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살인마 유영철 비화 공개

법정서 십자가 부수고 악마가 되었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 그의 이름은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언론에 이미 알려진 것들이 아닌 법원의 판례를 바탕으로 그의 잔인한 범행 수법과 범행 장소 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유영철은 1970년 전북 고창에서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세때 부친이 죽자 전반적인 경제 사정은 매우 좋지 않았다. 유영철의 지능은 보통이었고 편협한 성격으로 다른사람과 잘 융화되지 못했다. 자신의 요구 사항이 반영되지 않으면 참지 못하고 격분하는 반사회적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예체능계에 소질이 많았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육상 단거리 달리기를 했고, 투포환과 기계체조를 하면서 지속적인 체력단련을 통해 손목의 힘과 악력을 길렀고 장차 화가가 되는 꿈도 꿨지만 색약 등의 이유로 예고 입학이 좌절되어 공고에 입학했다. 이후 절도 사건으로 구속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학교도 자퇴하고 전형적인 ‘비행청소년’이 된다.

기독교에 불만
신의 존재 부정

유영철은 친구의 소개로 여자친구를 만나게 된다. 사귀던 도중 특수절도죄로 구속되고 징역 10월을 선고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내심 기대했지만 실형을 선고 받는다. 법정에서 손에 쥐고 있던 나무 십자가를 부수는 등 자신이 믿어왔던 기독교 신앙에 회의를 품고 나중에는 노골적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조금씩 악마가 돼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친구와 어머니의 집에서 동거하며 혼인신고까지 하면서 살게 되는데 또 다시 절도죄로 구속된다.

출소 후 경찰관 신분증을 위조해 퇴폐업소를 상대로 금품을 갈취 하는가 하면 음화판매로 벌금 300만원형을 받기도 했다. 절도죄로 수배생활을 하던 와중에도 같은 범행을 반복하다가 징역 2년형을 선고 받는다. 이후 미성년자를 강간하는 사건으로 3년5개월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때 혼인신고를 했던 여자친구에게 재판상 이혼을 당하게 된다.

이혼 재판 과정에서 모욕적인 욕설까지 듣게 되면서 그녀에게 느낀 환멸감과 극도의 배신감 때문에 여자친구와 아들까지 살해할 마음을 품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다른 사람들을 살해하기로 마음 먹는다. 교도소 벽에 출소 후 죽일 사람의 숫자까지 기재했다.

2003년 드디어 희대의 악마이자 살인마인 유영철이 탄생하게 된다. 출소 후 어머니의 집에 머물면서 과도로 큰개를 찔러보는 살인 실험을 한다.

피만 많이 나올 뿐 곧바로 죽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 유영철은 둔기로 머리를 강타하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곧바로 쓰러트릴 수 있어 보다 효과적인 살인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만의 범행 도구를 특수 제작 하게 된다. 공사장에서 자루가 긴 해머와 짧은 장도리 자루를 이용해 4kg짜리 해머를 제작하고 위협용 잭나이프 칼 한자루와 범행 시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세무장갑, 목장갑을 준비한다.

준비한 범행도구만을 보더라도 주도면밀하고 계획적으로 사람을 살해하려고 마음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디어 범행 준비를 끝내고 주로 노약자와 부녀자들만 집에 있는 출근 후 오전 시간에 범행할 것을 결의하는 계획을 세운다.

2003년 9월24일 유영철에 의한 첫 피해자가 발생했다. 그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소재 A(72)씨의 단독주택 담장을 넘어 정원으로 침입했다. 집안의 동태를 살피면서 코팅 목장갑으로 갈아끼고 잭나이프를 든 채 현관문으로 들어가 거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잔인한 수법·사이코 성향 자세히 기술
주도면밀 범행…소름끼치는 사건의 전말

2층 각 방문을 열어 젖혀 유영철을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A씨를 준비한 재크나이프로 찔러 쓰러트린 후 짧은 해머로 머리를 여러 차례 내리쳤다. A씨의 옆에 있던 피해자 B씨가 장롱속에서 돈을 꺼내주려고 하자 “내가 돈 때문에 그런거 같아?”라며 해머로 B씨의 머리를 내리쳐서 살해했다.

2003년 10월9일에는 서울 종로구 구기동 소재 C(85)씨의 단독주택에 담장을 넘어 정원으로 침입해 C씨를 발견하고 재빨리 해머로 머리를 내리쳐 쓰러뜨린 후 계단을 통해 1층 거실로 내려오던 D(60)씨의 배를 발로 걷어 차 소파 쪽에 밀쳐 넣고 해머로 머리를 수회 내리친다. 뒤늦게 인기척을 듣고 계단을 내려오던 E(35)씨도 2층 복도로 끌고 올라와 두개골이 부서져 뇌가 빠져 나올 정도로 머리를 내리쳐 살해했다.

살인에 맛들린 유영철은 교회 또는 성당 부근의 주택에 침입해 2003년 10월16일 피해자 F씨를, 2003년 11월18일 피해자 G씨, H씨를 같은 방식으로 살해한다. 강도범의 소행으로 위장하기 위해 금고문을 훼손 하던 중 사용하던 전지가위가 튀면서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 마디부분이 베여 금고와 방바닥에 피가 떨어졌다. 자신의 피로 인해 범행이 발각될 것을 우려한 유영철은 피를 없애기 위해 집안에 불을 지르기로 마음먹고, 피해자들이 쓰러져 있는 1층 안방으로 내려와 주방에 있던 라이터로 신문지와 옷가지에 불을 붙였다.

범죄는 더욱 더 대담해졌다. 2003년 11월 말 서울 마포구 신수동 소재 그의 오피스텔에서 컴퓨터 스캐너 장비를 이용해 서울지방경찰청장 명의의 공문서인 경찰관 신분증을 위조했다. 2004년 2월9일 인천 남동구 간석동 오거리 육교 부근의 모텔방에서 전화로 불러낸 윤락녀인 피해자 I씨에게 위조된 경찰관 신분증을 제시하고 “윤락행위를 했으니 감방에 보내겠다”고 겁을 주며 수갑을 채웠다.

이어 전화로 모텔까지 데려다 준 사람을 위 모텔로 유인하도록 시켜 전화연락을 받고 온 피해자 J씨에게까지 위조된 경찰관 신분증으로 속여 29만원을 갈취했다. 2003년 저질렀던 4차례의 살해사건에 대해 꼬리가 잡히는 듯 했다.

교도소 벽에
죽일사람 적어

버팔로 신발을 신은 사람에 의한 연쇄살인으로 추정된다고 언론에 보도됐다. 유영철은 자신이 검거될 것을 걱정해 사건 당시 착용했던 버팔로 신발을 폐기하고 거주지도 서울 마포구 신수동 고시원에서 같은 동 오피스텔로 옮겼다. 고립, 불안감이 팽배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에게도 잠시 동안의 안정기간은 있었다. 2003년 12월께 전화방을 통해 만나게 된 K씨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잠시 심리적인 안정을 가졌으나, K씨가 그의 과거 범죄전력 뿐만 아니라 그의 직업, 학력, 가족관계에 관한 내용이 거짓말이었음을 알게 되고, 또 2004년 2월께 K가 다른 남자와 만났던 것에 대해 심한 말다툼을 한 후 K씨의 “성관계를 맺으려면 선불을 달라”는 말에 격분해 몸을 묶고 강제로 성관계를 맺다 그녀의 목을 심하게 조르는 등의 폭행을 가하면서 K씨는 유영철과의 만남 자체를 극도로 기피하게 됐다.
 

유영철은 K씨의 휴대폰으로 문자메세지를 집요하게 보내면서 재결합을 시도했으나 K씨는 휴대폰을 교체하고 거주지도 옮겼다. 연락 자체를 두절하자 그녀에게 매우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K를 살해하고 싶은 마음이 치솟은 그였지만 휴대폰 통화내역 등 자료가 남아있어 곧바로 범인으로 검거될 가능성이 높아 포기한다. K씨에 대한 복수의 불길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K씨와 동종 직업에 종사하는 전화방이나 출장마사지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상대로 범행을 계획 한 것이다.

영업특성상 실종신고를 할 가능성이 적고 실종이 되더라도 찾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K씨로부터 당한 배신감을 보상받기로 마음먹었다. 인터넷 자료검색을 통해 토막살해 장면 등을 집중적으로 내려받아 살인방법을 숙지할 뿐만 아니라, 토막살해 후 사체 암매장을 쉽게 하기 위해 미리 쇠톱, 가위, 망치, 잭나이프 등 살인도구를 준비한 그는 다음 범행상대를 찾아 나섰다.

한방에 보내려
4kg 둔기 제작

그는 2004년 3월15일 서울 서대문구 소재 전화방에서 그 곳으로 전화를 걸어온 L씨와 만나기로 하고 약속장소로 갔다. 돈을 더 줄 테니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그의 말에 L씨는 의심 없이 그의 집으로 이동한다. 성관계를 한 후에도 피해자를 돌려보내지 않자 이상함을 느낀 L씨가 도망을 가려 하자 그 자리에서 L씨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살해 후 사체 운반 시 부피가 크면 발각될 것을 염려해 사체의 형체를 알아 볼수 없을 정도로 토막을 내고 잘게 부숴 10개 정도의 검정비닐봉지에 나눠 담았다. 서울 마포구 대흥동 소재 뒷산 등산로에 삽으로 구덩이를 파서 피해자의 사체를 은닉하기까지 했다. K씨로 시작된 유영철의 그릇된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4년 4월에는 전화방에서 알게된 M씨를 살해하고 피해자의 신원확인이 불가능 하도록 사체를 절단해 구덩이를 파서 묻어 피해자의 사체를 은닉했고, 2004년 5월에는 서울 서대문구 소재 피시방에서 인터넷으로 속칭 ‘조건만남’ 쪽지를 보내고 있는 피해자 N씨에게 접근해 살해하고 같은 방법으로 피해자의 사체를 숨겼다.

2003년부터 2004년까지 그가 살해한 사람의 수는 21명. 위와 같은 방법을 주로 사용했지만 얼굴, 엉덩이 부위 등을 수회 베고, 손목을 절단하는 등 기이한 행동도 일삼았다. 살해된 피해자들의 공통점은 교회나 성당 근처에 사는 노약자나 부녀들, 그리고 출장 마사지업소에서 일하는 윤락녀라는 점이었다.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것들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면 이런 식으로 반사회적인 성격을 표현했던 것이다.

2004년 7월15일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기동수사대는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에 출장마사지사 등 부녀자들을 유인, 감금해 소지품을 절취하거나 그 부녀자들을 연쇄 살해한 혐의가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리고 2004년 6월경 살해당한 출장마사지사의 핸드폰 등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 현장에서 확인됐다.

과도로 개 찔러보는 살인 실험
죽지 않자 범행 도구 특수제작

이렇게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의 살인 행각은 막을 내렸다. 체포후 그는 절도, 감금, 부녀자 살인, 부유층 주택 살인사건 혐의 등에 관해 자백과 부인을 반복하다가 간질증세가 있는 양 연극을 펼치기도 했다. 경찰관이 수갑을 풀어 주자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뛰쳐나가 재차 체포됐다. 유영철은 호송되면서도 간질 발작 흉내를 내거나 다리가 아프다며 비명을 지르는 등 갖은 술수를 다 부렸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다시 검거된 유영철은 묵비권을 행사하는 등 제대로 진술하지 않았다. 보고를 받은 수사부장은 직접 유영철을 신문하기로 결정했다.

서울경찰청 수사부장. 경찰의 별에 해당하는 경무관으로 거대 서울경찰청 형사들의 최고 우두머리가 직접 피의자 신문을 하겠다니, 위험부담이 매우 큰 모험이었다. 만약 수사부장이 신문해도 별 소득이 없다면 위신이 구겨지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방법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는 부담을 안은 결정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유영철에게도 전달됐다. 유영철은 매우 과시욕이 강하고 우쭐대기 좋아하는 심리적 특성이 있는 터라 서울 경찰 최고위 형사 간부가 직접 자신을 신문하러 온다는 사실에 흥분했다고 한다. 한국의 살인 사건 분석과 프로파일링을 주제로 범죄학 박사 학위까지 받은 김용화 수사부장이 차분히 추궁하자 유영철은 이내 자백하기 시작했다. 우선 4건의 부유층 노인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임을 자백했다.

자백 내용이 구체적이고 상세하며 범인이 아니면 모를 이야기들을 하거나 현장 상황을 정확히 재현해 그리는 점 등으로 보아 범인이 분명했다. 진술에 뒤이은 현장 답사에서도 정확히 피해 주택들을 찾아내고 사건 현장의 처음 모습을 재현해냈다.

11시간 도주하는 동안 증거가 될 만한 물건들을 버렸다는 진술에 따라 수색한 결과 유영철의 하숙집에서 멀지 않은 골목길 구석에서 범행에 사용한 해머가방도 발견해 수거했다. 나중에 이 해머의 손잡이 플라스틱 안쪽에서 피해자의 혈흔을 발견했다.

살인에 맛들려
총 21명 살해

이상한 것은 이미 4건의 연쇄살인을 자백한 유영철이 출장 마사지사 실종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모르쇠로 일관한다는 것이었다. 수사부장은 계속해서 유영철이 소지하고 있던 여성용 발찌와 손목시계, 여분의 휴대전화에 대해 그 출처를 집중 추궁했다. 꿋꿋하게 거짓말에 거짓말을 거듭하던 유영철은 마침내 스스로의 거짓말에 지쳐 모든 걸 털어놨다. 10개월 동안 총 21명을 살해한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은 그 해 11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ktikti@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영화 <추격자> 실존인물은…끝나지 않은 유영철 트라우마 

영화 <추격자>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진 보도방 업주 노모(42)씨가 마약 혐의로 또 다시 철창 신세를 지게 됐다. 지난 10월 15일 서울북부지방법원은 마약을 구입해 투약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노씨에 대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앞서 노씨는 필로폰과 대마를 여러 차례 구입해 투약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바 있다. 

지난 2004년 연쇄살인범 유영철 검거에 결정적 도움을 준 노씨는 “유영철 검거 과정에서 트라우마가 생겼고 이에 시달렸다”고 호소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같은 혐의로 2001년부터 2013년까지 8차례 처벌을 받았고, 2005년 이후엔 유영철 검거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세 번이나 양형 결정에 선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노씨는 유흥업소를 운영하던 지난 2004년 자신의 업소 여성이 실종되자 경찰에 신고한 뒤 자신도 추적에 나섰으며, 결국 다른 업주들과 함께 살인마 유영철을 붙잡아 경찰에 넘기고 포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노씨 인생에 치명타를 남겼다. 이전에도 마약에 가끔 손을 댔던 그는 현장 검증 과정에서 끔찍한 시체들을 직접 목격한 후 트라우마로 마약중독자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마약에 의존하던 노씨는 여러 차례 교도소를 드나들었다. 2010년에는 선처를 받기 위해 중국 폭력조직 흑사파가 국내 조직에 마약을 건네고 있다는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노씨의 재판에서 배심원은 만장일치로 유죄 의견을 냈다. 재판부는 배심원의 의견인 징역 3년형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자신의 범행을 국가기관의 탓으로 돌리는 등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엄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다만 과거 검거에 기여한 경력이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고 가족과 지인들이 선처를 탄원하고 있다는 점 등을 참작했다고 덧붙였다.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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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혁만 아는 보수대연합

장동혁만 아는 보수대연합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지방선거를 53일 앞두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자 일각에선 “장 대표가 지방선거 패배 후 부정선거론을 제기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장 대표가 취임 직후 구상했던 보수 대연합은 이미 무너졌다. 그의 구상은 왜 무너졌을까? 그리고 누가 그다음을 노리고 있을까?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지난 11일 미국으로 출국했다. 장 대표는 미국 국제공화연구소의 초청을 받았다. 원래는 지난 14일부터 2박4일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초청 측의 요청으로 3일 앞당겨 출국했다. 누가 뭐래도 앞당긴 출국 장 대표는 지난 1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저는 세계의 자유를 지키는 최전선 워싱턴 DC로 출발했다”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코 외면할 수 없기에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6·3 지방선거를 53일 앞둔 시점에서, 그것도 일정을 더 늘린 출국이었다. 그 스스로는 “6·3 지방선거는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는 거대한 전선이 될 것”이라며 “지방선거를 앞둔 현재의 분열과 고통의 시간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고, 위기의 대한민국 앞에서 우리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당내 일각에선 비판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김재섭 의원은 지난 14일 SBS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출연해 “너무 갑작스럽게 비밀스럽게 가셔서 명분을 모르겠다”며 “선거를 코앞에 앞둔 상황에서 공천도 마무리가 안 됐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배현진 의원도 같은 날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지금 가장 우선으로 해야 할 것은 선거가 어려운 상황에서 뛰어야 하는 후보들이 단 하루라도 낭비하지 않도록 후보를 빨리 결정지어 주는 일”이라며 “그걸 포기하고 미국에 간 것은 이번 선거가 이미 어렵게 된 마당에 포기하는 심정으로 차라리 다음에 어떤 정치적 행보를 위해서 지지층 결집을 목적하려고 간 것 아니냐”고 의심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도 지난 11일 경기 수원 방문 도중 기자들을 만나 “미국에 지방선거 표를 찍어줄 유권자가 있느냐”며 “리더가 이번 지방선거를 포기한 거 아니냐는 느낌을 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 대표는 이런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은 지난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장 대표와 국민의힘 김민수 최고위원이 미국 국회의사당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공개했다. 김 전 최고위원은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비판했다.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은 지난 9일 KBS 라디오 <세상의 모든 정보 윤인구입니다>에 출연해 “국제공화연구소의 중요한 목적·역할 중 하나는 각국 부정선거 감시”라며 “장 대표가 그에 대한 기법을 배우고 와서 지방선거 패배 후 부정선거 때문에 졌다고 얘기하려는 게 아니냐”고 주장했다. 친한(친 한동훈)계인 국민의힘 윤희석 전 대변인도 같은 날 SBS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출연해 비슷한 주장을 했다. 보다 못한 <조선일보>는 지난 10일 국제공화연구소 근무 경력이 있다는 익명의 워싱턴 DC 외교·안보 싱크탱크 연구원의 발언을 인용해 “개발도상국·후진국의 선거 도중 발생할 수 있는 부정을 감시하는 국제공화연구소를 단순히 부정선거론 연구기관으로 매도하는 것은 상당히 모욕적인 수사”라면서 장 대표를 두둔했다. 장 대표는 지난해 8월 당 대표 당선 과정에서 대여 투쟁과 단일 대오를 강조했다. 선출 직후 진행된 기자회견에서도 “단일 대오로 뭉쳐 제대로 싸우는 야당의 모습을 보여드리겠다”며 “지금부터 단일 대오에서 이탈해 내부 총질하는 분들과 당론을 계속 어기는 분에 대해서는 결단하겠다”고 주장했다. 선거 앞두고 미국행…일각선 “부정선거론 배우러?” 극복 못 한 모순…당내 한 제외하고 당외 이와 연대? 이후 진행된 것은 한 전 대표·김 전 최고위원 제명과 배 의원 당원권 1년 정지 등 친한계 일원들에 대한 징계였다. 이들 중 배 의원은 법원에 징계 효력 정치 가처분을 신청했고, 지난달 인용돼 징계 효력에서 벗어났다. 친한계 구성원들은 다수의 방송 시사 프로그램에 활발하게 출연하면서 이익과 불이익을 동시에 전달하고 있다. 원외 인사들도 방송 출연을 통해 존재감을 유지하면서 이들의 의견을 왕성하게 전달한다. 하지만 장 대표 등 친한계가 아닌 국민의힘 인사들에 대해서도 공격적인 의견을 밝히기 때문에 비판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장 대표는 지난해 9월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면서 “방송에서 의견을 가장해 당에 해를 끼치는 발언을 하는 것도 해당 행위”라며 “국민의힘을 공식 대변하는 인물임을 알리는 패널 인증제를 시행하겠다”고 강조했다. 그가 한 전 대표 대신 선택한 연대 시도 대상은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였다. 지난 1월엔 이 대표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공천 헌금 의혹·통일교 게이트 특검법 공동 추진을 합의했다. 지난달엔 지방선거를 앞두고 대여 투쟁 방안을 논의했다. 이에 대해선 장 대표가 이 대표와의 연대를 통해 보수 대연합을 시도한 것이라는 해석이 다수 나왔다. 하지만 이 대표는 “공조와 연대는 다르다”면서 선거 연대에 대해선 선을 긋고 있다. 개혁신당 지지자들도 이 대표가 국민의힘에서 징계를 받고 대표직에서 물러나 개혁신당을 창당하기까지의 과정을 토대로 국민의힘에 대한 강한 반감을 유지하고 있다. 당내 경쟁자와의 투쟁을 위해 불미스럽게 당을 나간 외부 인사와의 연대를 추구하는 그림에 대해선 한동안 “모순 아니냐”는 지적이 이어졌다. “보수 대연합은 당내 갈등을 봉합한 후 추진하는 것이 합리적인 순서”라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장 대표는 당선 과정에서 구 친윤(친 윤석열)계와 강경 보수 성향 윤 어게인 세력의 지원을 받았다. 이를 토대로 장 대표의 구상을 확인할 수 있다. 장 대표는 친한계를 국민의힘에서 내보낸 후 구 친윤계·윤 어게인을 묶어 강경한 선명 보수 야당을 만들어 그 위에 군림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구 친윤계 중 상당수는 대구·경북·강원 등 국민의힘의 텃밭으로 통하는 지역 내 유지들과 밀착해 정치활동을 이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 어게인 세력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를 두둔하면서,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반대했다. 두 세력에 대해선 “같은 ‘보수’라는 테두리 안에 있을 뿐, 성향이 전혀 다르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구 친윤계는 언론 노출을 가급적 피하면서 지역구 관리에 공을 들이는 토착 보수 성향을 보인다. 반대로 윤 어게인 세력은 대규모 집회 개최·유튜브 활동 등 강경한 의견을 왕성하게 표현하는 것에 주력한다. 실패한 연대 이대로 포기? 아울러 구 친윤계는 윤 어게인 세력과 밀착하는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지난달 국민의힘 의원 전원 명의로 발표된 절윤(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절연) 선언에도 참여하는 등 윤 전 대통령을 이미 지웠다. 반대로 전한길씨 등 윤 어게인 세력은 절윤 선언을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장 대표에 대해서도 독한 비난을 이어갔다. 장 대표로선 지난해 당 대표 선거 출마 이후부터 구상했던 “구 친윤계·윤 어게인을 묶는다”는 목표가 어긋난 것으로 보여질 여지가 있다. 일각에선 국민의힘 지방선거 패배와 장 대표 체제 붕괴에 대비해 ‘포스트 장동혁’을 거론하고 있다.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거친 후 전당대회를 열어 새 지도부를 선출할 가능성이 언급되고 있다. 현 시점에서 포스트 장동혁에 도전할 수 있는 인사로는 ▲오세훈 서울시장 ▲한 전 대표 ▲신동욱 수석최고위원 등이 거론되고 있다. 오 시장은 지난달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 공천 1차 마감 시한까지 신청하지 않았다. 이어 당의 인적 쇄신·절윤 선언 실천·혁신 선대위 설치 등을 요구하면서 장 대표와 대립각을 세웠다. 오 시장은 추가 공모 기간 내에 공천을 신청했지만, 이때까지도 “서울시장 출마가 아니라 장 대표 체제 붕괴 후 당권에 도전하려는 게 아니냐”는 말이 돌아다녔다. 따라서 오 시장의 선거 당락을 떠나 그가 당권에 도전할 가능성은 여전히 배제되지 않는다. 서울시장 5선에 성공하더라도 당 대표 출마 및 당선 후 겸직을 막을 법적 제한은 없다. 한 전 대표는 지난 14일 전입신고를 하는 등 부산 북갑에서 재보궐선거에 출마할 가능성이 유력해졌다.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로 확정된 전재수 의원은 이곳에서 3선을 했고, 현재 부산 내 유일한 민주당 의원이다. 한 전 대표가 이곳에서 당선돼 민주당의 부산 내 근거지를 소멸하면 국민의힘에 복귀해 다시 당권·대권에 도전할 명분이 붙는다. 신 최고위원에 대해선 지난해 12월부터 “포스트 장동혁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장 소장은 지난해 12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국민의힘 내 대구·경북에 지역구를 둔 몇몇 의원이 장 대표로는 안 되겠다면서 신 최고위원이 비대위원장을 맡으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고 주장했다. “구 친윤계로서는 오 시장도 구 친윤계와 성향이 다른 수도권 내 보수 성향 엘리트에 속해 부담스러워할 것이고, 오랫동안 갈등했던 한 전 대표는 말할 것도 없다”는 분석도 돌아다녔다. 신 최고위원에 대해선 한동안 서울시장 출마설도 돌았지만, 실제로 출마하지는 않았다. 3인방 행보는? 성향이 전혀 다른 세력을 조율하면서 그 수장으로 군림하는 데에는 ▲전략적 경계 설정 및 수용 ▲고도화된 소통 ▲정치적 영향력 행사 기술 ▲유연한 지도력 등 고난도 정치술이 필요하다. 이 정치술을 갖추고 세력 조율을 시도했던 대표적인 정치인은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였다. 효종·현종은 어느 한 세력이 일방적인 우위를 점하지 않는 방향으로 서인·남인의 당쟁을 관리했다. 하지만 2대 독자로서 강한 정통성과 고집 센 성격을 가졌던 숙종은 주기적으로 환국을 일으켜 한 세력에 일방적으로 정권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서인은 학문 방향·남인에 대한 대응 등 논점에서 의견이 엇갈려 노론·소론으로 갈라졌다. 영조가 즉위했을 때는 노론·소론의 당쟁이 극대화됐다. 이 때문에 소론·남인 강경파가 영조를 인정하지 못해 군사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의 난이 발생했다. 이후 영조가 추진했던 탕평책은 노론·소론의 온건파만 조정에 남겨놔 균형을 유지하는 완론 탕평이었다. 이 때문에 종전엔 없던 탕평파라는 당파가 탄생했다. 이들은 영조의 완론 탕평에 협조해 살아남았다. 하지만 탕평파에는 영조의 사도세자 살해를 끝까지 막지 못했다는 정치적 약점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탕평파의 핵심이었던 사도세자의 처가 풍산 홍씨는 세손 정조의 정치 보복을 우려해야 했다. 정조의 즉위를 도왔던 세력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처가 경주 김씨 가문이었다. 결국 영조의 완론 탕평은 유교에서 금기시하는 척신 정치로 나아갔다. 정조는 즉위 초엔 홍인한·정후겸 등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세력의 핵심을 숙청한 후 측근 홍국영에게 전권을 맡겼다. 그러다가 홍국영이 과도한 권력욕을 드러내자 숙청한 후 영조와 정반대로 준론 탕평을 추진했다. 준론 탕평은 각 당파의 강경파를 전면에 내세워 당파마다 선명한 당론을 내세우게 한단 것이다. 이는 곧 “영조 이전의 정치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고, 각 당파에 스스로 생각하는 의리를 명확하게 밝히라고 요구하는 체제였다. 그들의 의리 중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선택하는 심판 겸 절대자는 정조 자신이었다. 정조가 홍국영 숙청 이후 선택한 정국 관리 대리인은 소론 강경파 겸 시파였던 서명선이었다. 이어 그를 견제하기 위해 영조 대에 사실상 조정에서 사라졌던 남인을 조정에 편입시키려고 남인 영수 채제공에게 고위직을 부여했다. 아울러 자신의 스승이었던 김종수와 초강경파인 심환지 등 노론 벽파와 정민시 등 노론 시파도 조정에 공존시켰다. 각 당파의 수장들을 골고루 챙겨 자신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한 경쟁을 시킨 것이었다. 각 당파의 강경파만 엄선해 조정에 공존시켜야 했기 때문에, 정조의 갈등 조정 업무는 매우 많았다. 김종수는 이따금 갈등을 일으켰다. 정조는 매번 적당한 선에서 김종수를 처벌하면서 그 갈등을 무마했다. 정조도 김종수에 대해선 “위험에 직면하면 위험에서 건져주고, 거의 죽게 되면 죽음에서 구원해 줬다”고 말했다. 선거 패배하면 주목받을 ‘포스트 장’ 누구? 정조의 준론 탕평 갖가지 비결…누가 갖췄나? 서명선은 공개적으로 “저는 채제공과 의리상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고, 채제공이 역적이 아니면 저는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명선은 이인좌의 난 이후 남인에 대한 감정이 격렬해진 소론 일각의 정서를 조정에서 공론화했다. 그런데 막상 서명선은 심환지로부터 탄핵당했다. 서명선이 영의정이 된 것에 심환지가 불만을 품은 것이었다. 그러자 정조는 크게 분노해 김종수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데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줄까 봐 두렵다”면서 벽파를 ‘우리 벽패는’이라고 일컫는 등 심환지에게 수많은 밀지를 보냈던 사람은 정조였다. 심환지는 보는 즉시 태워 없애야 하는 밀지를 보관해 후세까지 전하게 했다. 이 밀지 모음이 ‘정조 어찰첩’이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밀지를 보내 정국 관리 구상을 밝히면서 심환지에게 구체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등 막후에서 ‘정국’이란 거대한 연극의 감독 겸 주연을 맡았다. 이것으로도 부족해 정조는 세자에게 양위한 후 스스로 정예부대로 육성했던 장용영을 데리고 수원 화성으로 물러앉아 조정을 감독하는 원격 통치를 구상했다. 정조가 정했던 시기는 1804년이었지만, 정조는 1800년 훙서했다. 정조가 구상했던 준론 탕평은 정조 말고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정조는 할아버지의 극진한 총애를 받을 정도로 공부에 몰두해 즉위 후엔 스스로 성리학의 정통이자 스승을 자처했다. 이는 신하들이 임금을 가르치는 경연을 없애고, 임금이 신하를 가르치는 초계문신제를 채택한 것에서 확인된다. 아울러 서명선·김종수·정민시 등은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가까이 지내면서 사조직 동덕회를 조직할 정도로 측근이었다. 조정 내부엔 정조의 준론 탕평에 동조하는 시파가 있었고, 정조 어찰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벽파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조정 외곽엔 영남 남인 1만명이 연명해 정조의 사도세자 복권을 시도하고 정조의 준론 탕평에 호응하는 등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친위 무력 기반 장용영도 있었다. 이것으로도 부족해 밀지를 주고받으면서 막후에서 정국을 설계하면서 이끄는 부지런함까지 갖췄다. 꿈꾸는 잠룡들 과연 국민의힘은 서로 전혀 다른 구 친윤계·친한계·강경 보수를 모두 조율할 수 있는 수장을 배출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선 모두의 인정을 받는 월등한 실력과 부지런함을 갖춰야 한다. 장 대표가 지금이라도 이를 소화할 수 있을지, 아니면 새로운 누군가가 나타날지, 보수 성향 유권자의 가슴은 타들어 가고 있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