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서방파 이후… 전국구 최대 폭력조직 5

김태촌·조양은 이은 최고의 주먹은?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한국 조직폭력계가 요동치고 있다. 최근 경찰이 '범서방파' 조직원을 대거 검거한 데 이어 조폭을 겨냥한 추가 단속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국내에 잔존하는 216개파 5300여명의 조폭 모두가 집중관리 대상에 올랐다. 경찰은 이들을 상대로 올해 연말까지 사법처리 여부를 결판 짓겠다는 각오다. 이른바 '3대 패밀리'의 악명을 이어 받은 대형 조폭들이 최우선 단속 대상으로 거론된다. 외형은 줄었지만 더욱 악랄해진 수법으로 활동하고 있는 폭력조직 5곳을 조명했다.

이른바 '3대 패밀리'가 악명을 떨쳤던 전국구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다. 대다수 폭력조직은 조직을 슬림화한 뒤 지역 상권에 밀착했다. '범서방파'나 '양은이파'가 와해되는 동안 지방에 남았던 조폭은 전국구 부럽지 않은 세력을 키웠다. 때로는 지역 경찰들과 유착해 세력을 유지하기도 했다.

지난해 기준 경찰이 파악한 국내 폭력조직은 모두 216개였다. 조직원 수는 5425명으로 전년(2012년)에 비해 41명 늘었다. 이 숫자는 최근 경찰이 범서방파 조직원을 대거 검거하는 등 집중 단속을 벌여 일부 변동됐다. 그러나 변동폭이 미미해 5300여명 정도가 관리 대상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최대 조직]
충북 파라다이스파

그렇다면 한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조직은 어디일까. 간부급을 기준으로 76명이 활동하고 있는 '파라다이스파'가 꼽혔다. 파라다이스파는 충북 청주를 기반으로 1986년 전후 결성된 폭력조직이다. 신원이 확인된 간부만 수십명인 만큼 실제 조직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1990년대 초반 파라다이스파는 충북 4대 조직으로 불렸다. '시라소니파' '화성파' '비룡파' 등과 경쟁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시라소니파는 파라다이스파와 조직의 뿌리가 같다. 이들은 '야망파'라는 집단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파악된다.


재판 기록을 인용하면 파라다이스파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북문로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1986년 5월부터 지역 유흥업소 영업부장, 지배인 등의 자리를 확보하며 20년 넘게 경영권을 행사했다.

당시 ▲형님들에게 90도로 인사하고 예의를 지켜라 ▲선배의 명령지시에 절대 복종하라 ▲의리를 지키고 조직원 간에 단합을 잘하라는 등의 행동강령을 만들었다.

또 상하 간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확립하여 활동구역 일대 유흥업소의 영업을 방해하거나 폭행·협박하는 등 위력을 과시했다. 경쟁 조폭의 출현을 감시하고 유사시에는 흉기를 휘둘러 경쟁세력을 제압했다. 파라다이스파는 거의 매년 기수별로 조직원을 영입했다.

파라다이스파가 전국에 알려진 사건이 있었다. 두목 신윤식(당시 38세)씨가 살해된 실버스타나이트클럽 습격사건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993년 5월28일 밤 청주관광호텔 실버스타나이트클럽 대표였던 윤식씨는 경쟁조직인 시라소니파 행동대원 김모씨 등 20여명의 기습을 받고 자신이 운영하던 나이트클럽에서 숨졌다. 김씨 등은 범행에 앞서 무심천 인근에 집결한 뒤 회칼과 낫, 일본도 등으로 무장하고 잠들어있던 윤식씨를 찾아가 무참히 도륙했다.

이들은 사건 당일 후배 조직원이 파라다이스파 조직원들에게 습격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파라다이스파와 시라소니파는 1992년 6월에도 조직 간 칼부림을 한 것으로 확인된다. 파라다이스파 최모씨와 정모씨는 시라소니파 김모씨와 안모씨에게 흉기를 휘둘러 중상을 입혔다.


또 1990년 4월에는 북문로 한 제과점 앞에서 선혈이 낭자한 난투극을 벌였다. 당시 시라소니파가 휘두른 흉기에 등을 찔린 곽모씨는 피를 흘리며 지하상가로 피신하다 과다출혈로 숨졌다. 사건의 발단은 "왜 후배인데 인사를 하지 않느냐"였다.

2000년대 들어서도 조직 간 갈등은 계속됐다. 2006년 7월 파라다이스파 조직원들은 시라소니파가 장악한 나이트클럽의 종업원을 엘리베이터에서 수차례 폭행하는가 하면 2007년 8월 주점에서 사소한 말다툼 끝에 또 다시 난투극을 벌였다.

당시 파라다이스파 조직원들은 폭력계 선배인 시라소니파 조직원을 때려 기절시켰고, 싸움이 커지자 주점에서 식칼을 가져와 휘두르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을 연출했다. 이들의 패싸움에는 알루미늄 배트가 동원됐다.

아울러 파라다이스파는 조직 내 하극상이 발생하자 이를 수습한다며 자신들끼리 손가락을 잘랐다. '줄빠따'로 기강을 잡은 것은 물론이었다. 이외에도 파라다이스파는 조직원을 모 대학 총학생회장으로 만들어 거액의 학생회비를 횡령했고, 2011년에는 가족 간 재산문제에 개입해 자산가를 납치·살해하는 끔직한 범행을 저질렀다.

문제의 파라다이스파 2대 두목 신모씨는 1993년 5월 두목 윤식씨가 사망하자 조직을 물려받아 후배 조직원에게 폭력을 사주한 혐의(범죄단체 수괴죄 등)로 지난 2001년 구속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충북 내 조폭에게 범죄단체 수괴죄가 적용된 최초의 판례로 남아 있다.

[전국 넘버2 이상]
대구 동성로파

파라다이스파에 이어 간부급 조폭이 가장 많은 조직은 대구 향촌동파(75명)였다. 그러나 대구에서 패권을 쥐고 있는 조직은 동성로파로 전해진다. 향촌동파와 동성로파는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동성로파는 1973년 결성된 폭력조직으로 1988년께 간부급 조직원이 줄줄이 구속되며 위기를 맞았다. 이후 '범죄와의 전쟁'으로 두목 오모씨가 도피 6개월 만에 검거되며 사실상 와해됐다.

그러나 동성로파의 김모씨는 두목의 유고를 틈타 조직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하부 조직원을 유흥업소에 취업시키거나 사채업을 하면서 자금을 모았다. 1994년에는 자신을 지지하는 소위 봉덕동계를 주축으로 '경제건달'이라는 새로운 조직폭력개념을 도입했다. 이 과정에서 조직 선배들을 배제하고 경쟁 계파인 신천동계를 몰아내며 "나의(김씨) 시대가 왔다"는 말을 퍼뜨렸다.

1995년 6월 두목 오씨가 출소하자 김씨는 두목을 찾아가 반강제적인 '승낙'을 받아냈다. 같은 해 7월 김씨는 모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조직원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후계자로 지명됐다. 김씨는 ▲조직을 탈퇴하면 보복한다 ▲조직 내의 일을 외부로 누설하지 않는다 등의 강령을 만들어 이를 따르도록 했다.

이후 김씨는 가족동반 단합대회, 하·동계 단합대회, 망년회, 식사모임 등으로 조직을 공고히 했다. 활동영역은 동성로 일대에서 대구시내 전역으로 확장했다. 자신의 후배들을 이용해 대구시내 주요 호텔 룸살롱과 나이트클럽 7개, 양복점과 제화점 등을 접수했다. 한편으로는 광주 콜박스파 등 다른 조폭과의 연계를 강화했다. 이 같은 수법으로 김씨가 챙긴 돈은 무려 100억원이 넘는 것으로 확인됐다.

앙숙인 향촌동파와의 대결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법원 판결문을 보면 "향촌동파를 압도하게 될 정도로 조직이 강화됐다"고 쓰여 있다.


대대적인 조폭 단속 '범서방파' 사실상 와해
지역 밀착 형님들 기승…외형 줄이고 더 악랄

과거 동성로파는 유령회사를 인수해 딱지어음을 발행하는가 하면 슬롯머신사업 등 각종 이권에 개입해 폭력을 행사한 혐의를 받았다. 2011년에는 보험사기에 연루된 한 조직원이 체포됐으며, 최근에는 수상레저 사업권을 놓고 경쟁조직과 집단 패싸움을 도모한 조직원들이 대거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건이 있었던 2013년 6월 동성로파는 포항의 폭력조직인 삼거리파를 기습하려 원정을 떠났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동성로파 추종세력인 김모씨 등은 대명동 유흥주점에서 기물을 부수는 등 행패를 부리다 인근 편의점에서 흉기를 꺼내 향촌동파 조직원을 찌른 혐의로 구속됐다. 보복에 나선 향촌동파 조직원 10여명은 동성로파 조직원 윤모씨 등을 수십 차례 폭행한 혐의로 나란히 법정에 섰다.

[세력 간 이합집산]
동작 신이글스파

수도권에선 조폭들의 입지가 좁아지다 보니 조직 간 세력을 규합해 활로를 찾는 일이 늘고 있다. 대표적으로 서울 서남부지역 최대조직인 이글스파는 서울 동작구와 금천구 일대의 세력을 연합해 신이글스파를 형성했다.

이글스파는 1978년께 당시 모 상업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윤모씨 등 12명이 결성한 불량서클 '이글스'에서 출발했다. 윤씨는 1979년 8월께 강간치상혐의로 출교된 뒤 평소 친분이 있던 인근 건달들을 모아 관악구 신림동 신림사거리를 중심으로 금품을 갈취하기 시작했다.


1987년 당시 대선을 앞두고 민정당 관악지구당 청년국장이었던 A씨는 이글스를 선거운동에 동원하기로 계획했다. A씨의 요구에 윤씨는 한가람청년회를 결성한 후 이를 모태로 조직을 체계화했다.

이글스파는 1988년 충북 괴산군 화양계곡에 집결해 씨름과 장기자랑 등 단합대회를 열었다. 대선에 가담한 윤씨 등을 주축으로 신림동 일대의 상권을 차례로 장악했다. 이글스파는 유흥업소에 조직원을 강제 취업시키고 발생한 수익을 갈취하는 수법으로 돈을 챙겼다. 당시 '산이슬파' '선우회' 등의 군소조직은 이글스파에 편입됐다.

이글스파는 다른 조직과 유사한 행동강령을 정하고 합숙소를 지정해 정기 모임을 가졌다. 매달 축구대회를 열며 조직의 기강을 다졌다. 관악구 일대 중고교 불량학생들을 영입해 조직원으로 키웠다. 2005년 검찰 수사 당시 이른바 '일진'으로 불린 대다수 학생은 예외없이 이글스파에 가입돼 있을 정도로 유착이 심했다.

특히 이글스파는 악랄한 범행 수법으로 유명했다. 업주들이 상납을 거부하면 비가 쏟아지는 대로변에 무릎을 꿇리고 폭행하는가 하면 옷을 찢어 알몸으로 만든 뒤 맥주병으로 머리를 수차례 때려 피투성으로 만드는 등 신림사거리의 무법자로 자리했다.

지난 20여년 동안 검·경은 수차례 집중 수사로 이글스파를 감옥에 잡아넣었다. 그때마다 이글스파는 보란 듯이 부활했다. 재개발현장이 많은 지역 특성을 살려 아파트 공사 이권에 개입하기도 했다.

지난 6월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이글스파 행동대장 고모씨 등 20명을 입건했다. 이들은 일명 '보도방' 업주들을 상대로 상습적으로 금품을 빼앗고 협박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에 따르면 고씨 등은 지난 2011년부터 올해 2월까지 서울 서남부지역 일대 유흥업소와 보도방 업주들을 상습적으로 폭행해 3억원 상당의 금품을 빼앗은 혐의를 받았다.

또 유흥업소 기물을 부수거나 문신을 보여주면서 업주들을 협박했고, 폭력을 행사해 경영권을 헐값에 넘겨받았다. 명절에는 10만원상당의 한우갈비세트를 요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글스파는 회식을 할 때 업주들이 여성 도우미를 보내지 않거나 성접대를 하지 않으면 집단으로 폭행하는 등 수준 이하의 악행을 저질렀다.

[정관계 유착?]
전주 월드컵파

지난 8월 660억원 규모의 면세담배 유출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사건의 중심에는 전주 월드컵파 조직원 김모(39)씨가 있었다. 김씨는 KT&G직원, 담배 구매업자, 무역업자 등과 공모해 면세담배 2933만여갑을 빼돌렸다. 김씨는 밀수한 담배를 국내로 유통한 총책이었다.

월드컵파는 전주 나이트파와 더불어 전북 지역 최대조직으로 꼽힌다. 시기상으로 월드컵파가 먼저 결성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나이트파가 생겼다고 한다.

전성기 때 조직원은 100명 남짓해 그리 크지 않은 규모다. 하지만 월드컵파가 전국구에 준한 명성을 갖게 된 이유가 있다. 두목 주모씨의 화려한 경력이다.

주씨는 지난 범죄와의 전쟁으로 구속돼 실형을 살았다. 검찰은 주씨에게 범죄단체 수괴죄를 적용했다. 당시 검찰의 기소 내용을 보면 주씨는 상당한 '거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주씨는 1980년대 전북승마협회 부회장직을 맡아 사회고위층과 어울렸다. 1987년 4월 통일민주당 창당방해사건인 일명 '용팔이사건'에 연루되는 등 정치권과 연을 맺었다.

지역에서는 골재채취회사 등을 운영하며 사업가 행세를 했지만 88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서울 강남·이태원 일대 유흥가에 진출했다. 주 수입원은 슬롯머신 사업이었다. 이 과정에서 월드컵파는 경쟁조직을 제거할 목적으로 강남 모 병원 응급실에서 나이트파 조직원을 무참히 살해했다.

상하 엄격한 위계질서
기수별로 조직원 모집

월드컵파는 이글스파처럼 소규모 폭력서클로 출발했다. 이후 전주 완산구에 있는 나이트클럽 '월드컵'을 접수하면서 '월드컵파'란 이름을 갖게 됐다. 월드컵파가 급성장한 배경에는 부두목 김모씨의 역할이 컸다. 김씨는 일대 어느 조폭보다 폭력적이며 잔인했다고 한다. 김씨의 '주먹'에 힘입어 주씨는 일대 상권을 손쉽게 거머쥘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 몸집을 불린 나이트파와는 수차례 칼부림을 벌여 수십명이 죽거나 다쳤다. 83년과 84년 연이어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1989년에는 보복살인이 오가며 '피바람'이 불었다. 당시 월드컵파 조직원 4명은 나이트파 두목 김모씨의 친구에게 가스총을 쏘는 등 충격적인 범행으로 시민을 경악시켰다.

1990년 8월 주씨 구속 후 월드컵파의 외형은 급격히 축소됐다. 그러나 일부는 서울과 경기로 거주지를 옮겨 아직도 폭력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주로 자영업이나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개별 조폭들이 정관계와 유착해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실제로 지난 2005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전주월드컵파가 모 정치인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또 월드컵파 조직원은 수감생활 중 알게 된 교도관을 꾀어 수억원을 투자받은 뒤 반환을 요구하는 교도관을 폭행해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유일한 전국구]
부산 칠성파

3대 패밀리가 몰락한 후 전국구에 가장 근접했던 조직은 '칠성파'라는 것이 정설이다. 조폭 최초로 '프랜차이즈화'를 시도했으며, 갈라져 나온 분파가 각 지역마다 자리하며, 토호 조폭을 견제했다는 등의 소문이 전해진다.

얼마 전 칠성파가 범서방파와 서울 강남에서 대규모 패싸움을 벌이려 했다는 비화가 뒤늦게 밝혀졌다. 5년 전 칠성파는 차량 수십대를 동원해 조직원 80여명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권 다툼을 벌이던 범서방파와 결전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당시 칠성파는 회칼과 야구방망이 등으로 무장했는데 이를 사전에 인지한 경찰이 '전쟁'을 막았다는 후문이다.

칠성파는 1960년대 초부터 부산시내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80년대 들어 세력이 급격히 팽창했다. 슬롯머신업소, 향락업소, 유흥·숙박업소 등 탄탄한 수입원을 기반으로 조직폭력계 주도권을 장악했다. 반대급부로 형성된 신20세기파와는 오랜 기간 라이벌로 대립했다.

범죄와의 전쟁 이후 칠성파는 여러 조직으로 분파됐다. 초대두목 이강환씨는 구속 수감된 뒤 현역에서 은퇴했다. 온천장 칠성, 서동 칠성, 기장 칠성 등으로 나뉜 조직은 부산을 넘어 수도권으로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신20세기파와 일대 전면전을 벌여 이 사건이 영화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칠성파는 2대 두목 한모씨가 검찰에 구속되면서 구심을 잃었다. 2010년을 기점으로 군소조직을 통합하며 '제2의 전성기'를 노리던 한씨는 신20세기파와 다투는 과정에서 상대 조직의 두목을 살해하려 했다. 이러한 첩보를 입수한 검찰은 한씨 등 칠성파 조직원 25명을 체포하며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여전히 부산 모 호텔에서 난동을 부리거나 도박 빚을 갚으라며 폭력을 행사하는 칠성파 조직원이 적발되고 있다. 조직의 뿌리가 깊은 만큼 지하세계에서의 영향력은 여전하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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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머드급 국방정보본부 ‘5공 보안사’ 오버랩, 왜?

매머드급 국방정보본부 ‘5공 보안사’ 오버랩, 왜?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군 정보기관 개혁안의 윤곽이 잡히고 있다. 기한은 2027년까지다. 방첩사 해체 및 정보사 인간정보부대를 국방정보본부 직속으로 둔다는 게 골자다. 군 안팎에서는 우려가 쏟아진다. 국방정보본부에 여러 권한이 쏠리면 과거 ‘전두환 보안사’처럼 통제가 힘들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 조직에 여러 권한이 집중되면 장단점이 확실하다. 관리하기 쉽지만 수장의 역량이 부족하면 컨트롤하기 어렵다. 군 정보기관은 더욱 그렇다. 인간정보 부대(HUMINT·휴민트)의 경우 전문가가 극소수다. 특히 전문가 대다수가 12·3 내란에 연루돼 개혁에 동참할 수 없는 형국이다. 2027년까지 조직 개편 우리 군에는 각종 정보와 첩보 수집을 담당하는 군 정보기관이 존재한다. 대북 업무만을 담당하는 국군정보사령부, 777사령부와 국내 간첩 및 군사보안에 초점을 둔 국군방첩사령부로 나뉜다. 정보사와 777은 국방정보본부가 총괄 지휘한다. 정보기관 특성상 자세한 조직 현황은 공개되지 않는다. 그간 군 정보기관은 역할을 나눠 견제와 균형을 잡아왔다. 이들 기관은 12·3 내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정치인 체포조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투입 등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과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은 각각 위험한 일을 계획하고 일부 실행했다. 이재명정부가 들어서면서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군 정보기관에 대한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약속했다. 방첩사 장성 7명은 모두 직무에서 배제됐고, 현재 참모장 대리 겸 사령관 직무대행은 육군사관학교가 아닌 학사장교 출신의 편무삼 육군 준장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지난달 29일에는 직무정지·분리 파견됐던 임삼묵 2처장(공군 준장) 등 장군 4명이 각 군으로 원대 복귀했다. 나머지 3명은 정성우 방첩사 1처장, 국방부 방첩부대장, 육군본부 방첩부대장 등이다. 방첩 업무는 방첩사에 두고 수사 기능은 국방부 조사본부로, 보안 기능은 국방정보본부 및 각 군으로 이관하는 방안 등이 확정됐다. 이는 정치 개입·민간 사찰로 누적된 군에 대한 불신을 불식하고 정보기관을 본연의 임무로 복귀시킨다는 취지지만, 대공·방첩 기능 약화로 안보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도 거세다. 방첩은 말 그대로 간첩 활동을 막는 걸 일컫는다. 방첩 자체가 정보·보안 수집과 수사를 통해 이뤄진다. 실제로 정보·보안 업무를 이관받는 국방정보본부의 경우 예하 정보사의 블랙 요원 명단 유출 등 기밀 유출 사고를 막지 못했다. 국회는 7년간 외부감사가 없었던 정보사에 대해 올해부터 방첩사가 들여다보도록 했다. 수사권도 문제다. 군사경찰 최상위 조직인 국방부 조사본부도 내란 당시 정치인 체포조 편성·운영 등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한 조직에 보안·신원조사·첩보 수집 통째로 해체 수순 방첩사 군 인사 통제는 누가 하나 명확한 규정 없이 광범위한 범죄 정보 수집 활동을 벌여오면서 수사 전문성을 의심받아 온 조사본부에 국가보안법·군사기밀보호법 위반죄, 내란·외환·반란·이적죄 등 10대 안보 관련 수사권을 넘기면 컨트롤하기 어려운 권력기관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방첩사 기능 폐지로 군에 대한 통제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방첩사는 국방부 장관 직할부대로서 각 부대의 부조리 조사 및 감찰, 지휘관의 특이 동향 점검, 대령급 이상 인사 검증 등을 통해 군을 견제해 왔다. 국방부는 올해 1단계로 내란 극복·미래 국방 설계를 위한 민·관·군 합동특별위원회 내 군 방첩·보안 재설계 분과위원회(분과위원장 홍현익 전 국립외교원장)를 구성해 조직·기능 재설계 등 합리적 개편 방안을 도출할 예정이다. 내년엔 2단계로 방첩사 개편을 위한 법령·규칙 개정, 시설 재배치, 예산 조정 등 후속 조치 사항을 이행하고 개편을 완료할 방침이다. 또 국방정보본부장의 합참정보본부장 겸직을 해제하고 정보사령부에서 휴민트 부대를 분리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국방정보본부령 일부 개정안을 지난달 27일 입법 예고했다. 국방부는 “정보사령부를 포함한 국방정보 조직 전반의 지휘·부대 구조를 최적화해 임무·기능 수행에 전문성과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라며 개정 이유를 밝혔다. 개정안은 국방정보본부의 업무와 관련해 ‘합동참모본부 등의 예산 편성 및 조정(1조 2항 7호)’을 삭제함으로써 합참과의 직접적 업무 연결을 차단했다. 반면 군사보안 외에 암호정책(동항 8호)과 군사 관련 지리공간정보 외에 국방기상정보(동항 제11호), 군사정보 외에 군사보안(동항 12호)을 추가했다. 군사보안 업무가 신설된 것은 국군방첩사령부 개편에 대비한 사전 조치로 풀이된다. 어디까지? 초월적 권한 개정안은 국방정보본부장의 직무와 관련해 ‘군사정보·전략정보 업무에 관해 합동참모의장 보좌’(3조 2항)를 삭제해 합참정보본부장 겸직을 해제했다. 개정안은 정보본부 예하부대 중 정보사령부 업무와 관련해 기존의 ‘군사 관련 영상·지리 공간·인간·기술·계측·기호 등의 정보’ 등(4조 2항 1호) 규정 중 ‘영상’과 ‘인간’을 삭제했다. 대신 동항 4호에 ‘군사 관련 인간정보 수집·지원 및 훈련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기 위한 인간정보 부대’ 규정을 신설했다. 이른바 블랙 요원이나 특임대(HID) 같은 인간정보 부대를 정보사에서 분리해 정보본부 예하에 재배치했다. 이에 따라 정보본부 예하에는 기존 정보사와 777사령부(신호정보 담당) 외에 인간정보 부대가 추가된다. 방첩사는 지난 8월 조직 와해를 막기 위해 전담팀을 꾸렸다. 정치권에 따르면 방첩사는 같은 달부터 ‘부대개혁 TF’라는 전담팀을 꾸리고 간부들에게 비공개 지침을 하달했다. ‘글로벌 안보 위협’을 이유로 들어 “주변 고위급 지인 등 인맥을 통해 부대 존치 논리나 순기능 역할에 대해 전파해 협조나 지원을 이끌어내라”는 내용이다. 국정기획위원회의 방첩사 폐지 방침을 두고 “국방부·대통령실·국회 측도 방첩 역량 약화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는 주장도 담겼다. 한 군 관계자는 “지금 방첩사가 내부 갈등이 심하다. 개혁해야 하는 것에 동의는 하는데 방첩사 폐지로 방첩 기능이 약화되는 걸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반면 부대가 없어져도 기능 자체가 이관되기에 문제될 게 없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대북 정보망 복구가 중요 정보사에서도 최근 개혁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포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에 따르면 경기도 판교에 위치한 정보사 100여단 소속 일부 인원들이 지난달 21일 오전 안양에 위치한 정보사령부 건물로 출동했다. 사령부에서 인간정보 부대 관련 업무를 담당·지원하는 관련 부서들의 사무용품, 책상, 의자, 서류 등을 포장해 100여단으로 가져오기 위해서다. 사무용품 등의 이전은 당일 낮 12시께 중단됐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박선원 의원이 문제를 제기하자 이전 중단 지시가 내려간 것이다. 이후 100여단 소속 인원들은 부대로 복귀했다. 다만, 중단 지시 전 옮겨진 인간정보 부대 관련 부서의 서류와 물품들은 100여단에 남아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국방부는 군 정보기관 개혁 조치의 일환으로 지난달 13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내년 1월1일부터 인간정보부대를 정보사에서 분리해 국방정보본부 예하 부대로 전속하겠다”고 보고했다. 이 과정에서 정보사가 100여단을 움직여 인간정보 부대가 국방정보본부 소속으로 개편되기 석 달 전, 국방부와 정보사 지휘부에 보고도 없이 사령부 건물을 방문한 것이다. 정보사령관 직무대리는 지난달 26일 “상급부대에서 (인간정보부대 개편 내용을 담은) 법적 근거를 마련할 때까지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사령부가 추진한 사항을 잠정 중단하라”는 취지의 공문을 하달했다. 지난 9월18일 정보사 100여단 부대 강당에서는 국방정보본부 산하 인간정보 부대 개편을 위한 내부 설명회가 열리기도 했다. 당시 100여단장은 해당 간담회를 주재하며 부대원들에게 “간담회에서 나눈 이야기나 부대의 사정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하라”며 입단속을 강조했다. 앞으로 국방정보본부가 갖게 되는 권한은 막대하다. 현행 구조에서 국방정보본부장은 정보사·777, 합참 정보부를 총괄한다. 여기에 더해 정보사의 휴민트 기능을 직접 통제하고 보안·신원조사를 추가하면, 누구도 견제하기 힘든 조직이 탄생한다. “대북공작 휴민트가 장관 직속? 전례 없어” “조직 수장 역량에 따라 괴물 집단 될 수도” 민주당 내부에서도 반발이 만만치 않다. 민주당 한 중진 의원은 “휴민트 임무 특성상 비밀·독립성이 가장 중요하다. 이걸 국방정보본부장 예하로 두겠다는 건 관리하기 쉽다는 장점도 있지만 윤석열과 같은 인간에게 넘어간다면 굉장히 위험한 조직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기관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다른 군 전문가도 “전문성이 없는 민간 부처가 공작 임무를 직접 운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보사 휴민트 조직은 국정원과 긴밀한 협력을 통해 공작을 기획한다. 국정원이 예산도 관리해 관리·감독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며 “이번 개혁안이 완전히 확정된 건 아니지만 휴민트를 국방정보본부 예하로 두는 건 도박”이라고 비판했다. 박 의원도 지난달 13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휴민트 부대의 본질은 숨기고 또 숨겨야 하는 특수공작 조직”이라면서 “전 세계 어느 나라도 국방 장관 직속으로 인간정보 공작부대를 두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같은 당 부승찬 의원 역시 “전시 연합사령관 지시를 받는 부대도 아니고, 평시 합참 지휘체계에도 없는 부대”라면서 “작전 지휘체계나 통제체계에 들어가 있지 않은 부대인데, 이를 국방정보본부에 넣는 건 불가능하다”고 언급했다. 이 같은 지적에도 국방부는 국방정보본부령 일부개정령안을 입법 예고했다. 기존 국정감사 업무보고에선 정보부대 개편을 2026년 내 마무리하겠다고 했었는데, 이번 개정령안은 내년 1월1일 시행으로 못 박았다. 이에 민주당 황명선 의원은 종합감사에서 인간정보부대의 국방정보본부 편입에 우려를 표했다. 황 의원은 “장관도 동의하지 않는 이런 개정안을 누가 냈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에 안 장관은 “글자 그대로 입법 예고이니 의원들께서 의견을 주시면 최적화하겠다”고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국방정보본부와 국방부 기획조정실(조직관리담당관)은 다른 분위기다. 한 국방부 관계자는 “장관과 국방정보본부 간 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정보 계통 군인들은 오히려 현 입법안을 두고 안도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개혁 반대 움직임도 황 의원이 민·관·군 합동 특별자문위원회의 ‘방첩·보안 재설계 분과’가 합리적인 안을 만들어낼 때까지 입법 예고를 보류해달라고 하자 안 장관도 “알겠다”고 답했다. 안 장관은 “휴민트 조직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 부대에 대해서는 가급적 말을 절약해주는 것이 휴민트 부대를 살리는 길이고 부대 가치를 존중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