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살아보고 살지 결정하세요”

분양전환 임대아파트 인기 비결

일단 살아보고 나중에 분양 받을지를 결정하는 임대아파트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오르는 전셋값이 버겁긴 하지만, 당장 집을 사는 건 더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목받는 분양전환 임대아파트를 조명한다.

 

목돈 모을 때까지…내집마련 징검다리 역할
일반 아파트 비해 청약 경쟁률 크게 웃돌아

 

최근 예비 입주자를 모집한 경기도 수원의 10년 분양전환 임대아파트는 신청자가 폭주해 인터넷 접수가 한 때 중단됐다. 전용 85㎡의 경우 인근 아파트 전세 가격보다 1억원가량 저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세가 계속 오르는 데다 집값에 대한 불안감도 여전해 실수요자들이 몰리고 있는 것으로 업계는 분석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같은 지역이라도 분양전환 임대아파트의 청약 경쟁률은 일반 분양아파트를 크게 웃돈다. 지난 4월 경기도 수원에서 분양전환 임대아파트의 청약률은 4.5대 1, 경기도 시흥에서는 2.9대 1을 기록했다. 모두 일반 아파트 청약률보다 2배가량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뿐만이 아니다. 울산도시공사가 지난 7월27일 청약접수를 받은 청량 율리 10년 공공임대 아파트는 52가구 모집에 381명이 몰려 평균 7.32대1의 청약경쟁률을 기록했다. 화성 동탄2신도시, 시흥 목감지구, 부천 옥길지구, 의정부 민락2지구, 구리 갈매지구 등 올해 들어 수도권에서 분양한 LH의 임대아파트는 모두 2대1이 넘는 경쟁률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신청자 폭주
접수 중단도


지난 4월 강원도 춘천에서 공급된 10년 분양전환 임대아파트 ‘춘천 호반베르디움 에코’는 159가구 공급에 271명이 청약해 3순위에서만 최고 4.72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같은 달 세종시에서 분양된 ‘한양수자인 와이즈시티’(2170가구)는 순위 내 청약을 마치지 못했지만 4순위에만 4000여명 청약자가 몰렸다.
목돈을 모을 때까지 주거비를 아낄 수 있는 전셋집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가운데 내집마련의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양전환 임대아파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민간 건설사 공급물량 중에는 월 임대료 없이 순수전세형으로 공급되는 물건도 있어 무주택자들의 내집마련에 징검다리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게 부동산 업계의 분석이다.
분양 전환 임대아파트는 5년 또는 10년 동안 임대로 살다가 기간 만료 후 임차인이 우선분양을 받을 수 있는 공급 형태로 임대로 살아보고 추후 구매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거주할 수 있고 임대기간 동안 취득세, 재산세, 종합부동산세, 양도세 등의 세제혜택을 받을 수 있다.
집값 하락에 대한 걱정도 없어 장기적으로 내집 마련 계획을 세우는 수요자들에게 적합하다는 평가다. 이러한 임대아파트 중 5년 또는 10년의 임대 기간 동안 임차인이 월세나 전세로 살다가 기간이 만료된 후 분양으로 전환하는 단지를 분양전환 임대아파트라고 한다.
민간기업이 건설한 아파트는 최초 입주 후 임대기간의 절반, 5년 임대의 경우 2년6개월만 지나면 임대사업자가 임차인과 협의하에 분양이 가능하다. 현재 거주 중인 무주택 임차인에게 우선권이 주어지고 남는 물량에 한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분양하는 방식이다. 분양전환 임대아파트의 가장 큰 장점은 무주택자들이 목돈을 들이지 않고 살 곳을 구해 종자돈을 모으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집을 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취득세, 재산세 등의 세부담과 금융비용 부담이 없다. 예를 들어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의 3억원짜리 전용 84㎡ 아파트를 살 경우 취득세로 매매가의 1.1%인 330만원, 재산세로 1년 40만7500원씩 5년간 207만7500원을 내야 한다. 금리 4%로 주택담보대출 1억3000만원을 끼고 샀다고 가정하면 추가로 5년간 대출이자 2600만원을 내야 하지만 이 모든 금액이 임차로 살 경우 절약되는 효과가 있다.
하반기에는 LH 외에 호반, 중흥, 우남, EG건설 등 민간 건설사들도 분양전환 임대아파트를 잇달아 선보인다. 민간에서 자신의 브랜드를 달고 내놓는 단지가 늘면서 전용 67㎡형에 4베이를 적용하는 등 단지 품질도 과거보다 훨씬 나아졌다는 평가가 많다.
민간 건설사가 임대아파트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파트 용지를 조성원가의 70% 수준으로 싸게 살 수 있고, 국민주택기금에서 낮은 금리로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청약을 위해서는 청약통장이 있어야 하고 가구주 및 가구원 전원이 무주택 요건을 갖춰야 하는데 LH 등 공공기관에서 공급하는 단지는 여기에 소득조건 등이 추가된다.

 

“종자돈 모으는
기반으로 선택”



분양전환 임대아파트의 분양전환 때 분양가는 보통 입주자와 시공사에서 각각 감정평가사를 구해 산술평균하는 식으로 정해진다. 5년 후 감정가로 분양전환한다는 것은 결국 5년 후 시세를 반영해 분양을 받는 셈이다. 감정가라는 것은 주변시세를 참조해 반영되는 만큼 계약자는 감정가로 나오는 분양가 대비 내부 인테리어, 커뮤니티 시설 등의 품질을 주변단지와 꼼꼼하게 따져서 계약해야 한다.
한 부동산 전문가는 “최근 인기가 높은 분양전환 임대아파트는 임대 기간의 절반 이상만 거주하면 내 집으로 분양받을 수 있지만 분양 가격을 놓고 분양주체와 갈등을 빚을 수 있다는 점은 유념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해 발한 석미모닝파크 = 석미건설㈜은 강원도 동해시 발한동에 임대아파트를 공급한다. 동해시 발한동 351-20번지 일대에 건립 중인 동해 ‘발한 석미모닝파크’는 지상 15층 5개동에 전용면적 40.33∼
84.81㎡ 규모 298가구로 구성된다.
다양한 연령층을 위해 5개 타입의 평면으로 구성됐고, 내진설계로 안전성을 확보했다. 합리적인 단지 설계로 채광 및 통풍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또 주방, 드레스룸, 발코니, 세탁실 등의 공간을 효율적으로 배치해 주부들의 동선을 최소화했다.
동해시 쇄운동에 이어 공급되는 동해 발한 석미모닝파크는 동해시 중심도로인 7번국도와 인접해 있고, 망상IC와 가까워 동해고속도로 진출입이 쉽다. 동해중앙시장, 대형마트, 묵호건강증진센터, 시외버스터미널, 묵호역 등 생활편의시설이 가깝다. 도보 통학이 가능한 창호초교, 묵호초교, 묵호여중을 비롯해 인근에 동호초, 묵호중, 동해중, 동해상고 등 우수한 교육여건을 갖추고 있다.
민간건설 공공임대아파트로 공급되는 석미모닝파크는 준공시점을 기준으로 5년 후 분양 전환이 가능하다. 입주는 2015년 8월 예정. 견본주택은 9월18일 오픈할 예정이다. 중도금 대출이 가능하고 발코니새시가 기본으로 제공된다.
석미모닝파크 분양 관계자는 “동해시 북부지역인 발한동에 신규 아파트가 공급되는 것은 15년 만에 처음”이라면서 “민간건설 공공임대아파트로 공급되기 때문에 5년간 이사 걱정 없이 내 집처럼 거주할 수 있고 주변 시세보다 저렴하기 때문에 벌써부터 수요자들의 관심이 높다”고 밝혔다.

 

임대기간 취득·재산세 등 세제 혜택
하반기 민간 건설사들도 잇달아 분양

 

추후 분양가로
갈등 빚을 수도

▲용인 역북 우남퍼스트빌 = 중견주택업체인 우남건설은 경기 용인시 역북동 용인시청 인근에서 ‘용인 역북 우남퍼스트빌’모델하우스를 열고 임대분양에 나선다. 역북지구와 인접한 이 단지는 914가구(전용 67∼84㎡) 규모다. 내 집처럼 거주하다가 임대기간의 절반(5년)이 지나면 분양 전환이 가능한 10년 임대아파트다.
용인경전철 김량장역이 현장에서 500m 안에 있고, 영동고속도로 용인IC, 국도 45번 등도 가깝다. 서울과 인근 동백, 기흥, 수원, 동탄, 분당 등으로 이동이 편리하다. 또 주변에 용인시청과 용인세브란스 병원, 용인초·중·고등학교가 있다.
임대아파트지만 평면을 차별화했다. 4베이(방·거실·방·방 전면향 배치)는 물론 가구독립 평면 등 분양아파트에 적용되는 설계로 임대 아파트 평면의 질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면적이 넓지 않은 전용 67㎡A타입의 경우 방 3칸과 거실이 전면으로 배치되는 4베이로 꾸몄다. 84㎡B 타입은 4베이와 3면이 개방될 수 있는 구조로 설계해 일조권은 물론 채광과 환기를 좋게 했다.
우남퍼스트빌 분양 관계자는 “용인시청 인근에 분양 홍보관을 마련해 운영해 본 결과 퇴직자와 신혼부부 등 다양한 층에서 문의를 해오고 있다”며 “대단지 임대아파트인 데다 평면을 차별화해 수요자들의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시흥시 배곧신도시는 서울대 시흥캠퍼스를 중심으로 교육·의료·산학클러스터의 자족도시로 개발된다. EG건설은 배곧신도시 B3블록에 ‘시흥 배곧신도시 EGThe1’을 11월 분양할 예정이다. 전용 59㎡, 총 880가구 규모다.
중흥건설은 전남 순천 신대B2-1에서 ‘중흥S클래스’를 12월 분양 예정이다. 전용 59~84㎡ 1490가구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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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