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따라 맛따라 ②충북 영동군

봄꽃에 눈이 환하고 봄맛에 입이 즐겁다

동백과 산수유, 매화가 이 땅을 물들이고나면 한바탕 또 다른 꽃 잔치가 시작된다. 벚꽃과 개나리가 피면서 산천이 물감을 쏟아부은 듯 울긋불긋 물든다. 4월 중순이 지나면 하얀 배꽃과 분홍빛 복숭아꽃도 잇따라 피어 상춘객의 발걸음을 바쁘게 한다. 벚꽃처럼 떠들썩하고 요란하지 않지만, 은은한 아름다움이 보는 이를 설레게 한다.

은은한 아름다움, 배꽃과 복숭아꽃
영동 매천리가 선사하는 봄날의 위안

이맘때 배꽃과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곳을 꼽으라면 충북 영동을 꼽는다. 추풍령 자락에 자리해서 일조량이 풍부하고 낮과 밤의 기온차가 커 과일 농사가 잘되는 지역인데, 특히 배와 복숭아가 유명하다. 영동에서도 배 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이 매천리다. 10여 년 된 나무부터 100년이 더 된 나무까지 낮은 구릉에 배나무 천지다.

매천리에 배꽃이 피기 시작하는 시기는 4월 중순. 하얀 배꽃이 들판에 가득한 풍경은 봄날 함박눈이 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차창을 열고 배 밭 옆을 천천히 지나면 달콤한 배꽃 향기가 콧속으로 스며든다. 배꽃 단지 중간중간에 분홍빛 복숭아꽃도 한창이다. 하얀 배꽃과 연분홍 복숭아꽃, 푸른 하늘이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인상파 화가의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하다. 

매천리 배 밭은 광양 매화 밭이나 하동 벚꽃 길처럼 이름난 관광지가 아니라, 농부들이 수확을 위해 가꾸는 삶의 현장이다. 그래서인지 시골 풍경과 어우러진 배 밭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멋을 풍긴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면 배꽃 터널을 걸으며 봄을 만끽할 수 있다.

들판 가득한
하얀 배꽃


배꽃은 화려하거나 호들갑스럽지 않다. 오히려 기품이 넘치고 우아한 멋이 있다. 꽃말도 ‘온화한 애정, 위로, 위안’이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위로나 위안을 받기 위해서일 텐데, 활짝 핀 배꽃 사이를 걸으며 봄날의 위로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

봄꽃을 보았다면 이제 봄맛을 즐길 차례다. 배꽃만큼 화사한 향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와인코리아다. 영동에서 배와 복숭아 못지않게 유명한 과일이 포도다. 영동 포도는 전국 생산량의 12.7%, 충북 생산량의 76%를 차지한다. 와인코리아는 영동 농민이 직접 재배한 포도를 엄선해 와인을 만드는 곳. 숱한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거쳐 토종 와인 샤토마니(Chateau Mani)를 탄생시켰으며, 지금은 홍콩 등지에 수출할 정도로 발전했다.

와인코리아에서는 다양한 체험을 해볼 수 있다. 달콤하면서 쌉싸름한 샤토마니는 불고기와 부침개 등 한식과도 잘 어울린다. 와인 향 그윽한 40℃ 안팎의 대형 족욕 시설에 둘러앉아 발을 담그면 여행의 피로가 스르르 풀린다. 오크통 100여 개와 와인 5만여 병을 쟁여놓은 저장 토굴도 볼거리다.

영동 적시며
흐르는 금강

토속 음식도 영동을 찾은 상춘객의 입맛을 즐겁게 한다. 영동은 금강 자락에 기대앉은 고장이다. ‘비단 강’이라는 뜻이 있는 금강(錦江)은 강줄기를 따라 펼쳐진 산수가 아름다워 붙은 이름. 물이 맑아 피라미, 쏘가리, 동자개(빠가사리), 메기가 지천이다. 영동을 대표하는 음식이라면 금강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로 만든 도리뱅뱅이와 어죽을 꼽을 수 있다.

도리뱅뱅이는 피라미를 튀겨서 양념을 발라 먹는 요리다. 영동을 비롯해 금산, 옥천, 무주 등 금강 유역에 자리한 마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까만 프라이팬에 둥글게 놓인 피라미를 보면 도리뱅뱅이라는 이름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꾸덕꾸덕하게 마른 피라미를 묽은 반죽에 담그고 밀가루를 덧바른 다음, 기름을 넉넉하게 두른 프라이팬에 튀긴다. 피라미가 어느 정도 튀겨졌을 때 갖은 양념을 한 고추장을 바르고 센 불에 재빨리 튀긴다. 이렇게 하면 튀김옷이 더 바삭바삭해진다. 튀긴 피라미에 채 썬 상추와 깻잎, 마늘을 얹는다.

새빨간 양념 옷을 입고 노릇하게 튀겨진 도리뱅뱅이는 보기에도 군침이 흐른다. 젓가락으로 한 마리 집어 먹으면 비린내 없이 고소한 맛에 반한다. 바삭바삭 씹히는 맛도 일품이다. 피라미는 담백한 생선이지만 기름에 튀기면 멸치처럼 고소한 맛이 난다. 피라미는 민물고기라도 완전히 익혔기 때문에 안심하고 먹어도 된다.


도리뱅뱅이와 함께 먹으면 좋은 음식이 어죽이다. 쏘가리, 동자개, 메기 등 갓 잡은 민물고기를 통째로 두 시간쯤 삶으면 진하고 걸쭉한 국물이 나온다. 여기에 고춧가루, 고추장, 생강, 후춧가루, 된장, 들깻가루, 부추, 청양고추, 깻잎 등을 넣고 한소끔 끓인다. 국수와 수제비를 넣고 좀더 끓이면 시원하면서도 칼칼한 맛이 일품이다.

요즘 영동에서 ‘뜨고 있는’ 음식은 자연산 능이버섯전골이다. 상촌면 임산리에 조성된 자연산버섯음식거리에는 다양한 버섯 요리를 내는 식당이 10곳 정도 모여 있다. 이곳 음식점은 민주지산을 비롯해 인근 산에서 채취한 야생 버섯을 사용한다. 소고기 육수에 능이버섯을 푸짐하게 넣고 끓인 전골을 한 숟가락 떠먹으면 “아, 좋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속이 따뜻해지고 온몸에 땀이 흘러 마치 보약을 먹은 것 같다.

아이들과 함께 갔다면 심천면 고당리 영동국악체험촌을 추천한다. 매주 토요일 오후 3시에 난계국악단의 무료 국악 공연이 열리는데, 국악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판소리 등 흥겨운 우리 가락을 즐길 수 있다. 사물놀이, 거문고, 난타 체험 등 국악기를 배우고 연주할 수 있는 체험실도 마련되었다. 기네스북에 등재된 세계에서 가장 큰 북 ‘천고(天鼓)’를 두드려보는 것도 잊지 말자. 귓전을 울리는 커다란 북소리가 막힌 가슴을 뻥 뚫어준다.

------------------------여행 정보------------------------
당일 코스

매천리 배 밭→와인코리아→영동국악체험촌
1박 2일 코스
· 첫째 날: 매천리 배 밭→영동국악체험촌→와인코리아
· 둘째 날: 송호국민관광지→월류봉→반야사
관련 웹사이트
· 영동군 문화관광 http://tour.yd21.go.kr/html/tour
· 와인코리아 http://www.winekorea.kr
· 영동국악체험촌 http://gugak.yd21.go.kr
문의 전화
· 영동군청 문화체육관광과 043-740-3223
· 영동국악체험촌 043-740-5946
· 와인코리아 043-744-3211
· 송호국민관광지 관리사무소 043-740-3228
대중교통(기차)
· 서울역-영동역: 무궁화호·새마을호 하루 24회(05:50~22:50) 운행, 2시간20분~2시간40분 소요.
* 레츠코레일 1544-7788,www.lets korail.com
(버스)
· 서울-영동(옥천):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하루 3회(10:00, 14:00, 18:00) 운행. 약 2시간30분 소요.
* 동서울종합터미널 1688-5979, www.ti21.co.kr
자가운전
· 서울 출발: 경부고속도로→영동 IC→영동 방면
· 부산 출발: 경부고속도로→황간 IC→영동 방면
· 광주 출발: 호남고속도로→서대전 JC→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영동 IC→영동 방면
숙박
· 민주지산자연휴양림: 용화면 휴양림길, 043-740-3437
· 두바이모텔: 영동읍 계산로6길, 043-744-2235
· 와인모텔: 영동읍 계산로, 043-745-1317
· 달이머무는집: 황간면 월류봉길, 010-2541-7966
식당
· 가선식당: 어죽·도리뱅뱅이, 양산면 금강로, 043-743-8665
· 선희식당: 어죽, 양산면 금강로, 043-745-9450
· 청학동: 능이버섯전골, 상촌면 민주지산로, 043-743-1837
· 한미칼국수: 칼국수, 영동읍 영동시장4길, 043-743-8443
주변 볼거리
옥계폭포, 난계사, 천태산, 영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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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