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스러진 달 (45) 현장 점검

국립극장서 거사 치른다

소설가 황천우는 지금까지 역사소설 집필에 주력해왔다. 역사의 중요성,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또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 과정에서 ‘팩션’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다. 팩트와 픽션, 즉 사실과 소설을 혼합하여 교육과 흥미의 일거양득을 노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은 사건을 들추어냈다. 필자는 그 사건을 현대사 최고의 미스터리라 칭함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1974년 광복절 행사 중 발생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다.

담뱃불을 살피며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 바늘이 막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저만치 아래서 택시가 올라오는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담배를 발로 가볍게 비벼 끄고 극장 건물 한 모퉁이를 찾아 몸을 숨기고 택시를 주시했다.

동일의 예상대로 택시는 국립극장 앞에 멈추어 섰고 예의 정장 차림의 석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살피며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으로 시선을 주었다. 근처에도 이르기 전에 절로 눈이 감겼다.

피식하고 한번 웃고는 석원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모자를 반듯하게 쓰고 내린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며 고스란히 태양빛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귀중한 사람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동일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갔다. 가까이 이르자 인기척을 느낀 석원이 고개 돌렸다.

이어 모자를 벗고 상체를 90도 정도 꾸부려 예를 표했다.

순간 일본인들의 지나친 인사 예법을 생각하며 문석원이 아닌 난조 샤쿠겐이라는 이름이 입가에 맴돌았다.


“지금 온 게요?”

“먼저 와 계셨습니다.”

“한번 둘러보려 먼저 왔소.”

둘러본다는 말에 힘을 주었다.

그 의미를 알았는지 석원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 한번 둘러보고 와요.”

동일의 낮은 목소리에 석원이 가볍게 고개 숙였다 몸을 돌려 건물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동일이 다시 나무 그늘에 몸을 맡기고 석원의 움직임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건물에 이른 석원이 고개를 돌려 주차장을 바라보았다.

이어 다시 고개를 돌려 건물 내부로 들어가려는 듯 문 앞에 자리 잡았다.

그 자리에서 문손잡이를 돌리는데 문이 닫혀있는지 애를 먹는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 순간 동일이 다가가 석원을 불렀다. 동일의 부름에 석원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급히 돌아왔다.


“지금 내부를 볼 수는 없을 것이오. 그러니 오늘은 주차장에서 건물까지 가는 동선만 살피도록 하오.”

석원이 다시 주차장에서 국립극장 정문까지 가는 길을 살펴보았다.

그다지 복잡할 것도 없는 동선을 석원이 여러 번 관찰했다.

그를 바라보던 동일이 석원을 승용차에 태우고 남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남산타워 근처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고타로 상.”


“예, 지도…아니 나카소네 상”

“고타로 상은 남조선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오?”

느닷없는 질문인지 석원이 흠칫했다.

“고타로 상의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도 남조선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고타로 상은 남조선에는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어 하는 소리요.”

“오히려 그 부분 때문에 정이 가지 않습니다. 부모님 모두 남조선 출신이건만 왜 일본이란 땅에 와서 그리도 천대받으며 살아야 했는지. 그런데 남조선은 일본과 친하지 못해 안달하는 모습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특히 박정희 일당들을 보면 정말로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고는 했습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고 말고. 거기에 더하여 박정희 정권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독재를 감행하고 있으니 고타로 상처럼 트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참기 힘들다 생각하오.”

말을 하며 근처를 바라보자 한적한 곳에 벤치가 놓여 있었다.

동일이 그리로 걸음을 옮겨가자 석원이 땀을 뻘뻘 흘리며 뒤를 따랐다.

“잘 보도록 하오.”

동일이 벤치에 앉자마자 주변을 살피고 바지 뒷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펼쳤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국립극장 내부 설계도요.”

순간 석원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곳이 아까 고타로 상이 들어가려던 입구요.”

석원이 동일이 가리키는 지점을 따라 내부로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곧바로 1층 로비가 나타났고 이어 극장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있었다.

이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함께 그곳에도 로비가 있었다.

“그런데 나카소네 상.”

“말해보오.”

“저는 국립극장이라고 해서 상당히 규모가 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그리고 이 배치도를 살펴보니 이외로 규모가 크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내 어느 곳에서 저격해야 할까 고민했었는데 막상 현장을 살펴보니 어느 곳에서고 저격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허술한 경호 노려… 연설 중 저격 모의
“반드시 성공해야” 근접 사격 신신당부

동일이 내색은 못하고 그저 속으로 웃고 말았다.

“물론 고타로 상의 말이 백번 지당하오. 하지만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야 할 거요. 그리고.”

동일이 말하다 말고 뜸을 들이자 석원의 얼굴에 긴장감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비록 여분의 총알이 있지만 첫발에 치명상을 입혀야 하오. 그리고 나머지 총알은 확인 차원에서 사용되어야 하오.”

석원이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링컨의 경우를 상기하라는 말이오. 링컨을 한 방에 죽일 수 있었던 사유는 바로 가까운 거리에서 저격했기 때문이오.”

동일이 시선을 배치도에 주었다.

석원 역시 동일의 시선을 따라갔다.

“잘 살펴보오, 어디가 최적의 장소인지.”

석원에게 주문을 주고 이내 곁에 있는 돌을 들어 저만치에서 움직이는 생명체를 바라보았다.

꿩이 나무 사이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 꿩을 향해 돌을 던졌다.

정신없이 먹이를 찾아 배회하던 꿩이 낌새를 알아챘는지 돌을 던지는 순간 날아가 버렸다.

“나카소네 상, 순간적으로 든 생각인데 목표물이 움직임이 없을 때 저격하는 방식이 옳지 않겠습니까?”

“잘 보았소, 바로 그런 문제요.”

동일이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면 박정희가 행사장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석원이 다시 시선을 배치도에 주면서 주차장부터 행사장으로의 이동 경로를 살피기 시작했다.

“주차장은 어떠하겠습니까?”

석원이 손가락으로 주차장을 지적했다.

“주차장은 곤란하오.”

“왜요?”

동일이 단정적으로 말을 받자 석원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가장 경호가 삼엄한 부분이 박정희가 행사장에 도착하는 순간이오. 즉 처음 부분에 가장 많은 신경을 집중하는 게 경호의 기본이오.”

“그러면 경호가 가장 허술한 순간을 잡으라는 말씀이십니다.”

“당연하오. 그러니까 방금 이야기했듯이 정지 상태에서 그리고 경호가 허술한 이러한 요인들을 복합적으로 고려하여 저격 순간을 선택해야 하오.”

“그렇다면…”

석원이 말하다 말고 뚫어지게 동일을 주시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소?”

“좋은 생각보다도, 광복절 행사 당일 박정희가 연설할 거 아닌가요. 그러면 그 순간을 이용해서 저격하는 방법이 좋을 듯합니다.”

“그것은 최후의 방법이고.”

“최후라니요?”

“고타로 상이 그 순간 어느 위치에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소? 다행스럽게도 연설대 가까이 있다면 고타로 상 말대로 최적의 기회가 될 수 있지요. 그러나 먼 거리에 있다면 어려운 문제가 될 거요.”

“제가 가까이 자리 잡으면 어떨까요?”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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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