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지국제병원으로 본 의료민영화 이면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2.05.11 09:54:55
  • 호수 13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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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생명이 상품으로 전락”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병원은 지역사회 주민의 치료와 예방을 포함한 총괄적인 의료를 서비스하며 병의 예방과 연구도 함께 시행한다. 병원은 공익적 목적에 설립 기반을 두지만, 제주도 서귀포시의 ‘녹지국제병원’ 설립을 기점으로 그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녹지국제병원’이 설립되면 한국에 의료민영화가 시작될 거라고 지적한다.

녹지국제병원의 전신은 녹지 제주 헬스케어타운 유한회사다. 이 회사는 중국 상하이에 본사를 둔 녹지그룹이 전액 투자했다. 2015년 12월 녹지그룹은 제주도 서귀포시에 영리병원인 녹지국제병원 설립을 승인받았다. 여기서 말하는 영리병원이란 개인이 재산상의 이득을 취하는 병원을 말한다. 

영리병원
첫 시작

이렇게 따지면 진료나 입원 등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병원이 전부 영리병원이 아닌가 생각이 들지만, 개인병원을 제외한 국내 병원은 병원에서 취득한 이윤을 병원의 인건비, 시설투자 등 병원 내부 투자를 하는 데만 이용 가능하다. 

반면 영리병원은 병원의 이윤을 투자자들에게 배당할 수 있어 특정 사업을 하는 다수의 투자자가 모여 설립한 법인이 된다.

즉 ‘영리 추구’의 의미가 아닌 ‘영리법인이 설립한 병원’을 뜻한다. 영리병원은 병원이 번 돈을 병원의 내부 투자 외에 투자자들에게 배당할 수 있다.


의료법 제33조 제2항에는 병원 개설의 자격을 제한한다. 이 법에는 병원 개설 자격을 ▲의사·치과의사·한의사·조산사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의료업을 목적으로 설립된 법인 ▲민법이나 특별법에 따라 설립된 비영리법인 ▲준정부기관·지방의료원·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으로 제한해 영리병원 설립을 막고 있다.

한국이 영리병원 설립을 막은 이유는 병원의 이익금이 밖으로 빠져나갈 경우, 병원이 사익만을 추구해 환자의 치료가 뒷전이 될 수 있는 경우를 대비해서다.

실제로 미국 조지아주 영리병원 응급실 담당 국장인 크레이그 브러머 의학박사가 밝힌 사실에 따르면 영리병원은 경제적 이득만을 위해 환자의 건강을 고려하지 않고 조건 없는 입원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 영리병원의 사례다. 열이 40도까지 올라간 생후 11개월 된 아기가 응급실로 왔다. 여러 조사에서 이상이 없었고, 체온이 정상인 37.1도까지 내려갔다. 그러나 병원은 ‘열병’ 진단으로 입원 조처를 했다. 또 목 통증 때문에 응급실을 찾은 71세 노인은 가슴 통증을 호소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심전도 검사와 흉부방사선영상 검사를 받아야 했다.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으나 가슴 통증 규정에 따라 불필요하게 입원 조처됐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서 영리병원 의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국의 영리병원은 병원 방침을 거역한 의사를 가차 없이 해고했다.

한국 공공병원 5% 내외로 OECD 최하
일본은 영리병원 금지, 공공병원 30%


미국 연방수사국은 “이 병원은 외부 의사들과 사무실 임대계약을 해 정상가보다 낮은 임대료를 받거나 검사 대행 계약으로 검사비를 계약서보다 높게 지불했다. 이런 금전적 관계를 맺고 있어서 이들 의사들이 이 병원에 환자 진료 의뢰를 한 것은 불법”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전 세계적으로 영리병원의 문제점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오래전 일이다. 이런 와중에 녹지국제병원은 어떻게 승인을 받은 것일까.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정부는 의료법 제23조 ‘의료기관 또는 외국인 전용 약국의 개설’에 ‘외국인 전용 의료기관’을 폐기하고 ‘외국인이 개설하는 의료기관’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했다.

이 기관에서는 내국인이 진료 받을 수 없게 했고 건강보험 비용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외국인 진료만으로는 대규모 외국 의료기관 개설이 어려웠다. 곧 정부는 내국인 진료를 무제한 허용하는 취지로 법률을 개정했다. 

여기에 더 나아가 ‘구제주 국제 자유 도시 특별법 법률’ 제20조의4에는 ‘외국인 전용’ 의료기관 개설에 관한 특례를 규정해서, 제주도 내에 외국인 전용 영리병원을 설치할 법적인 근거가 최초로 도입됐다. 

이 같은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서귀포시 동홍동과 토평동 일원 38만1495㎡에 ‘제주 헬스케어타운 조성사업’을 위한 녹지 제주 헬스케어타운 유한회사를 설립했다.

예산은 800억원이 들었다. 2015년 6월 이 회사는 제주도지사에게 녹지국제병원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다. 사업계획서에는 ‘제주도를 방문하는 중국인 등 외국인 의료관광객이 대상이다. 제주도를 방문하는 외국인 의료관광객을 대상으로 성형·미용·건강검진 서비스를 제공하는 외국 의료기관’이라고 명시돼있고, 같은 해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보건복지부 장관으로부터 사업계획을 승인받았다. 

정부가
적극 주도

2017년에는 녹지국제병원 건물 착공·준공 후 진료과목을 ▲성형외과 ▲피부과 ▲가정의학과 ▲내과로 외국 의료기관 개설허가 신청을 했다. 하지만 제주도민들은 영리병원 개설에 부정적이었다. 여론조사 결과 제주도민의 10명 중 7명은 영리병원인 녹지국제병원을 반대했다.

이 같은 제주도민들의 의견은 반영됐다. 이듬해 ‘제주도 숙의형 정책개발 심의위원회’가 녹지국제병원 의료기관 개설허가 문제에 대해 의논했다.

의논에도 답이 나오지 않으면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는 ‘숙의형 정책개발’ 절차를 거쳤다. 녹지국제병원은 개설 불허 권고를 받았고, 녹지국제병원은 비영리병원으로 활용될 것을 제시했다.

이후 녹지국제병원은 ‘진료 대상자는 제주도를 방문하는 외국인 의료관광객을 대상으로 함’으로 바꿔 원 도지사로부터 개설허가를 받았지만, 조건부 개설허가 이후 3개월이 지나도록 병원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원 도지사는 의료법 규정을 들어 청문 절차를 거쳐 2019년 4월17일, 병원 개설허가를 취소했다.


유한회사 측에 제주도 보건의료 정책심의위원회 심의 결과와 청문 일정을 보냈다. 심의위 측은 녹지국제병원이 제주특별법상 외국인 투자 비율을 충족하지 못했고, 병원 지분의 50% 이상을 보유한 외국 법인만 가능해 녹지국제병원이 당장 영리병원으로 운영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외국인만?
내국인 포함

수차례 법적 공방 끝에 개설허가 취소 소송은 지난 1월13일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녹지국제병원은 이달 제주도를 상대로 ‘외국의료기관 개설허가 취소 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올해는 녹지국제병원 논란이 발생한 지 벌써 7년째다. 다만 녹지국제병원이 이번 재판에서 최종 승소해도 단기간 내 국내 첫 영리병원이 열릴 가능성이 작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제주도에서 녹지국제병원에 대해 내·외국인 진료를 모두 허가할지 아닐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전문가들은 녹지국제병원이 국내 첫 영리병원으로 운영되면 발생할 문제점들이 많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상황에도 국민들이 의료민영화를 걱정하는 것은 제주도가 2006년부터 꾸준히 영리병원 개설을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2006년에는 ‘제주 메디컬리조트’ 설립을 위한 MOU를 체결했으나 투자가 무산됐다. 2007년에는 PIM(Philadephialnternational Medicine-Management Development)와 MOU를 체결했다. 하지만 설립 부지 미확보, 국내 협력사의 열악한 재무구조 등의 문제로 설립이 무산됐다. 


이런 식으로 2006년부터 2013년까지 제주도는 영리병원 개설을 위해 7번의 양해각서(MOU) 체결 및 사업을 진행했으나 모두 무산됐다. 녹지국제병원은 아직 최종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이 사례까지 합치면 영리병원 개설을 위해 총 8번 시도한 것이다. 

제주도 이외에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 ▲인천 ▲부산 ▲대구 등지에서도 영리병원 도입을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실제 운영된 사례는 없다. 지자체들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리병원 개설을 막은 것은 영리병원이 의료민영화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지난 2일 서울시 종로구에서 개최한 ‘왜 다시 영리병원(투자개방형 병원)인가? 위기의 시대, 영리병원 재점화 논란과 한국 의료위기 토론회’에서는 녹지국제병원을 포함한 영리병원의 문제점을 다방면으로 다뤘다.

변혜진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상임연구위원은 태국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태국은 영리병원을 통해 의료관광을 실시했다. 이후 태국 연 의료비는 10~25% 상승했고 의료에 관한 지역 불균형도 초래됐다.

의료비 10~25% 상승
지역 불균형도 초래

한국과 유사한 의료체계를 가진 일본은 영리병원을 금지하고 공공병원을 비중을 25~30%로 유지하고 있다. 영리병원을 허용한 미국도 의료체계가 OECD 최하위지만 공공병원 비율은 22%다. 반면 한국은 공공병원이 5%밖에 되지 않고 비영리병원의 수익성 추구도 심각한 상황이다. 

결국 공공병원이 확보된 미국도 영리병원의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는 만큼, 공공병원 확보가 부족한 한국에 녹지국제병원이 생기면 문제가 더 심각할 수밖에 없다.

변 위원은 “영리병원을 허용하면 의료비 폭등, 지역 병원 폐쇄, 건강보험 재정 고갈 등 미국식 의료민영화로 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영리병원과 의료민영화는 정부가 추진한다고 밝혔다. 2007년 삼성경제연구소는 ‘의료서비스산업의 고도화와 과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는 의료민영화를 위한 주요 과제로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 ▲민영보험 활성화 ▲영리병원 허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민영보험은 미국식 관리 의료형 민간의료보험이라고 주장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2010년에도 개인의료정보 데이터베이스화와 환자 정보 공유 등 의료정보화, 건강관리 서비스 등 예방산업 육성을 추진해야 한다고 지목했다.

당시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는 임기 내 이를 그대로 시행했다. 문재인정부는 박근혜정부 정책을 이어 보험회사 건강관리 서비스 합법화를 추진했고, 보험회사가 병원을 통제해 의료제공자로서 해야 할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게 됐다.

변 위원은 “즉각 영리병원 도입을 허용하는 법을 개정해 우회적 영리병원 도입 및 의료민영화 추진을 막아야 한다. 또 공공병원을 대폭 확충해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는 공공의료 및 의료공공성 강화 정책을 추진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서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기획국장도 영리병원의 문제점을 언급했다. 영리병원은 보건의료 데이터를 원하는 기업들이 공적 통제에서 벗어나 데이터 수집과 집적화를 쉽게 이룰 수 있는 수단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 

현재 기업은 웨어러블 디바이스 등의 라이프로그 정보 수준만 접근할 수 있다. 개인의 의학적 과거력과 검사 결과 및 처방 내용은 병원에서 발생하고 축적되는데, 영리병원이 허가되면 경영진의 판단에 따라 데이터를 의료기관 밖에서 상업적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위협받는
국민건강

이 국장은 “우리나라는 의료자원의 절대 다수를 민간이 공급하고, 영리적 의료행위가 용인되는 상황이다. 여기서 영리병원을 허가하면 국민의 생명이 상품으로 전락할 것”이라며 “과도한 의료화로 상업적인 낭비 의료가 증가할 것이고, 국민건강 수준은 향상되지 않는 가운데 높은 의료비를 부담해야 할 것이다. 검증되지 않은 인공지능이 의료인력으로 대체되면서 환자 안전과 국민건강을 위협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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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