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의 끝자락에 한해 동안 우리 사회를 돌아보니, 잘못된 장면들은 너무도 선명한데 책임의 얼굴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정치의 언어는 거칠어졌고, 사회의 감정은 쉽게 들끓었으며, 공동체는 사소한 계기로 갈라졌다. 규범도 윤리도 약해졌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각도 둔해졌다.
공정과 상식이라는 말은 여전히 넘쳐났지만, 그것이 실제 삶의 기준으로 작동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무너지고 망가지는 데도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질문만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와 문화의 왜곡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기간 누적된 선택과 방관, 침묵과 타협이 겹쳐진 결과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사회 문제의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이 문장이 오늘날 가장 쉬운 책임 회피의 표현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두의 책임이라는 말은 결국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구조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누가 해결해야 할까? 정치인일까, 정부일까, 시민단체일까, 학자일까? 아니면 과거처럼 사회적 신뢰를 지닌 지식인과 종교 지도자, 작가의 몫일까?
현실은 냉정하다. 어느 누구도 책임의 중심에 서려 하지 않는다. 정부는 제도의 한계를 말하고, 정치인은 구조적 문제를 말하며, 시민단체는 권한 부족을 말한다. 학자와 전문가는 분석을 제공하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 책임은 언제나 다음 주체에게로 미뤄진다.
이 공백을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한 집단이 정치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유독 많은 것을 책임지겠다고 말해 왔다. 잘 살게 해주겠다고 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며, 심지어 어떤 문화를 가져야 하는지까지 규정하려 든다. 말만 놓고 보면 정치는 경제·사회·문화 전반을 총괄하는 절대 권력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다. 경제가 흔들리면 정책 실패라는 이름으로 일정 부분 책임을 지는 척하지만, 사회가 분열되고 문화가 왜곡돼도 정치권은 거의 책임지지 않는다. 대신 더 강한 법, 더 많은 규제로 문제를 덮는다.
특히 심각한 문제는 정치가 스스로 만들어낸 이 혼란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치로 인해 경제가 흔들리고,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고, 문화가 황폐해졌다면 정치인은 그 정치적 판단에 대한 대가를 치르면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도 정치인은 선거 때만 되면 늘 “우리가 다 책임지겠다”고 말한다. 책임질 의지도, 책임질 구조도 없으면서 말로만 책임을 확장해 온 것이다. 이 과잉 책임 선언이야말로 정치의 가장 큰 무책임이 아닐 수 없다.
정치의 본래 역할은 명확하다. 법을 만들고, 행정부를 감시하며, 제도의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정치는 사회의 도덕 교사도 아니고, 문화의 설계자도 아니다. 그런데도 정치가 이 영역에 개입하려 들수록 책임은 오히려 흐려지고, 실패의 책임은 늘 ‘구조의 문제’나 ‘사회적 합의 부족’이라는 말로 밀려난다.
정치의 과잉 개입은 국민이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질 공간을 잠식한다. 국민은 점점 삶의 주체가 아니라 정치의 결정에 반응하는 객체로 밀려난다. 사회와 문화의 문제까지 정치의 탓으로 돌리는 순간, 시민은 비판자는 될 수 있어도 책임자는 되지 못하고, 정치인의 “우리가 책임지겠다”는 말은 결국 선언으로만 남는다.
이제 책임의 구조를 다시 세워야 한다. 정치인은 정치 때문에 나라가 엉망이 됐다면, 그 정치적 판단에 대해 분명한 책임과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리고 선도 넘지 말아야 한다. 사회와 문화까지 대신 책임지겠다는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
정치는 제도의 틀을 만들고, 그 틀의 결과에 대해 책임지면 된다. 사회와 문화의 방향은 시민 사회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학자와 전문가, 언론과 교육, 지역 공동체와 직능 단체가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
이제 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가 방관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정치에 모든 기대와 분노를 떠넘기는 순간, 정치는 더 오만해지고 사회는 더 무기력해진다. 정치의 과잉은 시민 책임의 공백에서 자란다. 우리가 스스로 책임지지 않을수록 정치는 더 많은 것을 대신 결정하려 들 것이다.
시민의 관심이 오랫동안 정치에만 집중되는 동안, 정치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며 오만해졌다. 이제는 시민이 정치에 쏟아왔던 과도한 관심과 분노의 일부를 사회와 문화로 돌려야 한다.
어찌 보면 사회와 문화는 제도보다 삶에 가깝고, 정치보다 삶의 주체인 우리 손에 더 직접적으로 달려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정치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이 영역에서 책임을 회수하지 않는 한, 정치의 과잉 개입과 사회의 무기력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2025년의 끝에서 다시 묻는다. 정치인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그리고 그 책임을 넘어서는 순간, 왜 사회와 문화는 더 망가지는가. 사회와 문화는 정치가 대신 살아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짊어져야 할 무거운 몫이다. 책임을 다시 나누지 않는다면, 2026년의 끝에서도 우리는 같은 분노와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