가 줄어드는 형국이다. 비주류 의원들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곳곳서 터져나온다. 지난 3일, 민주당 이상민 전 의원이 탈당의 시작점을 끊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도미노 탈당’이 이어질 것이란 관측도 적지 않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는 이 전 의원의 다음 스텝이 주목된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상민 전 의원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향해 직격탄을 날리면서도 비명계 모임인 ‘원칙과 상식’에는 합류하지 않았다. 국민의힘 인요한 혁신위원장과 만남을 가졌지만 “어떤 선택이든 열려 있다”는 모호한 답변만 냈다. 마침내 ‘유쾌한 결별’을 시사한  그는 <일요시사>와 만난 자리서 후회 없는 마지막 쓴소리를 내뱉었다. 다음은 이 의원과의 일문일답.

-12월 초 거취를 정하겠다고 밝혔다. 이때를 마지노선으로 정한 이유는?

▲당내서 뜻을 같이 모아온 의원이 몇 명 있다. 지금은 소위 ‘원칙과 상식’이라고 하는데 모임의 구성원들과 결이 다르고 의견 차이도 있었다. 더는 당내서 민주주의를 논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오히려 논의가 늦어질수록 ‘공천 흥정’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어서 빨리 입장을 정리하고 싶었다.

반면 다른 의원들은 당에 남는 쪽으로 기울었다. 사실 11월에라도 결정하려 했는데 예산국회 등 여러 모로 어수선해서 이 시기를 마지노선으로 정했다.

-민주당과 결별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많다. 내가 속한 당이 1당이 돼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민주당이 잘되라고 그렇게 쓴소리를 했는데, 이제 그 꿈을 접은 거다. 다른 곳에서 그 꿈을 펼치려고 한다. 더는 내가 설 자리가 없다고 판단해 무력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앞서 이 대표는 체포동의안 표결을 두고 노골적으로 부결을 호소한 적이 있다. 이전에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까지 했는데 약속을 뒤집은 셈이다.

이후 영장이 기각되고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서 민주당 진교훈 후보가 압승하면서 기세등등해졌다. 나 같은 사람이 당을 비판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계속 민주당에 있어야 하는지 많은 고민이 들었다.

민주당이 강성 지지층인 개딸(개혁의 딸)에게 점령당한 것도 이유 중 하나다. 민주당은 더 이상 민주당이 아니다. ‘이재명 사당’이고 ‘개딸당’이다. 당의 모든 게 이 대표를 방어하기 위해 돌아간다. 정당이라는 건 당원의 당비만이 아니라 국민 세금으로 꾸려가는 공조직인데 특정인의 비리를 보호하고 감싸는 데 급급하다.

-민주당서 5선을 지낸 중진 의원이다. 떠나는 데 아쉬움은 없나?

▲물론 아쉽고 안타깝기도 하다. 나는 2004년 열린우리당으로 시작했다. 그때 슬로건이 ‘깨끗한 정치, 골고루 잘 사는 나라’였다. 그 슬로건을 생각하면 아직도 설렌다. 그런데 오죽하면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겠는가? 소모적인 논쟁을 하는 것보다 빨리 나가서 정치인으로서의 목적을 이루는 게 낫다고 본다. 내 시간과 에너지가 아깝고, 상대방도 그럴 것이다. 더는 경력을 낭비할 시간이 없다.

-민주당 지도부로부터 연락은 없었는지?

▲없다. 물론 연락이 없다고 해서 특별히 섭섭하지는 않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당 대표가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 있어 결과가 어떻든 당내 구성원들을 추스르고 또 통합적으로 끌고 나가는 모습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점에서는 상당히 인색하다.


-과거의 민주당과 지금을 비교한다면 어느 점이 가장 아쉬운가?

▲그때 당시에는 실험정신이 강했다. 치열하기도 했고 또 초선 의원은 부조리나 불의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한국 정치를 개혁하겠다는 의지도 있었다. 정당이라는 것은 다양성과 다원성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다. 당명도 더불어민주당이다. ‘더불어’라는 것은 차이가 있음을 전제로 하고 차이가 있어도 어울릴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지금의 민주당은 그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민주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다른 의견을 허용치 않고 그저 ‘일색’이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초선 의원에게 아쉬움이 많다. 이견을 제시하는 과정서 자기 검열을 많이 한다.

탈당 도발에도 이 묵묵부답
“미련 없다” 다음 행보 주목

아무래도 당 대표를 맹종하는 데서 비롯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대표 때도 똑같았다. 지금은 정도가 더 심해졌을 뿐이다. 맹종 이후에는 성역화, 다음에는 신격화가 된다. 당의 역동성이나 도덕성이 뚝 떨어지는 이유다. 당이 둔감해졌다.

-어떤 방면서 당이 둔감하다고 느꼈나?

▲도덕적 둔감성이다. ‘2021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이 대표적인 예시다. 돈봉투가 오고 간 것이 사실이다시피 하는데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없다. 우기고 버티고 “식사비다” “검찰 탄압이다”라는 말로 치부해 버린다. 검찰 탄압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모든 게 정당화된다. 그런 도덕적 감수성이 둔감해진 것을 볼 때면 퇴행했다고 느껴진다.

-이전부터 탈당 후 국민의힘에 입당할 것이란 이야기가 기정사실로 돌았다. 당시 국민의힘 의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나를 좋게 생각하는 분들은 덕담도 해줬다. 당시에는 내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도 받아줄 곳도 없었다. 그런데 국민의힘 쪽에서 “이쪽으로 와라”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니 당연히 따뜻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에 입당하면 그쪽에서도 ‘쓴소리 담당’을 맡게 될까?

▲쓴소리를 하는 게 내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처음부터 내 민의만 표출하면 또다시 갈등이 생긴다. 만일 쓴소리를 하더라도 여러 가지를 고려하고 완급 조절을 해야 한다. 그쪽은 그쪽 나름의 문화와 분위기가 있는 만큼 전략적으로 잘 배치해야 한다.

-민주당에 오랜 기간 머물렀던 만큼 국민의힘 의원과 섞이기 어려울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이와 관련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한데?


▲국민의힘 의원이 우주나 화성서 온 사람도 아니고, 민주당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 이념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면 ‘완전 보수’ ‘완전 진보’가 없는 것과 비슷하다. 어쩌면 행태나 방식은 똑같을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민주당의 일색, 맹종은 국민의힘 내부에도 존재한다. 그쪽도 윤심(윤석열 대통령의 의중)이면 ‘깨갱’하지 않는가?

-지난 9월 ‘유쾌한 결별’ 발언으로 상당한 이목을 끌었다. 왜 유쾌하다고 표현을 했는지 궁금하다.

▲가수 에일리가 부른 ‘보여줄게’ 노래서 영감을 얻었다. 떠나는 상대방을 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고 오히려 새로워진 자신을 보여준다는 점이 너무 통쾌했다. 상황을 회피할 수도 있지만 가사를 보면 꺾이지 않고 상대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기까지 한다. 그래서 지금 당장 “유쾌한 결별을 하자”가 아니라 “유쾌한 결별을 할 각오로 선을 분명히 정리해야 한다”는 뜻에서 말한 것이다.

그런데 지도부에서는 이 발언을 분당으로 받아들였는지 오히려 놀란 반응을 보였다. 이후 이 대표가 나에게 ‘엄중 경고’를 했다. 경고는 받아봤는데 엄중 경고는 또 처음이다.

-신당을 창당할 계획은 없었는지?

▲하고 싶은 마음은 꿀뚝 같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세가 부족하다. 인적 네트워크도 필요하고 자금력도 있어야 하는데 총선을 앞두고 혼자 하려니 준비가 안 됐다. 진행형이지만 충청권을 기반으로 도전해보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번 시도는 해보려고 하는데 아직 용기와 패기가 솟구치지는 않는다.


-본격적으로 정치 현안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이상민 의원의 정치관은 무엇인가?

▲경험치에 근거해서 대답하자면 세 가지 요소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민의를 대변하는 것이다. 공천이나 정치생명 연장에 굽히지 않고 주저 없이 민의를 대변하는 게 기본이다. 둘째는 상충하는 여러 가지 이해관계를 해결해나가는 능력이다. 부딪히는 걸 조정해내고 지혜를 모아서 조금씩 풀어가는 것이다.

새 보금자리 찾아 떠나는 이유는…
“정치 인생 최종 목표는 국회의장”

셋째는 앞서 말한 두 가지가 축적돼야 한다. 기반이 쌓이면 유권자한테 ‘오늘이 고돼도 나아진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지금의 정치는 거짓말이 많다. “내가 정치인이 되면”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이런 식이다.

-21대 국회는 유독 혐오로 얼룩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끝없는 진영 논리와 이념 싸움에 피로감을 느낀 국민도 적지 않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는지?

▲상대방을 보고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자기 당의 강성 지지자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상대를 얼마나 적대적으로 대하고 상처 입히는지가 평가의 지표가 된다. 반대편을 악마화하고 같은 말이라도 험한 단어를 쓰는 일이 일반화됐다. 양쪽 모두 그런 현상을 보이는데 특히 민주당은 그게 심하다.

개딸이 박수를 쳐주면 보상이 있고 그게 악순환으로 번지게 된다. 그들의 지지를 받을수록 당의 최고위원이 되고 당 대표도 될 수 있다. 더 나아가면 대선후보도 노려볼만하고 후원금도 많이 들어온다. 만일 이런 보상이 없었다면 상대방한테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덤비는 일은 없을 거다.

-현재 민생과 관련해 관심 있게 보는 법안이 있다면?

▲경제가 어려운 때일수록 인재를 육성하는 쪽에 방점을 두고 끈기를 가져야 한다. 내가 발의한 법안 중에 ‘사회적 특별연대세법’이 있다. 코로나19로 이득을 본 빅테크 기업으로부터 세금을 더 걷고 이를 청년을 위한 생활자금이나 학자금, 또는 교육 프로그램에 사용하자는 내용이다.

-세금 관련 이야기가 나왔는데 최근 정부가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을 주장했다. 관련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섬세함 없이 막무가내로 진행하다 보니 불거진 문제라고 본다. 연구비의 배정이나 지원에 있어서 분명히 잘못 쓰이는 부분이 있다는 건 다 공감한다. 이런 부분을 핀셋으로 골라서 고쳐야 하는데 일률적으로 총액을 삭감해버렸다.

연구위원 재정은 회계연도가 1년씩이지만 연구비는 3년 또는 5년이다. 도중에 연구비를 잘라버리면 인건비가 필요한 포스트닥터나 대학원생이 완전히 일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연구비를 사용한 사람을 불법 카르텔로 규정하는 것 역시 이들에게 있어 굉장히 자존심 긁히는 일이다.

-정치인으로서 이루고 싶은 최종 목적이 무엇인가?

▲국회의장이 돼서 국회 개혁을 이루고 싶다. 의원들의 특권 폐지와 민심에 부합하는 유능하고 효율적인 국회를 꾸리는 것이다. 의회 수장으로서 집행부의 수장인 대통령과 대칭되는 리더십을 발휘하고 견제와 협업을 동시에 이뤄나가고 싶다.

두 번째는 의원의 국제적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개별적인 지식을 얻는 것에 불과하고 어학도 부족하다. 매번 한미동맹을 강조하지만 미국 의원과의 네트워크가 없는 게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국회가 아쉽게 느껴진다.

각 나라에 특화된 정치인 육성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이를 위해서라도 글로벌 경쟁력을 쌓기 위한 토대와 기초를 만들고 싶다.

-끝으로 국민에게 어떤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민의를 대변하고 더 나은 사회 조건을 개선하는, 그래서 이상민이 하는 일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는 정치인으로 남고 싶다. 기대에 많이 미치지 못하겠지만 노력해왔다. 내년 총선서 지역구인 대전유성을에 출마할 계획이다. 지금은 첨단 과학기술이 좌지우지하는 시대인데, 이곳은 과학기술의 메카로 꼽히는 곳이다. 과학기술이 국정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연구자가 재능을 발휘해 몰입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고 싶다.

<hypak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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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