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아역 배우의 연기력을 대폭 끌어올리는 마스터”란 평가를 듣는 윤가은 감독의 영화 <세계의 주인>이 조용한 흥행 가도를 이어가고 있다. 윤 감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와 닮은 듯하면서도 다른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윤가은 감독의 신작 <세계의 주인>은 지난달 22일 개봉했다. 이후 지난 12일 기준 <세계의 주인>을 관람한 관객은 9만6670명이다. 독립영화로선 조용한 열풍을 이어가고 있다. 배우 김의성·김혜수·박정민·김태리·고아성 등은 릴레이 응원 상영회에 동참했다.
릴레이 응원
<세계의 주인>은 <우리들>과 <우리집>에 이은 윤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영화다. 윤 감독은 두 작품에서 여자 초등학생의 미묘한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우리들>에선 교실에서 흔히 일어날 법한 교우관계의 형성·갈등과 은근한 따돌림을 다뤘다. <우리집>에선 복잡한 가정환경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어른이 돼가는 아이들을 다룬다.
윤 감독은 <세계의 주인>에선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세 작품을 통해 드러난 윤 감독의 연출 특징은 ▲아역 배우의 차원 높은 연기력 ▲아이의 눈높이와 움직임에 맞춘 장면 구도 ▲절제된 미장센 ▲집중력 있는 일상 탐구 ▲진지한 시선과 문제 제기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감독의 주된 역할 중 하나가 연기 지도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윤 감독은 데뷔작에서부터 숙련된 재능을 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 영화를 다수 감상한 관객이라면 윤 감독의 영화들에서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연상시킬 가능성이 있다. 윤 감독의 연출 특징 중 상당수는 고레에다 감독과 겹친다.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인 고레에다 감독은 절제된 미장센 속에서 아역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면서 현실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다. 두 감독 모두 억지 감동을 추구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서사를 통해 관객 스스로 느끼게 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윤 감독은 이미 데뷔작 <우리들> 공개 후 ‘한국의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별명을 얻었다. 윤 감독은 이 별명을 피하지 않는다. 봉준호·고레에다·중국의 지아장커 감독은 <세계의 주인>을 호평하면서 윤 감독을 지지했다. 이에 대해 윤 감독은 지난달 20일 <뉴스1>과의 인터뷰에서 “후배 영화인으로서 그분들의 길을 모방하고, 때로는 변주하면서 쫓아가는 길을 걸었다”고 말했다.
아역 중심 숙련된 연출…“마스터” 평가
미묘한 아이들 심리 섬세한 묘사가 장점
그들 중 봉 감독은 “윤가은·고레에다·고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아역 배우를 스크린에 살아 숨 쉬게 하는 3대 마스터”라고 극찬했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연출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누렸다.
윤 감독의 영화는 여성 초등학생·고등학생의 평범한 일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미묘한 갈등에 빠지고, 그 갈등을 통해 현실의 다양한 문제를 드러낸다는 특징이 있다.
<우리들>에선 또래 집단에서 제외되고 싶어하지 않는 아이들의 다양한 선택과 미묘한 갈등을 다룬다. <우리들>에서 묘사되는 교실은 이미 어른의 세계다. 살기 위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 상처는 봉합되지 않는다. 때로는 진실이 드러나 의도치 않게 따돌림을 당한다.
관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영원히 이어지는 숙제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집>에선 가족을 다룬다. <우리들> 주인공의 가족은 가난하지만 화목했다. 반대로 <우리집> 주인공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가족이다. 가정불화가 이들을 괴롭힌다. <우리집>의 두 주인공이 친해진 계기는 이에 대한 공감대였다.
환경은 이들의 우정을 끝까지 괴롭힌다. 고레에다 감독의 2011년 작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선 아이들이 어른의 불화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비교하면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
<세계의 주인>은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불행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얘기한다. 그 상처는 가족 모두에게 영향을 준다. 가족은 저마다 각자의 방법으로 상처를 치유하려고 하지만, 때로는 그 각자의 방법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서로를 잘 알지 못해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세계의 주인>의 핵심 소재는 아동 성폭력이다. 이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이 어떻게 2차 가해를 하는지, 피해자가 살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등을 다양한 등장인물을 통해 아주 서서히 드러낸다. 윤 감독은 이들의 평범한 일상을 공들여 집중력 있게 장시간 보여준다. 이어 무르익었을 즈음 중심 소재를 서서히 드러내다가 어느 순간 폭발시킨다.
살기 위해 상처 치유 노력
“평범한 설정으로 감정 폭발”
이는 고레에다 감독이 지난 2023년작 <괴물>에서 보여줬던 연출과 비슷하다. <괴물>에선 비밀을 가진 두 남자 초등학생을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해 갈등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진실이 밝혀진 순간 폭발하는 감정을 예사롭지 않게 묘사했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란 말은 일상에서 흔히 쓰인다. 두 감독은 이 흔한 말을 영화 주제로 연출 전면에 내세운다. 윤 감독은 <우리들>과 <우리집>에서 “아이의 나쁜 관행과 어려움은 어른의 환경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반대로 <세계의 주인>에선 사려 깊은 어른이 있어야 아이도 상처가 아물 수 있도록 노력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세계의 주인>에선 어른의 역할 비중이 크지 않다. “아이가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선 어른의 말 없는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고레에다 감독이 아역 배우를 내세워 사회 문제를 다룬 영화로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어느 가족> <괴물>을 언급할 수 있다. 이 영화 속 아이들이 겪는 문제는 모두 어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에선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4남매가 등장한다. 아빠는 아예 존재 자체가 거론되지 않으며, 엄마는 자신만의 삶을 위해 아이들을 버렸다. 고레에다 감독은 4남매를 비극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하지만 계절의 변화를 뚜렷하게 묘사해서 “엄마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는 비극을 암묵적으로 전달한다. 아울러 밖에서 활발하게 노는 아이들을 보여주면서도 결국 엄마 없는 좁은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현실을 대비시켰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괴물>에선 아이를 자신의 틀에 맞추려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특히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선 상반된 두 아버지를 대비시키면서 무엇이 어른의 역할인지 되묻는다. <어느 가족>에선 친부모의 폭력과 ‘양부모 아닌 양부모’의 ‘사랑 아닌 사랑’을 대비시킨다.
드러나는 세계
고레에다 감독이 다양한 환경의 캐릭터들을 통해 현실에서 아이들이 처하는 어려운 상황을 묘사한 것처럼, 윤 감독도 아이들이 처하는 환경을 다루는 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아울러 <세계의 주인>에선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일상적인 설정을 주인공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매개로 다루면서 일상을 표현하는 연출력도 비범하단 사실을 입증했다.
윤 감독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에서 이창동 감독의 지도를 받았다. 이 감독도 <세계의 주인>과 비슷한 소재를 다룬 걸작 <시>를 연출했다. 윤 감독은 거장들의 자양분을 꼼꼼하게 흡수해 어느덧 자신만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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