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상일 감독의 <국보>가 일본 영화 역대 최대 흥행을 기록했다. <국보>는 명문 가부키 가문 내 친자·양자의 경쟁·갈등을 다룬다. 혈연·재능이란, 타고나는 것들의 딜레마를 다룬 <국보>는 주어진 운명에 대응하는 우리의 선택을 소설·영화로 그려냈다.
재일교포 이상일 감독의 신작 영화 <국보>가 지난달 19일 개봉했다. 일본에선 지난 6월 개봉돼 11월24일 기준 관객 1231만명을 동원하며 일본 영화 역대 최대 흥행을 기록했다. <국보>는 일본 전통 연극 가부키 배우 명문가에서 재능을 드러내면서 사실상 양자로 대접받는 제자·친자의 경쟁·갈등을 다룬다.
일 최대 흥행
일본의 가부키 배우 명문가는 일본 최고의 명문가로 대접받는다. 이들 중 특히 대접받는 4대 가문은 황족·정치인 가문과 비슷한 예우를 받는다. 가부키 가문에선 대대로 배우로서의 예명을 세습한다. 일본에선 이를 ‘슈메’라고 한다. 가문을 이어받을 구성원은 만 2세 무렵 무대에 처음 서서 관객에게 인사한다.
이 의식은 ‘하츠오메미에’라고 한다. 다이묘가 쇼군에게 후계자를 처음 소개하던 의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슈메·하츠오메미에를 치르는 후계자는 대부분 가부키 가문 당주의 친자다. 이 때문에 <국보>는 일본에선 매우 도발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가부키 가문에서 제자로서 양자가 돼 당주까지 오른 사례로는 마츠시야마 가문의 6대 가타오카 아이노스케가 유명하다.
가타오카는 아들이 없던 2대 카타오카 히데타로로부터 인정받아 양자로 입적됐는데, 이는 예외적인 사례다.
일각에선 <국보>의 갈등 구도를 놓고 “혈연·재능의 갈등은 흔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일본에선 그렇게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는 구도가 아니다. 일본의 역사를 바꾼 사건 중엔 친자·양자의 갈등이 많기 때문이다.
1467년 발생한 오닌의 난은 무로마치 막부의 영향력을 완전히 끝낸 사건으로 통한다. 막부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아들이 없어 스님으로 출가한 동생 요시미를 환속시킨 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했다. 요시마사는 요시미를 후계자로 삼은 후 친아들 요시히사를 얻는다.
오닌의 난은 요시마사가 후계자를 요시히사로 바꾸려던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다이묘 가문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다수 있었기 때문에, 막부의 후계자 교체는 막부만의 일이 아니었다. 다이묘들은 막부의 후계자 결정에 개입해 내전을 벌였다.
요시히사는 9대 쇼군이 됐지만, 내전의 여파로 막부의 영향력은 땅에 떨어졌다. 이후 일본은 센코쿠 시대를 맞았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도 친자가 없었다. 그래서 누나의 아들 히데츠구를 양자로 삼아 간파쿠 직위를 물려줬다.
일본 역사 바꾼 친자·양자 갈등 영화화
남성의 여성 연기 다룬 일본판 <패왕별희>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친자 히데요리를 얻은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에게 반역죄를 적용한 후 할복을 명령했다. 히데츠쿠의 가족도 모두 죽였다. 히데요시가 죽을 당시 히데요리의 나이는 불과 5세였다. 그로부터 17년 후 도요토미 가문은 오사카 전투를 끝으로 몰락했다.
<국보>의 주인공인 야쿠자의 아들 타치바나 키쿠오(요시자와 료 분)는 간사이 카미카타 가부키 명문가 당주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 분)의 인정을 받아 제자가 된다. 이 가문에선 온나가타(여성 역할을 하는 남성 배우)를 세습한다. 미모와 연기력이 모두 뒷받침돼야 배우로서 무대에 설 수 있는 가문이다.
일부 관객들은 이로 인해 첸카이거 감독의 1993년 작 <패왕별희>를 함께 거론한다. 이 영화의 중심 소재는 항우·우미인 부부의 비극적인 사랑을 담은 경극 ‘패왕별희’였다. <패왕별희>는 20세기 중국의 각종 격변 속에서 몰락하는 경극과 두 남성 배우의 묘한 사랑을 담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거론되는 것은 언제나 우미인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르는 청뎨이 역을 맡은 장궈룽의 미모였다.
이 감독도 <패왕별희>를 언급했다. 이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학창 시절 <패왕별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언젠가 이런 영화를 찍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2010년 무렵 가부키의 온나가타를 중심으로 찍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감독은 <국보>의 원작 소설을 집필한 요시다 슈이치와 오랫동안 상의했고, 요시다의 원작 소설 출간에 이어 영화화를 추진했다.
친자·양자의 갈등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도 1980년 작 <카게무샤>에서 보여줬다. 센코쿠 시대 다이묘 다케다 신겐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좀도둑을 카게무샤로 삼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겐이 사망하면서 남긴 유언은 “3년 동안 나의 죽음을 숨기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카게무샤는 신겐의 대역으로 활동했고, 아들 다케다 카츠요리는 당주가 되지 못했다. 중심 소재는 스스로 신겐이라고 생각하면서 닮아가는 카게무샤와 그를 바라보면서 조바심을 느끼는 카츠요리의 갈등이다. 변형된 친자·양자의 갈등이라고 볼 수도 있다.
관점에 따라 카게무샤가 다케다 가문의 당주 자격을 이어받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구로사와 이어받은 주제 의식·화면
극중 공연 자막 설명으로 이해 도와
이 감독은 화면 구성 과정에서도 가부키 특유의 화려한 색감을 전면에 내세운다. 특히 두드러지는 연출은 흰 눈과 붉은 피를 대비시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구로사와 감독의 1985년 작 <란>의 색감과 비슷하다”는 평이 있다. 이 감독 스스로는 “구로사와 감독의 1958년 작 <이키루>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국보>는 세트 구성과 가부키의 재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 관객은 극중 등장하는 가부키 공연에 익숙하지 않다. 수입사는 자막을 통해 극 중 공연의 줄거리와 특성을 설명하며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카게무샤>와 <국보>의 공통점은 일본의 오랜 고정관념에 도전한단 것이다. <카게무샤>는 일개 좀도둑이 다이묘에 동화돼 스스로 다이묘라고 생각하는 등 일본 사회에선 용납할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을 넘본다.
<국보>는 혈연·재능의 갈등을 다룬다. 좀도둑이 스스로 다이묘라고 생각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사회에서 야쿠자의 아들이 가부키 명문가의 일원이 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2011년 이후 일본에선 야쿠자를 겨냥한 폭력단 배제 조례가 전국에서 시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야쿠자는 자신의 명의로 휴대전화를 개설할 수 없고, 은행 거래를 할 수 없다. 자동차를 가질 수도 없고, 사회보장보험도 적용받지 못한다.
이레즈미 같은 문신을 하면 목욕탕에도 갈 수 없다. 일본 야쿠자 영화에서 야쿠자 조직이 사무실에 금고를 두고 현금을 보관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폭력단 배제 조례는 야쿠자를 사회에서 격리하기 위해 시행되고 있고, 야쿠자 가족에게도 사회적으로 부정적 시선을 보내는 등 사실상의 연좌제가 적용되는 사례가 많다.
매혹하는 선택
재능과 혈연은 모두 타고나는 것이다. <국보>에서 다루는 것은 타고난 것들의 충돌·비극·이해다. 타고난 것 때문에 웃고, 타고난 것 때문에 운다. 타고난 것으로 인해 교만에 빠질까 봐 궁지로 몰기도 한다. <국보>는 타고난 것의 모든 딜레마를 다룬다. 주어진 운명에 대응하는 다양한 선택은 고대 그리스 비극 이래 오랫동안 우리를 매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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