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갔던’ 친문 기업의 추락

‘문’ 달아준 날개 ‘윤’ 다 떼버린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좋은 날이 마냥 이어질 순 없다는 뜻이다. 경제 상황에 따라 영향을 받는 기업은 부침이 더 있는 편이다. 호황과 불황을 넘나드는 시장의 시류에 잘 올라타야 한다. 그와 동시에 기업이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바로 정치권이다. 특히 정부의 성향이 끼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윤석열정부 출범 이후 문재인정부서 추진됐던 정책들이 여럿 뒤집혔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권은 ‘문재인정부 지우기’가 윤정부의 핵심정책이라고 꼬집었다. 과거 정권교체가 10년 주기로 이뤄질 때는 정책의 연속성이 유지되는 편이었다. 

5년 만에
바뀐 분위기

하지만 문재인정부가 5년 만에 정권을 내주면서 정책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민주당은 지난 총선서 다수 의석을 차지해 국회서 우위를 점했다. 국민의힘은 영남권을 제외한 전 지역서 궤멸에 가까운 성적표를 받았지만 대선서 승리해 균형의 추가 맞춰졌다.

여소야대 국면서 민주당이 의석수를 무기삼아 입법을 시도하면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식이다. 

이 같은 과정이 반복되면서 정국은 경색됐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임기 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의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의 행보는 특히 외교와 경제정책서 두드러진다. 윤정부는 미국과 중국 사이를 줄타기했던 문정부의 중립외교를 뒤엎고 한‧미‧일 동맹 강화를 강조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 세일즈 외교를 전면에 내세웠다.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이라고 자청하면서 순방 외교에 몰두 중이다. 경제와 외교를 접목해 대한민국 전체 파이를 키우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동시에 국내에서는 ‘친기업’ 정책을 펼치고 있다. 역시 ‘친노동’ 정책을 우선시했던 문정부와 상반되는 행보다. 

이 과정서 문정부서 흥했던 기업이 윤정부 들어 쪼그라드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과거 정부서 이른바 잘나가던 기업이 정권교체 이후 타격을 입는 경우는 흔한 일이지만 윤정부에선 그 정도가 노골적이라는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정책에 이어 그 대상이 되는 기업까지 엎으려 하는 게 아니냐는 설명이다.

첫손에 꼽히는 기업은 카카오다. ‘공룡기업’으로 불리는 카카오는 내수시장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카카오는 ‘국민 메신저’로 불리는 카카오톡을 배경으로 각종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문어발식 사업확장으로 골목상권을 파괴한다는 비판이 줄을 이었지만 별다른 제재가 없어 문정부와 ‘밀월관계’라는 의혹까지 불거졌다. 

전 정부 정책 뒤엎기
외교부터 경제까지

하지만 카카오 계열사가 100여개가 넘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 여론이 급속도로 냉각됐다. 규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고 문정부 말에 이르러 정치권과 공정거래위원회 등에서 칼을 뽑았다. 점유율 90%가 넘는 메신저 앱(카카오톡)을 등에 업은 카카오 계열사가 표적이 됐다. 

지난해 10월에는 카카오가 임대해 사용하는 데이터센터서 화재가 발생해 주요 서비스 접속에 장애가 발생했다. 이 과정서 카카오의 사후 처리가 문제로 떠올랐다. 양적으로는 크게 확장됐지만 질적으로는 여전히 미숙한 상태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국민 밉상’ 기업으로 낙인찍혔다. 


윤정부는 이미 악화될대로 악화된 카카오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단순 규제를 넘어 카카오 계열사에 처벌의 칼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금융감독원이 선봉에 섰고 칼끝은 김범수 카카오 전 의장까지 겨누고 있다. 연예기획사 SM엔터테인먼트 시세조종 의혹이 어떤 후폭풍을 가져올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카카오는 의혹에 연루된 카카오뱅크의 대주주 자격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 야심차게 금융업에 뛰어든 초반 기세는 사라진 지 오래고 향후 금융 관련 사업은 ‘꿈도 못 꾼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 윤 대통령이 카카오를 ‘콕’ 찝어 ‘철저한 조사’ ‘반드시 제재’ 등의 발언을 쏟아냈다. 

해당 발언은 지난 1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서 열린 제2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서 나왔다. 이 자리서 윤 대통령은 카카오 택시에 대해 언급하면서 “독점적 지위를 이용한 횡포가 너무 심하다”며 “이 부도덕한 형태에 대해 반드시 정부가 제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카카오택시를 운영하는 카카오모빌리티는 대책을 내놓겠다며 즉각 반응했다. 

국민 기업
국민 밉상

카카오에 대한 전방위적 압박에 가려졌을 뿐 문정부서 승승장구했던 건설사의 입지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호남지역을 기반으로 급성장한 호반건설·중흥건설 등이 입길에 오르내리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윤정부가 호남기업을 타겟으로 잡았다는 말이 끊이지 않을 정도다.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는 계열사를 동원해 공공택지를 낙찰받는 ‘벌떼 입찰’ 의혹을 확인하고 있다. 호반건설·대방건설·중흥건설·우미건설·제일건설 등이 대상으로 떠올랐다.

먼저 호반건설이 과징금 폭탄을 맞았다. 공정위는 독점규제및공정거래에관한법률 위반으로 호반건설에 과징금 608억원을 부과했다. 삼성웰스토리(2349억원), SPC(647억원)에 이어 부당지원으로 공정위가 부과한 과징금 중 역대 3번째 규모다. 

공정위에 따르면 호반건설은 다수의 계열사를 설립해 공공택지 추첨 입찰에 참가시켜 당첨 확률을 높이는 방식으로 다수의 공공택지를 확보한 후 이를 총수 자녀 소유 회사와 그 자회사에 몰아준 혐의를 받고 있다. 호반건설은 “조사 과정에 충분히 소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사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동시에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법조계 등에 따르면 호반건설 측은 지난 9월 공정위를 상대로 시정명령 및 과징금 납부명령 취소 청구소송을 서울고법에 제기했다. 공정위 결정은 1심 판결과 같은 효력을 가지기 때문에 2심 법원서 다룬다. 과징금 폭탄 외에도 호반건설 앞에 놓인 산은 높고 험하다.

특히 원희룡 국토교통부(이하 국토부) 장관이 호반건설을 겨냥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공정위가 과징금을 부과한 직후다.


장관이 직접
“화가 난다”

원 장관은 “호반건설이 벌떼 입찰로 알짜 공공택지를 대거 낙찰받은 뒤 그걸 두 아들 회사에 양도해 아들을 번듯한 회사 사장으로 만들었다”며 “2013~2015년 벌어진 일에 대해 공정위에서 과징금 608억원을 부과했지만 호반건설의 두 아들이 운영하는 회사는 분양이익만 1조3000억원 이상 벌었다”고 자신의 SNS에 적었다.

그러면서 “국토부서 해당 시기에 택지를 낙찰받은 업체가 입찰 등록기준을 충족했는지 등을 조사한 뒤 더 자세한 불법성 여부는 경찰, 검찰 수사로 밝혀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의지를 드러냈다.

공정위는 공소시효(5년) 소멸을 들어 김상열 전 회장을 검찰에 고발하지 않았지만 국토부 입장은 다르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한 셈이다. 법조계에선 검찰이 호반건설의 승계 작업을 들여다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재계 순위가 껑충 뛴 중흥건설 역시 공정위가 불붙인 벌떼 입찰 의혹으로 표적이 된 상태다. 문정부서 ‘벌떼 입찰’로 총 178필지의 공공택지 중 67필지를 5개 건설사가 낙찰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호반건설이 18필지로 가장 많았고 중흥건설이 11필지로 나타났다.

우미건설(17필지), 대방건설(14필지), 제일건설(7필지) 등도 이름을 올렸다. 


문정부서 보조금을 몰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에디슨모터스는 여권을 중심으로 문제 제기가 이뤄지고 있다. 

국민의힘 한무경 의원실이 관계 당국으로부터 제출받은 ‘에디슨모터스 자금 지원 현황’ 자료에 따르면 회사에 지원된 정부 자금 1960억원 중 문정부 시절 집행된 금액은 1934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에디슨모터스는 2017년 당시 강영권 회장이 한국화이바 차량사업부를 인수한 뒤 지금의 사명으로 바꿔 운영한 회사로 전기차 사업을 주력으로 삼았다.

카카오·호반건설·에디슨모터스
전폭적인 지원→조사·감사 대상

사업 규모를 키우는 과정서 문정부와 전북 등 지자체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뤄지면서 특혜 의혹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법정관리와 경영진 기소로 나타났다. 이뿐만 아니라 에디슨모터스에 돈을 댄 정부와 지자체가 재정 부담을 짊어지게 됐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정우택 의원은 전북도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공개했다. 정 의원에 따르면 전북도가 에디슨모터스로부터 입은 직접 피해 추계액은 52억3700만원에 이른다. 앞서 문정부 당시 행정안전부는 산업통상자원부와 지역주도형 청년일자리 지원사업, 군산형 일자리 산업을 추진한 바 있다.

해당 사업은 당초 예상에 미치지 못했다. 

여기에 전북도와 군산시는 군산형 일자리 사업에 참여한 에디슨모터스에 막대한 금융지원은 물론 빚보증까지 해줬다. 2021년 7월 전북도와 군산시는 각각 50억원씩 출연해 100억원을 빌려줬고 전북도 산하기관인 전북신용보증재단은 이 대출에 대한 빚보증을 섰다.

하지만 에디슨모터스는 경영 악화로 기업회생 절차를 밟았고 전북신보는 올해 초 보증에 따라 대신 빚을 갚았다. 

전북신보는 국정감사에서 “에디슨모터스 대위변제에 아쉬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한 군산형 일자리를 이끌기 위해 대승적으로 사업을 지원했었다”고 해명했다.

정 의원은 “(에디슨모터스로 인한)피해는 고스란히 전북도민이 지게 됐다”며 “왜 이런 피해를 보게 됐는지 철저하게 점검하고 책임 있는 조치를 통해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지자체뿐만 아니라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이하 중진공)서 에디슨모터스로 지원한 돈에 대해서도 감사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중진공은 2018년 11월부터 2021년 3월까지 5회에 걸쳐 에디슨모터스에 약 129억원을 지원했다.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에디슨모터스 특혜 지원 의혹에 대해 감사원 감사를 요청했고 곧 감사가 시작될 것”이라며 “의혹이 해소될 수 있도록 챙기겠다”고 국감서 밝혔다. 

5년 뒤엔
또 누가?

한 경제계 인사는 기업의 흥망성쇠 주기가 5년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대권의 향배에 따라 기업의 생사가 결정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전 정부의 정책을 뒤엎는 과정서 이른바 ‘친정부’ 성향으로 분류됐던 기업이 철퇴를 맞고 있다. 반대로 또 다른 기업은 친정부라는 바람을 타고 위로 오르고 있다.

<jsjang@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