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쪼개는 보이지 않는 손

혼란의 ‘당원 주권’ 시대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지난 7일 이재명정부가 출범 6개월을 맞았다. 정부가 안정 궤도에 접어들면서 탄핵 정국부터 바짝 긴장한 더불어민주당의 결집력이 이전보다 느슨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론을 형성하고 때로는 한발 앞서 나가는 당원들에 의해 각기 다른 목소리가 분출되면서 이견이 드러난 탓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강성 지지층에 휘둘린다는 지적이 나온 건 비단 이번뿐만이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민주당 대표이던 시절 개딸(개혁의 딸)을 자처하고 나선 ‘원조’ 강성 지지층의 영향력도 상당했다.

팬덤 정치
대물림

당시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 표결을 놓고 개딸의 집단 움직임이 최고조에 달했다. 체포동의안이 가결되자 이들은 친문(친 문재인), 비명(비 이재명)계 의원 이름이 적힌 ‘수박 리스트’를 만들어 문자 폭탄을 돌렸다. 민주당 의원을 대상으로 체포동의안에 부결했다는 확답 메시지를 받아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리는 ‘수박 색출’ 인증 릴레이를 펼치기도 했다.

일각에서 과도하다는 우려가 나왔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말리는 의원은 없었다.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차기 권력이 누구인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반기를 들기는 쉽지 않았던 탓이다.

당시 이 대표를 따르는 팬덤은 점점 커졌고, 여기에 올라타는 정치인이 대거 확산되면서 견고한 친명(친 이재명)계 울타리가 세워졌다. ‘개딸에 휘둘리는 민주당’을 정면으로 비판하던 비명계 일부는 4·10 총선에서 컷오프됐고 이들 중 다수가 탈당하는 등 심리적 분당 상태로까지 내몰렸다.


정권이 바뀌고 새로운 팬덤이 들어섰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을 뿌리 뽑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을 첫 번째 과제로 내걸었고, 개혁 의지로 똘똘 뭉친 민주당은 가장 강하고 전투적인 인물(정청래 후보)을 차기 대표로 세웠다.

지난 8월 전당대회서 당선된 정청래 대표 역시 ‘강경파’ 꼬리표를 달고 당원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내란의 밤을 뒤로하고 이제는 강력한 개혁으로 대한민국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게 국민 대다수의 여론이라는 설명이다.

당시 정 대표는 수락 연설을 통해 ‘당원 주권’이라는 단어를 거듭 강조했다.

정 대표는 “강력한 개혁 당 대표가 되겠다는 약속대로 검찰, 언론, 사법개혁을 추석 전에 반드시 마무리하고 전당대회가 끝난 즉시 검찰·언론·사법개혁TF를 가동시키겠다”며 “당원 주권 정당으로 1인 1표 시대를 열겠다. 당원 주권 정당 TF도 열어 당헌당규를 정비하고 중요한 당 의사 결정은 당원의 뜻을 묻도록 전 당원 투표를 상설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기점으로 당원중심주의라는 명분을 등에 업은 강성 지지층의 지배력이 빠르게 확산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빈틈없이 굴러갔던 민주당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정부와 엇박자를 보이는 정 대표를 향해 ‘자기 정치’ 지적이 나오는가 하면 국민의힘과 협치를 보인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에게 사퇴 요구가 쏟아졌다.

‘개딸’이 밀어준 이재명, 정청래는?
마음 안 들면 ‘수박’…사라진 다양성


3대 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는 민주당 의원에게는 ‘수박(겉과 속이 다른 정치인을 일컫는 은어)’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개혁 과도기에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건 민주주의가 건강하다는 증거”라지만 당이 원하는 방향으로 향하지 않을 경우 원인을 찾아 개혁의 걸림돌로 낙인 찍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등 다양성을 묵살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본격적으로 당원들의 목소리가 커진 건 ‘검찰개혁’의 속도와 수위를 두고 당정간의 온도 차가 노출되면서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민주당은 강성 의원들을 중심으로 당장 검찰청을 없애자고 주장했지만 대통령실은 형사사법 체계를 바꾸는 만큼 충분한 논의를 통해 논란을 최소화하기를 바랐다.

이후 사법개혁을 앞두고 대통령실이 ‘조용한 개혁’을 주문하면서 본격적으로 불만이 터졌다. 우상호 대통령실 수석이 “국민의 사랑을 받고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접근 방식으로 개선해야 한다. 시끄럽지 않게 개혁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전하는 등 당정 간의 온도 차가 드러난 것이다.

강하게 개혁 고삐를 쥔 정 대표는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개혁의 적기라고 판단한 강성 지지층도 힘을 보탰다. 정 대표는 우 수석의 발언 이후 자신의 SNS를 통해 “상기하자 검찰 만행, 잊지 말자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상기하자 조희대의 난, 잊지 말자 사법개혁!” 등의 글을 여러 차례 게시하며 개혁 의지를 드러냈다.

진통 끝에 개혁을 매듭지은 정 대표는 ‘1인1표제’를 시작으로 본격 당원 주권 시대를 열어젖혔다. 정 대표가 추진한 1인1표제는 당헌·당규상 현행 당 대표·최고위원 등을 선출할 때 대의원과 권리당원 투표 반영 비율이 20:1 미만으로 규정된 것을 1대1로 바꾸는 것이 골자다.

이를 기반으로 강성 지지층의 당내 장악력이 높아질 것이란 분석이 나오면서 당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민주당은 지난달 19~20일 이틀에 걸쳐 당헌·당규 개정안에 대한 전 당원 여론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1인1표제 찬성률은 86.81%로 집계됐다. 이를 토대로 정 대표는 “90% 가까운 당원의 뜻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며 “대한민국 어느 조직도 1인 1표, 헌법에서 보장한 평등 정신을 위반해서는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론조사 투표율이 16.81%에 그치는 등 한계점도 드러났다. 결국 1인1표제에 대한 우려는 완전히 해소되지 못한 채 중앙위원회로 넘어갔다.

꺾이지 않는
여론 증폭기

지난 5일 중앙위원회에서 ‘1인1표제 도입을 위한 당헌 개정의 건’에 대한 투표를 진행한 결과 부결로 마무리됐다. 찬성 수는 271명, 반대 수는 102명으로 과반(299명) 찬성을 얻지 못한 것이다. ‘당원 대다수가 찬성했다’는 주장과 달리 정 대표의 ‘자기정치’ 의구심을 불식시키지 못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투표 직후 정 대표는 “전당대회 때 약속한 공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중앙위원회에서 부결돼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됐다. 1인1표 당헌개정안은 지금 즉시 재부의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며 당원에게 사과했다.

이어 “따라서 부결된 제2호 안건 1인1표제는 당분간 재부의하기 어렵게 됐다”면서도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이재명정부의 국민 주권 시대에 걸맞은 당원 주권 시대에 대한 열망은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조금 더 시간을 갖고 당원들에게 길을 묻겠다”고 약속했다.


당원들의 반응은 당혹에서 분노로 바뀌었다. 각종 친민주당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대의원을 ‘기득권’이라고 지적하는 비판이 쏟아졌다. 당원 주권 명분을 앞세웠던 만큼 당내 기득권 세력에 의해 당의 ‘진짜 주인’인 당원의 목소리가 묻혔다는 점에서다.

지지자들은 커뮤니티, 유튜브 등의 공간에서 1인1표제에 대한 저마다의 생각을 쏟아냈고, 앞과 다를 바 없이 ‘정청래의 자기 정치’와 ‘개혁 발목을 잡는 수박’이라는 두 프레임의 싸움으로 번졌다.

강성 지지층과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친민주당 성향 유튜브가 스피커 역할을 하면서 팬덤은 점점 몸집을 키웠다.

한 국민의힘 의원은 <일요시사>와 만난 자리서 “우리(국민의힘)도 유튜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민주당은 굵직한 소통 창구가 정해져 있어 위(지도부)에서 지령이 떨어지면 의원들이 주요 유튜브에 출연해 아젠다 세팅을 하고 톤을 맞추는 등 깔끔하게 움직인다”며 “지금 국민의힘은 각개전투 중이고 출연하는 유튜브도 메시지도 다 다르다. 여론의 큰 흐름을 읽지 못하니 쌍방향 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성 지지층의 중심에 선 정 대표는 이미 ‘뉴스공장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이하 뉴스공장)’와 김어준씨가 운영하는 <딴지일보>를 띄우면서 스피커를 키웠다. 정 대표는 당 초선 의원 모임 ‘더민초’ 워크숍에 참석해 “우리 민주당 지지 성향으로 봤을 때 <딴지일보>가 가장 바로미터다. 거기 흐름이 민심을 보는 하나의 척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요즘 언론에서 <딴지일보> 게시판에 글 쓴다고 그러는데 저는 10년 동안 1500번 썼다. 평균 이틀에 한번 썼다”며 “꾸준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갈라치기
책임 전가

이 같은 정 대표의 주장을 정면으로 들이받은 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위로 알려진 민주당 곽상언 의원이었다. 곽 의원은 (뉴스 공장)을 향해 “이런 유튜브 방송이 ‘유튜브 권력자’라면, 저는 그분들께 머리를 조아리며 정치할 생각이 없다”고 반기를 들었다.

“유튜브 권력이 정치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지적한 곽 의원은 “200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 노무현 후보는 ‘<조선일보>는 민주당의 경선에서 손을 떼라’며 분명한 입장을 밝히셨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적었다.

이후 각종 커뮤니티 등 온라인 공간은 곽 의원을 향한 욕설과 비난으로 도배됐고 기사에 ‘좌표’를 찍는 등 지지층이 집단으로 움직였다.

강성 지지층은 지난해 치러진 국회의장 선거나 전당대회 등 크고 작은 선거에 영향을 끼쳤다. 정치 양극화가 강해지는 만큼 내년 치러질 민주당 최고위원 보궐선거와 지방선거에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란 해석이다.

먼저 다음달 11일 민주당 최고위원 보궐선거가 예정돼있다. 지방선거 출마를 준비하는 전현희·한준호·김병주 최고위원의 사퇴로 치러지는 이번 선거는 중앙위원 50%·권리당원 50% 투표를 반영해 치러지는 만큼 여타 다른 선거처럼 당심 잡기가 최대 과제로 자리 잡았다.

사퇴한 최고위원 중 전현희·김병주 의원은 정 대표에게 우호적인 인물로 분류됐던 만큼 새 지도부가 어떤 인물로 채워지느냐에 따라 민주당의 성격도 바뀌기 때문이다.

유동철 부산 수영지역위원장이 출마를 선언하자 이번 보궐선거가 친명 대 친청(친 정청래) 간의 대결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재명 대표 시절 영입돼 친명으로 분류되는 유 위원장은 지난 부산시당위원장 선거에서 컷오프된 뒤 정청래 지도부를 향해 “결자해지하라”며 공개적으로 항의했던 인물이다.

유 위원장은 지난 9일 오전 국회에서 최고위원 보궐선거 출마 기자회견을 열고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 공정하고 투명한 공천 관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미 당원들은 의심하고 우려하고 있다. 당내의 비민주적 제도를 개선하고 당내 권력을 감시·견제할 수 있는 최고위원이 필요하다”며 사실상 현 정청래 지도부를 저격했다.

최고위원 보선 당심 바로미터 급부상
진화 나선 당정 “우리 모두가 친명”

이어 “당 대표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컷오프는 이미 현실이 됐다”며 “조직강화특위는 당헌·당규의 미비를 이용해 제어할 수 없는 권한을 휘두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리 민주당에 무소불위의 권력은 존재할 수 없다”며 “이재명 대통령처럼 정정당당하게 맞서 공정과 민주의 가치를 복원하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1일엔 이재명 대통령의 대장동 특혜 의혹 사건 변호인이었던 이건태 의원이 출마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밖에도 친명계인 강득구 의원도 최고위원 후보군으로 거론되면서 당원들의 눈길도 보궐선거로 향했다.

‘심리적 분당’ 트라우마를 겪은 민주당은 다시 한번 원팀으로 모든 선거에 임하겠다는 방침이다. 정부 역시 출범 6개월째인 만큼 불필요한 갈등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9일 정 대표, 김 원내대표와 함께 만찬 자리를 가졌다. 2시간30분 동안 진행된 회동서 그는 두 사람에게 “개혁 입법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합리적으로 처리되면 좋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 대표의 1인1표제가 부결되면서 정 대표의 리더십 타격이 불가피해지자 이를 방어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된다.

민주당 역시 화합의 메시지를 내놨다.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민주당에 ‘친청’은 없다. ‘친명’만 있을 뿐”이라며 “‘친명·친청’은 민주당을 분열시키려는 기우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이재명정부의 성공과 공동운명체다. 이정부의 실패를 바라는 사람이 민주당에는 단 한 사람도 없다”며 “외부의 갈라치기에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 ‘갈라치기’는 당을 흔들고 결국 이정부를 흔드는 것이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언론을 향해서는 “‘친명·친청’이라고 쓸 때 근거 아니면 자제를 요청한다”고 요구하기도 했다.

당의 당부에도 이 같은 설명이 나오는 것 자체가 갈등을 인정하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다. 앞으로 다가올 크고 작은 선거들이 한때 민주당을 벼랑으로 내몰았던 계파 싸움의 도화선이 될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네 편?
내 편?

한 민주당 관계자는 “온라인을 통해 여론이 형성되고 지지자들이 결집하면서 양날의 검이 됐다”며 “(온라인은) 익명이 보장되기 때문에 여론을 흐리려는 사용자가 마음만 먹으면 금세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 끝없이 의심하고 반격하다 보면 같은 지지자끼리도 분란이 생긴다. 지난 전당대회서 선명성 경쟁을 할 때부터 민주당 내 갈등은 예견된 수순”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이어 “친청 라인은 강성 의원들을 시작으로 지금부터 조금씩 생길 것”이라며 “선수가 높거나 이름이 알려진 의원들은 대놓고 줄을 서지 못해도 개혁에 힘을 실어주는 등의 방법으로 민주당과 강성 지지층을 움직이고 있다”고 봤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국힘도 당원 전쟁

강성 지지층을 대하는 국민의힘 상황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지방선거 6개월을 앞두고 ‘마이웨이’ 강성 우파 행보를 걸으면서 당내 중진들의 고심이 깊은 모양새다.

앞서 국민의힘 지방선거총괄기획단은 ▲당원 투표 50% ▲일반인 여론조사 50%인 현재 경선 룰을 ▲당원 70% ▲일반인 여론조사 30%로 바꾸는 방안을 당 지도부에 건의했다.

당심과 민심이 다르지 않다는 취지인데, 중도 확보가 필수인 선거에서 해당 전략이 오히려 당의 발목을 잡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당심 70%로는 필패한다는 지적이 많다”고 밝혔으며 국민의힘 이성권 의원은 “민심에 역행하는 ‘정치적 자해 행위’”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총괄기획단 위원장인 나경원 의원은 “당심 안에는 이미 민심이 녹아 있다. 당원은 국민의 일부이며 국민과 등 돌려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며 “‘당심이 민심과 다르다’는 말은 결국 우리 스스로 당원을 과소평가하는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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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구 친윤(친 윤석열)계 핵심으로 분류됐던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장 대표는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들의 공개 갈등엔 ‘옹립의 정치학’이 숨어 있다. 특정 세력이 정변을 일으키거나 지도자 교체를 시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지도자 옹립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정당성·생존 본능이 적절하게 조화해야 한다. 그래서 복잡한 조건이 가미된다. 지도자 옹립을 위한 조건으로는 대체로 ▲적절한 상징성 ▲새 기득권이 될 주도 세력과의 조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 등을 들 수 있다. 아무나 못 갖는 지도자 조건 이 중 가장 어려운 숙제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새 지도자가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강하게 밀어붙이면, 새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새 지도자는 자신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생존 본능은 강한 권력 의지로 연결된다. 자신만의 새로운 비전을 실천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강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을 옹립한 주도 세력과 마찰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빈번하다. 왕은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고, 귀족은 이를 막으려고 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과 귀족은 끊임없이 정치적 다툼을 벌였다. 이 때문에 많은 왕이 교체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옹립된 지도자는 대체로 권위가 약하다. 옹립된 지도자는 지배 질서가 규정한 정통성이 약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옹립되는 과정 자체가 지도자로선 주도 세력에게 빚을 진 격이 되는 사례도 많다. 조선 태종은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낸 후 즉위했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적장자 승계를 중시하는 유교 질서에선 도저히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태조는 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악수를 뒀고, 사병을 혁파하려고 했다. 새 질서를 왕이 직접 부정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기득권 세력의 기반을 침범하려고 한 것이다. 태종은 적장자 대접을 받던 형 정종을 세자·왕으로 옹립한 후 형의 양자로서 왕위를 승계해 질서를 지키는 모양새를 갖췄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주축은 주도 세력이 동원한 사병이었는데, 태종은 이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하지만 그는 주도 세력 중 상당수를 정계에서 일시 퇴출시킨 후 사병을 혁파했다. 자신과 왕조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안전판을 확실하게 확보한 것이다. 경제적 이권까지 거둬들이려고 해선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태종은 공신들이 저지르는 각종 비행을 적당한 선에서 눈감아줬다. 태종의 킹메이커 하륜은 도성 안에 조성된 신덕왕후의 능이 이장되자, 주변의 좋은 땅을 선점하기 위해 사위들을 동원했다. 하륜에겐 지금도 유능한 신하·부정부패의 상징이란 평가가 함께 따라다닌다. 조선 중종도 형 연산군 폐위 이후 옹립된 임금이었다. 엉겁결에 왕위에 올라 큰 빚을 졌기 때문에 중종은 공신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핵심 공신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이후 중종은 조광조·김안로 등 대리인을 내세웠다가 토사구팽하는 정치술을 반복했다. 너무 유능해도, 너무 무능해도 안 된다 출마설 도는 주호영·윤한홍의 장 직격 조광조 일파는 중종이 한밤중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숙청됐다. 김안로는 아들의 초례가 예정된 날 체포됐다. 주도 세력으로선 왕이 너무 유능하거나 정치에 밝으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너무 무능하거나 막 나가도 안 된다. 지나치게 막 나가서 폐위된 대표적인 왕은 고려 충혜왕이었다. 충혜왕은 아버지 충숙왕이 양위해서 즉위했다. 당시 고려 왕은 원나라 사신이 하루아침에 폐위해 귀양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권위가 없었다. 고려 친원파의 권력은 왕보다 더 강했다. 그리고 고려엔 원나라 제2황후 기황후의 오빠 기철이 있었다. 고려 왕은 정상적으로 즉위하더라도 원나라·친원파가 사실상 인준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즉위하는 임금마다 옹립된 지도자나 다름없었다. 충혜왕은 즉위 후 아무나 성폭행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성폭행 대상 중엔 서모 경화공주도 있었다. 이 사실은 원나라 사신에게도 알려졌다. 결국 충혜왕은 폐위돼 귀양 가던 중 사망했다. 한편으로 충혜왕은 폭력배들을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양성한 후 권문세족이 독점하던 유통구조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려고 했다. 아울러 권문세족의 사유지를 혁파하려 하는 등 이들의 경제기반을 뒤흔들려고 했다. 충혜왕이 폐위된 결정적인 계기는 기철의 건의였다. 원나라는 기철의 건의를 받아들여 충혜왕을 폐위했다. 충혜왕은 폐위되던 순간 사신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12·3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 대부분은 소장파 성향의 초·재선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당에 비상계엄 관련 사과와 당의 혁신을 요구했기 때문에 딱히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원조 친윤’ 중 1명으로 평가받는 국민의힘 3선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에게 비상계엄 관련 사과를 요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윤 의원은 지난 5일 진행된 국민의힘 ‘이재명정권 6개월 국정평가 회의’ 도중 장 대표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인연과 골수 지지층의 손가락질을 다 벗어던지고, 계엄 굴레에서 벗어나자”고 요구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비상계엄이 잘못됐단 인식을 아직도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계엄을 벗어던지고, 국민께 어이없는 판단의 부끄러움을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앞에서 사과 요구 이는 장 대표가 지난 3일 비상계엄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려던 계엄이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었다. 장 대표는 이날 윤 의원의 비판을 들은 후 고개만 살짝 숙인 채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국민의힘 6선 주호영 국회부의장도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은 지난 8일 대구 지역 언론인과의 정책토론회 중 장 대표를 일컬어 “자기 편을 단결시키는 과정을 밟다가 중도가 도망간다면 잘못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장 대표는 ‘12월3일까진 지켜봐 달라’고 말했고, 그 이후엔 민심에 따르는 조치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아서 당내 반발이 많다”고 강조했다. 주 부의장은 “윤 전 대통령은 폭정을 거듭하다가 탄핵당했다”며 “비상계엄도 김건희 여사 특검을 막으려던 것이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라는 등 윤 전 대통령도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과 윤 의원은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출마 가능성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 부의장은 이날 대구시장 출마 가능성에 대해 “준비는 많이 해왔고, 이른 시일 안에 의견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윤 의원은 지난 2021년 경남도지사 출마 의사를 내비쳤다가 입장을 선회했던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지난 2월 공개한 명태균씨의 전화 통화 녹취엔 “윤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윤 의원의 경남도지사 출마를 막았다”는 취지의 대화가 공개됐다. 지방선거를 약 6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주 부의장처럼 출마 가능성을 암시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방선거는 국회의원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두는 방법엔 ▲지역구 내 지방선거 공천 ▲중앙정치에 지역 이해관계 반영 등이 있다. 지방선거에선 국회의원이 공천·조직 동원 등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민주당 이상헌 의원은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재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박순자 전 의원도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지난 3월 징역형을 확정받았다. 힘 못 쓰는 2가지 이유 국민의힘 대표를 지냈던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지난 2월 <일요시사>와 만나 “국민의힘은 김종인 선거대책위원장·이준석 대표 체제 외엔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실제로 국민의힘은 지난 2016년 이후 지난 2022년 대선·지방선거 외엔 참패를 거듭했다. 국민의힘이 선거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로는 크게 2가지가 거론된다. 하나는 자체적으로 선거 후보를 양성하는 게 아니라, 선거가 임박해 외부 명망가를 데려와 주요 선거 후보로 옹립하는 특성이다. 다른 하나는 영남·강원 등 핵심 텃밭에 자리 잡아 중앙정치보다 지역구 기반 다지기에 집중하는 정치인 집단이다. 세간에선 이들을 일명 ‘언더 찐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선거 참패가 이어지면, 중앙정치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도 줄어든다. 영향력이 줄면, 지역의 이익을 중앙정치에 반영하기 어렵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둘 방법·영향력을 모두 잃는다는 것은 언더 찐윤 의원들에게 매우 치명적이다. 아무리 중앙정치·전국 단위 선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당이 정권 획득 가능성이 아예 없는 수준으로 추락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그 정당에 소속된 국회의원과 이해관계를 교환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21세기 이후 국민의힘에서 배출한 대선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 ▲홍준표 전 대구시장·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다. 이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전국적 인지도 ▲정치적 상징성 ▲낮은 당 장악력 등이다. 대선 출마 당시 “당 장악력이 낮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던 대선후보는 이 전 총재·박 전 대통령밖에 없었다. “당 장악력이 낮다”는 명제는 국민의힘 친윤계 의원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당 장악력이 높은 대통령·대권주자는 의원들과 굳이 이익을 주고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은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대표 등 수도권에 기반해 중도 공략 의지가 강한 정치인과의 불화가 잦다. 이들과 이해관계·성향·기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많아서 당권을 다투거나 알력이 있을 가능성도 큰데, 결국 화합하기 어렵다. 살기 위해 충돌하는 장 VS 친윤 “우리끼리 총구 안 돼” 의견 고수 언더 찐윤 의원들이 언론 노출을 꺼리는 성향도 ‘당 장악력이 낮은 적절한 대권주자’를 선호하는 현상과 맞물린다. 언더 찐윤의 관점으로 보자면, 윤 전 대통령은 자멸해서 사라졌다. 한 전 대표·안 의원은 수도권 엘리트 성향이 강하다. 지난 8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은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을 청산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런 상황에서 두드러진 사람이 바로 장 대표였다. 장 대표는 정치 경력이 짧으면서도 한 전 대표와 결별한 이력이 있다. 지난 2월엔 백봉신사상을 수상할 정도로 신사적 이미지도 강했다. 국민의힘 내 강성 보수 성향 당원들은 장 대표를 선택했다. 이후 장 대표는 범보수 대권주자로 주목받았다. 코리아정보리서치가 지난 6일부터 이틀 동안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범보수 차기 대선후보 적합도 여론조사에서도 21.3%의 지지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겐 정치적 기반이 없다. 대권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다. 대선에 출마하지 않더라도,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 없으면 정치 생명을 길게 유지할 수 없다. 장 대표는 장외집회 개최 위주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장외집회에선 이재명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하는 강성 발언을 주로 내놨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 장외집회에서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불법이었고, 국민의힘은 그 불법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가 강경 보수 성향 당원의 비난을 받았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김민수 최고위원은 국민의힘을 강경 보수의 길로 이끄는 ‘투톱’이다. 그런데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둔 시점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지방선거는 이들의 정치적 삶과 죽음을 좌우할 가능성이 있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의원들이 충돌하는 결정적인 지점은 살고자 하는 의지다. 윤 의원이 장 대표를 비판했다는 사실은 “국민의힘 구 친윤계가 장 대표를 통제불능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으로 연결된다. 강경 보수 성향이 짙어지면, 선거의 캐스팅보트로 인식되는 중도층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친윤계 의원들에겐 당과 개인의 이익이 모두 줄어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조 의원은 지난 8월 <일요시사>와 만나 “강경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선택지는 어차피 국민의힘밖에 없다”면서 중도 공략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이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친윤계 의원들이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한 이유와 맞물릴 가능성이 크다. 장 대표의 실질적 임기는 지방선거 결과에 달렸다. 따라서 장 대표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 정도다. 장 대표는 이 안에 강경 보수 세력을 자신의 독자적인 기반으로 삼으려 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옹립하는 세력과 옹립되는 수장은 각자의 삶과 죽음이 걸려 있어 긴장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장 대표에 대해선 “국민의힘, 나아가 보수 진영의 진정한 1인자가 될 만한 기반이 부족하다”는 다수의 분석이 나온다. 장 대표와 친윤계의 이해관계는 여기서 엇갈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남은 6개월 빠듯한 시간 새누리당 정옥임 전 의원은 지난 9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주 부의장은 신중한 사람이지만 현실감각이 굉장히 빠르다”며 “장 대표는 화장을 지운 여자의 얼굴처럼 다 보여줘서 장 대표 체제 종언은 이제 뚜껑만 열리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게 남은 시간은 불과 6개월이다. 부족한 것은 결국 시간이다. 하지만 장 대표는 윤 의원·주 부의장의 비판에 “우리끼리 총구를 겨눠선 안 된다”며 “싸워야 할 대상은 이재명 독재정권”이라고 반박했다. 장 대표는 흔들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 장 대표와 구 친윤계는 과연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