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닮은' 화천대유-BBK 평행이론

적도 아군도 없는 ‘노다지 스캔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우리나라에서는 5년에 한 번 ‘대선’이라는 전국 단위의 큰 장이 선다. 오일장 한구석 투전판에서처럼 공격과 방어가 난무하는 전쟁터다. 각 정당의 대표 선수는 상대 선수에 대한 의혹을 무기 삼아 싸움에 나선다. 단판 승부인 만큼 불거지는 의혹의 파급력은 나라를 뒤흔드는 수준이다.

20대 대선이 5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정치권은 일찌감치 대선정국에 접어들었다. 현재 여야 모두 대선 최종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을 치르는 중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오는 10일, 국민의힘은 다음달 5일 대선후보를 결정짓는다. 양당의 후보가 확정되면 그때부터 진검승부가 펼쳐진다. 

지지율 전쟁
의혹들 난무

대선은 5년 동안 권력을 잡기 위한 후보들 간의 공성전이다. 땅따먹기 게임에서 한 사람이 땅을 많이 차지하면 다른 사람의 몫이 줄어들 듯 지지율 역시 마찬가지다. 한 후보가 오르면 상대 후보의 지지율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다자구도가 아닌 양자구도일 경우엔 그런 현상이 좀 더 뚜렷하다. 

후보들은 자신의 지지율을 올리는 것만큼이나 상대의 지지율을 낮추는 데 골몰한다. 대선 기간 동안 후보를 비롯한 측근, 가족, 지인 등에 대한 의혹이 폭발적으로 불거져 나오는 이유다. 이 과정에서 의혹을 해명하는 후보의 대처 능력이 검증된다.

위기관리 능력이 부족해 의혹이 확산되면 투표일까지 꼬리표를 떼기 어렵다.


최근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둘러싼 의혹이 불거졌다. 이 지사가 성남시장 시절 추진한 ‘대장동 개발사업’을 두고 관련 의혹이 터져 나오고 있는 것. 문재인정부 임기 내내 국민이 민감하게 반응한 부동산 문제가 대선을 코앞에 두고 터지면서 관심이 집중되는 모양새다. 

대장동 개발사업은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210번지 일원에 5903세대의 공동주택 등을 신축하기 위한 92만㎡(약 28만평)의 택지를 개발하는 사업과 이에 연계해 구 시가지에 위치한 수정구 신흥동의 구 제1공단 5만6000㎡(약 1만7000평) 부지를 공원화하는 사업이 결합된 1조5000억원 규모의 민관공동 도시개발사업이다. 

대장동 개발사업이 현재의 형태로 진행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2005년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공영개발로 진행되던 대장동 개발사업은 2010년 6월 민간 개발로 전환됐다. 같은 해 성남시장이 된 이 지사는 사업을 공영 개발로 재전환했다. 

하지만 1조원이 넘는 막대한 투자자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성남시도 대규모 개발사업을 진행해본 적이 없었다. 결국 사업은 민관공동개발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이른다. 성남시는 위험 부담을 더는 대신 상당한 수준의 개발수익을 환수할 수 있는 방식을 취한 것.

1조 규모 대장동 개발사업
민간으로 4000억 흘러갔다

실제 성남시는 5503억원에 달하는 수익을 환수했다. 문제는 민간 사업자들이 챙긴 4040억원의 개발이익이다. 대장동 개발사업에 참여한 민간사업자들은 출자금의 수천배에 달하는 배당 이익을 챙겼다. 4000억원이 넘는 개발 수익이 민간으로 흘러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관련 업체들에 대한 특혜 의혹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업체들이 ‘성남의뜰’ ‘화천대유’ ‘천화동인’ 등이다. 성남시는 대장동 개발사업 추진을 위해 성남도시개발공사(이하 성남도시공사)를 설립했다. 성남도시공사는 시중은행들과 함께 납입자본금 50억원 규모의 특수목적법인(SPC)을 만들었는데, 바로 성남의뜰이다.


여기에 자산관리회사로 화천대유가 들어왔다. 천하동인 1~7호는 화천대유의 자회사다.

화천대유는 성남의뜰에 1%의 지분을 갖고 있다. 성남의뜰이 지난 3년 동안 전체 주주에게 배당한 금액은 5903억원. 이 중 68%인 4040억원이 화천대유로 흘러 들어갔다. 화천대유와 천하동인 1~7호의 개인투자자 7명이 대장동 개발사업에 투자한 돈은 3억5000만원으로, 8개사의 지분을 모두 합하면 7%다.

이들이 전체 배당금의 70%에 가까운 돈을 받은 셈이다. 특혜 의혹이 불거진 대목이다. 여기에 화천대유와 천하동인 관련자들의 면면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대장동 개발사업 문제는 게이트로 번질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전직 언론인이자 화천대유 대주주인 김만배씨, 유동규 전 성남도시공사 기획본부장, 천하동인 4호 실소유주 남욱 변호사, 화천대유 고문 권순일 전 대법관, 아들이 화천대유에서 50억원의 퇴직금을 받은 사실이 알려져 탈당한 무소속 곽상도 의원 등 정치권, 법조계 등에서 다양한 인물이 튀어나오는 중이다.

막대한 이익
특혜 있었나?

그러면서 화천대유 실소유주 논란이 불거졌다. 실제 언론보도를 통해 화천대유 의혹이 나온 직후부터 “화천대유는 누구 겁니까”라는 말이 정치권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201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을 겨냥해 유행했던 “다스는 누구 겁니까”라는 말의 패러디다.

일각에서는 화천대유 의혹이 ‘제2의 BBK’ 사건이라고 분석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BBK 주가조작 사건은 17대 대선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를 상대로 불거진 의혹이다. 1999년 설립된 투자자문회사 BBK가 옵셔널벤처스의 주가를 조작한 사건으로, 이 전 대통령이 개입돼있다는 의혹이 나오면서 그해 대선판을 뒤흔들었다. BBK에 거액을 투자한 자동차 부품회사 ‘다스’의 실소유주 논란이 불거진 것.

▲의혹 제기 시점 = 화천대유 특혜 의혹과 BBK 사건은 모두 대선 경선 과정에서 나왔다. 화천대유 의혹은 민주당 경선 도중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졌고, BBK 사건은 17대 대선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당시 상대 후보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 측이 제기했다. BBK 사건은 17대 대선의 가장 큰 이슈로, 선거 이후에도 이 전 대통령을 따라다녔다. 화천대유 의혹은 현재 대선정국을 완전히 잠식하며 확산되고 있다. 

▲유력 대선후보 연루 의혹 = 두 사건 모두 유력한 대선후보가 연루돼있다는 의혹으로, 그 파급력이 상당하다. 화천대유 의혹은 이 지사가, BBK 사건은 이 전 대통령이 중심에 있다. BBK 사건이 언급되던 시점에 이 전 대통령은 당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었다.

당시 대선 구도는 한나라당 경선이 곧 대선이라고 할 정도였기 때문에 후보들 간의 다툼이 치열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정권교체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지지세가 강했기 때문.

“무관하다”
진실은?


화천대유 의혹은 이 지사가 성남시장 시절 일어났다는 점, 관련 인물들이 이 지사와 연관돼있다는 의혹이 불거진 점 등에서 화살이 한 사람을 향하고 있다. 국민의힘에서는 화천대유 사건을 ‘이재명 게이트’라고 주장하면서 맹공을 퍼붓고 있다.

이 지사는 논란이 나온 직후부터 줄곧 사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국민의힘 게이트’라고 역공 중이다. 

이 지사와 이 전 대통령 모두 해당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이 전 대통령은 2000년 당시 공개 강연에서 자신이 BBK를 직접 설립했다고 말하는 동영상이 공개된 바 있다. 해당 동영상은 2007년에 알려졌다. 이 지사는 지난달 14일 대장동 개발사업에 대해 “사실 이 설계는 제가 한 겁니다”라고 말했다.

해당 발언 역시 화천대유 의혹이 불거지기 전에 나왔다. 

▲개인 vs. 지자체 = BBK 사건과 화천대유 의혹은 ‘누군가’ 이득을 봤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성격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연루된 인물의 수 등을 두고 봤을 때 화천대유 의혹이 BBK 사건보다 훨씬 광범위한 사건으로 보여진다. BBK의 경우 이 전 대통령의 사업파트너 김경준이라는 인물이 존재했지만 사기업에서 진행한 일이었기에 그 범위가 넓지 않았다. 

하지만 화천대유 의혹은 대장동 개발사업이 민관공동개발로 진행됐기 때문에 기업, 은행, 시행사 등이 존재하는 것은 물론 성남도시공사라는 ‘관’이 함께 엮여있다. 여기에 BBK 사건에서 이 전 대통령은 철저한 수비 위치였고, 당시 여당이었던 대통합민주신당은 공격 포지션을 취했다. 


다시 도는 “누구 겁니까”
특검 수용 두고 엇갈린 선택

반면 화천대유 의혹은 연루된 인물의 면면이 여야를 넘나들고 있다. 국민의힘 소속이었던 곽상도 의원의 아들 논란이 불거졌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맡았던 박영수 전 특검은 딸 논란에 휩싸였다. 여당과 야당이 해당 의혹을 두고 서로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피해자 vs. 수혜자 = BBK 사건은 주가조작이 이뤄지면서 상당한 피해자가 나왔다. 실제 피해자만 5000여명이 넘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 2018년 다스의 실소유주가 이 전 대통령으로 밝혀지는 과정에서 앞서 2017년 10월 피해자들의 고발이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의 소송이 없었다면 다스 실소유주 논란은 그대로 묻혔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반면 화천대유 의혹은 현재까지는 이득을 본 사람들 위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수천억원의 배당이익이 일부 사람들에게 몰리면서 그 배경이 관심사로 떠올랐다. 수천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의 흐름이 화천대유 의혹의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특검 vs. 안 돼 = 화천대유 의혹이 터지면서 특검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야당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최근에는 여당 내에서도 특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 지사 측은 특검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지사 측은 특검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면서도 정부 특별합동수사본부를 만들자는 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의 주장에 대해서는 환영의 뜻을 보였다. 야권 대선주자들은 이 지사가 특검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이재명 지사의 특검 거부는 범죄 연루 자인이자 자가당착”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BBK 사건 당시 이 전 대통령은 검찰 조사를 받았고, 이후 특검도 수용한 바 있다. 대선 기간 동안 BBK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이 전 대통령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여론이 들끓자 이 전 대통령은 대선 투표일 사흘 전 특검 수용 입장을 발표했다.

이 전 대통령 당선 이후 BBK 특검이 이뤄졌지만 이듬해 2월 역시 무혐의 처분이 났다. 당시 검찰과 특검이 이 전 대통령에게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을 받았다.

▲감옥 vs. ? = 지난해 10월 대법원은 이 전 대통령의 다스 자금 횡령과 삼성 뇌물 등의 혐의에 대해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다스가 이 전 대통령의 것이라고 인정했다. 2007년 처음 의혹이 제기된 이후 검찰, 특검 수사에서 법망을 피해갔던 이 전 대통령이 13년 만에 단죄를 받은 셈이다.

사정기관
결론낼까?

반면 화천대유 의혹은 고구마 줄기 이어지듯 사건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향후 상황을 예측하기 어렵다. 특히 대선을 불과 5개월 앞둔 시점에 불거진 의혹이라 사정기관의 움직임에도 의문부호가 붙는다. 일각에서는 어떤 식으로라도 의혹이 봉합되지 않을 경우, 대선 투표일까지 화천대유 의혹이 언급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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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