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신 빙속 여제’ 김민선

이상화 넘는다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제2의 이상화’라는 수식어를 떨쳐내고 ‘제1의 김민선’으로 우뚝 섰다. 이상화 이후 스피드스케이팅계의 최고 기대주로 꼽히는 김민선이 이상화의 기록을 하나씩 넘어서고 있다. 최근 세계대회서도 압도적인 기량을 과시하고 있는 김민선에게 ‘원조 빙속 여제’ 이상화 역시 아낌없는 격려를 보내고 있다.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에이스’ 김민선이 제104회 전국동계체육대회(이하 동계체전)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대회 폐회일인 지난 20일, 대한체육회는 한국체육기자연맹 기자단 투표 결과 김민선이 MVP로 선정됐다고 전했다.

김민선은 이번 동계체전서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일반부 500m, 1000m, 팀추월 종목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대회 3관왕에 등극했다. 이 중 500m(37초90)와 1000m(1분16초35)에선 대회 신기록을 경신했다. 둘 모두 이상화의 종전 기록을 넘어선 것.

새로운 기록
대회 휩쓸다

사실 대회 전체로 시야를 넓히면 김민선의 3관왕 기록이 희귀하다고 평할 수는 없다. 이번 대회서 3관왕을 22명이나 배출했던 데다 4관왕은 10명에, 5관왕도 2명 나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민선이 MVP로 뽑힌 이유는 최근 국제대회를 휩쓴 후광효과가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김민선은 체육기자연맹 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김민선은 국제빙상경기연맹(ISU)이 주관하는 2022-2023 시즌 월드컵서 금메달 5개를 따냈다. 올해 초에는 2023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세계대학경기대회에 출전해 3관왕에 올랐다. 이런 와중에 국내 최대 대회인 동계체전에서도 호성적을 거두자, 여러 성과를 종합해 ‘신 빙속 여제’ 대관식을 열어준 모양새다.

김민선은 “국내서 열리는 가장 큰 대회인 동계체전에서 MVP를 수상하게 돼 기쁘고 감사드린다”며 “이번 동계체전은 개인적으로는 대회 신기록을 경신해 더 큰 의미가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의미 있는 상을 받은 만큼 세계선수권대회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김민선은 11세 때 처음 스케이트를 신었다. 다른 스케이팅 선수들에 비해서는 다소 늦은 나이였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서 이상화가 스피드스케이팅 500m 종목서 금메달을 따는 모습에 반해 처음 스케이트를 신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민선은 처음에 피겨 스케이팅으로 스케이팅을 시작했다. 그러다 쇼트트랙으로 종목을 한 차례 변경했고, 다시 스피드스케이팅을 권유받았다. 김민선은 6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스피드스케이팅을 시작했다.

이후 김민선은 각종 주니어 대회를 휩쓸면서 이상화의 뒤를 이을 주역으로 눈도장을 찍었다. 김민선은 초·중등부 시절 동계체전 스피드스케이팅 단거리 종목(500m, 1000m)서 매번 상위권 성적을 기록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2016년에는 릴레함메르 청소년 동계올림픽에 출전해 500m 금메달, 매스스타트 동메달을 획득했다.

2017년 9월 국제빙상경기연맹 폴클래식 여자 500m서 37초70을 기록했다. 이상화가 10년 전 세웠던 세계주니어신기록 37초81을 뛰어넘는 기록이었다.

하지만 당시 김민선의 기록은 공인기록으로 인정되지 못했다. ISU 규정상 세계신기록을 수립한 선수는 도핑검사를 해야 하는데, 주최 측 과실로 김민선의 도핑검사가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결국 당시 김민선이 세운 기록은 비공인 기록으로 남게 됐다.

동계체전 3관왕…대회 신기록 ‘MVP’
ISU 주관 2022-2023 월드컵 금메달 5개

김민선은 3개월 후인 2017년 12월 2017-2018 ISU 월드컵 4차 대회에 출전해 세계주니어기록을 재차 경신했다. 그는 37초78의 기록으로 이상화가 세운 기록을 0.03초 앞당겼다. 이 기록은 문제없이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김민선은 국가대표 선발전을 무난히 통과하며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출전권을 자력으로 획득했다. 2017년 제50회 빙상인추모 전국 남녀 종목별 선수권 대회 1000m서도 1위를 차지하며 올림픽 호성적 기대감을 높였다.

실제로 김민선은 같은 해 월드컵 2차 대회서도 6위까지 오르며 성장 가능성을 보여줬다. 소속팀 의정부시청 감독인 제갈성렬은 김민선의 재능과 기량에 관해 “타고난 순발력에 좋은 신체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하체도 길다”며 “특히 스케이팅에 관한 이해도가 좋다. 스펀지 같은 선수다. 얼굴은 아기 같지만 승부욕과 독기가 있다”고 호평했다.

하지만 평창동계올림픽에서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김민선은 경기 일주일 전 허리 부상을 당하면서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김민선은 부상을 안고 뛴 500m 경기서 16위를 기록했다.

올림픽서 아쉬움을 삼키고, 부상의 여파로 한동안 잠잠한 시간이 흘렀다. 그런 와중에도 김민선은 꾸준히 성장했다. 그는 2020 사대륙선수권 500m서 38초416을 기록하면서 2위 브루클린 맥두걸을 0.117초 차로 따돌리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민선은 이 대회서 500m 금메달과 함께 팀스프린트에서도 은메달을 획득했다. 

그의 기량이 본격적으로 만개할 조짐을 보인 건 2021-2022 시즌부터다. 김민선은 이 시즌 1차 월드컵부터 성적과 순위를 꾸준히 끌어올렸다. 특히 캐나다 캘거리 올림픽 오벌서 열린 ISU 월드컵 4차 대회에선 37.205초를 기록해 자신의 500m 최고기록을 새로 썼다. 이는 당시 빙속 여자 대표팀 중에서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김민선은 또 한 번의 올림픽을 앞두고 유망주서 기대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기량 과시

김민선은 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제48회 전국남녀 스프린트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대회 겸 제76회 전국남녀 종합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대회 여자 500m 1차 레이스서 38초13을 기록했다. 이는 앞서 이상화가 2012년 수립한 38초18을 0.05초 앞당긴 대회 신기록이다.

뒤이어 3월 네덜란드서 열린 ISU 월드컵 파이널 500m 2차레이스에선 37초58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차지했다. 이는 김민선의 첫 월드컵 메달이다.

2022 베이징올림픽 당시, 김민선은 원래 곽윤기와 함께 개막식 공동 기수로 예정돼있었다. 하지만 실제 기수로는 김아랑이 나섰다. 이는 경기에 집중하고 싶다는 김민선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김민선은 주종목인 500m서 10조로 배정받아 일본 베테랑 선수인 고 아리사와 경기를 펼쳤다. 이날 김민선은 37초60을 기록해 전체 7위에 올랐다. 4년 전 자신의 기록을 1초 앞당겼다. 1000m에서는 8조에 배정됐다. 단거리 주자인 김민선은 초반 200m서 17초71를 기록했지만, 뒷심 부족으로 1분16초49의 기록으로 전체 16위에 올랐다.

터질 듯 말 듯 꾸준한 기대를 모았던 김민선의 기량은 올림픽을 두 번 경험하면서 비로소 만개했다.

김민선은 2022-2023시즌 1차 월드컵서 37초55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베이징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에린 잭슨, 은메달리스트 다카기 미호 등 쟁쟁한 선수가 대거 출전했던 대회서 2위를 무려 0.51초 차로 따돌리고 거둔 성과였다.

이 금메달은 개인으로서도 월드컵 첫 금메달인 동시에, 한국 빙상계로서도 이상화 이후 오랜만에 탈환한 월드컵 금메달이다. 같은 대회 1000m 종목에서는 네덜란드의 유타 레이르담에게 0.21초 뒤진 기록으로 은메달을 획득했다.

2차 월드컵 500m에선 같은 조 선수보다 한발 늦게 출발했음에도, 2위를 0.27초 차이로 넉넉히 따돌리며 재차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날 김민선의 기록은 37초21이었다. 김민선은 이 기록으로 1차 월드컵의 선전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입증해보였다.

3차 월드컵에선 부정 출발을 범해 심리적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도 참가자 중 유일한 36초대 기록(36초97)을 남겼다. 100m 구간을 참가자 중 가장 빠른 10초46으로 통과한 뒤, 페이스를 끝까지 유지한 것이 주효했다. 김민선은 3연패와 함께 개인 최고기록을 경신하는 기쁨을 누렸다.

장기 집권
가능할까

이 대회 1000m서 김민선은 6위를 기록했지만 개인 최고기록(1분13초794)을 새로 쓰며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4차 월드컵 500m에선 물오른 기량을 과시하며 월드컵 4연패를 달성했다. 36초96으로 개인 최고기록을 또 다시 경신했다. 유력 우승후보로 꼽혔던 다카기 미호는 37초26,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에린 잭슨은 37초35로 김민선의 뒤를 이었다.

김민선은 5차 월드컵에서도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였다. 500m서 모든 출전 선수 중 유일하게 37초대 기록(37초90)을 남겼다. 김민선은 월드컵 5연패를 달성하며 시즌 전관왕 달성 가능성을 키웠다.

하지만 김민선의 도전은 한 끝이 모자랐다. 김민선은 6차 월드컵에 출전해 500m서 38초08의 기록으로 아쉽게 2위를 차지했다. 1위 바네사 헤어초크의 37초96에 0.12초 뒤진 기록이었다. 수개월간 국내·북미·유럽을 오가며 강행군을 펼치면서 체력적 한계에 부딪힌 게 아쉬운 대목이었다.

단일 시즌 전관왕은 현역 시절 이상화도 갖지 못한 대기록이다. 이상화는 2013-2014시즌 월드컵 1~7차 레이스서 모두 우승하고도 전관왕 등극이 불발됐다.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서 500m 2연패에 성공한 후 남은 월드컵 대회에 모두 불참했기 때문이다.

김민선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지난해 12월 캐나다 퀘벡서 열린 ISU 스피드스케이팅 사대륙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김민선은 38초141을 기록하며 다시 금메달 사냥에 나섰다. 이번에는 뒷심이 돋보였다. 7조서 레이스를 펼친 김민선은 첫 100m 구간을 4위(10초68)로 통과하고도 무서운 뒷심으로 1위에 올랐다.

김민선은 이후 열린 1000m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상화와 예니 볼프 등 여러 전설적인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들은 긴 전성기를 누렸다. 김민선 역시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장기 집권’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김민선 역시 현시점 정상급 선수로 꼽히지만, 지금까지 목에 건 메달 수는 전설로 불리는 선수들에 비해 한참 적은 편이다. 다만 빙상계에서는 과거 사례에 비춰 김민선이 일단 정상권에 진입하면 독주체제를 굳히길 가능성이 크다는 기대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김 “이상화 수식어 부담? 자극제 된다”
이 “‘제2 이상화’보단 본인 이름으로”

2000년대 중후반을 주름잡은 독일의 전설적인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예니 볼프는 월드컵서 금메달 49개를 휩쓸었다. 보니 블레어가 39개, 이상화 36개, 고다이라 나오 28개, 캐트리오나 르메이돈 27개 순으로 그 뒤를 잇는다.
이들은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10년까지 정상권을 유지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김민선에게는 동계올림픽 금메달이 주된 동기로 작용한다. 김민선이 오는 2026년 열릴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동계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기량을 발전시켜 나간다면 앞으로 더 많은 메달을 목에 걸 수 있다는 것.

다만 허리 부상 재발을 조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민선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직전 허리 부상을 입은 뒤 2년간 주춤한 바 있다. 빙상계에서는 김민선이 허리를 잘 관리해 부상 재발을 막을 수만 있다면 빙속 여자 500m서 김민선의 전성시대가 열릴 수 있다고 본다.

김민선은 어린 시절부터 일찌감치 ‘포스트 이상화’로 주목받으며 항상 이상화와 비교돼왔다. 전설적인 선배와 비교되는 것이 부담일 수도 있겠지만, 김민선은 오히려 긍정적인 반응이다.

김민선은 언론 인터뷰서 관련 질문을 받고 “제가 국가대표에 선발됐던 17세 때부터 저에 대해 써 주신 모든 기사에 이상화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부담으로 느껴지진 않는다”면서 “오히려 많은 분이 제가 상화 언니만큼 잘할 수 있는 선수라고 믿어 주시고 지켜봐주신다고 생각해서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자극제가 된다”고 답했다.

김민선은 이번 시즌 월드컵 1차 대회서 여자 1000m 은메달을 획득한 뒤 “상화 언니가 꿈에 나왔다”고 말해 화제를 모았다. 이어 시즌 후반에는 “이번엔 꿈에 안 나왔다. 4차 대회 끝나고 축하 문자는 왔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상화와 김민선은 실제로도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는 관계로 알려졌다. 김민선은 2020년 7월 SBS 모바일 24 <배거슨 라이브 ㅅㅅㅅ>에 출연해 이상화와의 인연을 언급했다. 

김민선은 해당 방송서 “이상화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같은 방을 썼는데, 10세 이상 나이 차가 나서 오히려 편했다”며 “이상화가 밥도 많이 사줬다”고 말했다. 

이상화 역시 꾸준히 김민선을 응원하는 모습이다. 이상화는 김민선을 두고 “성숙한 정신력과 강한 집중력을 갖춘 선수고, 마치 어렸을 적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칭찬했다.

이상화는 은퇴 후에도 각종 방송에 출연할 때 김민선을 여러 번 언급했다. 김민선은 2021년 2월 방영된 SBS <동상이몽2 너는 내 운명> 이상화&강남 편에 함께 출연했다. 김민선이 이상화 부부와 함께 식사하는 모습이 방영됐다. 방송에서 김민선은 이상화가 가장 아끼는 후배로 소개됐다.

또 이상화는 지난해 2월 E채널 <노는 언니>에 출연해 2022년 베이징동계올림픽 기대주로 김민선을 꼽았다. 그러면서 세간에서 김민선을 ‘제2의 이상화’라고 부르는 것을 두고 “그것보다는 본인(김민선)의 이름으로 불러주면 좋겠다”고 뜻을 밝히기도 했다.

이상화 왕관
새로운 주인

김민선은 이상화를 넘어서기 위한 발전 방향도 스스로 찾아냈다. 김민선은 이상화가 세계신기록을 세우던 시절 초반 100m 기록이 10초09였다는 점을 언급하며 “제 기록보다 0.1초가량 빠르다. 그 부분을 앞당기면 그 이후도 좋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스타트가 마음처럼 쉽게 되진 않는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보완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민선은 다음 달 치러지는 세계선수권 대회서 세계 최정상 자리에 다시 한번 도전한다. 관건은 컨디션 조절이다. 김민선이 세 대륙을 오간 강행군으로 생긴 피로를 풀고, 몸 상태를 제대로 끌어올릴 수만 있다면 우승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전망이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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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BBQ 정보 유출 사건’ 위증 재판으로 확대⋯박현종 목줄 잡혔다

[단독] ‘BBQ 정보 유출 사건’ 위증 재판으로 확대⋯박현종 목줄 잡혔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대법원에서 집행유예로 확정된 사건이 다시 법정으로 끌려 나왔다. ‘BBQ 내부망 불법 접속’ 사건의 핵심 증거였던 ‘ID·비밀번호 메모장’을 둘러싼 위증 여부를 다투는 후속 재판이다. 박현종 전 bhc 회장의 집행유예가 확정된 사건임에도 검찰은 관련 증인들을 위증 혐의로 직접 고발했다. 핵심은 과연 BBQ 직원의 ID와 비밀번호가 적힌 그 메모장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유창성 전 bhc 정보전략팀장의 손을 어떻게 거쳐 전달됐는가다. 그리고 그 과정을 둘러싼 법정 진술의 신빙성이다. 검찰은 최근 공판에서 “피고인(박현종 등)에게 유리한 허위 증언이 반복됐다”는 판단 아래 유 전 팀장 등 관련자 3명을 위증 혐의로 고발했다. 메모장 전달자 통상 위증 여부는 재판부 판단 이후 별도 절차로 넘겨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번처럼 검찰이 직접 칼을 빼든 것은 이례적이다. 그만큼 단순한 진술 번복이나 기억 착오 수준이 아닌 사건의 본질을 뒤흔들 수 있는 중대한 허위 진술이 있었다고 본 셈이다. 이번 공판의 중심에는 ‘메모장 전달자’로 지목된 유 전 bhc 정보전략팀장이 있다. 그는 과거 재판에서 결정적 증거로 채택된 BBQ 직원들의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적힌 메모를 박현종 전 bhc 회장에게 전달한 인물이다. 이 메모장은 박 회장의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를 입증하는 핵심축이었다. 이 메모장의 출처와 작성 경위가 흔들리면, 사건 전체의 구조도 다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 검찰은 유 전 팀장이 박 전 회장에게 건넨 메모장의 내용 자체를 문제 삼았다. 메모장에 기재된 임직원 계정 정보 뒤에는 ‘퇴사자 임시’라는 내용이 덧붙어 있었다. 이는 BBQ 내부망에서만 확인 가능한 정보라는 점을 강조했다. 외부에서 추정이나 기억만으로 재구성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 성명불상자가 BBQ 내부망에 관리자 권한으로 접속해 계정을 취득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를 유 정보팀장을 거쳐 박 전 회장에게 전달했다는 구체적 시나리오까지 제시했다. 재판부 역시 “기억과 추리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떠올렸다는 설명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며 검찰 주장에 일정 부분 무게를 싣는 듯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재판부는 “특정한 심증을 가진 것은 아니”라며 추가 심리를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피고인 측은 거칠게 반격했다. 변호인은 검찰 주장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bhc와 BBQ가 극도로 적대적인 관계였던 상황에서, bhc 소속 직원이 BBQ 내부 직원과 접촉해 계정 정보를 빼냈다는 가정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논리다. 나아가 검찰이 실제 내부망 침입을 입증하지 못한 채 추측만을 쌓고 있다고 공격했다. 60억원대 횡령·배임 혐의에 리스크 추가 ‘BBQ 직원 ID·비밀번호 유출’ 둘러싼 공방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피고인 측은 기존 재판에서 채택된 증거와 증인 진술 전반에 대해 신빙성을 문제 삼으며, 데이터베이스(DB) 조작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사실상 1·2심은 물론 대법원 판단의 기초 자체를 뒤흔드는 주장이다. 확정 판결 이후 재판에서 “증거 자체가 위조됐다”는 취지의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법조계에서도 보기 드문 강수로 평가된다. 유 전 팀장은 BBQ 정보전략팀장으로 근무하다가 bhc 매각과 함께 bhc 정보전략팀장으로 이직한 인물이다. 이후 그는 박 전 회장에게 BBQ 직원의 개인정보를 적은 쪽지를 전달했다. 개인정보가 유출된 인물은 BBQ 재무임원과 재무 실무진이다. 2021년 11월3일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 열린 박 전 회장의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 관련 7차 공판에 유 전 팀장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유 전 팀장은 박 회장에게 BBQ 직원의 개인정보를 건넨 이유에 대해 “박현종 회장이 국제상공회의소(ICC) 중재 소송 때문에 BBQ 직원들의 아이디만 필요하다고 했다”며 “해당 직원들의 개인정보가 업무 수첩에 적혀있어 이를 그대로 전달했다. 당시 위법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박 전 회장은 검찰 조사에서 ‘BBQ 직원들의 개인정보와 비밀번호가 있으면 좋겠다’고 진술했다. 박 전 회장과 증인의 진술이 일치하지 않는 데 대해 묻는 검찰 질문에 유 전 팀장은 “박 전 회장의 진술은 모르겠고 아이디만 필요하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유 전 팀장은 BBQ와 bhc의 ICC 중재 소송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소송에 관여하지도 않았다고 증언했다. BBQ 직원들의 개인정보 취득 경위와 관련해서는 “BBQ 정보전략팀장으로 일할 당시 BBQ 재무임원이 그룹 전산망의 데이터가 다르다고 확인 문의가 왔다”며 “당시 물류 전산망이 바뀐 지 얼마 안 돼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아 문제 해결을 위해 임원에게 개인정보를 요청해 받은 뒤 이를 업무 수첩에 적은 이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 전 팀장이 개인정보를 받았다고 지목한 BBQ 재무임원은 앞서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개인정보를 아무에게도 전달한 적 없다”며 “업무 처리도 유씨가 아닌 다른 직원과 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검찰은 유 전 팀장이 그룹 전산망에 접근할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내부 정보 취득 시점이… 유 전 팀장은 재무임원의 개인정보를 취득한 시점에 대해서도 그간 검찰 조사에서 했던 진술을 번복했다. 그는 2011년~2012년 즈음에서 2013년 1월로 시점을 바꿨다. 검찰은 증인에게 진술을 번복한 이유가 물류 전산망이 바뀐 시점으로 맞추기 위함이냐고 묻자 유 전 팀장은 “단순 착오”라고 답했다. 유 전 팀장은 bhc 직원으로 일할 당시 BBQ 퇴사자의 개인정보를 어떻게 알 수 있냐는 검찰 질문에 “자신이 BBQ 정보전략팀장으로 일할 당시 퇴사자의 개인정보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있어 이를 바탕으로 추측해 박 회장에게 전달했다”고 답했다. 검찰은 유 전 팀장의 증언에 BBQ가 퇴사자에게 부여하는 임시 비밀번호를 줄 때 증인이 말한 방식을 쓴 것은 증인 퇴사 이후라고 지적했다. 검찰은 유 전 팀장이 박 전 회장에게 BBQ 전·현직 직원들의 정확한 개인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bhc가 BBQ의 데이터베이스(DB)를 모조리 빼내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관련, 박 전 회장은 검찰 조사에서 “BBQ 허락하에 BBQ DB를 모두 가져왔다”고 진술했다. 박 전 회장 진술 이외에 검찰 판단을 뒷받침하는 정황도 있다. 2013년 6월 말 bhc 매각 이후 bhc는 자체 전산망 구축을 위해 BBQ와 bhc 전산망 분리 작업이 필요했다. 그해 7월2일 외부 업체는 해당 작업이 최소 한달 이상 걸릴 것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유 전 팀장과 부하 직원 한 명, 그리고 한달 이상이 걸릴 것으로 판단했던 외부업체는 2013년 7월5일 오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불과 12시간 만에 BBQ로부터 분리된 bhc 전산망을 구축했다. 이와 관련해 유 전 팀장은 “bhc 직원이 100명 남짓에 불과해 수작업으로 데이터를 옮겨 가능했다”며 “BBQ DB는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BBQ DB 관련 박 회장과 유씨의 진술이 배치되는 데 대해 유 전 팀장에게 묻자 “자신은 박 회장에게 BBQ DB를 가져왔다고 말한 적 없다”며 “박 회장이 검찰에서 왜 그리 말했는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다만 유 전 팀장은 노트북 하드 교체 관련 재판 과정에서도 말이 일치하지 않았다. 뻔히 보이는 해킹의 목적 첫 증언에서는 bhc 매각 시기인 2013년 이후 노트북 감가상각 5년을 계산해 2018년에 바꿨다고 했지만 이후 2017년으로 고쳤다. 기존 사건이 ‘불법 접속이 있었느냐’는 사실관계 다툼이었다면, 이번 후속 재판은 ‘그 사실을 둘러싸고 법정에서 거짓말이 있었느냐’는 문제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이 조직적으로 이뤄졌는지 여부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해 2월, 박 전 회장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박 전 회장이 BBQ 직원 계정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취득할 수 없었고, 불법적 경로일 가능성을 인식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는 무죄였지만, 정보통신망법 위반은 명확히 유죄로 못 박았다. 그러나 사건은 집행유예 판결로 끝나지 않았다. 검찰이 위증을 별도의 범죄로 끌어올린 이상, 수사는 ‘위증교사’를 밝히는 단계로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법원이 관련자들의 위증을 인정할 경우, 그 진술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유도했는지가 핵심 수사 대상이 된다. 화살이 결국 박 전 회장을 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위증교사는 기존 사건과는 별개의 범죄로, 추가 기소로 이어질 경우, 사법 리스크도 한층 더 커진다. 문제는 입증이다. 위증교사는 단순한 정황만으로는 성립하기 어렵다. 구체적인 지시나 교감, 사전 조율 정황이 확인돼야 한다. 하지만 검찰이 이미 “유리한 허위 증언 반복”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고발까지 단행한 점을 감안하면, 단순한 가능성 제기를 넘어선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BBQ 출신 정보전략팀장 진술 번복 검, 증인들 위증 혐의로 직접 고발 이 사건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축은 bhc와 BBQ 사이의 오랜 분쟁이다. 박 전 회장은 삼성전자와 삼성에버랜드에서 근무하다가 2012년 BBQ 글로벌 대표로 영입됐다. 이어 2013년 BBQ 자회사 bhc가 미국계 사모펀드에 팔린 뒤 bhc 대표로 옮겨가며 양사 갈등의 중심에 섰다. 2018년 사모펀드 운용사 MBK파트너스 등과 함께 bhc를 사들여 오너 경영자가 된 동시에 각종 소송과 형사적 리스크의 한가운데에 서게 됐다. 이번 사건 역시 단순한 개인 비위가 아니라, 기업 간 치열한 법적 분쟁 속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무게가 다르다. 검찰에 의하면 박 전 회장은 2015년 7월3일 서울 송파구 신천동 bhc 본사에서 BBQ 직원 2명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무단 도용해 BBQ 전산망에 접속한 뒤 bhc와 BBQ가 연루된 국제 중재 소송 관련 자료들을 살펴봤다. 이로 인해 박 전 회장은 2020년 11월 재판에 넘겨졌다. 아울러 박 전 회장은 유 정보팀장으로부터 BBQ 직원 이메일 아이디, 비밀번호, 전산망 주소가 적힌 메모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6월 1심 재판부는 박 전 회장의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를 인정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에 대해선 입증이 부족하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사건은 항소심으로 넘어갔다. 항소심 3차 공판 때 검찰과 변호인은 파워포인트(PPT)를 통해 2시간 동안 치열한 공방을 펼쳤다. 먼저 의견 개진 기회를 얻은 변호인은 “BBQ가 여러 차례 박현종 회장을 영업비밀 침해 등의 이유로 고소했지만 계속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며 “그런데 검찰이 정보통신망법을 무리하게 적용해 박현종 회장을 기소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변호인은 “검찰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혐의를 입증한 것도 아니”며 “왜곡 가능성이 큰 간접 증거만 제시됐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박현종 회장은 2015년 7월3일 순댓국 프랜차이즈 인수 회의에 참석해 BBQ 전산망에 접속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부연했다. 반면 검찰은 “bhc가 2013년부터 BBQ 전산망에 무단 접속한 횟수가 236회에 달하지만 행위자가 드러나지 않아 기소하지 못했다”며 “박현종 회장은 무단 접속이 명백해 기소했다”고 반박했다. 지시했나 사면초가 검찰은 박 전 회장의 범행 동기에 대해 “2015년 BBQ 직원들이 박현종 회장이 bhc 매각을 총괄했다”는 진술서를 국제 중재 법원에 냈다. 국제 중재 소송에서 질 경우 지위가 불안정해질 수 있었던 박 전 회장은 “해당 진술서를 검토하고 반박해야만 했다”고 했다. 이어 “박현종 회장 휴대전화에서 BBQ 직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적은 메모 사진이 나왔다. BBQ 전산망 접속 데이터 분석 결과, 박현종 회장이 BBQ 사내 메일을 포워딩(전달)한 개인 메일을 2년 만에 열람한 기록도 있다”며 혐의를 입증할 물적 증거가 많다고 했다. 검찰은 “2015년 7월3일 순댓국 프랜차이즈 인수 회의 참석자 2명은 박현종 회장을 회의에서 보지 못했다고 했다”며 박 전 회장의 알리바이를 부인하기도 했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