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선감도 ㉓지옥 같은 하루

  • 김영권 작가
  • 등록 2024.10.28 02:00:00
  • 호수 1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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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진달래, 개나리, 철쭉 등 봄의 산야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꽃들이 지면서 산은 초록빛이 점점 더 무성해져 갔다. 어느덧 봄날이 저물면서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노동 수용소

선감학원의 하루는 늘 철저한 점호로 시작해서 점호로 막을 내렸다. 철두철미한 인원점검이었다. 그곳은 말이 학원이지 사실은 노동 수용소와 마찬가지였다.

수용소 내에는 기술을 가르치는 직업보도부도 있었는데 분야는 축산부, 목공부, 이용부, 양잠부, 체육부 등이었다. 나름대로 심사숙고한 끝에 용운은 목공부에 들었다. 뭔가 기술을 하나쯤 익혀두어야 될 것 같았다. 

제약된 틀 속에서 고된 작업도 작업이지만, 신입이기에 따라붙는 고충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논밭일 등 힘겨운 일과를 마치고 옥사로 돌아오면 이번엔 반장을 비롯한 여러 고참들이 부려먹기에 바빴다, 수건을 빨아 와라, 팔다리를 주물러라, 식수를 떠 와라, 한시도 봐 주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서슴없는 주먹질이나 기합이 뒤따랐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은 배고픔이었다.

거친 보리밥이나 밀밥 한 덩이에 짜디짠 곤쟁이젓과 멀건 시래깃국뿐인 식사, 그리고 작업 중간에 던져주는 밀빵 한 개. 일은 고된 데다 먹는 건 고아원에 있을 때보다도 부실하다 보니 가뜩이나 풀기 없는 뱃속엔 갈수록 허기만 축적됐다.

너나없이 둑에 앉기만 하면 습관처럼 풀줄기를 뽑아 질겅거렸고, 냉이나 달래뿌리를 찾기 위해 쉬지 않고 눈알들을 굴렸다.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를 찢어서 날로 씹어 삼키는 일쯤은 예사였다. 쥐나 뱀도 마찬가지였다. 독버섯을 잘못 뽑아 먹고 죽은 아이도 있었다.

한동안 지난 뒤부터는 용운도 불침번에 들게 되었다. 초짜로서의 기간이 끝난 것이다.

불침번 교대는 복도 중앙에 걸려 있는 괘종시계에 의해서 이뤄지는데, 교대 시마다 앞 근무자는 항상 같은 소리를 읊조렸다.


화장실에 간 사람이 30분 이상 돌아오지 않을 때는 즉시 반장을 깨울 것, 수시로 복도를 내다볼 것 등이었다. 취침한 지가 얼마 안 되는 시간상의 이유 때문인지 복도에 대변을 보는 사람도 없었고 화장실에 가서 시간을 넘기는 사람도 없었다.

그보다 문제는 근무 시간마다 엄습하는 비애감이었다. 고요한 밤 가물거리는 호롱불 밑에 홀로 서 있노라면 괜스레 신세가 처량해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었다. 

선감원의 하루하루는 수용된 모든 원생들에게 어슷비슷한 시간과 공간으로서 주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시공간에서 원생 개개인이 느끼고 생각하는 건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었다.

똑같은 기상나팔 소리를 듣고도 공포의 전주곡으로 느끼기도 하고 감미로운 미련으로 감촉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바다에서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파도를 보고도 당사자의 사고방식에 따라 절망과 희망의 극단적인 쌍곡선을 마음속에 그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여러 종류의 인간형이 섞여 부대끼며 살고 있었다. 순응형은, 좀 괴이하게 변화된 환경이지만 그곳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회라고 여기며 가능한 대로 적응하려고 애썼다.

그곳의 엄혹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 나약한 존재라고 인정한 사람뿐만 아니라 강하다고 자부하는 자도 설령 속으로는 이빨을 으득으득 갈지언정 겉으로는 잘 훈련된 개와 같은 순종을 그곳의 주인들에게 보여 주었다. 

견디기 어려운 배고픔
혁명 정부 고귀한 뜻?

사장(舍長)들이 그런 존재였다. 그들은 똑같은 원생 신분이면서도 원장이나 사감 선생에게 선택되어 그분들의 지시대로 다른 원생들 위에 군림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들의 가슴속에 억눌린 분노가 힘없는 수하 원생들에게 쏟아졌다. 

그들에게는 ‘사장실’이라는 방이 따로 주어졌다. 작긴 해도 여러 명의 몸뚱이가 한 방에서 마치 지옥처럼 부대끼는 일반실에 비하면 그곳은 천국이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원장을 비롯한 관리자들을 대신해 그곳을 통치해 나간다는 사명감을 주입받고 있었다.

“너 이 개새끼, 어디서 감히 내 눈을 쳐다봐. 난 위대한 오일육 혁명정신을 지금 이곳에서 실행하고 있단 말야!”

그들은 선생이 짐짓 보지 않는 곳에서는 이런 소리를 지껄이며 원생들의 왕처럼 굴었다.

그들은 일명 ‘저승사자’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실제로 질서유지를 명분 삼아 조금이라도 제 눈에 그슬리면 마구 폭행을 휘둘러 반병신으로 짓이겨 놓거나 심지어 싸늘한 시체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그 시체는 원래 살아 있을 때도 쓰레기로 취급되었으므로 죽어서도 쓰레기처럼 지저분한 가마니에 말려 뒷산 기슭에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사실상 사회에서 강도, 강간, 도둑질, 금품 갈취, 소매치기 등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놈들 중에 오히려 순응형이 더 많았다.


그들의 순응은 참회나 반성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잘 지내고자 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반항형은 선감학원이 양두구육의 수작질을 벌인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선감학원이 양대가리를 문 앞에 걸어놓고 개대가리처럼 물어뜯는 곳임을 알고는 세상 또는 적어도 선감도의 하늘 아래 까발리고 싶어했다. 

그들은 사회에서도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해 왔으며, 한 순간 참지 못해 울분을 터뜨리고는 잡혀온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순응형처럼 요령을 잘 피울 줄도 몰랐고 또 편하게 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곳은 그들에게는 사람이 사는 데가 아니라 괴상야릇한 지옥과 같은 세계였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사람처럼 살아보고픈 갈증에 시달리며 용을 쓰거나 몸부림을 쳐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감원 측은 애초부터 원생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반항할수록 더 혹심한 폭력으로 제압하려 했다. 

폭행은 고통을 두려워하도록 하기 위해 가해지는 것인데, 어떤 반항아들은 고통 자체를 운명으로라도 여기는 듯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으므로 수용소 측으로서는 골치였다.

예비역 대령인 조 원장은 위대한 5·16 혁명 정신을 받들어 자신의 무대인 선감학원에서 숭고하게 꽃피우기를 희망했다. 

건설의 역군

쓰레기들을 새사람으로 탈바꿈시켜 조국 건설의 역군으로 동참시키려는 혁명 정부의 고귀한 뜻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우선 목표를 달성하는 게 더 중요하므로 방해가 되는 잡초나 삐죽 튀어나온 돌멩이 같은 존재는 사정없이 뽑아내 버리라고 아래에다 지시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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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계엄 후폭풍> 끝나지 않은 탄핵 시나리오

[12·3 계엄 후폭풍] 끝나지 않은 탄핵 시나리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탄핵 열차가 멈춰 섰다. 시동이 걸릴 듯 말 듯 미적대던 열차는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를 동력 삼아 나아가기 시작했다. 열차를 레일 위에 올린 것은 야권이지만 운전대를 잡은 여당이 브레이크를 잡았다. 탄핵 열차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재가동이냐, 전복이냐?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난 3일부터 탄핵소추안 표결이 이뤄진 7일까지 정치권을 비롯한 대한민국 전체가 들썩였다. 야권은 비상계엄 선포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공개하면서 ‘윤석열 퇴진’을 외쳤고 여당인 국민의힘은 탄핵안 부결을 당론으로 정하고 이탈표 단속에 나섰다. 국민은 서울 여의도, 광화문 등지서 열린 탄핵 찬반 집회에 참석했다. 숨가쁜 4일 쪼개진 국민 여야는 표결 전까지 치열한 수싸움을 벌였다. 야권은 ‘김건희 특검법’과 ‘대통령 탄핵안’을 같이 표결하겠다고 선언했고 국민의힘은 김 여사 특검법에만 표를 던지고 탄핵안 표결 때는 퇴장하는 방식으로 맞섰다. 그 결과 김 여사 특검법은 부결, 탄핵안은 정족수인 200석을 채우지 못해 표결이 무산됐다. 지난 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서 열린 본회의서 ‘김건희 특검법(윤석열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의 주가조작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 재의의 건)’에 대한 표결을 진행한 결과, 재적 의원 300명 가운데 찬성 198표, 반대 102표로 부결됐다. 2표차로 김 여사 특검법은 최종 폐기됐다. 이후 이어진 대통령 탄핵안 표결서 국민의힘 의원들은 단체로 퇴장했다. 안철수 의원이 자리를 지키고 김예지·김상욱 의원 등이 본회의장으로 돌아와 표를 던졌지만 정족수를 채우진 못했다. 대통령 탄핵안의 가결 요건은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다. 범야권 찬성 표를 192명으로 계산했을 때 국민의힘 의원 8명의 이탈표가 필요했다. 표면상으론 윤 대통령 부부가 ‘한숨 돌린’ 모양새다. 하지만 여론의 파도는 훨씬 거세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특히 국민의힘이 국회 본회의장서 보여준 모습이 국민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김 여사 특검법 표결 후 국회 본회의장을 떠나는 모습이 생중계에 고스란히 잡히면서 ‘방탄 정당’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 상황이다. 모든 일은 지난 3일 오후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에서 시작됐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재현된 비상계엄 상황에 한국은 물론 전 세계가 화들짝 놀랐다. 계엄군과 국회의원, 시민 등의 대치로 국회 앞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후 계엄사령부의 포고령이 나오자 혼란은 더욱 극심해졌다. 3일 오후 10시25분 비상계엄 선포 이후 4일 오전 4시27분 해제되기까지 6시간 동안 국회는 긴박하게 움직였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3일 오후 11시께 “모든 국회의원은 지금 즉시 국회 본회의장으로 모여달라”고 공지했다. 재적 의원 과반이 찬성하면 계엄 해제를 요구할 수 있다. 최소 150명 이상이 국회 본회의장으로 집결해야 했다. 여당, 표결 전 퇴장 직무 정지는 면했다 그사이 계엄군이 국회 본청 유리창을 깨고 보좌진 등과 대치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이 전개됐다. 우 의장이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본회의에 상정해 표결을 진행할 당시 모인 국회의원은 190명이었다. 표결에 참여한 의원의 전원 찬성으로 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됐다.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 2시간30여분 만이다. 계엄 선포 해제 발표는 3시간 뒤인 오전 4시27분께 나왔다. 윤 대통령은 생중계 담화를 통해 “어젯밤 11시를 기해 국가의 본질적 기능을 마비시키고 자유 민주주의 헌정질서를 붕괴시키려는 반국가 세력에 맞서 결연한 구국의 의지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며 “그러나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가 있어 계엄 사무에 투입된 군을 철수시켰다”고 말했다. 6시간 만의 상황 종료였다. 문제는 후폭풍이다. 계엄군이 국회의원을 체포하거나 시민과 충돌해 사상자가 나오는 등 최악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1979년 이후 처음 선포된 비상계엄이 한국 사회에 안긴 충격은 엄청났다. 여론이 들끓었고 특히 정치권은 사상 초유의 사태에 시계 제로(0) 상황이 됐다. 발 빠르게 움직인 쪽은 야권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롯한 야6당은 4일 오후 ‘대통령 탄핵안’을 발의하고 5일 국회 본회의에 보고했다. 탄핵안 발의에는 야6당 의원 190명 전원과 무소속 김종민 의원이 참여했다. 이들은 “헌법이 요구하는 그 어떠한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음에도 원천 무효인 비상계엄을 발령했다”고 탄핵 사유를 들었다. 국민의힘은 표결 직전까지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종일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정한 상태였지만 내부 상황이 요동쳤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가 “윤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말을 하면서 사실상 탄핵 찬성의 뜻을 밝힌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몇몇 의원이 당론과 상관없이 찬성표를 던지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혼란이 더해졌다. 7일 국회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탄핵안 표결 결과에 따라 윤 대통령은 물론 여야의 운명이 갈릴 판국이었다. 윤 대통령과 윤석열정부, 여당과 야당 그리고 당 대표까지 정치적 셈법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이라 표결에 쏠린 관심이 컸다. 특히 칼자루를 쥔 국민의힘의 행보에 전 국민의 이목이 몰렸다. 여기에 이날 오전 윤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 형식으로 국민 앞에 선 게 변수로 떠올랐다. 45년 만에 6시간 종료 윤 대통령은 “이번 비상계엄 선포는 국정 최종 책임자인 대통령으로서의 절박함에서 비롯됐다”면서도 “그 과정서 국민께 불안과 불편을 끼쳐드려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는 이번 계엄 선포와 관련해 법적, 정치적 책임 문제를 회피하지 않겠다”며 “저의 임기를 포함해 앞으로의 정국 안정 방안은 우리 당에 일임하겠다”고 약속했다. 2분 남짓한 짧은 담화는 비상계엄 선포 이후 사흘 만에 나온 윤 대통령의 대국민 메시지였다. 일각에서는 탄핵 부결을 위한 ‘쇼’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고 국민의힘 표 단속을 위한 행보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탄핵안 표결이 무산된 후 대통령실에서는 이날 담화가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봤던 것으로 알려졌다. 탄핵안 폐기로 정치권은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국민의힘은 표결 무산의 책임을 모조리 뒤집어 쓸 상황에 처했다. 지난 4일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에 친한계로 분류되는 국민의힘 의원 18명이 찬성표를 던진 바 있다. 이들 가운데 절반만 찬성에 표를 던졌으면 윤 대통령의 탄핵안은 가결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탄핵안 표결은 정치적 판단이라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야 간 상황이 정당 소속 국회의원의 표결에 작용했다는 것이다. 야권은 상대적으로 탄핵 표결 여파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다. 탄핵안이 가결됐다면 윤 대통령의 직무가 바로 정지되는 상황이었고 부결이어도 책임 소재는 국민의힘으로 향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탄핵안 발의가 민주당의 ‘꽃놀이패’라는 말이 계속 나온 이유다. 여기에 민주당은 표결 전부터 탄핵안이 부결되면 재발의하겠다고 공언했다. 부결된 안건은 회기 중에 다시 제출할 수 없는 만큼 정기국회 회기가 종료되는 오는 10일 이후 임시국회를 소집해 탄핵안을 다시 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앞서 민주당 김용민 원내정책수석부대표는 “국가 비상사태를 막기 위해 탄핵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탄핵안이 가결될 때까지 밀어붙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고립된 여 힘 받는 야 정치권 일각에서는 ‘가결은 시간 문제’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윤 대통령의 퇴진을 바라는 여론이 심상치 않기 때문.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 여사 논란과 고 채 상병 사건 등에도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성사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이 정치권의 중론이었다. 실제 국민 사이에서도 10년 사이에 두 번이나 대통령을 탄핵하는 상황을 꺼리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이 같은 분위기는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완전히 뒤집혔다. 20~40대 청년층은 생전 처음 겪는 일에 충격을 토로했고 1980년대 비상계엄을 겪은 50대 이상 장년·노년층은 40여년 만에 다시 일어난 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탄핵을 통해 윤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4일 조사한 결과, 국민 10명 가운데 7명은 윤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전국 만 18세 이상 유권자 504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4.4%포인트)서 반대는 24%에 그쳤다. 만 18~29세는 86.8%, 40대는 85.3%가 윤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50대 76.4%, 30대 72.3%, 60대 62.1%, 70세 이상 56.8% 순이었다. 지역별로는 광주·전라서 찬성 비율이 79.3%로 가장 높았고 서울은 68.9%로 나타났다. 보수의 심장으로 불리는 대구·경북서도 탄핵 찬성이 66.2%로 과반을 넘어섰다. 탄핵안이 표결까지 가지도 못하고 무산되면서 안 그래도 불붙은 대통령 퇴진 여론에 기름이 더해졌다. 윤 대통령이 탄핵 위기를 넘겼어도 여전히 가시밭길에 있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결국 소나기를 피했을 뿐 ‘식물 대통령’ 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국회는 여전히 야6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야권의 192표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지난 5일 민주당이 발의한 최재해 감사원장에 대한 탄핵안과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 등 3명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회서 감사원장에 대한 탄핵안이 통과돼 직무가 정지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재발의·명태균 첩첩산중 국민 신뢰 완전히 잃어 민주당은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 이전 감사가 부실하게 이뤄졌다는 이유로 최 원장에 대한 탄핵안을 발의했다. 또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연루 의혹에 불기소 처분을 내리는 과정서 이 지검장과 조상원 서울중앙지검 4차장, 최재훈 서울중앙지검 반부패2부장 등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고 탄핵 사유를 들었다. ‘게이트’로 번질 조짐을 보이는 명태균 사건도 윤 대통령의 발목을 잡고 있다. 정치 브로커 명태균씨는 김 여사 공천 개입 의혹과 미래한국연구소의 불법 여론조사 의혹 등 사건의 핵심 인물로 꼽힌다. 민주당서 이른바 ‘명태균 녹취록’을 공개하면서 윤 대통령 부부를 비롯해 일부 여당 인사가 언급되고 있다. 명씨는 2022년 8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김 전 의원을 경남 창원의창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 후보자로 추천하는 과정서 김 전 의원 회계책임자였던 강혜경씨를 통해 8070만원을 받고 2022년 6·1 지방선거를 앞두고 경북 고령군수와 대구시의원 예비후보로 출마한 사람들에게 유력 정치인 등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공천 추천과 관련해 2억4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일각에서는 명씨가 현재 받는 혐의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나온다. 명씨가 과시한 정치적 영향력이 윤 대통령 부부라는 ‘뒷배’로부터 나온 게 확인되면 그 파장은 어마어마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명씨를 둘러싼 의혹을 파헤칠수록 검찰 수사가 윤 대통령과 김 여사를 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김 여사 문제로 다시 귀결된다. 윤 대통령은 그간 재의요구권(거부권)을 이용해 김 여사에게 쏟아지는 공세를 막아왔다. 그럼에도 논란이 가라앉지 않자 “제 아내의 현명하지 못한 처신으로 국민께 걱정 끼쳐드린 부분에 대해 사과를 드리고 있다”며 몸을 낮추기도 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 선포-해제-탄핵안 발의-표결 무산 등의 과정서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어 김 여사에 대한 공세를 더는 막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무엇보다 윤 대통령 본인도 내란 혐의로 고발당한 상태다. 검·경은 수사 속도를 높이는 중이다. 여론이 더 악화되면 국민의힘서도 윤 대통령과 거리두기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더 큰 문제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잃어버린 권위와 신뢰다. 탄핵안이 발의되기 전부터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10% 후반을 오락가락했다. 국민 10명 가운데 2명도 윤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지율은 비상계엄 선포 이후 급전직하 상태다. 박 전 대통령은 탄핵 표결 직전 지지율이 한 자릿수까지 떨어졌다. 성난 민심 극복 불가 대외적으로도 윤 대통령은 한국의 ‘리스크’로 여겨지고 있다. 미국은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오판’ 등의 표현을 사용하면서 비판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취임이 얼마 남지 않았고 세계 곳곳서 전쟁이 계속되는 등 급변하는 국제 상황서 윤 대통령이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야권의 탄핵 실패가 윤 대통령의 성공일 수 없는 이유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