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 특별대담> 국회의장 문희상에게 변화를 묻다

  • 최현목 기자 chm@ilyosisa.co.kr
  • 등록 2018.09.17 10:46:09
  • 호수 11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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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은 의원답게 국회는 국회답게 “달라지겠습니다”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민족 대명절 추석이 다가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처럼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그간의 안부를 묻는 뜻 깊은 시간이다. 추석이 있는 9월은 ‘국회의 달’이기도 하다. 국회는 지난 3일부터 시작된 100일간의 정기국회 기간 동안 ‘협치’ 가능성을 보여줄 예정이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이번 정기국회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후반기 국회 2년은 첫째도 협치, 둘째도 협치, 셋째도 협치가 될 것이다.” 

지난 7월 후반기 국회의장이 된 문 의장은 취임일성서 이같이 강조했다. 이어 지난 3일 있은 정기국회 개회식서 문 의장은 “이번 정기국회 100일을 민생입법의 열매를 맺기 위한 협치의 시간, 국회의 시간이 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협치의 열쇠를 쥔 문 의장은 <일요시사>와의 대담을 통해 “단 1%라도 국민의 신뢰를 더 얻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노력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의지를 다졌다.

다음은 문 의장과 일문일답.

- 추석을 맞은 국민들께 덕담 한 말씀.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 가고 한 해의 땀과 정성을 수확하는 축복의 계절 가을이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그 어느 해보다 폭염과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가 컸습니다. 더욱이 일자리 문제, 소득 양극화 심화 등 민생의 어려움은 깊어만 가고 있습니다. 

지쳐있는 국민 여러분께 먼저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후반기 국회의장을 맡으며 국민 신뢰 회복을 위해 ‘협치와 통합의 국회’ ‘일 잘하는 실력국회’ ‘미래를 준비하는 국회’를 제시했습니다. 저는 의장 임기동안 단 1%라도 국민의 신뢰를 더 얻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노력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회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국민에게 힘이 되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일 년 중 가장 좋은 계절, 그 한가운데서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을 맞아 국민 모두가 행복하고 넉넉한 한가위 보내시길 바랍니다.


-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보고 어떤 심정이셨는지?
▲지난 8월 제21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1, 2차에 걸쳐 이뤄졌습니다. 전쟁 속에서 헤어졌던 어머니와 아들, 아버지와 딸, 형제와 자매는 65년이 지나서야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재회했습니다. “살아줘서 고맙다”는 말속에는 천륜을 끊어버렸던 전쟁의 비정함과 분단세월의 야속함이 고스란히 묻어있습니다. 

6·25전쟁과 지난 70년의 분단이 애꿎은 사람들의 천륜을 끊어버렸습니다. 이제 정치가 이들의 천륜을 이어줘야 합니다. 결자해지, 한반도의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 정착에 여야 정치권이 뜻을 모아 나갈 수 있도록 국회의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 정치를 시작한 지 40년이 흘렀습니다. 처음에 목표하셨던 일을 많이 달성하셨는지?
▲‘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 이후의 제 삶은 ‘덤’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2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여러 경험이 쌓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선배·동료 의원님들께서 부덕하고 불민하기 짝이 없는 저에게 국회의장이라는 막중한 책무를 맡겨주셨습니다. 국회의장직을 저의 마지막 소임이라 생각하고 정치인생 40년의 경험과 지혜를 모두 쏟아 혼신의 힘을 다해 역사적 소임을 수행하겠습니다.

“첫째도 협치, 둘째도 협치” 강조
정기국회 100일 레이스, 역할론↑

- 40년 정치인생 중 가장 힘들었을 때와 힘이 났을 때를 각각 꼽아주신다면?
▲아마 2009년이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민주정부 1, 2기 10년 동안 쌓아올린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 해에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차례로 서거하셨는데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1997년 대선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화적이고 수평적인 정권교체를 이뤘을 때, 인생에 가장 큰 보람을 느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금도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으로서 온 힘을 다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에 매일 아침 새로운 힘이 나는 듯합니다.  

- 지난 3월 발표된 ‘2017사회통합실태조사’ 신뢰부문서 국회가 꼴찌를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통계청의 ‘2017 한국의 사회지표’ 결과도 마찬가지입니다. 6선 국회의원으로서 이런 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기관신뢰도 조사에서 만년 꼴찌인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국민들께서는 국회를 보고 싸움 좀 그만하라고 할 수 있겠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국회는 싸움을 하는 곳입니다. 국회는 의견이 다른 이익, 계층, 지역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전부 모인 곳이기 때문에 일사불란한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것입니다. 


매일 싸우며 일해야 살아서 펄펄 뛰는 국회가 되는데, 자극적이고 감정적인 막말로 싸우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서로를 타도의 대상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로 논리 대 논리로 싸우며, 서로 상생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신뢰받는 국회 구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삼국지 인물과 연관된 별명을 갖고 계십니다(겉은 장비, 속은 조조). 의장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삼국지 인물 중 자신과 가장 닮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 있다면?
▲저는 별명을 즐기는 편입니다. 정치인이 별명을 갖기가 쉽지 않은데, 다양한 별명을 붙여주시는 것은 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있다는 행복한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부터 저를 보고 겉은 장비, 속은 조조라는 말들을 많이 하시는데 생긴 모습 때문에 장비로 불리는 것은 이제 제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왕 머리가 좋다고 표현해 주시는 것이라면 조조보다는 제갈공명이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17기관신뢰도 꼴찌
“꼭 신뢰받는 국회로”

- 국정감사를 앞두고 있습니다. 각오 한 말씀.
▲국정감사뿐 아니라 정기국회 100일은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국회가 국회다워지는 ‘국회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행정부를 견제하고 비판하는 일은 입법부의 몫이자 입법부 본연의 역할입니다. 
 

특히 국정감사는 상임위별로 피감기관에 대해 현미경 감사를 실시하고 정책현장, 민생현장을 두루 점검한 뒤 그 결과를 예산안 심사와 민생입법 발의·심사에 반영한다는 점에서 국회 활동의 필수절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정감사가 지적과 비판이 난무하는 여야 정쟁의 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편부당한 사항들이 시정되고 제도개선으로 이어지는 ‘정책 검증의 장’으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또한 상임위뿐 아니라 상임위 소위원회도 활성화해 상시적으로 정부정책을 검증·견제하는 상시국회 체계로 갖춰나가야 할 것입니다.

- 곤란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만, 최근 국회 특수활동비(이하 특활비) 폐지 문제로 잡음이 많았습니다. 국민들이 특활비 사용에 분노했던 이유를 어떻게 진단하시나요?
▲저는 국회의장 취임 일성으로 “대명천지에 쌈짓돈이 어디 있고 주머닛돈이 어디 있느냐 이것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특활비라는 예산의 성격상 내역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알고 보면 쓸 수밖에 없었겠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면 이를 바꿔나가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국민의 뜻에 따라 지난 8월16일 특활비 용도에 부합하는 것을 제외하고 전액 폐지를 결정했습니다. 특활비 폐지를 계기로 예산, 인사, 조직운영 등 국회 전반에 대한 개혁을 실천할 것입니다. 이미 의장 직속 국회혁신 자문위원회를 신설했습니다. 그동안의 방만한 운영, 예산 낭비 등을 철저히 살펴보고 바로 잡아갈 것입니다.

- 연내 개헌을 강조하셨습니다. 로드맵은?
▲개헌안을 제안할 수 있는 헌법적 권한에 따라 대통령의 역할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국회가 나서야 합니다. 국회가 합의하면 대통령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제 국회가 할 때입니다. 여야 모두 개헌의 당위성에 공감하고, 각 당 원내대표가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있기 때문에 여당도 야당도 동의할 수 있는 개헌 합의안을 도출하는 데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야가 합의할 수 있는 개헌안 도출을 위해 교섭단체 대표들과 자주 만나 대화하고 독려하겠습니다.

겉은 장비, 속은 조조?
“제갈량으로 불러달라”

- 원내에만 7개 정당이 있습니다. 이들의 협치를 이끌어내기 위해 어떤 리더십을 발휘하실 건지?
▲다당제의 제20대 국회는 협치가 숙명입니다. 어느 한 정당도 과반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국회 선진화법도 협치를 필수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지난 7월13일 ‘협치로 국회의 계절을 열어가자’고 제안했고, 여야 각 정당 지도부서 흔쾌히 화답해주셨습니다. 머리를 맞대면 협치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원칙에 맞고, 여야 간 합의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협치의 3원칙은 첫째 대의명분, 국민적 요구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절차적 투명성, 밀실서 하면 야합이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타이밍입니다. ‘줄탁동기’라는 말이 있듯이 타이밍이 맞아야 협치가 완성됩니다. 저 또한 국회가 하나로 뭉쳐서 새롭고 든든한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도록 여러 당의 의견을 조율하고, 협치와 소통의 장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가겠습니다.

- 역대 국회의장 중 가장 존경하는 분이 있다면?
▲역대 국회의장 모두 국가와 국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시기마다 국민이 요구하는 국회의장 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국회의장은 국정운영의 한 축인 입법부의 수장이기 때문에 그 막중한 책임을 느끼며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2대 국회의장을 역임한 해공 신익희 선생께서는 ‘민주주의는 얼른 생각하면 모든 일이 치밀하지 못하고 대단히 둔하게 보일 때가 있다. 굼뜨고 민활하지 못해도 이것이 튼튼하고 가장 옳은 길이고 드문드문 더뎌도 황소의 걸음이다’는 말씀을 남겼습니다. 국회가 지금 당장은 국민의 눈높이를 따르지 못하는 못난 모습입니다. 앞으로 협치를 바탕으로 의회주의가 만발하고 국회가 더욱 국회다워질 수 있도록 ‘호시우행’의 자세로 변화해 나가겠습니다.


<chm@ilyosisa.co.kr>


[문희상은?]

▲서울대 법학 학사
▲제26대 대통령비서실 실장
▲전 국회 부의장
▲전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
▲6선 국회의원(14·16·17·18·19·20대)
▲제20대 국회 후반기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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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전한길 유니버스’ 절대 불가능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국민의힘 행사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다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국민의힘에서 ‘보수의 김어준’을 꿈꾸는 것 같다. 전씨는 과연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했던 영향력을 단번에 얻을 수 있을까? 국민의힘에 입당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가 지난 8일, 대구 EXCO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전당대회 대구·경북지역 합동연설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전씨는 지난 3월 창간한 <전한길뉴스> 소속 언론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선거판 난장판 하지만 전씨는 언론 취재의 한계를 넘어 반탄(탄핵 반대) 성향 후보들의 연설 도중 응원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반대로 찬탄(탄핵 찬성) 성향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이 연설할 때마다 “내부 총질” 혹은 “배신자” 등 원색 비난을 했다. 이날 김근식 최고위원 후보는 전씨를 직접 지칭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지고, 계엄을 계몽령이라고 정당화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이 투쟁할 수 있겠느냐”면서 비난했다. 그러자 전씨는 김 후보에게 욕설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동시켰다. 찬탄 성향 조경태 당 대표 후보가 연설할 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들고 항의하는 등 지지자들의 조 후보 비난을 유도했다. 그러자, 찬탄 성향 일부 당원들이 전씨에게 물병을 던지면서 항의했다. 한 당원은 전씨에게 “난 20년 차 당원인데, 입당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당신이 왜 이런 난동을 부리느냐”고 따져 물었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전씨의 전당대회 출입을 막기 위해 대의원이 아닌 일반 당원의 행사장 출입을 금지했다. 이어 전씨에 대한 징계 가능성도 내비쳤다. 그러자 전씨는 <전한길뉴스> 발행인 신분을 내세워 “언론 탄압”이라며 반발했다. 이처럼 전씨는 국민의힘 당원과 언론인이란 신분을 왕래하면서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개입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과 지난 7일엔 시사평론가 고성국씨 등과 함께 주최한 ‘자유 우파 유튜브 연합 토론회’에 각각 장동혁·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출연시켜 ‘면접’을 보는 위력을 국민의힘 내외에 과시했다. 특정 진영의 강경파를 대상으로 언론사·유튜브 채널 등을 운영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모델로는 방송인 김어준씨가 있다. 김씨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친문(친 문재인) 강경파 성향 당원·지지자를 대상으로 라디오·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대표 후보들을 면접하는 형식은 김씨가 지난해 3월 자신의 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민주당 총선 후보자였던 이언주·전현희 의원과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출연시켜 객석의 청중에게 큰절을 시킨 것과 비슷하다. 김씨가 지난 6월 기획·진행한 ‘더 파워풀’ 콘서트엔 ▲문재인 전 대통령 ▲민주당 정청래 대표 ▲김민석 국무총리 등 다수의 민주당 내 유력 정치인이 참석했다. 입당하자마자 영향력 과시 물의 당원·언론인 오가며 전대 개입 김씨는 지난 2011년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로 활동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왔다. 물론 김씨가 15년 동안 구축한 영향력을 전씨가 단기간에 얻긴 어렵다. 이 때문인지 전씨는 국민의힘에 입당하자마자 ‘10만 당원 양병설’ 등을 주장하면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하기 위해선 당비를 3개월 이상 납부하고, 연 1회 이상 교육을 받은 책임당원이어야 한다. 전씨는 지난 6월 온라인으로 입당했고, 당 대표 후보 등록일은 지난달 30일부터 단 이틀 동안이었다. 따라서 전씨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출마 길이 막힌 전씨는 전당대회에서 당원·언론인 신분을 교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선동해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가 민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과 주변 진영 전체를 둘러싼 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갖는 틀과 비슷하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견고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대전제를 토대로 “언론·문화 등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해 참호전으로써 상대 세력을 약화해야 한다”는 사상을 정리했다. 각 분야에 구축한 진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전개할 기동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구조가 뿌리내리면서 러시아 2월·10월 혁명과 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뒤집는 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람시는 주도권 다툼으로써 체제 내 혁명을 추구하는 취지의 사상을 구체화했다. 우리나라에선 소련 해체가 가시화되던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 노동운동에 문화·예술운동을 접목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등 각계에서 다른 방향의 노동운동을 전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을 받치는 양대 축은 각계의 시민단체들과 진보 성향 매체들이다. 대규모 정치 이벤트가 진행될 땐 민주당 지원 사격을 맡으면서,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구축·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또 민주당에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도 한다. 주요 선거 등 대규모 기동전이 필요한 상황에선 각자의 진지에서 일시에 뛰쳐나와 물량을 공급하는 식이다. 이 같은 구조를 상징하는 사람이 민주당 윤미향 전 의원이다. 정의기억연대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던 윤 전 의원은 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횡령 의혹이 유죄로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일각에선 윤 전 의원의 사면을 강하게 지지했고, 결국 8·15 광복절특사를 통해 사면·복권됐다. 민주당과 그람시 하지만 시민단체와 매체는 대중을 직접 동원하기가 어려운 데다, 매체는 언론 고유의 한계가 있다. 시민단체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부실하다는 핸디캡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도 존재해 왔다. 이 때문에 삼각 구조를 받쳐줄 또 하나의 하부 구조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사람이 바로 김씨였다. 김씨는 지난 1998년 ‘안티 <조선일보>’라는 깃발을 내걸고 <딴지일보>를 창간한 후 풍자·B급 정서·유머를 지향해오고 있다. 당시 <딴지일보>에선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찍어 먹는 용도로 내는 간장의 위생 상태를 취재해 기사화하거나 국가혁명당 허경영 명예대표의 대권 도전 과정을 풍자하는 등 ‘신선한 B급 정서’를 지향해 독자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 김씨에게 평생 따라다닐 놀림거리를 남겼다. 김씨가 <딴지일보>의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용 성인용품을 판매했고, 성인남녀의 만남을 중개하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탓이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여전히 김씨를 비판하면서 당시의 전력을 함께 언급한다. 이후 김씨는 ▲황우석 박사 옹호 ▲영화감독 겸 코미디언 심형래씨 옹호 등 숱한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황 박사 옹호는 그럴 듯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 김씨의 특성과 깊이 맞물린다. 당시의 논란도 김씨에 대한 비판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그랬던 김씨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계기로는 크게 2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공동 진행자 중 1명으로 활동했단 것이었다. 김씨는 당시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거친 항의를 말리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문 전 대통령을 주목했다. 이후 김씨는 문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를 자처했고, 이는 ‘나는 꼼수다’ 진행 이후 문 전 대통령의 대세론으로 이어졌다. ‘나는 꼼수다’는 김씨 특유의 B급 정서·음모론이 이명박정부에 대한 다양한 불만과 맞물려 대성했던 방송이었다. ‘나는 꼼수다’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김씨의 성향을 구체화한 방송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해당 팟캐스트의 상징으로 통하는 “쫄지 마”는 여전히 회자된다. ‘나는 꼼수다’는 구체적인 사실관계 검증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확한 당파성을 매개로 특정 정당·진영 사람들이 선호할 음모론과 괴담을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와 섞어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을 적당히 왕래하면서 민주당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영웅과 악당들 이는 집단의식으로 연결됐고, 김씨에겐 거대한 영향력을, 민주당엔 거대한 지지 집단을 만들어줬다. 김씨는 ‘나는 꼼수다’를 통해 단순·명쾌한 이분 구도를 완성했다. 그를 선호하는 민주당 지지자의 정치관은 “보수진영이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어린이용 만화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울러 현재 민주당 핵심 지지 세대로 알려진 4050세대가 미국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선호하는 것과 연결해볼 수 있다. 이 세계관엔 초월적인 힘을 갖고 모든 생명체의 절반을 죽여 우주를 정화하려는 악당에 맞서는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사건이었다. 이들에게 노 전 대통령 사망사건은 거대 악당과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주는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김씨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상주로서 백 전 의원의 항의를 제지하던 문 전 대통령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우리 고전문학 중 전설은 김씨의 평소 주장과 비슷한 서사 구조를 띠고 있다. 전설은 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이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비극적인 구조를 취한다. 또 설득력을 부여해야 많은 사람에게 퍼질 수 있어서 실제 존재하는 지역·지명을 매개로 그럴듯하게 전개된다. 여기엔 각박한 현실을 바꿔줄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소망이 담겨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엔 “정씨 성을 가진 영웅이 새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될 것”이란 취지의 예언서가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김씨의 주장은 21세기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김씨는 민주당과 주변 진영을 취약한 상황에서 거대한 악에 도전하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영웅담에 환호한다. 그러면서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을 또 잃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공유한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김씨는 ‘김어준 유니버스’ 혹은 ‘민주 유니버스’를 만들었고, 지지자들은 관객을 넘어선 참여자로서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이들의 세계관을 소개하면서 “대통령이 국민을 지켜야지, 왜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완전히 다른 ‘B급 정서’ 카타르시스·도파민 차이 김씨는 ▲세월호 고의 침몰설 ▲천안함 피격 사건 관련 가짜 뉴스 살포 ▲코로나19 대구 확산설 등 주장을 이어가면서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했다. 그들이 김씨를 통해 느낀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은 고스란히 민주당의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그래서 총선 출마 후보들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해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체포 대상 중 1명으로 김씨를 지목했던 것은 김씨에게 엄청난 이익이 됐다. 당시 계엄군은 김씨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스튜디오 주변을 통제했다. 김씨는 지난해 12월13일 국회에서 “계엄군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를 사살한 후 북한 소행으로 공작하려고 했다”면서 “정보 출처는 국내에 대사관이 있는 우방국”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 우방국은 미국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지만, 미국은 국무부·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이를 부인했다. 반면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어준님’의 증언을 허구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과 보수 세력은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처럼 정교한 조직체를 만들지 못했다. 보수 세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피커 역할은 전씨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씨처럼 진영 전체를 들썩일 수 있는 정치적 유머 감각과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카타르시스와 도파민을 제공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강경 보수 지지자들 외 국민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고, 국민의힘 내부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국민의힘이 지난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이겼을 당시엔 민주당에 비판적인 2030세대 남성과 6070세대를 아울러 민주당을 지지하는 4050세대와 2030세대 여성을 포위한다는 ‘세대포위론’ 전략이 제시됐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과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불화 끝에 결별하면서 이 연합은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당시 승리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지지층은 이 대표 특유의 합리주의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강경 보수를 지향하는 노년 유권자로 분열됐다. 전씨는 많은 공무원 제자를 거느린 유명 한국사 강사였다. 따라서 적절히 순화된 주장과 교묘하게 선정한 정치적 입지를 섞어서 정치 전면에 나섰더라면,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씨는 김씨와 달리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유머를 섞는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전씨의 옛 제자들은 그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절대로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는 김씨와 달리, 직접 국민의힘에 입당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 하는 등 적당히 선을 긋지도 않는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큰절을 하게 만드는 김씨와 달리, 전씨는 스스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전당대회서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전에겐 없는 것들 무엇보다 김씨가 “이 대통령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진 것 아니냐”는 설까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구축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단 사실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국민의힘은 정치 구조를 통찰하지 못해 민주당이 장기간 공들여 구축한 정치 구조체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도 전씨는 ‘전한길 유니버스’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과연 전씨는 ‘보수의 김어준’이 될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