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숙사로 돌아가자 스라소니 눈이 인상부터 썼다.
“이 자식들, 너희들 왜 이제 와?”
“오다가 2반 얘들끼리 싸움이 붙었는데, 완전히 결투 영화의 한 장면 같았어요.”
피에로가 손짓 발짓을 섞어 넣으며 말했다.
콩고물 맛이…
“새끼, 채플린 아니랄까봐 영화 얘기냐.”
스라소니가 피에로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2반 새끼들 맛이 간 모양이군. 그건 그렇고 얼마나 얻어 왔냐?”
피에로가 용운의 것까지 합쳐서 건네었다.
“에게, 겨우 요거야? 너네들 몰래 처먹고 오리발 내미는 것 아냐?”
스라소니가 눈을 부라렸다.
말은 그러면서도 그는 반장 앞으로 다가앉으며 뭉치를 풀었다. 여러 개의 눈이 침을 삼키며 바라보았다. 스라소니는 반장 앞으로 음식물을 공손히 밀어 놓았다.
“많이 드십시오, 백곰 형님.”
“흐흐흐, 그래. 모처럼 이런 날도 있어야 살지.”
백곰은 인절미를 하나 집어 입속에 넣고 오물거리며 말했다. 그는 의외로 욕심없이 손가락에 묻은 콩고물을 털더니 말했다.
“야, 너희들도 맛을 좀 봐.”
동시에 여러 개의 손이 갈고리처럼 뻗어나와 음식을 집었다. 그 소동을 못 본 척 백곰은 용운을 슬쩍 밖으로 불러내더니 물었다.
“그건 잘 전달했냐?”
“예.”
“그래, 뭐라고 하던?”
“급해서 금방 뛰어나왔어요.”
용운은 그 누나가 한 말은 가슴속에 넣어 숨겼다.
“짜식아, 답장을 받아와야지. 다음부턴 제대로 하라구. 흠, 그 절뚝발이 천사가 반지를 받긴 받았단 말이지? 흐흐, 그럼 일단 됐어.”
백곰은 둔중한 몸집과는 달리 재빠른 동작으로 건물 뒤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유쾌한 휘파람 소리가 흘러왔다.
고적한 밤이면 먼 바다 쪽에서 아스라이 해조음이 들려오고, 뒷산에서는 두견새가 애끊는 소리로 울곤 했다. 그 소리를 들으면 불현듯 가슴이 막막하고 구슬퍼졌다.
용운은 자리에 누웠으나 쉬 잠들지 못했다. 낮에 벌어졌던 이런저런 일들, 특히 잔칫집에서 음식을 얻어먹던 원생들의 모습이 용운을 과거로 이끌어 갔다.
살아온 인생은 짧지만 지난날의 여러 가지 체험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작은 머릿속을 맴돌다가 스쳐갔다.
지금 이곳엔 왜 와 있는 것인가? 하루빨리 엄마를 찾아나서야 할 때 여기서 무엇하는 것인가?
자꾸만 엄마가 마산포 어귀에 와서 부르는 것 같은 환청을 듣다가 입을 틀어막고 소리 죽여 운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침 삼키는 여러 개의 눈
청계천 다리 밑 오두막
‘아! 엄마…… 왜 저를 버리셨지요? 제가 그렇게도 미웠던가요?’
용운은 속으로 외치며 탄식했다. 눈물 한 방울이 돋아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물밀 듯이 덮쳐 오는 엄마 생각에 젖은 용운은 옛 추억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갈 곳 없는 어린 떠돌이에게 밤은 유난히 빨리 찾아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행인들의 왕래도 뜸해져 갔다. 무작정 밤거리를 헤매던 끝에 용운이 우연히 찾아든 곳은 청계천 다리 밑이었다.
다리 아래에 누추한 오두막이 하나 보였다. 안에서 시시껄렁한 두런거림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용운은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첫 번째 교각 아래로 내려갔다.
숨어서 밤을 보내기에 적당했고 가까이에 누군가 있어 덜 무서우리란 생각에서였다. 둑의 경사가 심했다. 용운은 겨우 앉아 교각 하나를 등받이로 삼았다. 무척 추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좀 앉았으니 다시금 고독과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음울하면서도 순정스러워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 눈물 한 방울이 맺혀 떨렸다.
엄마는 지금 어디 있는 것일까?
앞으로 이런 괴로운 날들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대체 어떻게 해서 내가 이 지경이 돼야 했던 것일까?
희미하나마 몇 가지 떠오르는 게 없지 않았다. 어느 이름 모를 개천과 산 언덕배기를 해 떨어지는 줄 모르고 쏘다니며 뛰놀던 추억이었다.
강물은 시리도록 맑았고 천왕산엔 유독 진달래꽃이 화려했다. 하지만 그런 추억은 아스라한 느낌일 뿐 뚜렷하게 가닥이 잡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누군가가 끈으로 자신을 목 졸라 죽이려 했던 것도 같은데, 그 또한 모호하고 희미해 긴가민가하긴 마찬가지였다.
기이하게도 겪은 지 얼마 안 되는 그런 일들이 마치 수십 년 전의 일이라도 되는 듯 까마득하고 아슴아슴했다.
제풀에 코끝이 찡해진 용운은 훌쩍훌쩍 소리죽여 울기 시작했다.
“게 누구여?”
용운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두 번째 교각 옆에 웬 거지 하나가 누워서 고개를 빼들고 있었다.
교각에 가려져 머리만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늙은이였다. 용운은 맥없이 대꾸했다.
거지 아이
“저는 엄마를 잃어버렸어요.”
“엄마가 뭐여?”
“엄마요. 엄마가 빵 사온다고 해놓고 가더니 안 와요.”
“너 사는 디는 워딘데?”
“푸른 산이랑 강이 있는 데요.”
“산이랑 강은 어디에나 있지. 그래 그게 어디여?”
용운은 도리질을 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