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살인마 유영철 비화 공개

법정서 십자가 부수고 악마가 되었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 그의 이름은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언론에 이미 알려진 것들이 아닌 법원의 판례를 바탕으로 그의 잔인한 범행 수법과 범행 장소 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유영철은 1970년 전북 고창에서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세때 부친이 죽자 전반적인 경제 사정은 매우 좋지 않았다. 유영철의 지능은 보통이었고 편협한 성격으로 다른사람과 잘 융화되지 못했다. 자신의 요구 사항이 반영되지 않으면 참지 못하고 격분하는 반사회적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예체능계에 소질이 많았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육상 단거리 달리기를 했고, 투포환과 기계체조를 하면서 지속적인 체력단련을 통해 손목의 힘과 악력을 길렀고 장차 화가가 되는 꿈도 꿨지만 색약 등의 이유로 예고 입학이 좌절되어 공고에 입학했다. 이후 절도 사건으로 구속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학교도 자퇴하고 전형적인 ‘비행청소년’이 된다.

기독교에 불만
신의 존재 부정

유영철은 친구의 소개로 여자친구를 만나게 된다. 사귀던 도중 특수절도죄로 구속되고 징역 10월을 선고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내심 기대했지만 실형을 선고 받는다. 법정에서 손에 쥐고 있던 나무 십자가를 부수는 등 자신이 믿어왔던 기독교 신앙에 회의를 품고 나중에는 노골적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조금씩 악마가 돼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친구와 어머니의 집에서 동거하며 혼인신고까지 하면서 살게 되는데 또 다시 절도죄로 구속된다.

출소 후 경찰관 신분증을 위조해 퇴폐업소를 상대로 금품을 갈취 하는가 하면 음화판매로 벌금 300만원형을 받기도 했다. 절도죄로 수배생활을 하던 와중에도 같은 범행을 반복하다가 징역 2년형을 선고 받는다. 이후 미성년자를 강간하는 사건으로 3년5개월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때 혼인신고를 했던 여자친구에게 재판상 이혼을 당하게 된다.


이혼 재판 과정에서 모욕적인 욕설까지 듣게 되면서 그녀에게 느낀 환멸감과 극도의 배신감 때문에 여자친구와 아들까지 살해할 마음을 품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다른 사람들을 살해하기로 마음 먹는다. 교도소 벽에 출소 후 죽일 사람의 숫자까지 기재했다.

2003년 드디어 희대의 악마이자 살인마인 유영철이 탄생하게 된다. 출소 후 어머니의 집에 머물면서 과도로 큰개를 찔러보는 살인 실험을 한다.

피만 많이 나올 뿐 곧바로 죽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 유영철은 둔기로 머리를 강타하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곧바로 쓰러트릴 수 있어 보다 효과적인 살인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만의 범행 도구를 특수 제작 하게 된다. 공사장에서 자루가 긴 해머와 짧은 장도리 자루를 이용해 4kg짜리 해머를 제작하고 위협용 잭나이프 칼 한자루와 범행 시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세무장갑, 목장갑을 준비한다.

준비한 범행도구만을 보더라도 주도면밀하고 계획적으로 사람을 살해하려고 마음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디어 범행 준비를 끝내고 주로 노약자와 부녀자들만 집에 있는 출근 후 오전 시간에 범행할 것을 결의하는 계획을 세운다.

2003년 9월24일 유영철에 의한 첫 피해자가 발생했다. 그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소재 A(72)씨의 단독주택 담장을 넘어 정원으로 침입했다. 집안의 동태를 살피면서 코팅 목장갑으로 갈아끼고 잭나이프를 든 채 현관문으로 들어가 거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잔인한 수법·사이코 성향 자세히 기술
주도면밀 범행…소름끼치는 사건의 전말

2층 각 방문을 열어 젖혀 유영철을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A씨를 준비한 재크나이프로 찔러 쓰러트린 후 짧은 해머로 머리를 여러 차례 내리쳤다. A씨의 옆에 있던 피해자 B씨가 장롱속에서 돈을 꺼내주려고 하자 “내가 돈 때문에 그런거 같아?”라며 해머로 B씨의 머리를 내리쳐서 살해했다.


2003년 10월9일에는 서울 종로구 구기동 소재 C(85)씨의 단독주택에 담장을 넘어 정원으로 침입해 C씨를 발견하고 재빨리 해머로 머리를 내리쳐 쓰러뜨린 후 계단을 통해 1층 거실로 내려오던 D(60)씨의 배를 발로 걷어 차 소파 쪽에 밀쳐 넣고 해머로 머리를 수회 내리친다. 뒤늦게 인기척을 듣고 계단을 내려오던 E(35)씨도 2층 복도로 끌고 올라와 두개골이 부서져 뇌가 빠져 나올 정도로 머리를 내리쳐 살해했다.

살인에 맛들린 유영철은 교회 또는 성당 부근의 주택에 침입해 2003년 10월16일 피해자 F씨를, 2003년 11월18일 피해자 G씨, H씨를 같은 방식으로 살해한다. 강도범의 소행으로 위장하기 위해 금고문을 훼손 하던 중 사용하던 전지가위가 튀면서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 마디부분이 베여 금고와 방바닥에 피가 떨어졌다. 자신의 피로 인해 범행이 발각될 것을 우려한 유영철은 피를 없애기 위해 집안에 불을 지르기로 마음먹고, 피해자들이 쓰러져 있는 1층 안방으로 내려와 주방에 있던 라이터로 신문지와 옷가지에 불을 붙였다.

범죄는 더욱 더 대담해졌다. 2003년 11월 말 서울 마포구 신수동 소재 그의 오피스텔에서 컴퓨터 스캐너 장비를 이용해 서울지방경찰청장 명의의 공문서인 경찰관 신분증을 위조했다. 2004년 2월9일 인천 남동구 간석동 오거리 육교 부근의 모텔방에서 전화로 불러낸 윤락녀인 피해자 I씨에게 위조된 경찰관 신분증을 제시하고 “윤락행위를 했으니 감방에 보내겠다”고 겁을 주며 수갑을 채웠다.

이어 전화로 모텔까지 데려다 준 사람을 위 모텔로 유인하도록 시켜 전화연락을 받고 온 피해자 J씨에게까지 위조된 경찰관 신분증으로 속여 29만원을 갈취했다. 2003년 저질렀던 4차례의 살해사건에 대해 꼬리가 잡히는 듯 했다.

교도소 벽에
죽일사람 적어

버팔로 신발을 신은 사람에 의한 연쇄살인으로 추정된다고 언론에 보도됐다. 유영철은 자신이 검거될 것을 걱정해 사건 당시 착용했던 버팔로 신발을 폐기하고 거주지도 서울 마포구 신수동 고시원에서 같은 동 오피스텔로 옮겼다. 고립, 불안감이 팽배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에게도 잠시 동안의 안정기간은 있었다. 2003년 12월께 전화방을 통해 만나게 된 K씨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잠시 심리적인 안정을 가졌으나, K씨가 그의 과거 범죄전력 뿐만 아니라 그의 직업, 학력, 가족관계에 관한 내용이 거짓말이었음을 알게 되고, 또 2004년 2월께 K가 다른 남자와 만났던 것에 대해 심한 말다툼을 한 후 K씨의 “성관계를 맺으려면 선불을 달라”는 말에 격분해 몸을 묶고 강제로 성관계를 맺다 그녀의 목을 심하게 조르는 등의 폭행을 가하면서 K씨는 유영철과의 만남 자체를 극도로 기피하게 됐다.
 

유영철은 K씨의 휴대폰으로 문자메세지를 집요하게 보내면서 재결합을 시도했으나 K씨는 휴대폰을 교체하고 거주지도 옮겼다. 연락 자체를 두절하자 그녀에게 매우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K를 살해하고 싶은 마음이 치솟은 그였지만 휴대폰 통화내역 등 자료가 남아있어 곧바로 범인으로 검거될 가능성이 높아 포기한다. K씨에 대한 복수의 불길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K씨와 동종 직업에 종사하는 전화방이나 출장마사지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상대로 범행을 계획 한 것이다.

영업특성상 실종신고를 할 가능성이 적고 실종이 되더라도 찾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K씨로부터 당한 배신감을 보상받기로 마음먹었다. 인터넷 자료검색을 통해 토막살해 장면 등을 집중적으로 내려받아 살인방법을 숙지할 뿐만 아니라, 토막살해 후 사체 암매장을 쉽게 하기 위해 미리 쇠톱, 가위, 망치, 잭나이프 등 살인도구를 준비한 그는 다음 범행상대를 찾아 나섰다.

한방에 보내려
4kg 둔기 제작

그는 2004년 3월15일 서울 서대문구 소재 전화방에서 그 곳으로 전화를 걸어온 L씨와 만나기로 하고 약속장소로 갔다. 돈을 더 줄 테니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그의 말에 L씨는 의심 없이 그의 집으로 이동한다. 성관계를 한 후에도 피해자를 돌려보내지 않자 이상함을 느낀 L씨가 도망을 가려 하자 그 자리에서 L씨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살해 후 사체 운반 시 부피가 크면 발각될 것을 염려해 사체의 형체를 알아 볼수 없을 정도로 토막을 내고 잘게 부숴 10개 정도의 검정비닐봉지에 나눠 담았다. 서울 마포구 대흥동 소재 뒷산 등산로에 삽으로 구덩이를 파서 피해자의 사체를 은닉하기까지 했다. K씨로 시작된 유영철의 그릇된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4년 4월에는 전화방에서 알게된 M씨를 살해하고 피해자의 신원확인이 불가능 하도록 사체를 절단해 구덩이를 파서 묻어 피해자의 사체를 은닉했고, 2004년 5월에는 서울 서대문구 소재 피시방에서 인터넷으로 속칭 ‘조건만남’ 쪽지를 보내고 있는 피해자 N씨에게 접근해 살해하고 같은 방법으로 피해자의 사체를 숨겼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그가 살해한 사람의 수는 21명. 위와 같은 방법을 주로 사용했지만 얼굴, 엉덩이 부위 등을 수회 베고, 손목을 절단하는 등 기이한 행동도 일삼았다. 살해된 피해자들의 공통점은 교회나 성당 근처에 사는 노약자나 부녀들, 그리고 출장 마사지업소에서 일하는 윤락녀라는 점이었다.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것들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면 이런 식으로 반사회적인 성격을 표현했던 것이다.

2004년 7월15일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기동수사대는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에 출장마사지사 등 부녀자들을 유인, 감금해 소지품을 절취하거나 그 부녀자들을 연쇄 살해한 혐의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리고 2004년 6월경 살해당한 출장마사지사의 핸드폰 등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 현장에서 확인됐다.

과도로 개 찔러보는 살인 실험
죽지 않자 범행 도구 특수제작

이렇게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의 살인 행각은 막을 내렸다. 체포후 그는 절도, 감금, 부녀자 살인, 부유층 주택 살인사건 혐의 등에 관해 자백과 부인을 반복하다가 간질증세가 있는 양 연극을 펼치기도 했다. 경찰관이 수갑을 풀어 주자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뛰쳐나가 재차 체포됐다. 유영철은 호송되면서도 간질 발작 흉내를 내거나 다리가 아프다며 비명을 지르는 등 갖은 술수를 다 부렸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다시 검거된 유영철은 묵비권을 행사하는 등 제대로 진술하지 않았다. 보고를 받은 수사부장은 직접 유영철을 신문하기로 결정했다.

서울경찰청 수사부장. 경찰의 별에 해당하는 경무관으로 거대 서울경찰청 형사들의 최고 우두머리가 직접 피의자 신문을 하겠다니, 위험부담이 매우 큰 모험이었다. 만약 수사부장이 신문해도 별 소득이 없다면 위신이 구겨지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방법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는 부담을 안은 결정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유영철에게도 전달됐다. 유영철은 매우 과시욕이 강하고 우쭐대기 좋아하는 심리적 특성이 있는 터라 서울 경찰 최고위 형사 간부가 직접 자신을 신문하러 온다는 사실에 흥분했다고 한다. 한국의 살인 사건 분석과 프로파일링을 주제로 범죄학 박사 학위까지 받은 김용화 수사부장이 차분히 추궁하자 유영철은 이내 자백하기 시작했다. 우선 4건의 부유층 노인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임을 자백했다.

자백 내용이 구체적이고 상세하며 범인이 아니면 모를 이야기들을 하거나 현장 상황을 정확히 재현해 그리는 점 등으로 보아 범인이 분명했다. 진술에 뒤이은 현장 답사에서도 정확히 피해 주택들을 찾아내고 사건 현장의 처음 모습을 재현해냈다.

11시간 도주하는 동안 증거가 될 만한 물건들을 버렸다는 진술에 따라 수색한 결과 유영철의 하숙집에서 멀지 않은 골목길 구석에서 범행에 사용한 해머가방도 발견해 수거했다. 나중에 이 해머의 손잡이 플라스틱 안쪽에서 피해자의 혈흔을 발견했다.

살인에 맛들려
총 21명 살해

이상한 것은 이미 4건의 연쇄살인을 자백한 유영철이 출장 마사지사 실종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모르쇠로 일관한다는 것이었다. 수사부장은 계속해서 유영철이 소지하고 있던 여성용 발찌와 손목시계, 여분의 휴대전화에 대해 그 출처를 집중 추궁했다. 꿋꿋하게 거짓말에 거짓말을 거듭하던 유영철은 마침내 스스로의 거짓말에 지쳐 모든 걸 털어놨다. 10개월 동안 총 21명을 살해한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은 그 해 11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ktikt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영화 <추격자> 실존인물은…끝나지 않은 유영철 트라우마 

영화 <추격자>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진 보도방 업주 노모(42)씨가 마약 혐의로 또 다시 철창 신세를 지게 됐다. 지난 10월 15일 서울북부지방법원은 마약을 구입해 투약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노씨에 대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앞서 노씨는 필로폰과 대마를 여러 차례 구입해 투약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바 있다. 

지난 2004년 연쇄살인범 유영철 검거에 결정적 도움을 준 노씨는 “유영철 검거 과정에서 트라우마가 생겼고 이에 시달렸다”고 호소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같은 혐의로 2001년부터 2013년까지 8차례 처벌을 받았고, 2005년 이후엔 유영철 검거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세 번이나 양형 결정에 선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노씨는 유흥업소를 운영하던 지난 2004년 자신의 업소 여성이 실종되자 경찰에 신고한 뒤 자신도 추적에 나섰으며, 결국 다른 업주들과 함께 살인마 유영철을 붙잡아 경찰에 넘기고 포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노씨 인생에 치명타를 남겼다. 이전에도 마약에 가끔 손을 댔던 그는 현장 검증 과정에서 끔찍한 시체들을 직접 목격한 후 트라우마로 마약중독자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마약에 의존하던 노씨는 여러 차례 교도소를 드나들었다. 2010년에는 선처를 받기 위해 중국 폭력조직 흑사파가 국내 조직에 마약을 건네고 있다는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노씨의 재판에서 배심원은 만장일치로 유죄 의견을 냈다. 재판부는 배심원의 의견인 징역 3년형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자신의 범행을 국가기관의 탓으로 돌리는 등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엄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다만 과거 검거에 기여한 경력이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 가족과 지인들이 선처를 탄원하고 있다는 점 등을 참작했다고 덧붙였다.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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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