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고 - 억울한 사람들> 집단폭행 피해자의 울분

경찰이 놓친 증거 3년째 발목을 잡다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억울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담습니다. 어느 누구도 좋습니다. <일요시사>는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겠습니다. 이번에는 집단폭행을 당하고도 경찰의 증거 확보 부족으로 한을 풀지 못한 피해자의 사연입니다.

제보자 A씨는 이달 초 <일요시사>와 만나 자초지종을 털어놨다. A씨는 “집단폭행을 당한 그날, 2020년 7월16일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A씨는 일행 2명과 함께 서울 강남구 소재의 한 건물을 찾았다. 당시 진행 중이었던 민사소송에 활용할 사진 증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남자 3명이…

그는 피고 건물 사진촬영을 모두 마친 뒤, 곧바로 빠져나왔다. 이를 지켜보던 피고는 그의 등 뒤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A씨는 “그때 피고는 조직폭력배 조직원 B씨에게 전화를 걸어 ‘A가 사진을 찍어간다. 빨리 와서 찍은 걸 빼앗고 혼을 내주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 3명이 A씨를 둘러쌌다. 일행이 약 50m를 걸어 나왔을 무렵이었다. 이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사진을 지울 것을 종용했다. A씨 주장에 따르면 이들은 1시간 가까이 A씨를 밀치는 등 폭행·위협했다. 이윽고 따라온 피고도 합세했다. 

A씨가 제시한 진단서에 따르면 그는 이날 일로 총 전치 5주 수준의 상해를 입었다. 처음에 전치 3주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았음에도 잘 낫지 않아 2주간 추가 치료를 받아야 했다. 착용 중이던 안경도 폭행 중 파손됐다.


하지만 A씨는 끝내 사진을 삭제하지 않았다. 그러자 되레 피고가 A씨를 경찰에 신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남경찰서에서 경찰차 3대가 도착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경찰은 망가진 안경을 찍어가는 등 현장 증거를 확보했다. 

A씨는 경찰에 “폭행 가해자들을 현장서 연행해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를 거절하며 그에게 “고소장을 작성하는 등 정식 고소 절차를 밟으라”고 말했다. 이에 A씨는 현장을 비추던 방범용 CCTV를 가리키며 “저 카메라에 폭행 장면이 다 담겼을 것이다. 연행하지 않겠다면 CCTV 영상이라도 확보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일요시사>에 “분명 경찰의 영상 확보를 약속받고 귀가했다”고 강조했다.

집단폭행 피해…경찰에 CCTV 확보 요청
“알겠다”더니 뒤늦게 “사실은 안 했다”

이후로는 지지부진한 수사가 이어졌다. 경찰은 고소장을 제출한 지 한 달이 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고소인 진술도 받지 않았다. 조바심이 난 A씨는 수차례 담당 형사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끝내 닿지 않았다. 그는 “변호사를 선임하고 나서야 겨우 고소인 진술을 하러 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경찰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현장 방범용 CCTV 영상을 확보해두지 않았던 것이다. 뒤늦게 확보할 수도 없었다. 방범용 카메라는 이른바 ‘밀어내기’식으로 오래된 영상을 삭제하기 때문에, 이미 그날 영상이 지워졌을 터였다. A씨는 손쓸 새도 없이 가장 결정적인 증거를 날렸다.

A씨는 “내게 잘못이 있다면 경찰을 너무 믿은 것 하나뿐”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처음부터 분명히 증거수집을 요청했고, 고소도 늦지 않게 했다. 그런데 누가 늑장부리다 증거를 날려 먹었느냐”며 “결과적으로 증거가 수집됐는지 확인조차 못 하게 한 것 아니냐. 연락이라도 잘 받아줬다면 이런 일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는 경찰에 현장조사와 대질조사를 요구했지만,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찰은 사건을 넉 달간 들고 있다가 검찰로 송치했다. 혐의가 일부 인정된 B씨는 벌금 50만원을 내게 됐지만, 나머지 2명은 증거불충분으로 혐의없음 처리됐다. 피고의 폭행교사 혐의 역시 증거불충분에 따른 혐의없음으로 결론났다.

A씨는 “이들이 저지른 일에 비해 너무 작은 처벌이 내려졌다”고 토로했다. 고소인인 본인의 진단서 발급 비용만 30만원이 들어갔는데, 집단폭행 주도자 벌금이 50만원인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는 얘기다. 경찰이 증거만 제대로 확보했더라면 이들에게 더 큰 처벌이 내려질 수 있었을 것이란 취지의 주장도 이어졌다.

경찰은 3년 전 사건을 종결했지만, A씨에겐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민사소송을 통해서라도 이들의 잘못을 간접적으로나마 입증하겠다는 생각이다. A씨가 B씨에게 제기한 민사소송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검 넘겨진 가해자들 
대부분 ‘증거불충분’

B씨는 최근 재판부에 폭행 사실을 상당 부분 부인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그는 의견서에서 형사처벌을 받은 범위인 피해자를 가볍게 툭툭 친 것과 배로 서로를 밀다 안경을 파손한 사실만 인정했다. 경찰이 확보하지 않았던 증거 하나가 수년째 A씨의 발목을 잡는 모양새다. 

이달 초 A씨는 당시 사건을 맡았던 형사에게 다시 연락했다. A씨가 당시 증거 확보가 미진했던 이유를 묻자, 담당 형사는 “(내가)고소장을 전달받은 시점에는 이미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사건을 넘겨받는 과정에서 혼선이 있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대질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대질조사는 상대방도 응해야 할 수 있다’고 설명했었다”고 답했다.

A씨는 경찰 측에 정보공개청구를 내고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관들의 관등성명을 알려달라 요청했다. 관련자 이야기를 모두 들어보고, 지금이라도 책임소재를 명확히 알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경찰은 “재판과 연결된 사안이 아닌 이상, 개인정보 보호 문제로 경찰관들의 관등성명을 알려주기는 어렵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사안에 따라 이름까지는 알려줄 때가 있다. 다만 이 경우에도 현재 계급이나 근무지는 알려주지 않는다”고 부연했다.

A씨는 경찰에 이름이라도 알려 달라는 요청을 다시 넣어둔 상황이다. 

“부실 수사”

<일요시사>는 A씨의 ‘부실 수사’ 지적에 관한 강남경찰서 입장을 직접 들어보기 위해 연락을 시도했다. 담당 형사는 <일요시사>에 “직접 입장을 밝히는 건 부적절한 것 같다”며 “상급자에게 문의해달라”고 전했다. <일요시사>는 전달받은 연락처로 수차례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고, 끝내 아무런 입장도 들을 수 없었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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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