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특집④>2009년 뒤흔든‘신드롬 9’

기쁨보단 눈물이 환희 보단 분노가

2009년 국민들이 열광한 신드롬은 어떤 것일까. 거성들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쏟은 국민들은 모질게 불어닥친 불황 앞에서 피눈물을 흘렸다. 이런 와중에 유행한 신종플루는 ‘죽음의 공포’에까지 떨게 만들었다. 미중년 열풍에 동참하려는 중년남성들의 꽃단장은 길어졌고 고단한 하루의 마감은 막걸리 한 사발이 함께했다. <일요시사>에서는 2009년 한 해를 물들였던 신드롬 9가지를 뽑았다.

정신적 지주였던 거성들의 죽음 잇따라 눈물 마를 날 없어
최악의 불황 닥치면서 불황타파 신 풍속도 여기저기 등장

2009년 대한민국을 흔든 신드롬 중 하나는 정신적 지주였던 거성들의 죽음이 몰고 온 파장이다. 유난히 큰 인물들의 죽음이 많았던 2009년,국민들의 안타까운 눈물도 끊이지 않는 해였다.

1>영웅들의 죽음

그중 하나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국민들의 슬픔과 충격은 더욱 컸다. 때문에 전국에 마련된 분향소에서는 몇 달 동안 향냄새가 가실 줄을 몰랐다. 노 전 대통령의 고향 봉하마을도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때 이른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서거 당시 전국에서 추모객들이 찾아와 못다 이룬 그의 꿈과 안타까운 죽음을 기렸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도 여전히 국민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고 있다. 한평생 화해와 사랑을 전한 김 추기경은 지난 2월16일 향년 87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1969년 한국인 최초로 추기경에 서임된 김 추기경은 종교와 세대를 뛰어넘는 ‘어른’으로 존경받았다. 가난한 자와 약한 자, 고통 받는 자들의 편에서 언제나 바른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김 추기경에 대한 국민들의 사랑은 연일 이어진 조문행렬이 말해줬다. 고인이 된 그의 모습을 보기 위해 명동성당으로 달려간 국민들의 수는 무려 40만명. 늦겨울의 추운 날씨 속에서 수 시간을 대기해야 했지만 누구도 불평 없이 김 추기경의 마지막을 눈물로 보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줬던 또 하나의 인물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몇 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던 김 전 대통령이었기에 그의 서거는 많은 이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인동초의 삶을 살며 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섰던 김 전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도 이념과 지역을 초월한 슬픔은 가실 줄 몰랐다. 더구나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뜬 지 불과 3개월 만에 또 한 명의 전직 대통령을 잃어 국민들의 허망함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2>불황이 부른 슬픈 신드롬

거성들의 죽음이 가슴을 시리게 했다면 돌아온 불황은 몸을 시리게 했다. 외환위기 10년 만에 닥친 불황은 갖가지 신풍속도를 만들었다. 가장 큰 변화는 돈을 쓰는 방식이다. 불황에 잘 팔린다는 제품들이 어김없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 것.그중 하나는 야한 속옷이다. 비싼 겉옷보다는 상대적으로 싼 속옷으로 기분전환을 원하는 이들의 손길이 야한 속옷으로 향한 것이다. 또 외출을 자제하고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 것도 속옷 매출을 늘리는 요인이기도 했다.

나영이 사건, 마약인구 증가 등 해결 못한 사회문제들
낮에는 신조어, 밤에는 막걸리로 하루 시름 달래기도


미니스커트 열풍 역시 불황방정식과 맞아떨어졌다. 심지어 23cm의 ‘마이크로 미니스커트’까지 등장해 여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칼바람 속에서도 미니스커트는 여전히 사랑받는 아이템 중 하나다. 도시락 열풍도 불황의 단면을 보여줬다. 학창시절 등교 버스 안에서나 날 법한 김치 냄새가 출근길 지하철에서 풍긴 것도 도시락 열풍이 가져온 현상이다. 먹고 마시고 입는 데 돈을 아껴야 하는 샐러리맨들의 선택이다.

불법 사채업자들이 저지르는 끔찍한 악행들도 불황의 그림자로 남았다. 돈이 궁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사채업자들은 이들의 절박한 심정을 악용해 뱃속을 채웠다. 자신들이 정해놓은 고리의 이자를 갚지 않을 때는 상상을 초월하는 행각이 이어졌다. 감금과 협박, 폭행을 서슴지 않는가 하면 채무자를 자살로 내몰기도 했다. 특히 여성 채무자들은 성희롱, 성폭행을 당하거나 성매매업소에 팔려가는 등 수치스런 대가가 뒤따랐다.

3>신종플루에 국민들 ‘벌벌’

2009년 4월 멕시코에서 발생한 신종플루 역시 사망자의 등장과 함께 각종 신드롬을 퍼트렸다. 가정에서 직장, 공공장소까지 신종플루가 만든 다양한 신풍속도가 나타나기도 했다. 먼저 따가운 시선이 두려워 공공장소에선 마음 놓고 기침 한번 못하는 각박한 세태가 생겼다. 직장인들의 변화도 눈에 띄었다. 점심시간 메뉴선정부터 회식문화까지 생활 전반의 모습이 바뀌었다.

그런가 하면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이 많은 장소는 피하는 분위기로 인해 여행이나 외식업 등 관련 산업이 된서리를 맞기도 했다. 건강염려증이 확산되는 풍조도 생겨났다. 건강식품을 과하게 챙겨 먹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도 건강염려증의 한 단면이다. 2009년 후반에 들면서 신종플루 공포가 서서히 줄어들었지만 해가 바뀌어도 신종플루가 만든 풍속도는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4>어린이 성범죄 현주소

이른바 ‘조두순 사건’으로 촉발된 어린이 성범죄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 역시 2009년 대한민국을 우울하게 만든 신드롬 중 하나다. 2008년 12월, 초등학생 나영이를 화장실로 끌고 가 성폭행을 저지른 범인 조두순은 나영이가 평생 겪어야 할 아픔에 비해 너무나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이는 한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져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이와 함께 아동성폭력의 심각성이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어린 시절 성폭력을 당해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야 했던 피해자들과 성폭력을 당한 아이들을 바라보며 함께 고통을 나누는 주변인들이 인터넷 등을 통해 피해사실을 알리면서 파문은 날로 커졌다. 이에 따라 관련 법규가 제정되는 등 어린이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의식이 진일보한 결과를 얻기도 했다.

5>‘엽기동영상’ 신드롬

‘저런 걸 도대체 왜 찍어서 유포하는 거야?’ 보기만 해도 손사래를 치게 되는 엽기동영상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진 것도 2009년이다. 이 동영상들은 대부분 청소년들이 촬영하고 인터넷에 올린 것으로 밝혀져 파문이 일었다. 제목도 끔찍한 엽기동영상 중 하나는 ‘여학생 알몸 폭행’이란 동영상. 화면 속에는 옷을 벗은 채 또래 여학생에게 폭행을 당하는 여학생들이 등장한다.

동영상을 찍은 목적은 더욱 흉악했다. 성매매를 원하는 남성들에게 동영상을 보여주고 여학생들에게 성매매를 시킬 목적이었던 것. 이밖에도 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을 성희롱하는 장면이 담긴 ‘선생님 꼬시기’, 초등학생들을 때리거나 괴롭히는 장면이 담긴 ‘초딩 낚기’ 등의 제목을 단 동영상들이 등장해 충격을 준 바 있다.

6>백색가루 유혹 ‘마약 열풍’

환각의 세계를 잊지 못하는 이들로 인해 2009년 마약신드롬은 어느 때보다 거셌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연예계 마약파문에 신종마약의 습격까지 백색가루는 어디서나 국민들을 유혹했다. 특히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서울 홍대나 이태원 일대의 클럽은 마약으로 신음한 한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와 달리 마약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기호식품’쯤으로 전락하면서 죄의식없이 마약을 즐기는 젊은이들의 수도 급증했다.

이태원의 한 클럽 관계자는 과거에 비해 요즘 젊은이들은 마약을 접하는 일이나 환각에 빠져드는 것을 대단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는다고 말해 최근의 마약열풍을 짐작케 했다. 그는 “과거 마약쟁이들이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날 목적으로 마약에 손을 댔다면 지금은 좀 더 신나게 놀고 춤추기 위해 스스럼없이 마약을 하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마약인구가 증가하자 정부는 단속과 마약범 색출에 주력하겠다는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그 효과가 새해부터 나타날지에 대해서는 아직 미지수다.

7>미중년 신드롬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인기로 꽃남 열풍에 불이 붙은 가운데 중년층의 반란도 심상치 않았다. 축 처진 뱃살에 근육이라곤 없는 몸, 술과 피로에 찌들어 주름살과 기미로 가득한 얼굴로 대변되던 중년남성들이 외모 가꾸기에 돌입한 것. 외모에 관심이 많은 중년남성들을 일컫는 노무족(No More Uncle의 줄임말)이란 신조어가 생긴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일주일에 2~3일은 폭음에 시달리던 중년남성들은 헬스클럽에 가기 위해 과감히 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내에게 맡긴 채 나 몰라라 했던 패션에도 관심을 가진다. 죽기보다 싫은 게 쇼핑이었지만 옷차림에 신경을 쓴 이후로는 유행하는 스타일을 공부하려 백화점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고스톱을 치거나 증권현황을 알아보는 것이 전부였던 인터넷생활도 바뀌었다. 피부관리법이나 뱃살 줄이는 비법을 찾아보는 데 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년남성들의 반란이 일어난 이유 중 하나는 ‘꽃중년’ 연예인의 등장이다. 배 나오고 머리숱 빈약한 남성들로 그려지던 드라마 속 중년남성의 변화는 남성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중년남성도 충분히 여성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외모도 경쟁력’이라는 사회분위기다.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매력적인 외모를 가꾸게 된다는 것. 이로 인해 중년남성들의 성형열풍, 남자 화장품 판매량 급증 등의 현상이 뒤따르기도 했다.


8>막걸리의 귀환

맥주와 와인에 밀려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던 막걸리가 화려하게 부활했다. 번화가마다 막걸리집이 속속 생기는가 하면 콧대 높은 백화점 진열대에도 막걸리 병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최근엔 홍대 클럽에까지 막걸리가 등장하는 등 그 열기가 날로 뜨겁다. 중년들에겐 아련한 추억으로, 젊은이들에겐 촌스러운 술로 기억되던 막걸리가 돌아온 것에는 불황이 자리한다.

싼값에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것이 막걸리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기 때문이다. 서양 술에 비해 어울리는 안주도 비교적 싸다. 두부김치, 빈대떡 등 싸고 맛좋은 안주들이 막걸리와 안성맞춤이다. 복고열풍 역시 막걸리의 인기를 불렀다. 즐겁기만 했던 시절을 함께한 술을 마시면서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추억을 더듬으려는 이들에게 막걸리가 제격이기 때문이다.

날로 세련미를 더해가는 막걸리 맛의 변신도 혀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들쩍지근하고 텁텁했던 막걸리는 수십 년의 개량과정을 거쳐 감칠맛나면서도 깔끔하게 변모했다. 한국인을 넘어 세계인들의 입맛까지 유혹하는 막걸리의 변신은 앞으로도 기대할 만하다.

9>‘신조어’ 열풍

한 해 만들어진 신조어는 그 사회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증거다. 2009년에도 기발한 신조어들이 등장해 울고 웃게 만들었다. 특히 2009년 등장한 신조어에는 새로운 남녀상을 표현하는 단어가 많았다.  먼저 남성을 지칭하는 신조어에는 결혼할 생각 없이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초식남, 김밥에 들어가는 우엉처럼 존재감 없고 비실비실한 우엉남, 근육질 몸매에 마초 같은 행동으로 여심을 유혹하는 짐승남, 잘나가는 ‘부인 남편 친구’를 뜻하는 부친남, 한 오락프로그램에서 키 작은 남성을 비하하는 뜻으로 쓰여 파문이 일었던 ‘루저남’ 등이 있다.

반면 여성을 지칭하는 신조어는 많지 않다. 직장에서는 똑 부러지는 커리어우먼이지만 집에 들어오면 건어물에 맥주를 마시며 외로움에 떠는 건어물녀가 대표적이다. 인터넷에는 더욱 아리송한 신조어들이 넘쳐났다. 주로 한 문장을 세 글자 정도로 줄인 말이 대세를 이뤘다.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을 줄인 ‘넘사벽’, 닥치고 본방 사수를 줄인 ‘닥본사’, 스크린샷을 줄인 ‘스샷’,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를 줄인 ‘솔까말’, 개인소장을 줄인 ‘갠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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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