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럭셔리 ‘SNS 가면족’ 실태

남의 인생 통째로 복사하는 사람들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언젠가부터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는 폭넓은 소통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자랑의 공간으로 변질되고 있다.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라고 말한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FC 퍼거슨 감독의 명언이 떠오를 정도다. 자신의 일상을 자랑하는 건 그나마 양호한 편에 속한다. 최근 들어 타인의 사진 등을 무단으로 도용하면서 자신의 일상으로 둔갑시키는 이들이 적지 않아 논란이다. 일명 ‘SNS 가면족’의 실태를 알아봤다.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트위터, 인스타그램…’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대표적인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들이다. 보통 지인들의 소식은 페이스북으로 받아보고 가족과 친구들의 안부는 카카오스토리로, 뉴스 속보 및 사회 이슈는 트위터로, 취미생활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주고 받는다.

컨트롤 C
컨트롤 V
 
이 같은 SNS에서 인기를 끌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활동이 필요하다. ‘좋아요’ ‘팔로워’ 등을 늘리고자 한다면 뿌린 대로 거둔다는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 법칙에 충실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만큼의 관심을 쏟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입지가 달라진다. 그러나 남의 일상을 그대로 복사해 자신의 것인 냥 활동하는 이들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일약 SNS 스타로 급부상하게 된다. 
 
직장인 장모(28·여)씨는 결혼을 앞두고 있는 친구와 특별한 추억을 남기고 싶어 단짝친구 3명과 함께 서울 시내 호텔에서 제공하는 ‘여성들을 위한 파티’ 패키지 상품 중 하나를 선택,  ‘브라이덜 샤워(신부파티)’를 준비했다. 장씨는 결혼하는 친구와 들러리들이 입을 의상을 빌리고 화장을 한 뒤 근사한 음식과 와인을 곁들이며 파티를 즐겼다.
 

장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페이스북에 파티 사진을 업데이트 했다. 와인 잔을 부딪히는 사진, 다양한 음식 사진, 꽃 사진 등 서너 장을 올렸다. 브라이덜 샤워 게시물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그리고 며칠 뒤 한 친구로부터 황당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장씨가 올린 사진 일부를 어떤 여성이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친구의 말을 들은 장씨는 해당 페이스북을 찾았다. 장씨의 사진을 도용한 여성은 브라이덜 샤워가 아닌, ‘친구 생일파티’라는 제목으로 글을 시작해 “사랑하는 ○○의 생일을 기념하며…”라며 와인 잔 사진을 공개했다. 이 게시물에는 부러워 하는 목소리가 가득했다.
 
 
장씨는 이 여성에게 ‘내 사진을 왜 도용하냐’며 항의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이 여성으로부터 온 대답은 ‘퍼간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찍은 사진이 아니라고 인정했지만 장씨의 페이스북에서 퍼가지는 않았다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놨다.
 
대학생 이모(23)씨도 장씨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이씨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사진, 카페에서 커피와 함께 책을 펼치고 있는 모습 등 자신의 일상을 인스타그램에 공개하면서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그러던 중 이씨는 자신이 직접 촬영해 보정까지 한 사진을 다른 사람이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사진을 훔친 건 다름 아닌 자신의 팔로워였다.
 
해당 계정에는 이씨가 찍은 사진이 똑같이 올라와 있었다. 다만 내용은 달랐다. ‘오빠랑 스테이크 써는 날’ ‘시험공부 빠샤’ 등 이씨가 사진을 올리던 당시 상황과는 다른 설명이 들어가 있었다. 화가난 이씨는 팔로워에게 댓글을 달았다. “이거 제가 찍어 올린 사진 같은데요?” 댓글을 달자마자 이씨는 곧바로 차단됐고 팔로워의 계정은 비공개로 전환됐다.
 
이 같은 사례는 그나마 평범한 편에 속한다. 진정한 ‘SNS 가면족’은 특정인의 사진을 꾸준히 복사하면서 인기를 얻다가 얼짱 반열에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사진의 주인은 자신이 얼짱이 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 듣고 알게 된다. 이 같은 일은 우리 주변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다.

사진 무단도용

가면 쓴 SNS
 
신고 방법은 SNS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페이스북에서는 사칭 계정의 타임라인에 들어가서 ‘팔로우’ 버튼 옆 도구 메뉴에서 ‘신고/차단’을 누르면 된다. 신고하려면 데스크탑 페이스북 웹사이트에 접속, 신분증을 스캔해 페이스북에 보내면 된다.
 
카카오스토리에서는 게시물 오른쪽 위 아이콘을 누르면 ‘신고하기’가 나온다. 계정을 신고하고 싶다면 해당 계정으로 들어가 오른쪽 위 아이콘에서 ‘신고하기’ 메뉴를 찾으면 된다. 트위터에서는 사칭 신고 페이지에 신고하면 된다. 트위터는 신고 내용이 이용약관을 어겼는지 확인하고 가짜 계정을 정지하거나 해지하는 조취를 취한다.
 
 
SNS 사진도용 문제가 점차 확대되면서 애초에 사진에 워터마크를 삽입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워터마크는 텍스트, 이미지, 비디오, 오디오 등의 원본 데이터에 본래 소유주만이 아는 마크(Mark)를 사람의 육안이나 귀로는 구별 할 수 없게 삽입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워터마크를 할 경우 흐린 바탕무늬나 로고와 같은 마크가 디지털 이미지 원본에 삽입된다. 사용자가 이미지를 보거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데 전혀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도 복제를 방지할 수 있다. 기존의 예술품에 화가의 도장이나 서명을 넣어두던 낙관이 디지털 낙관으로 그 형태가 바뀐 것이다. 그러나 워터마크가 능사는 아니다. 워터마크를 제거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폭넓은 소통’ 본래 기능 상실
어느샌가 자랑공간으로 변질
 
이해준 감독의 영화 <김씨표류기>는 SNS 신상도용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극중 정려원(김씨 역)은 다른 여성의 미니홈피에서 온갖 사진을 가져다가 자신의 미니홈피를 꾸민다. 아름다운 정려원의 모습을 본 미니홈피 친구들은 그를 칭송하며 사심을 드러낸다.
 
이에 도취된 정려원은 자아를 잃고 사진 속 여성에 빙의한다. 현실에서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생활로 인해 한없이 초라한 그지만, 온라인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화려한 여성으로 통했다. 그러나 가면 쓴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사진 속 주인이 나타면서 환상은 물거품이 됐다. 독방에 있던 정려원은 현실에 눈을 뜨고 진짜 소통을 찾아 헤맨다.
 
지난해에는 한 유명인의 평범하지 않은 행각에 진실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하모(28)씨는 ‘파워형인간’이라는 닉네임으로 누리꾼들 사이에서 ‘역대급 갑부’ ‘재벌 아들’이라고 불리며 인기 가도를 달렸다.
 
2008년 SBS <스타킹> 팔씨름대회에 출연한 하씨는 범상치 않은 근육으로 건강미를 과시하며 시청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방송 중 MC는 하씨에게 ‘어느 학교를 다녔냐’는 질문을 던졌고 ‘서울대 법학과’가 언급됐다. 속칭 ‘엄친아’였던 것이다.
 
이후 하씨는 국내 유명 패션 정보 인터넷 커뮤니티 ‘디젤매니아(디매)’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부를 자랑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올렸다. 일명 ‘네티즌수사대’가 정리한 글을 보면 하씨는 20억원을 호가하는 부가티베이론 차량 운전대 사진을 올렸다. 의문을 품는 이들에게는 “네, 실제로 탑니다”라고 댓글을 남겼다. 또한 7000만원에 육박하는 프리미엄 휴대폰 베트루(Vertu signature a limited edition) 사진을 올리면서 “전 세계에서 저 색상은 혼자 구입했다”고 자랑했다.

현실은 시궁창

온라인에선 왕
 
또 하씨는 수억원에 달하는 바쉐론 콘스탄틴 시계를 들고 인증샷을 찍었다. 여기에 한 미모의 백인 여성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며 “프리미어리그 첼시 구단주의 아트딜러를 개인 딜러로 고용했다. 업무 능력도 능력이지만 솔직히 미모를 보고 뽑았다”고 말해 남성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이 밖에도 하씨는 “푸틴이 한국에 방문했을 때 자신의 아버지가 독대했다”는 등 일반인으로서는 다소 믿기 어려운 경험을 풀어놓기도 했다.
 
 
이내 하씨는 디매에서 소위 ‘네임드’가 됐고 그의 글에는 언제나 뜨거운 반응이 잇따랐다. 그런데 서울대 출신이라고 밝힌 한 누리꾼이 “학교에서 하씨를 본 적이 없다”며 의혹을 제기하면서 그를 의심하는 이들이 급증했다. 결국 네티즌수사대는 하씨를 추적했고, 결국 하씨의 말 중 일부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일단 하씨는 서울대 법학과 출신이 아니었다. 네티즌수사대는 인터넷상에서 하씨의 아버지가 “명성에 걸맞지 않게 삼수했다. 이번에 또 수능쳤다”라고 적은 글을 찾아냈다. 누리꾼들은 하씨가 노량진 모 학원에서 삼수했고, 실패 후 러시아로 유학을 갔다고 추측했다. 그 근거는 하씨가 러시아 기숙학교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이후 디매에는 하씨 관련 글이 쏟아졌다. 사태가 커지자 하씨는 장문의 해명글을 올렸다. 해명글에서 하씨는 “억울한 부분도 많지만 잘못한 부분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안다”며 “서울대 법학과 출신이 아니다. 몇 차례 해명했었지만 좀 더 명확하게 하지 못한 저의 책임이 있다. 모두 저의 잘못임을 인정한다. 정말 죄송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사진을 찍어 올린) 부가티베이론은 제 것이 아니다”며 “비즈니스 과정 중에 저의 소유라고 할 수 있는 기간이 잠시 있어서 직접 운전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인터넷에 제 소유라고 말을 하진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하씨가 남긴 댓글 중에는 “실제로 탑니다”는 글이 있었다.
 

‘현실 왕따’ 온라인선 인맥왕
마치 내 일처럼…일상 둔갑
타인사진 등 무단도용 늘어
 
해명글을 맺으면서 하씨는 “화려하게 즐기길 좋아하고 남들에게 뽐내길 좋아하는 성격”이라며 “많은 운이 따라 좋은 생활을 하고 있으나, 남들이 생각할 정도로 엄청나게 부자거나 재벌은 아니다. 글을 쓸 때마다 언급했다. (그럼에도 오해를 사게한 점) 죄송하다”고 덧붙였다. 이후 하씨는 해명글을 포함해 그간 남긴 모든 글을 삭제한 후 디매를 탈퇴했다.
 
 
SNS 신상도용 문제로 인해 경찰서를 찾는 이들도 늘고 있다. 지난 10일 서울 강남경찰서 등에 따르면 6일 박모(26)씨가 사이버수사팀을 방문, 신원을 알 수 없는 사기범이 자신의 사진을 도용했다며 수사를 의뢰했다. 미국 유명 한인사이트에서 한 부동산 중개업자가 박씨 사진을 도용해 온라인상에서 사기 행각을 벌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박씨는 “친구로부터 내가 SNS에 올려놓았던 사진들이 부동산 중개인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됐다”며 “그 사람에 대한 댓글을 보니 온라인상에서 상습적으로 중개 사기를 벌여 지탄받고 있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내가 부동산 사기범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고 하소연했다.

당사자 모르는
도플갱어 판쳐
 
앞서 지난 1월13일에는 이모(27·여)씨가 “내 사진 수십 장을 누군가 자기 페이스북에 올려놓고 그 사람이 마치 나인 양 행세했다”며 강남경찰서에 수사를 의뢰했다. 운동하는 사진, 식사하는 모습 등 이씨가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올렸던 일상 사진들이 그대로 도용돼 있었던 것이다.
 
이씨는 “(그 사람이) 그동안 내 행세를 하며 어떤 일을 저질렀을지 몰라 걱정된다”며 “하지만 페이스북 계정이 미국에 있어서 한국에서는 수사가 어렵다고 들었다”며 불안감을 나타냈다. 이처럼 인터넷 등 온라인에서 다른 사람 사진을 자신인 것처럼 꾸미는 등 무단도용 사례가 빈발하고 있지만 형사 처벌은 어려운 상황이다. 사진도용의 경우 초상권 침해로 민사소송은 가능하지만 형사고소는 불가능하다.
 
온라인 평판관리 전문업체 맥신코리아 한승범 대표는 “현직 스튜디어스 사진을 자신의 SNS에 올린 뒤 스튜어디스인 것처럼 행동한 스튜어디스 지망생이 있었다”며 “사진의 주인은 이 여성에게 법적대응을 시도하려고 했고, 당시 이 여성의 부모가 자녀의 SNS 기록을 없애달라고 의뢰한 적이 있다”며 SNS와 관련된 평판관리 의뢰가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대표는 “일반인의 경우 꾸준히 자신에 대해 검색해보는 게 좋다”며 “가급적이면 SNS 상에서는 신변잡기를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그는 “SNS 활동이 지나칠 경우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난 떨어졌는데…’ 질투심에 친구 대학입학 취소
 
인천 서부경찰서는 지난 2일 대학에 수시 합격한 여학생의 개인정보 등을 알아낸 뒤 해당학교 홈페이지에 접속, 입학을 취소시킨 혐의로 A(19)양을 불구속 입건했다. A양은 지난해 12월14일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상 친구인 B(19)양의 수험번호, 보안번호 등을 입력해 건국대 홈페이지에 접속한 뒤 등록예치금 환불을 신청, 이 대학에 수시합격했던 B양의 합격을 취소시킨 혐의를 받고 있다.
 
약 3년 전 싸이월드를 통해 알게 된 이들은 서로 만난 적은 없지만 SNS 등으로 연락하면서 최근까지도 친구로 통하는 사이였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해 건대에 지원했으나 낙방해 재수하던 A양은 B양이 수시합격 사실을 SNS에 올리자 자신의 처지를 비관, 질투심에 B양의 입학을 취소시키기로 작정했다.
 
A양은 수험번호, 계좌번호 등 B양의 개인정보를 SNS에서 수집한 뒤 입시대행 사이트에 전화해 자신이 B양인 척하며 B양의 보안번호를 취득, 학교 홈페이지에서 등록예치금 환불 신청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B양의 계좌로 신청 당일 예치금 30만원이 입금됐으며, B양은 같은 달 24일 입금 내역과 합격 취소 사실을 확인한 뒤 26일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 관계자는 “A양이 B양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합격을 취소시키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이틀이었다”며 “SNS 등 온라인상에 무심코 올린 개인정보가 범죄에 악용될 수 있으니 자신의 신상이나 개인정보가 쉽게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경찰은 대학 측에서 수사 결과를 확인하고 B양에 대한 구제를 결정했다고 전했다. <광>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채 상병 특검’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야권의 4·10 총선 압승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움직임에도 속도가 붙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난감하기만 하다. 부족한 인력으로 인해 수사의 첫 단추도 끼우지 못하는 실정이다. 발 빠른 수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공수처 안팎에서는 정치권의 책임 떠넘기기에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직이 와해되기 직전인데 수사에 속도가 어떻게 나겠느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의 말이다. 요즘 공수처의 분위기는 참혹하다. 해병대 ‘채 상병 사건’으로 반전을 꾀하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특별검사(이하 특검) 목소리가 거세지면서 ‘비교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대통령실 압수수색? 채 상병 사건 특검법 추진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공수처의 분위기는 암흑 상태다. 검찰 제도를 보완해 ‘상설특검’ 명목으로 출범했음에도 ‘늑장·부실’ 수사 논란 속에 결국 사건 기록을 특검에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오는 5월2일, 임시국회를 열어 법안을 표결하자는 분위기다. 법안 통과를 위해서는 국회의장과 여당의 협조가 필요한데, 총선 이후 여당 일각서도 채 상병 특검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표출되고 있다. 채 상병 특검 법안은 지난해 10월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뒤 180일의 숙려 기간을 거쳐 본회의 표결만 하면 언제든 통과할 수 있는 상황이다. 채 상병 사건 수사 갈래는 크게 두 가지다. 무리한 수색 지시 등 책임자를 가리는 본안 수사가 경북지방경찰청서 진행 중이고, 해병대 수사단의 초동 조사에 국방부와 대통령실 관계자가 개입했다는 외압 의혹은 공수처가 맡고 있다. 외압 핵심 피의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주호주대사로 임명돼 부임 후 사퇴하는 과정서 대통령과 법무·외교부 장관의 직권남용 의혹도 공수처에 추가로 고발됐다. 야권이 특검을 통해 밝히려는 사안의 실체는 수사 외압에 집중돼있다. 특검이 통과되면 공수처가 내려던 실적이 특검으로 넘어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민주당은 이 대사 임명 과정서의 추가 의혹도 특검법안을 수정 발의해 포함할 계획이다. 공수처는 수사의 무게를 일부 덜겠지만, 6개월 넘게 진행해온 사건 기록을 외부에 넘긴다는 건 또 다른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다. 특검 추진 본격화…수사팀 의욕 잃어 “이럴 거면 왜 강조하나” 불만 증폭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는 “인력난 때문에 고전하는 상황이다. 내부 얘기를 들어보면 ‘죽을 맛’이란다. 채 상병 사건 수사는 최선을 다하려 했는데 특검이 언급되면서 수사팀의 의욕이 상실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수처법상 수사 범위와 인원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돼있어 실질적인 수사 기능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설명이다. 공수처법은 공수처의 수사 범위를 현직 공직자와 그 가족, 퇴임 3년 이내 전직 고위공직자로 한정하고 있다.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의 인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현재 공수처법이 규정하고 있는 검사와 수사관의 규모는 처·차장 포함 검사 25명, 수사관 40명이다. 공수처법을 추진할 당시 규모는 검사 30~50인, 수사관 50~70인이 제안됐지만 법무부와 국회의 논의를 거치면서 현재 정원으로 대폭 감소했다. 공수처 관계자는 “총선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인원 확대와 관련해 국회와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며 “검사의 신분보장을 위한 임기에 대해서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공수처는 최소한의 행정인력이라도 확보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 달라고 호소한 바 있다. 현행법상 행정인원 정원은 20명인데 지난 2022년 공수처는 행정직원 중 국·과장과 직제 파견자 등 7명을 제외하면 실제 가용인원이 13명에 불과해 수사관을 행정인력에 투입해야 할 상황에 놓인 바 있다. 공수처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수적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특히 공수처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일치시켜 수사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수처는 ‘공수처법상 기소권 없는 사건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연구용역’을 발주하는 등 수사 대상과 기소 대상의 불일치로 발생하는 구속영장 논란을 정리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기도 했다. 인력난 가중화 지금까지 공수처가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한 상황을 보면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지난해 12월 이 전 장관 등을 출국금지했고, 한 달 후인 지난 1월 압수수색에 착수했다. 이후 포렌식과 참고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을 비롯한 국방부 지휘부와 해병대 수뇌부 등에 대한 조사는 특검의 몫이 될 가능성도 있다. 경우에 따라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등으로 특검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공수처와 경찰은 특검법 처리 여부를 주시하며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총선 국면서 논란의 중심에 선 공수처는 수사를 신속하게 진행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입장이다. 공수처 지휘부 공백 상태가 영향을 줄 여지도 있다. 주요 피의자 소환 및 신병처리 등 주요 의사결정을 처장 대행인 부장검사가 결정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다. 만약 국회서 여야가 특검법 처리에 합의하는 수순을 밟으면 공수처도 새로 출범할 특검에 기록을 인계하기 위한 작업에 중점을 둘 가능성이 크다. 현재 본회의에 회부된 안은 민주당이 지난해 9월 발의한 법안이다. 민주당이 지난 3월, 이 전 장관이 주호주대사로 임명된 경위를 수사해야 한다는 별도의 특검안도 국회에 제출했기 때문에 이 두 법안이 병합되는 안도 거론된다. 본회의 회부 안건은 수사기간을 최장 100일로 정하고 있는데, 잔여 수사를 검찰에 이첩하도록 명시됐다. 경찰과 공수처가 시작한 수사가 특검을 거쳐 검찰 손에 넘어가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말도 나온다. 민주당이 3월 발의한 안은 잔여수사 이첩 대상을 검찰과 공수처로 정했다. 단추도 못 끼워 민주당이 특검법 조항 일부를 양보하고 국민의힘이 수사 대상 확대에 동의하는 시나리오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나온다. 이런 과정서 본회의 회부 안이 조정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이 전 장관은 최근 변호인을 통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진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전 장관 측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요청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이 전 장관 측 김재훈 변호사는 최근 공수처에 소환 촉구 의견서를 내고 “이 전 장관은 호주 대사직서도 물러났으나 공수처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며 “공수처의 이런 수사 방기 탓인지 정치권에서는 특검 필요성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에 보낸 의견서에서 “이첩 보류 지시는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국방부 장관은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사건 이첩에 대한 최종 승인권자이므로 인사권자가 인사안 결재 후 이를 취소·변경할 수 있듯이 그 승인을 변경할 수 있다”며 “해병대 수사단장에게 수사 권한이 있다느니, 수사단장에게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이첩 권한이 있다느니 하는 것은 법 규정의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억지”라고 주장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장관이 보고서를 회수하라고 지시하기 전에 대통령실 내선번호로 전화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전 장관은 대통령으로부터 (사단장을 빼라는)지시를 받은 사실이 없다”며 “당시 장관이 군사보좌관과 논의하는 과정서 ‘(초급 간부들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한다면)초급 간부들이 힘들어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눴고 법무관리관실의 법리 검토를 거쳐야 한다고 판단해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고 강조했다. 수사 인원 범위 제한적 법 개정 안되면 도루묵 이어 “재검토한 결과 8월24일 직접적인 혐의가 있는 2명을 경찰에 이첩했고, 해병대수사단 조사기록 원안도 그대로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전 장관 측은 민주당이 추진하는 ‘채 상병 특검’도 비판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의 1차 수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황인데 무엇이 미흡하고 국민적 의혹이 남아 해소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냐”며 “특검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공수처의 신속한 수사와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공수처 수장이 석 달째 공석인 점은 제도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더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종 후보자 지명을 두 달 가까이 미루고 있다. 앞서 국회 공수처장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2월29일 판사 출신 오동운(사법연수원 27기) 변호사와 검사 출신 이명순(연수원 22기) 변호사를 후보로 추천했다. 김진욱 전 처장과 여운국 전 차장이 임기 만료로 퇴임해 공수처가 ‘대행 체제’에 들어간 건 지난 1월 말부터다. 김선규 수사1부장이 처장 대행을 맡고 있지만, 지난달 제출한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아 임시로 대행직을 수행 중이다. 최근 인사위원회서 연임이 불발된 수사1부 소속 김송경 검사(사법연수원 40기) 임기도 만료됐다. 김 대행이 이끄는 수사1부는 공기광 검사만 남게 된다. 별도 조직개편 계획도 없어 수사 부서 1개가 사실상 사라질 위기다. 윤 대통령이 공수처장 후보자를 지명해도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해야 임명이 가능하다. 21대 국회 임기는 내달 29일까지다. 22대 국회가 개원해도 원구성에 시일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신속한 공수처장 공백 해소를 위해선 이달 안으로 후보 지명을 마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수장 공백 장기화 우려 법조계에서는 특검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공수처법에 따르면, 공수처는 이 전 장관에 대한 수사권은 있지만 기소 권한이 없다. 수사를 마친 뒤 검찰에 사건을 넘기고 검찰이 기소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구조다. 공수처 출범 당시 수사·기소권을 모두 줄 경우 일각에선 ‘무소불위 공수처’가 될 거란 우려가 제기되면서 공수처는 법관, 검사, 고위 경찰공무원에 대해서만 제한적 기소권을 갖게 됐다. 문제는 검찰이 채 상병 사건 기소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검찰을 관할하는 법무부는 지난달 8일, 공수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전 장관의 출국금지를 해제했다. 사건 처리의 중립성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특검을 통해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