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위기 ③

IMF세대들의 ‘통한의 목소리’

 

 

IMF의 삭풍이 몰아쳤던 1990년대 후반 대학교를 졸업한 IMF세대.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없는 풍요로움 속에서 청소년기와 20대 초반을 보냈던 그들은 앞으로 남은 미래도 장밋빛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발을 딛으려는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IMF시대라는 괴물과 취업전쟁, 그리고 냉혹한 현실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벼랑 끝에 몰린 이들은 삶의 방식과 태도, 사고방식까지 바꿔야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 속에 버려졌다. 그리고 10년 후인 지금, 그들은 여전히 힘들다. 지난 10년간의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은 세계적 경제공황 속에서 물거품이 될 위기다. 하루하루가 위태한 30대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IMF는 벗어났지만 고통은 10년 째

컴퓨터 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 개발팀에 근무하는 전모(38)씨는 대학교를 졸업한 후 10년간 하루도 위기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한다.
대기업에 다니는 아버지 밑에서 부족할 것 없는 청년기를 보냈던 전씨. 대학시절에도 아르바이트 한 번 안 해봤을 만큼 경제적 풍요로움을 누렸다. 자신의 삶은 앞으로도 쭉 평화롭고 안정적일 거라는 전씨의 기대가 무너진 것은 대학 졸업을 몇 달 남기지 않았을 때였다.교과서에서나 보던 ‘IMF’란 세 글자가 연일 뉴스에 나올 때만 해도 자신과는 무관한 일일 거라 여겼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IMF의 직격탄은 전씨의 가정에도 떨어졌다.
퇴직을 10여년 앞둔 아버지가 ‘명퇴’를 당하면서 가정경제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퇴직금으로 받은 2억원 남짓한 돈과 모아둔 돈을 합해 시작한 사업이 화근이었다. 체계적인 준비 없이 뛰어든 사업은 전씨의 가정에 별 보탬이 되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1998년 8월, 코스모스 졸업을 했다. 서울 소재 사립대 공대에 다녔던 그는 유례없는 취업전쟁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선배들이 쉽게 들어갔던 기업들에 수십 번 이력서를 냈지만 합격소식은 남의 일이었다. 결국 눈높이를 낮춰 이듬해 봄, 중소기업에 입사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전씨는 대학 때 마지노선으로 생각했던 연봉의 절반수준밖에 안 되는 급여를 받으며 일주일에 6일씩 야근을 하며 2년간의 직장생활을 했다. 돈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경제를 떠안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은 점점 설계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20대 후반을 아등바등 살다 맞이한 30대는 더욱 매서웠다. 그가 다녔던 회사가 도산해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된 것.
몇 개월을 실업급여에 의존해 살아가던 전씨는 선배의 소개로 또 다른 중소기업에 입사했다. 규모도, 연봉도 적지만 내실 있는 회사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회사에 몸담고 있다.
더 조건이 좋은 회사로 옮기려고도 해봤지만 팍팍한 살림살이 속에서 자기계발을 하며 몸값을 올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또 5년 전 결혼하면서 생긴 아파트대출금과 각종 은행대출이자를 갚느라 휴직을 하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것은 꿈도 못 꾸는 형편이다. 여기에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사교육비 걱정은 덤이다.
몇 달 전부터 그를 짓누르는 또 한 가지는 지난 해 무리를 해가며 산 펀드가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 반토막이 나는 것도 시간문제란다.
전씨는 “IMF시대를 벗어난 지 10년이 지났다고 하지만 난 한 번도 IMF세대라는 걸 잊어본 적이 없다”면서 “아버지가 40대에 누렸던 경제적 안정을 몇 년 후에나 맛볼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전씨처럼 IMF를 즈음해 사회에 뛰어든 30대들은 지난 10년을 돌아볼 때면 소주 한 잔이 생각난다. 1970년에서 1975년 전후로 태어난 이들은 이전 세대가 겪었던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환경 속에서 유년기를 맞이했다.
물론 지금의 10대와 20대들이 맛보는 정도의 풍요로움은 아니지만 ‘내 자식에게만큼은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부모세대의 뼈아픈 희생으로 이전의 어느 세대보다 고생 없이 청소년기를 보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대학교만 졸업하면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 일을 할 수 있으리란 기대로 다가올 시련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바로 몇 해 전에 졸업한 선배들을 봐도 그랬다. 그들에게 대학교는 자유와 젊음으로 대변되는 낭만의 캠퍼스였고 졸업만 하면 치열한 경쟁 없이 쉽게 직장을 얻었다. 이 때문에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나 막막함은 그리 크지 않았다.
92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가 1999년에 졸업한 김모(37)씨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어렵게 대학에 들어갔지만 대학교에 가서 특별히 공부를 한 기억은 없다”며 “마치 고3처럼 공부한다는 지금의 대학생들을 보면 우리 세대는 편한 대학시절을 보낸 셈”이라고 말했다.
IMF 세대는 또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진 배낭여행 1세대이기도 했다.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조치가 내려지면서 이들의 무대는 해외로까지 넓혀졌다. 이로 인해 보다 넓은 시각을 가졌고 다가올 사회생활도 두렵지 않았다.

대학졸업과 함께 IMF시대 맞아 냉혹한 사회 속으로 뛰어들어
치열한 취업경쟁 뚫은 뒤 구조조정과 무한경쟁에서 고군분투


그러나 이들이 사회에 발을 들이기도 전, 대한민국은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1997년 11월21일, 경제국치라 불리는 IMF가 시작되고 희망은 절망으로 변했다. 외환정책의 실패,  위험성 대출자산 증가 통제불능으로 인한 기업의 연쇄도산, 기업투자의 부실화 등 각종 구조적 요인으로 발생한 위기는 여유로웠던 이들의 인생에 태클을 걸었다.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신입사원을 뽑는 기업의 수가 너무나 적었기 때문이다. 이전만 하더라도 4~5월이면 대기업들은 공채사원 모집으로 수천 명의 신입사원을 뽑았다. 그러나 1998년 상반기 신입사원을 뽑은 대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취업준비생은 이에 비해 그 어느 때보다 많았다. IMF세대는 베이비붐 세대이기도 하다. 1970년에서 1972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의 수는 그 어느 때보다 많았다.
통계청의 ‘2005년 인구총조사’에 따르면 출생인구가 가장 많은 해는 1971년으로, 87만5천1백87명이나 됐고, 1970년(85만9천8백17명)과 1972년(85만9천5백12명) 생이 뒤를 이었다. 이는 가장 수가 작은 2005년생(41만3천8백5명)에 비하면 두 배가 넘는 수치다. 이로 인해 1998년 20대 실업자는 52만명에 달했다. 이전 해의 27만여 명보다 2배 가까이 많은 수다.
이처럼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고생 끝에 취직했다고 해서 안전한 삶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언제 자신이 구조조정의 칼바람을 맞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직장생활을 해 나갔다.이때부터 ‘평생직장’이란 개념은 사라지고 있었다. 지금 일하고 있는 직장이 간부급으로 승진해 정년퇴직을 보장받는 곳이 아니라 다른 직장으로 옮겨가는 교두보의 역할만을 할 뿐이란 것.
IMF를 벗어나고 21세기를 맞이했다고 해서 이들 세대의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결혼적령기를 맞은 이들은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값이 폭등해 월급쟁이에게는 전셋집을 마련하는 것도 버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삶의 질은 높아만 갔다. 집은 없어도 차는 있어야 하고, 명품 하나쯤은 있어야 대접받는 시대가 왔다. 여기에 주6일제에서 주5일제로 바뀌면서 여가생활을 즐기는 데 드는 돈도 만만치 않게 들어갔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하모(39)씨는 “아직까지 아파트 대출금을 갚는 형편이지만 가족 여행과 취미생활을 포기할 수 없어 저축할 몫이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전 세대에 비해 기본적인 생활비도 늘 수밖에 없다. 휴대폰, 인터넷 등 정보생활에 필요한 돈이 수도세처럼 빠져나가고 사교육비도 늘어만 간다. 그리고 이들 세대의 자녀들은 사교육비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중, 고등학교 입학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아 그 부담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여기에 몇해 전부터 광풍처럼 불었던 펀드와 주식바람은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이전 세대보다 훨씬 쉽고 가볍게 재테크를 생각하는 30대들은 실제로 재테크로 짭짤한 맛을 본 사람들이 많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적인 경제 불황은 대박의 꿈마저도 앗아갔다.
불안한 직장생활의 마지막 보루로 투자했던 펀드와 주식은 바닥으로 치닫기 일쑤고 어렵게 대출을 받아 산 아파트 등의 부동산도 날이 갈수록 값이 떨어지고 있다.
직장인 박모(37)씨는 “틀림없는 정보라고 해서 믿고 산 펀드의 수익률이 끝도 없이 떨어지고 있어 자다가도 벌떡 깬다”면서 “주식실패로 자살했다는 우울한 이야기가 남의 일이 아닌 것 같다”고 털어놨다.
이런 상황에서 30대들의 목을 조이는 또 다른 것은 ‘무서운 후배’들이다. 어느 세대든 후배들이 자신들을 치고 올라와 위협하는 것은 순리(?)겠지만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인 이들의 후배는 누구보다 능력 있는 세대다.
10대 시절에 IMF를 겪고, 바로 윗세대들이 얼마나 냉혹한 사회에서 일하는지를 지켜봤던 이들은 어느 세대보다 철저히 준비하고 사회에 발을 들였다. 대학교는 술을 마시고 연애나 하는 곳이 아니라 ‘취업을 위한 학원’ 정도로 여긴 ‘후배’들은 고3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많은 투자를 쏟아 취업문을 통과한 인재들이다.
게다가 30대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기기 힘든 것은 이들이 가진 정보력이다. 20대 후반에서야 인터넷을 접한 IMF세대와 달리 이들은 이미 10대부터 자유자재로 인터넷을 가지고 논 세대. 무려 10년이란 차이를 따라잡는 것이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호텔에서 근무하고 있는 서모(39·여)씨는 “언젠가 부장님이 나와 후배에게 같은 일을 시킨 적이 있는데 후배는 나보다 24시간이나 빨리 보고서를 제출했다”며 “일한 경력은 내가 훨씬 길기 때문에 당연히 후배를 이길 줄 알았는데 인터넷을 이용한 정보력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IMF세대인, 30대 후반을 맞은 이들은 예고도 없이 가장 치열한 세상 속으로 들어온 뒤 10년 동안 무한 경쟁 속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IMF보다 더 혹독한 경제위기라는 지금, 10년 전의 잔혹한 추억을 떠올리며 불안에 떨고 있다.
 

IMF 처녀에서 88만원 세대까지 ‘그때 그 유행어들’
IMF 이후 취업난 빗댄 신조어 쏟아져


IMF 이후 10년 동안 계속 되고 있는 취업난과 청년 실업은 각종 신조어를 만들었다. 이 용어들은 우울한 현실 속에서 쓴 웃음을 주며 여러 사람들에게 회자됐다. 잠깐 사용되다 사라진 신조어와 관용어로 굳혀진 용어들을 되돌아보자.

IMF 처녀
IMF시대였던 1990년대 후반 생겨난 신조어.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던 당시 기혼녀부터 해고시키는 회사방침으로 인해 결혼을 하고도 처녀행세를 하는 유부녀를 일컫는 말. 심지어 결혼하고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거나 남편과 당분간 따로 사는 등 직장을 사수하기 위한 당시 직장인들의 노력은 그야말로 처절했다.

갤러리족
주인의식 없이 회사 돌아가는 대로 그저 따라다니다가 그만둘 때는 미련 없이 떠나는 직장인들을 일컫는 말. IMF 후 구조조정으로 인해 직장인들이 강제 퇴직당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전이까지만 해도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를 평생직장으로 여겼지만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더 나은 직장이 나오면 미련 없이 직장을 옮기는 풍속도가 생겼다. 갤러리족이라는 이름은 회사의 운명은 상관없이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생각하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마치 골프장의 갤러리들이 멋진 플레이가 나오면 박수를 쳐 주고, 선수가 이동하면 따라 나서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생겨났다.

각종 생선 시리즈
외환위기 이후 직장인들의 목숨과 관련한 신조어들도 연일 생성됐다. 명예퇴직자를 이르는 ‘명태족’, 하루아침에 생매장당한 직장인인 ‘생태족’, 어느 날 황당하게 잘린 직장인을 말하는 ‘황태족’, 30대에 일찌감치 잘린 조기 명퇴자를 일컫는 ‘조기족’, 퇴직금을 두둑이 받은 명예퇴직자를 이르는 ‘알밴 명태족’ 등이다. 이들 용어 중 명태족 등은 지금도 쓰이며 IMF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고공족(考公族)
구조조정으로 해고당하는 이들이 늘면서 해고의 위험성이 없는 공기업과 공무원이 큰 인기를 얻으며 생긴 용어다. 고공족은 고시건 공무원시험이건 일단 붙고 보자는 생각으로 공부를 하는 수험생들을 일컫는다.


공휴족(恐休族)
쉬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신조어. 이들은 주로 취업에 부담을 느낀 대학생들로 방학 중에도 쉴 틈 없이 학업 외에 3~5개 활동을 동시에 한다. 이들은 어학공부, 각종 아르바이트, 봉사활동, 기업 인턴십, 자격증 취득 등 졸업 후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면 마다않고 한다.

이태백·삼태백
청년실업은 20대 태반이 백수라는 ‘이태백’이란 말을 만들었다. 장기화된 취업난은 연령대를 넓혀 30대 태반이 백수라는 ‘삼태백’으로 바뀌기도 했다.

대학 둥지족
취업이 어려워지자 휴학을 하며 졸업을 미루는 학생을 일컫는다. 이들은 어학연수, 인턴쉽 등을 핑계로 휴학을 밥 먹듯하며 사회로 나가는 시간을 유예시킨다.

버블리족
‘거품족’이라고도 하는데 1986년부터 1990년까지 거품 경기 때 입사했거나 대학생활을 보낸 직장인 중 거품경기가 사라지면서 급변하는 기업 조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직장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 버블리족의 특징은 무관심·무능력·무경쟁으로 조직의 입장보다는 개인적 관심에의 일을 추진하고 모든 책임을 조직에 돌리는 것. 또 자신에 대한 남의 평가에 대해 관심이 없고 경쟁의식도 없으며, 근무시간에 조직 업무에 대한 집중도 취약해 공사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특징이 있다.

88만원 세대
20대 비정규직 노동자가 약 88만원을 받는다는 뜻. 88만원은 비정규직 전체의 평균 임금(1백19만 원)에 20대 평균 소득 수준 비율인 74%를 적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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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