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사한’ 아베의 노림수

다같이 죽자고? ‘막장 가미카제’

[일요시사 정치팀] 설상미 기자 = 한국과 일본은 오월동주(舟) 관계다. 양국의 상호 의존도가 높아 상대를 겨눈 칼의 끝은 필연적으로 본인을 향한다. 그럼에도 최근 양국 간 갈등은 끊이질 않고 있다. 과거에도 하루아침에 파국을 맞는 경우는 흔했지만 이번 갈등은 과거와 달리 더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아베정부는 왜 툭하면 한국을 때릴까.
 

▲ 문재인 대통령(사진 오른쪽)과 아베 일본 총리

지난 1일 일본은 ‘한-일 신뢰관계 손상'을 명분으로 화이트리스트(전략물자 수출 시 통관절차 간소화 혜택을 주는 안보상 우호국가)서 한국을 제외하는 시행령 개정 계획을 발표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대법원의 첫 배상 판결이 나온 지 8개월이 되는 시점으로, 일본 최대 공영방송사인 NHK는 이 발표의 배경을 강제징용 판결을 둘러싼 갈등으로 보도했다.

반한 감정↑
보수 결집?

하지만 이번 수출규제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터질 게 터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일본은 손바닥 뒤집 듯 한국의 수출규제 이유를 바꿨다. 처음엔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다. 이에 정치적 동기에서 빚어진 '경제 보복'이라는 여론의 비판이 일자, 한국 정부가 북한에 전략 물자를 밀반입한다는 이유로 안보상 수출규제를 강화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바른미래당 하태경 의원이 일본이 북한에 밀반출한 전략물자 목록을 밝히자, 일본은 수출규제가 아닌 수출관리 운용을 재검토하는 차원이라며 다시 말을 바꿨다.


일본 측 주장의 논리가 빈약하다는 점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일본은 배제 이유로 한국의 캐치올(Catch-all) 규제가 미흡하다는 점을 내세웠다.

캐치올이란 수출 ‘통제 리스트’에 속하는 전략물자 품목은 아니지만, 최종 사용자와 용도를 파악해 무기 제작 개발에 전용될 것으로 확인되거나 우려되는 경우에 이뤄지는 수출 통제 제도다. 하지만 국가별 적용은 오히려 한국이 일본보다 더 엄격하게 운영하고 있으며, 통제 대상 품목 역시 일본과 유사하다. 캐치올 규제가 없는 국가도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대상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일본이 한국에만 차별적 규제 강화를 강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산업에선 양국의 상호의존도가 높아, 일본의 수출규제가 강화되면 양국 모두 손실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한일 무역 갈등이 장기화될 경우, 승자가 없는 치킨게임으로 치닫아 양국 모두 경제적 손실이 불가피하단 것이다.

만약 한국이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되면, 전략물자는 무기로 쓰일 수 있는 품목마다 개별허가를 받아야 하고 민간 물자엔 캐치올 규제가 적용된다. 캐치올 규제의 경우 품목에 제한이 없다 보니 일본 정부가 임의로 규제를 확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왜 툭하면 한국 때리나
한일 갈등 진짜 이유는?

일본의 경우는 향후에 수출규제를 철회한다고 해도 비즈니스 신뢰 관계 회복에 더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일본은 정치적 사안을 경제 문제로 치환시켰고, 이번 경제규제는 일본 외교의 불안 요인을 분명히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일본의 수출규제는 지난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로 인한 보복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사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한일 분쟁의 뿌리는 1965년 6월2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산업화를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1개의 한일기본조약과 4개의 한일청구권협정에 서명해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이뤘다.
 

▲ 문재인 대통령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는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선언한다”고 명시했다.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로 불리는 병합조약을 포함, 한일 간 체결한 모든 조약을 무효화함으로써 강제징용과 군 위안부 등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청산하고자 한 일본의 속내였다.

여기서 ‘이미’라는 부사어에 주목해야 한다. 일본은 이미라는 부사어를 통해 과거엔 ‘합법·유효’했지만, 일본의 전쟁 항복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등으로 1965년 현재는 무효가 됐다는 해석을 내놨다.

이는 “무효임을 선언한다”는 구절을 통해 여러 조약들은 체결 당시부터 ‘불법·무효’였다는 한국의 입장과 대척점에 있다. 조약의 열린 해석으로 인해 과거사 책임에서 벗어난 일본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현재까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배의 정당성 판단을 유보한 대가로 박 전 대통령은 3억달러의 무상 자금과 2억달러의 차관을 일본으로부터 제공받았다. 이 돈의 대부분은 국가사업에 쓰였고, 군 위안부와 같은 역사의 피해자들에게는 돌아가지 않았다. 이후 대한민국은 한일협정이 잉태한 불안 위에서 고도 성장국의 길을 걷게 됐다.

지난 2005년 한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 등은 한일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며 기존 견해를 수정했다.

두려운 건
재팬 패싱

2012년 5월 대법원은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도 포기되지 않았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지난해 11월 대법원은 더 나아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하고, 전범기업 미쓰비시 측에게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위자료 1억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 과정서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청구권협정에 이를 포함시키겠다는 내심의 의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애초부터 한일협정으로 지급한 정치적 ‘보상’은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에 아베 총리는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확인된다’는 한일협정 제2조를 근거로 한국정부가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베정부도 한일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고노 다로 외무상도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공식적인 자리서 인정한 바 있다. 다만 일본은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어도 ‘외교적 보호권’은 상실했다는 논리로 맞섰다.

개인에게 소송할 자유가 있어도 그 권리를 정부가 외교적으로 보호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판결을 찬성해 온 일본 변호사 자이마 히데카즈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서 "개인 청구권이 있는 사람이 민간 기업을 상대로 제기를 했을 때 이에 대해서 국가 간 협정으로 모든 것이 끝났으니 개인이 권리를 가지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맞지 않는 이야기"라며 반박했다.

이어 "개인 청구권이 존재하고 그 권리가 있다면 법원에선 소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이라며 "권리를 법원이 인정해서 진행을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문제가 없는 것인데 국제법 위반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할 텐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저희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라 덧붙였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 측에게 위자료 지급을 선고해 일제의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정조준했다. 고노 다로 외무상은 “판결은 폭거이며 국제법에 기반을 둔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이라며 강하게 반발, 강제징용 문제 중재위 설치를 요구했다.

손바닥 뒤집듯
이랬다 저랬다

한국정부는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사법부 판단에 행정부가 개입할 수 없는 점을 들어서 일본 쪽 요구를 거부했다.

민주당의 내부 분열로 2012년 중의원 선거서 자민당이 압승하면서 아베총리는 지금까지 총재직을 연임하고 있다. 1955년 보수정당인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만들어진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일본 정치사서 안정적인 집권을 해왔다. 아베 총리는 일본 내 온건 보수보다 더 강경한 입장을 가진 우익 세력을 등에 업고 있다.


아베 총리가 위안부 문제를 인정한 ‘고노 담화’를 부정하며 역사 수정주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비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가적 정체성 강화는 자민당의 집권 열쇠인데, 과거사에 대한 한국의 압박은 일본이 근간을 다시 바로 잡아야하는 과정으로 아베 세력을 흔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아베 총리는 일본 최고의 정치 명문가 출신으로 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기시는 태평양 전쟁의 A급 전범으로 미국의 강요로 만들어진 평화헌법 개정에 강한 염원을 보였다. 평화헌법 9조는 국가 간의 분쟁 해결수단으로 전쟁과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아베 총리는 이 조항의 개헌을 정치 인생의 숙명적 과제로 꼽았다.

일부 언론은 이번 수출규제를 참의원 선거를 위한 보수 결집 수단으로 분석했다. 지난 22일에 있었던 참의원 선거는 평화헌법 개정 발의에 가능한 의석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선거였다. 비록 개헌 추진에 필요한 3분의 2(164석)에 못 미치는 160석에 그쳐 개헌 행보에는 브레이크가 걸렸지만 과반을 확보했다.
 

▲ 아베 일본 총리

강제징용 판결로 인해 반한 감정이 악화된 상태서 보수 세력을 결집시켜 쏠쏠한 재미를 봤다는 분석이다. 아베 총리는 앞으로도 개헌 의석 확보를 위한 정치적 동력으로 ‘한국 때리기’ 카드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반면 일각에선 수출규제는 애초부터 선거용이 아니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아베 총리는 ‘아베노믹스’를 통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되찾았다는 좋은 평가를 받으며 안정적인 지지율을 얻고 있다. 특히 20대 유권자들 중 70%가 아베 총리를 지지하고 있다.

수출규제라는 자기 파괴적 보복 카드를 꺼낼 만큼 아베가 궁지에 몰린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의원 선거가 끝난 당일 아베 총리는 “청구권협정 위반 상황에 제대로 된 답변을 가져오지 않으면 건설적인 논의가 안 될 것”이라며 단편적인 선거용 꼼수가 아님을 시사했다.

잘못 끼워진 첫단추
승자 없는 치킨게임


또 다른 전문가들은 일본의 경제보복은 한국을 경제 분야서 굴복시킴으로서 '재팬 패싱'을 극복하려는 외교용이라는 분석을 냈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시행령 개정 계획은 지난 G20 직후 남·북·미 판문점 3자 회동이 있고 난 이틀 후에 발표됐다. 아베정권의 외교정책은 기본적으로 북한과 중국을 견제하고 미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기반으로 한다. 일본은 지금까지 한·미·일 공조하에서 한국과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따로 발휘하며 동북아서 패권을 쥐었다.

하지만 문재인정부 출범 후 남북 관계가 평화 기조로 들어서면서 비핵화 문제서 일본만이 철저하게 배제됐고, 아베정권은 이에 계속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왔다.

그밖에도 일본이 반도체 산업서 한국을 강력히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동아시아 기술 경쟁서 한국에 우위를 빼앗기지 않기 위한 고육책이라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5일 “일본의 조치가 한국 경제의 핵심 경쟁력인 반도체 산업을 정면으로 겨냥했다”며 “우리의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것이 의도라면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아베 총리가 보수층 결집용으로 강한 카드를 꺼냈지만, 일본 내부서도 지나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며 갈등의 장기화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여러 복합적 요인이 얽힌 한일 갈등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우선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수습을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지난 22일에 열렸던 ‘한일관계 악화, 해법은 무엇인가’ 토론회서 박인환 변호사는 “지금 문제시 되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 문제는 정치적, 외교적 해결 방안으로 제3국 중재위원회 구성해 절차를 시도하는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전쟁이나 식민지 지배와 관련해 국가 상호 간 강제동원의 불법성을 상대방 국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국제사법재판소 등 국제적, 중립적 재판기구에 의한 판단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타 오사무 도시샤대 교수는 “한일협정 2조는 일본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개정이 어려운 문제”라며 양국 간의 역사인식을 좁히기 위한 양국 사회의 노력이 필요함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어 이번 분쟁을 통해 국산화의 필요성이 더욱 제기된 만큼 이를 계기로 국내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부품·소재 산업을 육성해 기술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일본 의존도가 높은 산업구조를 탈피해 한국이 일본 경제를 뛰어넘자는 것이다.

양국 관계
돌이킬 수 없나

무엇보다 한일 무역 전쟁은 양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분쟁으로, 이를 끝내기 위해선 평화 파트너십을 구축해 양국의 입장차를 좁히려는 외교적 노력이 절실해 보인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우리 정부가 일본의 수출규제를 반대하고 철회를 요청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지금과 같이 반일감정만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으므로 ‘백색국가리스트 조정 최종 각의결정’을 연기하도록 일본에 제안하고 양국 간 공식 논의 채널을 가동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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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빅텐트 타령 국민의힘, 왜?

또 빅텐트 타령 국민의힘, 왜?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이 당심 반영 비율을 늘린 지방선거 경선 규칙을 발표했다. 이어 장동혁 대표를 필두로 지방선거 전략으로 ‘반명 빅텐트론’을 지난 대선에 이어 또 거론했다. 국민의힘이 6년째 내리 실패한 전략을 또 끌고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의힘이 지난달 25일 지방선거 경선 규칙을 발표했다. 국민의힘 지방선거 총괄기획단 대변인을 맡은 조지연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진행된 기획단 회의 후 “내년 지방선거 경선에서 당원투표 비중을 기존 50%에서 70%로 늘리기로 했다”고 밝혔다. 민심보다 당심으로? 국민의힘 지방선거 공천은 당원투표 70%와 국민 여론조사 결과 30%가 혼합돼 결정된다. 만 44세 이하 청년은 가점을 부여받고, 여성 신인은 만 45세 이상이어도 가산점이 부여된다. 광역의원 비례대표 후보자는 청년 인재 오디션을 거쳐 선출해 최우선 순위로 당선권에 배치할 예정이다. 지난 2022년 지방선거 당시 국민의힘 대표였던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시행했던 공직 후보자 기초 자격 평가는 기초자치단체장·기초의원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다. 국민의힘 지방선거 총괄기획단장은 5선 나경원 의원이 맡고 있다. 나 의원은 서울시장 출마 후보군 중 1명으로 거론된다. 현 시점에선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로 오세훈 서울시장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일각에선 “나 의원이 사심 때문에 경선 규칙을 정한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대중적 인기는 높지만, 당내 기반은 약하다”는 평가로부터 비롯되는 의심이다. 새로 정한 경선 규칙에 대해선 당내에서도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던 김용태 의원은 지난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내년 지방선거를 시작으로 실질적인 수권 전략을 실현하려면, 공직선거 후보자 선출 규칙은 국민경선 100% 제도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도 같은 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비판했다. 윤 의원은 “민심이 곧 천심이고, 민심보다 앞서는 당심은 없다”며 “민의를 줄이고 당원 비율을 높이는 것은 민심과 거꾸로 가는 길이고, 폐쇄적 정당으로 비칠 수 있는 위험한 처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최근 사법부 압박 논란과 대장동 항소 포기 문제까지 있었는데도 우리 당 지지율은 떨어지고 여당 지지율이 오르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며 “여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성찰과 혁신 없이 표류하는 야당에 대한 국민적 실망이 더 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갤럽이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정당 지지도 여론조사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지지율은 43%였고, 국민의힘의 지지율은 24%였다. 지난 7월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만 18세 이상 100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전화 면접 여론조사 당시 국민의힘 지지율이 19%를 기록했던 것에 비하면 높지만, 두드러진다고 보긴 어렵다. 내부 비판 이어지는데 당심 비중↑ 비상계엄 사과 두고도 ‘옥신각신’ “국민의힘의 지지율이 당분간 크게 오르긴 어렵다”는 일각의 예측도 있다. 다음 달 3일은 비상계엄 1주년이라서 윤석열 전 대통령의 재임 중 실정과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불참 ▲윤 전 대통령 체포 저지 시도 ▲심야 대선후보 교체 시도 등 지난 1년 동안 국민의힘이 여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행보들이 다시 주목받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국민의힘 일부 소장파 의원들은 비상계엄 사과 등을 통한 윤 전 대통령과의 확실한 절연을 요구하고 있다. 국민의힘 박수민 의원은 지난 24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좀 더 명확한 메시지를 낼 필요가 있다는 얘기가 당내에서도 나온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역사와 국민 앞에 누군가 사과해야 할 상황이고, 국민의힘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예측할 수 없었던 돌발적인 계엄이 있었고, 탄핵에 이어 정권을 잃은 후 국정의 주도권을 넘겨줬다”고 강조했다. 반면 같은 당 김재원 최고의원은 같은 달 26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일회성 사과로 과거의 잘못을 끊어내고 새로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사과를 자꾸 하는 것은 오히려 현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어떤 정치를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며 “사과하는 것보단 앞으로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는 게 더 낫다”고 역설했다. 장 대표도 부정적인 의견을 밝히고 있다. 그는 같은 달 25일,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한 후 “사과 메시지를 내는 것은 지금 말씀드릴 단계는 아닌 것 같다”며 “국민의힘이 지금 싸워야 할 대상은 무도한 이재명정권과 의회 폭거를 이어가는 민주당”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구미역 광장에서 진행된 민생 회복·법치 수호 경북 국민대회에 참석해 “저들이 똘똘 뭉쳐 우리를 공격하고 손가락질할 때, 우리가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비판하는 게 부끄럽다”고 목소리 높였다. 그러면서 “대한민국과 자녀 세대를 위해 소리치는 우리가 아스팔트 세력이라고 손가락질당하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나라가 쓰러져가는데도 한마디도 못하는 게 부끄러운 것”이라고 강조했다. 해당 발언은 “사과해야 한다”는 일부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풀이된다. 돌발적인 계엄이다? 이재명 대통령·민주당에 대한 투쟁을 강조하는 장 대표의 주장은 빅텐트론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나 의원도 지난 1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 대통령과 민주당을 비판하면서 “국민의힘은 네 탓 공방을 벌이면서 분열에 빠져 있다”며 “정당의 뿌리를 흔드는 내부는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하나로 뭉쳐 민주당의 독재 완성 계략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고 했다. 국민의힘에선 각종 선거와 정국에 대응할 때마다 빅텐트론이 거론됐다. 시작은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 재임했던 지난 2019년이다. 이듬해엔 “각 정당·정파가 참여하는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모든 자유민주 세력과 손을 맞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 전 대표는 “통합 없이는 절대 이길 수 없단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며 “이 나라를 망치려는 사람들은 통합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황 전 대표가 주장했던 빅텐트론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란 헌법 가치를 공유한다면, 태극기 세력부터 중도 보수 인사까지 아우른다”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을 토대로 자유한국당은 미래통합당으로 바뀌었다. 황 전 대표는 제21대 총선 패배 후 물러났다. 이 대표는 빅텐트론에 일관적으로 반대하면서 세대 포위론을 토대로 지난 2022년 대선을 지휘했다. 지난 6월 대선에 출마했던 이 대표는 국민의힘 등 보수 각계로부터 후보 단일화 요구를 받았다. 이 대표는 당시에도 국민의힘 등에서 주장했던 ‘반명 빅텐트론’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대선을 완주했다. 일각에선 국민의힘의 빅텐트론을 놓고 “혁신 요구가 나올 때마다 제기되는 주장”이라고 비판한다. 빅텐트론의 핵심은 통합이다. 통합은 정치권에서 반대 계파·의견을 억압하는 수사로 활용되는 예가 잦다. 빅텐트의 핵심은 조정 능력이다. 여기엔 다양한 계파·의견을 조율해 갈등을 최소화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장 대표는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체제 전쟁 깃발 아래 모일 수 있는 모든 우파가 함께 모여서 이재명정권이 사회주의 독재체제로 가려는 걸 막기 위해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주장하는 ‘체제 전쟁’의 근거는 ▲검찰의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 ▲민주당의 배임죄 폐지·대법관 증원 시도 등이다. 장 대표는 공식적으로 국민의힘과 관계없는 황 전 대표가 지난 12일 내란 선동 혐의를 받아 내란 특검에 의해 체포되자 “우리가 황교안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어지는 재탕 삼탕 이어 “국민의힘만으로 이재명정부·민주당과 싸우긴 어렵다”며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주도하는 자유통일당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주도하는 자유민주당 ▲새누리당 조원진 전 의원이 주도하는 우리공화당 ▲황 전 대표가 주도하는 자유와혁신 등을 연대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들은 모두 부정선거론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에 반해 개혁신당과 이 대표는 부정선거론을 강하게 비판한다. 장 대표가 주장하는 빅텐트론은 김문수 전 대선후보 등이 주장했던 빅텐트론과 큰 차이가 없다. 당시 김 전 후보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이기기 위해선 어떤 경우든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한덕수 전 총리 ▲황 전 대표 ▲이낙연 전 총리 ▲이 대표 등을 통합 대상으로 지명했다. 권성동 당시 원내대표는 김 전 후보·한 전 총리의 단일화를 지지하면서, 당시 당내 주류와 불화했던 국민의힘 김상욱 당시 의원(현 민주당 의원)에게 “스스로 거취를 결정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장 대표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에게 당원 게시판 의혹 관련 압박을 가한 것과 비슷하다. 당시 권 전 원내대표는 “당원 대부분은 민주당 이 후보에게 대항하기 위해선 반명 빅텐트가 필요하단 의견을 갖고 있다”며 “지도부는 당원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는 부정선거론을 주장하는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연대를 주장하면서, 개혁신당과의 연대설도 공개적으로 부정하진 않는다. 일각에선 “오 시장이 장 대표·이 대표의 가교 역할을 한다”고 관측하고 있다. 오 시장은 지난 9월 “개혁신당과의 연대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 이후 꾸준히 개혁신당과의 연대를 주장하고 있다. 이후 정치권 일각에선 “오 시장이 서울시장으로 다시 출마하고, 이 대표가 경기도지사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하면 수도권에서 보수 진영이 선전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다. <미디어토마토>가 지난달 28일부터 이틀 동안 서울특별시 거주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무선·ARS 방식으로 진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오 시장은 보수 진영에서 민심 27.5%·당심 50.3%의 지지를 얻어 서울시장 후보 중 가장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민주당이 서울시장 후보를 선출한 후 ‘여당 프리미엄’을 앞세워 오 시장에 대한 공세를 이어간다면, 재선을 장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국민의힘이 중도층의 민심을 끝내 얻지 못하면, 오 시장으로선 힘겨운 선거가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체제 전쟁” 명분으로 사과 거부 홍 “국힘은 보수 참칭 사이비 레밍” 당내에서도 나 의원 등 막강한 경쟁자가 있어 본선행을 확실하게 장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대표는 지난달 23일 “국민의힘 내부에서 변화·쇄신 목소리가 전혀 안 나온다”며 “연대를 함께할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국민의힘은 지난 대선에 이어 1990년대식 ‘뭉치면 이긴다’ 구호만 내세운다”며 “그 전략으로 패배한 사람은 황 전 대표였는데, 같은 선택을 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길 기대하는 건 이해가 안 간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내부에도 연대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국민의힘 지도부에서 강경 보수의 주장을 가장 강하게 내세우는 김민수 최고위원은 같은 달 25일, 채널A 유튜브 채널 ‘정치시그널’에 출연해서 “이 대표는 당내 많은 분쟁을 가져온 사람이라서 화합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며 “개혁신당과의 연대는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김 최고위원의 주장은 오 시장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해석되고 있다. 김 최고위원은 “개혁신당은 보수 정당인지, 진보 정당인지 모르겠고, 그 사이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저는 최고위원이 되기 전부터 우측으로의 연대를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대선은 기동전·총력전 성격이 강한 반면, 지방선거는 진지전 성격이 강하다. 선거의 성격이 다르지만, 국민의힘에선 똑같이 ‘반명 빅텐트’라는 구호를 거론하고 있다. 역사엔 위기 상황에서 변화를 거부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맞이한 사례가 다수 기록돼있다.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이 그 집단을 주도할 때, 이 사례는 더욱 빈번하게 재현된다. 중국 청나라에선 수구파를 이끌던 서태후가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하던 광서제에게 반대해 정변을 일으켜 성공한 후 광서제를 유폐했다. 중국 정부가 지난 2008년 광서제의 능을 공식 발굴 조사한 결과, 광서제는 급성 비소 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어 3세 나이로 즉위한 청나라 황제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의 주인공인 선통제다. 선통제는 영화 제목 그대로 마지막 황제였다. 광서제의 개혁 시도는 청나라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취사 선택해 그 정보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불리한 정보는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성향을 확증편향이라고 한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지역구 관리에만 능하고, 기득권·이익 추구에만 관심을 두는 의원들이 당을 주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언더 찐윤’이란 집단이 거론된다. 확증편향 소탐대실 일각에선 국민의힘이 변화·혁신에 거부감을 느끼면서 같은 선택을 반복하는 핵심 이유로 언더 찐윤을 거론한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지난 6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은 이념도 없는, 보수를 참칭한 사이비 레밍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여러 번 선거에서 패배한 전략임에도 확증편향·소탐대실을 근거로 같은 선택을 고집한다면, 무리 지어 절벽에서 떨어지는 레밍과 비교되는 수모를 또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의힘에선 또 빅텐트론이 반복되고 있다. 빅텐트는 국민의힘 주변을 배회하는 유령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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