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스토킹 피해담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2.09.26 09:14:29
  • 호수 13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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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보호 중 2명 죽었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연인은 헤어지면 남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헤어지는 과정이다. 당연히 헤어지는 과정이 좋을 수는 없겠지만, 한때 연인이었던 상대방에 대한 예의는 있어야 한다. 이 과정 중이 끔찍한 범죄로 바뀌는 사람도 있다. 연인은 스토킹 가해자와 피해자가 된다. 가장 끔찍한 것은 스토킹 가해자가 피해자를 살해하는 경우도 발생하는 것이다.

스토킹(Stalking)이란 상대방이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이유 없이 상대방 또는 그의 동거인, 가족에 대해 접근하거나 따라다니며 진로를 막아서는 행위 등을 말한다. 이때 상대방은 불안감, 공포심을 느낀다.

행동을
정당화

스토커는 피해자를 몰래 따라다닌다. 지속적으로 미행하다가 피해자가 두려움을 느끼면 조금씩 접근하기도 한다. 당연히 사생활 침해가 동반되고, 심할 경우는 피해자를 위협하는 경우도 있다. 스토커는 피해자에 대한 잘못된 망상, 광적인 집착을 보이며, 대부분은 상대방을 물건처럼 소유하고 싶어한다.

보통은 집착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거절하면 마음을 접는 게 정상인데, 스토커는 이 과정에서 끝없이 집착한다. 상대방 의사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감정 표출을 하기도 하며 공격성·강제성·맹목적성 양상을 띤다.

또 이들은 연애 감정을 앞세운다. 피해자에게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상대방의 감정 또는 상대방과 관련된 인물에 대해 허황된 생각을 가지고 이를 사실로 여긴다. 피해자가 침묵하거나 거절 의사를 표해도 긍정적인 메시지로 착각한다.


이런 스토킹 범죄가 한때는 연예인의 전유물로 부각된 시대도 있었다. 아이돌 가수의 팬은 스토킹 범죄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보통 아이돌 가수 팬은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다니거나 포스터나 음반을 산다. 이 팬들 중에는 가수의 숙소에 직접 찾아가 얼굴을 보고 가기도 한다.

문제는 ‘사생팬’이다. 이들은 가수가 가는 곳마다 택시를 타고 쫓아다니거나, 대포폰을 만들어서 전화를 도청, 주민등록번호를 조회해서 정보 유출, 숙소를 몰래카메라로 촬영하거나 성추행 등을 저질렀다.

가수 김창완은 자신을 10년 넘게 스토킹한 남자 스토커를 경찰에 신고한 적 있다. 이 스토커는 김창완과 본인이 친구 사이라는 망상이 심했다. 이 때문에 김창완의 집을 몰래 들어가는 경우가 있었다.

가수 성시경은 과거에 부모님이 스토커에게 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 성시경은 “사생팬은 팬이 아니라 정신병자 스토커”라고 말을 할 정도였다.

배우 고 이다빈도 무명 시절 스토킹 피해를 입었다. 이다빈은 ‘486’ 문자 번호로 문자메시지를 받았는데 “빨간 드레스가 예쁘다” “지금(집에) 들어오네, 근데 옆에 남자는 누구?”라는 등의 문자를 받았다. 

스토커가 미스코리아 김성희와 혼인신고를 해버린 일도 있었다. 1970년대라서 가능한 일이지만, 김성희는 이 일로 터져나오는 온갖 언론 기사로 상처 받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당시 스토커는 문서 위조죄로 징역형을 살았는데, 마지막까지 김성희와 결혼한 게 진실이라고 주장했다. 

유명인의 스토커 피해는 처벌 수위가 높아지면서 점점 해결되는 양상을 보였지만, 반대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스토킹 범죄는 점점 심각해지는 상황이다.


상반기 경찰에 잡힌 사람만 2924명
처벌은 솜방망이…보복도 증가 추세

지난 16일 <한겨레>가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실을 통해 확보한 경찰의 연도별 스토킹 범죄 검거 인원과 여성가족부의 자료 등을 보면, 올해 상반기 스토킹 범죄로 경찰에 붙잡힌 이는 2924명으로 집계됐다.

연도별로는 2017년 358명, 2018년 434명, 2019년 580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2020년에는 471명으로 전년 대비 소폭 감소했다. 그러나 올해 상반기는 2924명으로 폭증했다. 5년 전인 2017년과 견주면 8배나 늘어난 것이다. 

지난해는 10월21일부터 12월31일까지 집계된 인원만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인원만 545명으로 전년 전체 검거 인원을 뛰어넘었다.

신고 건수는 2020년 4515건이던 스토킹 관련 112신고 건수가 지난해에는 1만4509건으로 3.2배가량 늘었다. 연도별로 보면 지난 1~7월 집계 신고 건수는 지난해 신고 건수를 넘어선 총 1만6571건이다. 2018년 2921건, 2019년 5468건, 2020년 4515건이다.

하지만 스토킹 범죄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고, 이후에 가해자가 보복범죄를 저지르는 상황도 계속 증가 추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10월21일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됐다. 스토킹처벌법에서 스토킹 범죄는 “지속적 또는 반복적으로 스토킹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스토킹 신고가 들어오면, 경찰은 즉시 현장에 나가 ▲스토킹 행위를 제지 ▲지속적 또는 반복적으로 스토킹 행위 시 처벌 경고 ▲스토킹 행위자와 피해자 분리 ▲범죄 수사 ▲피해자들에 대한 긴급 응급조치 ▲피해자에 대한 잠정조치 요청의 절차 등 안내 ▲보호시설로 피해자 인도 등을 한다. 

스토킹처벌법 제정 전에는 경범죄 처벌법 제3조 제1항 40·41에 따라 ‘(장난전화 등)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사람에게 전화·문자메시지·편지·전자우편·전자문서 등을 여러 차례 되풀이해 괴롭힌 사람’과 ‘(지속적 괴롭힘)상대방의 명시적 의사에 반해 지속해서 접근을 시도해 면회 또는 교제를 요구하거나 지켜보기, 따라다니기, 잠복해 기다리기 등의 행위를 반복해야 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처벌했다.

유명인도
일반인도

문제는 처벌 수위였다. 경범죄 처벌법은 해당 사항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1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의 형으로 처벌했다. 스토킹처벌법 제정 이후 ‘처벌 수위’는 나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스토킹 피해자가 겪는 현실적인 어려움은 나아진 것이 없다.

경찰의 신변보호(안전조치)를 받던 범죄 피해자가 사망한 사건이 올해만 4건으로 집계됐는데, 이들 중 두 명이 스토킹 범죄 피해자였다.

지난 5월 스토킹 범죄 가해자 A씨는 수사 중 잠정조치 1~3호(서면경고·100m 이내 접근금지·전기통신 이용 접근금지) 조치를 받았으나, 피해자가 지난 6월 처벌불원 의사를 밝히고 검찰 불송치 처분을 받았다. A씨는 잠정조치가 무효화된 당일 피해자와 술을 마시다 피해자를 맥주병으로 살해했다.


지난 6월에는 경기 안산시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와 가해자 B씨는 같은 빌라에 살던 사이다. 피해자의 처벌불원 의사로 잠정조치가 해제된 사이 가해자가 피해자를 계단에서 칼로 찔러 살해한 것이다. 당시 피해자는 스마트워치를 미착용한 상태로, 이웃 주민이 신고했다.

이런 사실은 경찰과 피해자 모두 스토킹 범죄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가 하나 더 있다. 피해자가 스토킹처벌법으로 고소하자, 가해자가 보복범죄로 대응하는 것이다.

지난 21일 50대 남성 C씨는 약 40일간 동거했던 여성 D씨에게 전화·카카오톡 등을 통해 만나 달라고 수십회 연락했다. C씨는 “같이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 못 헤어진다. 집을 불살라버리겠다”고 D씨를 협박했다. C씨는 D씨와 헤어진 뒤 거처를 지인의 집으로 옮긴 상황이었다.

신변 보호
잇단 비보

C씨의 연락은 반복적으로 지속됐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D씨는 지난 7일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D씨를 고소했다. 고소 이튿날 C씨는 D씨가 사는 집을 찾아갔고, 그의 차를 본 D씨는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은 C씨의 차에서 흉기를 발견하고 체포했다.

C씨는 “원래 칼을 차에 두고 다닌다”고 주장했지만, 경찰은 범죄 위험성이 있다고 보고 C씨에 대해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구속했다.


더 큰 문제는 스토킹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시행된 잠정조치 4호(유치장 유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스토킹처벌법 시행 이후에도 검경과 사법부의 안일한 문제의식이 바뀌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잠정조치 4호는 스토킹처벌법에 따른 피해자 보호 조치 중 가장 강력한 조치다. 검찰이나 법원이 경찰의 잠정조치 4호를 인용하면 최대 한 달간 피의자를 유치장에 구금할 수 있다.

지난달 서울 은평경찰서는 올해 3~8월 전 연인을 스토킹한 30대 남성 E씨에 대해 검찰에 유치장 유치를 신청했지만, 검찰은 초범이라는 이유로 이를 기각했다.

E씨는 지난달 피해자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흉기로 현관문을 훼손하고 문 틈에 흉기를 꽂아놓기도 했다. 서울서부지검 관계자는 “경찰이 유치장 유치 신청을 할 당시엔 범행의 반복성이 있다고 보기 어려워 기각했다”고 해명했다.

지난해 11월 서울 중구에서 발생한 스토킹 살해 사건에 대해서는 경찰이 유치장 유치를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살해 직전 피해자는 근처에 피의자가 왔다며, 잠정조치가 시행되지 않은 것이냐고 경찰에 문의까지 했다.

흉기로 현관문 훼손해도 초범이라고 기각
‘반의사불벌죄’ 폐지 골자로 하는 법 개정

당시 경찰은 “유치장 유치는 인신 구속 조치다 보니 어느 정도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 우리가 가진 것은 진술뿐이었다”고 밝혔다. 이 사건 이후 경찰은 “잠정조치 4호를 우선 고려할 수 있도록 지침을 마련하고 있다”고 발표했지만, 실효성은 없었다.

피의자를 유치장에 넣더라도 일찍 풀려나 실효성이 없었던 사례도 있다. 지난해 12월 서울 구로구에서 50대 중국인 남성이 스토킹 끝에 30대 여성을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피의자는 범행 3일 전 유치장에 구금됐지만, 검찰이 구속영장을 반려하면서 9시간 만에 풀려났다. 경찰은 피의자의 스토킹 범죄를 심각 수준으로 판단했음에도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에 따라 법무부는 스토킹 범죄와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 지시에 따라 스토킹 범죄의 ‘반의사불벌죄’ 폐지를 골자로 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반의사불벌죄란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형사처벌을 할 수 없는 범죄다. 

즉 반의사불벌죄가 폐지되면 피해자의 고소가 없어도 수사기관이 수사하고 기소해 처벌할 수 있다. 이 법이 폐지되지 않으면,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표시를 표명할 경우 처벌이 불가능하다. 단 해당 의사표시를 1심 판결 이전까지 해야만 성립된다. 

법무부는 스토킹처벌법에 규정된 반의사불벌죄 폐지를 신속히 추진하겠다고 지난 16일 밝혔다. 이 규정이 사건 초기 수사기관이 개입해 피해자를 보호하는 데 장애가 되고, 가해자가 합의를 목적으로 피해자에게 2차 스토킹 범죄나 보복범죄를 저지르는 원인이 된다는 점을 고려해 정부입법을 통해 적극적으로 폐지를 추진할 방침이다.

법무부는 또 스토킹 범죄 발생 초기 잠정조치에 가해자에 대한 위치추적을 신설해 2차 스토킹 범죄와 보복범죄를 예방할 수 있도록 피해자 보호 방안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도 대검찰청에 “스토킹 범죄에 대해 엄정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검찰은 스토킹 사건 초기부터 피해자에 대한 위해 요소를 철저히 수사할 방침이다.

보호에 
만전을

가해자에 대한 접근금지, 구금 장소 유치 등 신속한 잠정조치를 시행하는 한편 구속영장도 적극적으로 청구해 스토킹 피해자 보호에 만전을 기할 방침이다. 앞서 윤 대통령은 “스토킹 범죄가 발붙일 수 없게 하라”며 법무부에 스토킹처벌법 보완을 지시했다.

<alsw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스토킹 양형’ 대법원 입장은?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스토킹범죄에 대한 양형 기준 설정 여부를 검토하기로 했다.

대법원은 또 가해자를 불구속 수사할 때 전자발찌를 부착하는 등 조건부 석방제가 필요하다는 입장도 내놨다.

양형위는 지난 20일 119차 전체회의 결과에 대해 “지난해 10월부터 시행 중인 스토킹처벌법이 적용된 사건의 양형 사례를 면밀히 분석하고 스토킹처벌법 개정 여부 등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스토킹범죄에 대한 양형 기준 설정 여부를 심의할 예정”이라며 “범죄 발생의 빈도수, 해당 범죄의 양형에 대한 국민적 관심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다만 현재 8기 양형위는 지난해 6월 이미 범죄군을 선정해 양형 기준을 마련하고 있는 만큼 스토킹범죄 양형 기준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는 내년 4월 9기 양형위 출범 뒤에야 이뤄질 전망이다.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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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